왜 사는가?/자작시 205

엔트로피 세상사

엔트로피 세상사 모래, 바람, 생각, 사람 만사가 흩어지고 해체되는 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과 같다. 유리가 깨어지면 원상으로 되지 못하고 종이가 찢어지면 도로 붙기 불가능하고 마음이 금가면 초심으로 가지 못하듯이 일체는 질서에서 혼돈으로 때 되면 가고 흩어진다. 깨고 깨어지고 뜯고 뜯기고 누르고 눌리다가도 인연 닿으면 다시 보는 인간사다. 꽃이 져서 꽃이 되듯이 바람 불어 비가 되듯이 비가 얼음이 되듯이 만물이 형질 나투어 회통하듯이 一體皆空 속 오직 언어만이 太虛로 산다 우주 빅뱅이 올 때까지는 2021. 9. 2. 12:53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립 서비스

립 서비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단톡방에 줄창 이 말만 올리는 이가 있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누구든 존경하고 사랑한다니 성인의 경지다. 피 같은 자기 돈 떼먹고 도망간 자도 존경하는지 자기를 욕보이고 해친 자도 사랑할 수 있는지 당한 사람들에겐 뭔 홍두깨 소리일까? 성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먼저 할 일이 있다 아무나 무턱대고 존경하지 않는 일이다 누구를 함부로 사랑하지 않는 일이다. 번지수 틀린 설익은 존경과 사랑이 심한 모멸감에 몸을 떨고 있다 입이 있어 말은 할 수 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자기를 잃어 신음하면서 자기 속을 톺아보기도 벅찬 사바세계다. 2021. 9. 2. 12:4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세상 그릇

세상 그릇 인간들이 세상을 만들지만세상으로 사람의 그릇이 정해진다. 백야처럼 밤이 밤이 아니어서낮도 낮이 아니어서별들이 파리하고 달도 핏기가 없다꿈이 말라버린 삶섬처럼 제각기 혼자임에도사소한 일로 서로를 부정한다혼자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나이 들수록 모이면 남 얘기만 하거나흘러간 지난 얘기만 반복한다. 인간들이 만든 세상에낮밤이 뒤바뀌어 꿈들이 질식한 채왜소한 인간들만 득시글득시글2021. 9. 12. 12:49雲靜

용서

용서 부질없는 탐욕인 게 뻔히 보였다 자기가 소개한 기획부동산 땅을 사지 않는다고 동생은 악다구니 쓰고 남남인 듯 소리쳤다 오빠는 수년간 연락을 끊고 살았다. 언젠가부터 동생은 오빠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오빠는 관심 없는 듯 전혀 응해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어느날 동생이 정말 뉘우친다고 했다 그 동안 자기 욕심 때문에 주위 사람들 많이 마음 아프게 했단다 이제는 정말 다 내려놓고 살겠단다. 오빠에겐 사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었다 진작 그 마음을 냈더라면 오래 가지 않았다. 오빠는 이제야 진실로 기쁘다 오빠도 사과한다 외면해서 미안하다고 오빠가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낫살 더 먹은 오빠는 이렇게 옹졸하게 산다 회개만 할 수 있다면 옹졸하게 살아도 좋다. 2021. 9. 21. 09:07 북한산 淸..

찰나

찰나 모레 있을 행사에 가 있다가순간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을 놓쳤다기승전결이 참한 시가 될 듯 한······예리한 칼로 명주실 끊는 그 순간네 살 때 첫 가출한 달전엘 갔다왔다삼세를 갈무리하는 이 아뢰야식의 실체란? 표층의식에서 一念이 휙 사라지자심층의식에 쌓이는 찰나의 화석들생각 놓쳐서 아깝다는 그 생각도 남지만내겐 꽃이 될지 시가 될지 알 수 없는 일 삶은 매순간 손가락 한 번 튕기는 彈指달랑 습자지 한 장의 인생 두께······.2021. 10. 15. 00:22북한산 淸勝齋에서雲靜

淸河 장날의 외할매

淸河 장날의 외할매 시외버스가 설 때마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행여 인천에 살러 간 큰아들이 내리나 해서··· 닷새마다 서는 청하 장날이면 괜스레 앉았다 섰다 하면서 오전 내내 몇 번이고 먼 산을 쳐다본다 산중에서 화전밭 일구며 사는 둘째딸이 혹 오늘은 재피 팔러 오지 않나 싶어서··· 땅거미 질 때까지 삽작문만 클클히 내다본다 시집 간 포항에서 장사하는 맏딸이 빈 고기반티 이고 "엄마!"하고 들어설까 해서··· 이러구러 긴 여름 하루해가 지려할 때 뒷동산 소나무에 매인 누렁이가 도 번 운다 음매에 음매에 초갓집 뒤 푸른 대숲에 실바람이 워썩대고 뻐꾹 뻐꾹 뻐꾹새 소리 속절없다. 딸이 사는 서산으로 붉은 해가 뉘엿뉘엿할 제 정지에서 나직이 새어나오는 한숨 소리 칠순 노파 얼굴에 주름이 한 뼘 더 패인다 물 ..

보살심

보살심 대만의 오랜 친구 왕 부인 "내 딸!", "내 딸!" 사랑스럽다며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한다. 손에 물이 묻을세라 발이 땅에 닿을세라 세면 목욕도 손수 시켜주고 매끼 마다 분유까지 떠먹여준다. 40여년 세월 엊그제 같은데 여전히 강보에 누운 채 딸은 말을 못해서 답답한지 움직일 수 없어 갑갑한지 평생 아기여도 재롱 못 떨어 미안한지 때로 눈가가 촉촉해지다가도 젖병 물리면 이내 쌔근쌔근 잠든다. 노처녀 시집 못가서 죄송한지 옹알옹알 옹알이 하다가 엄마가 안아주면 금새 꺄르르 웃는다. 친구는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도는데 전생 과보로 달관한 내친구는 늘 웃는다. 아 숭고한 업보여! 아 거룩한 모정이여! 다음 생은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2021. 10. 2. 18:46 종..

소 팔고 돌아오는 길

소 팔고 돌아오는 길 암소 팔고 받은 돈 20만원 허리춤에 동여매고 돌아서는데 이별인가 싶어 말없이 우는 누렁이 애처로운 눈망울이 떠올라 흥건히 젖는 가슴 취중에도 따가워 비척비척 혼자 돌아가는 월포리 신작로 까악까악 까마귀 울음소리 애달픈 황톳길 핏빛 노을마저 숨 죽여 우는데 지게뿔에 매단 코뚜레만 달랑달랑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태가 넘도록 아침 마다 여물 주고 쇠죽 끊여 등 긁어주며 먹여 키운 피붙이인데······. 적막한 이른 새벽 누렁이가 남긴 텅 빈 외양간에서 소리 죽여 꺽꺽 오열하는 울음 달구똥처럼 떨어지는 눈물 아득한 옛날 옛적 4~50년 전 내 외할배는 소중개사였다 참으로 인정 많고 눈물 많은······. 2021. 10. 1. 10:39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위 졸시는『PEN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