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자작시 203

不垢不淨

不垢不淨 술 취해 반쯤 인사불성 된 직장 동료가 토한다 노래방 안락의자에 뒤로 기대어 누운 채 쿨럭 쿨럭, 쿨럭 쿨럭 가슴팍으로 용암처럼 꾸역꾸역 나오는 토사물 초겨울 한기 도는 실내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바로 윗도리를 벗어 두 손으로 쓸어 담았다. 토해낸 음식물이 더럽고 역하다고? 그러기 불과 두 시간 전, 술과 음식을 우리는 함께 맛있게 먹었다네 자체로는 더러워할 것도, 깨듯하달 것도 없지 찰나에도 생각은 오만 가지라 실체가 없는 걸 2022. 3. 27. 10:1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그리움이란 이런 건가요?

그리움이란 이런 건가요? 오늘은 새벽부터 그리운 얼굴들이 많이 떠오른다.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순간 눈물이 팍 쏟아진다. 바깥은 봄비에 초목과 산야가 촉촉히 젖어 있고... 강진에서 멀리 흑산도 쪽으로 수평선만 하염없이 바라본 다산 정약용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다. 그 섬은 유배 간 형 약전이 사는 절해의 고도였다. 그땐 바닷길에 막혀 못 갔지만, 지금은 역병에 막혀 있다. 오늘 이 땅엔 오늘 하루만 해도 35만 명이나 확진됐다. 내가 나고 자란 포항엔 형이 있다. 외롭게 사는 형이 자주 처연하게 부르는 '동백꽃 피는 항구'만 하염 없이 듣고 또 듣는다. 2022. 3. 13. 10:2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위 생각을 아래와 같이 시로 옮겨봤다. 그리움 새벽부터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그리..

메시아

메시아 칠흑 속 어둠들이 어둠을 먹어치워 남은 한 줄기 빛 마저 혈이 막혀 신음한다 속고 속이다 자신까지 속이게 되는 穢土 독초인들 뿌리 내릴 수 있겠는가! 개토가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믐날 밤 푸른빛 초승달이 밭아도 어제도 오지 않았고 오늘도 기척이 없다 무수한 내일들은 늘 오늘 같아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역시나 돌아선다 신이 죽었다는 게 정말 맞는 모양이다. 오지 않아도 기다림은 죽여버리지 않는다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기다리는 것이라도 있는가? 2022. 2. 21. 06:2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静

어떤 시인의 간구

어떤 시인의 간구 시인은 여느 뭇사람이 아니다 언어 조탁가이자 화가요, 음악가다 시가 색 없는 그림, 소리 없는 노래지만 시인이 정말 아름다운 존재인 까닭은 순정한 영혼을 빚어내기 때문일 터 시가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에도 입과 몸이 따로 노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시는 도덕군자 같아도 사는 건 위선군자다 말과 행동이 다른 따로국밥 시인이 아니라 인간다운 사람이 진짜 시인이다. 비굴하게 변명하지 않는, 항상 억울한 약자 편에 서고자 하는, 위험에 처한 이를 보면 몸을 던지는, 부귀영화를 뜬 구름으로 보는, 사는 것에 구차하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 부족한 자비심에 늘 자책하는 그런 사람 반나절을 살아도 시인으로 보다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2022. 2. 9. 11:5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사랑

사랑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맞아요?" 이따금씩 투정을 부리는 아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난 I love you"를 입에 달고 사는 양키가 아니거든! "꼭 사랑한다고 해야만 사랑한다고 믿나?" 사랑은 사랑한다 한 마디 말이 다가 아녀! 때는 연일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엄동설한 베란다에 널린 내의들이 꼼짝없이 떨고 있다 몽땅 거둬서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넣는다 바깥의 아내가 한파에 몸이 얼면 안 되지 몸이 얼면 마음도 얼낀데······. 2022. 2. 8. 09:32 구파발 우거 거실에서 착상 국회의사당역행 전철 안에서 초고 雲靜

미운 밥 연작

미운 밥 Ⅰ 명함을 받아보니 "박춘희"라고 돼 있다 "아 저의 장모님과 성함이 완전히 같네요!" 회의 후 참석자들과 같이 간 식당에서 자연스레 마주보고 앉게 된 초로의 여성 어디선가 봤을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말씨가 경남말씨라 했더니 고향이 산청이란다 순간 직감했다 "아 맞구나!" 그래서 바로 물었다 "혹시 운○ 누님 아니세요?" "예 맞아요!" "누님, 제가 운○ 친굽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운○는 하늘나라 갔어요!" "예에? 언제요?" "2년 전에요!" 파릇파릇한 젊은 기들이 빠져나갈 즈음 뜻한 바 있어 떠난 늦깎이 유학길 나는 타이완으로, 그는 러시아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혼자는 외로워 정말 외로워서 타이페이까지 날아오기도 했었다 그는 친구가 둘 밖에 없던 명석한 철학도였다 예술학도인 내가 말..

꿈결의 신라 천년

꿈결의 신라 천년 해돋는 토함산자락에 데칸고원의 정적이 들면 남산 석벽엔 불심의 눈물이 지고 고고한 반월성터에 신라낭도의 함성이 일면 계림숲에 은빛 백마가 비상한다. 고향을 그리다 꾼 꿈 새벽녘 눈 떠보니 포석정 천년 영화는 홀연듯 간 곳 없고 말없이 흐르는 서천만이 도도하구나. 1994. 1. 1 새벽 타이완 타이페이 政治大學 기숙사에서 雲靜 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