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한국전쟁 16

종전과 휴전

종전과 휴전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가 며칠 전 있은 대선 후보들 간의 TV토론 중에 '종전'선언'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지적이 올라왔다. 아래와 같다. 이재명이 안보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식한지는 지나 금요일(11일) 밤 대선후보 4자토론회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탈북 외교관인 태영호 의원에 따르면 이재명의 말을 듣고 김정은도 웃었을거라고 한다. 재명(在明이 아닌 在冥: 어둠 속에 있다는 뜻)은 종전선언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라는 윤석열의 물음에 '종전선언은 사실상의 종전을 말하는 것이고 정전은 법률적 용어다' 라고 답했는데 이 말은 개념파악이 전혀 안 된, 다시 말하면 뒤죽박죽된 在冥의 안보관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종전선언은 현재 종전(終戰)상태가 아니므로 전쟁을 끝내는 선언(declara..

또 다시 한국전쟁 역사를 왜곡한 시진핑!

또 다시 한국전쟁 역사를 왜곡한 시진핑! 시진핑 중공 주석이 또 한번 한국전쟁의 역사를 왜곡해서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작년 11월 11일 중공 제19屆 6중전회 두 번째 회의에서 통과된 '역사결의'(中共中央关于党的百年奋斗重大成就和历史经验的决议)에 대한 11월 30일의 부연설명과 지시(同제목의 說明, '以史爲鑒, 開創未來, 埋頭若干, 勇毅前行')를 내린 자리에서였다. 중공 당내 사실상의 종신제인 3연임을 합법화 한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면서 당 노선을 정리하고 자신을 毛澤東과 동급으로 올려놓은 것에 대해 반발과 잡음이 없도록 당내 기강을 잡는 차원에서 이뤄진 이번 시진핑의 발언(당내 분파를 가차 없이 처리하라는 지시)은 그저께 나온 중공의 이념과 이론을 다루는 기관지 중의..

아직도 6.25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자들은 누군가?

아직도 6.25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자들은 누군가? 김일성의 6.25남침전쟁을 내전이니 하는 헛소릴 해대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고 해서 오늘 9.28서울수복 기념일에 6.25전쟁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보탭니다. 6.25전쟁이 북한 김일성이 대남 기습 공격을 감행한 명백한 "남침 전쟁"임에도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김일성의 남침이 아니라는 의미로 "내전"이라느니, 당시 해방공간의 38도선 상에서 남북한 군 사이에 빈발하게 총격전이 벌어졌으니 나중에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먼저 남침했다고 해도 38도선 상에서의 총격충돌은 그 동안 일상사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굳이 누가 먼저 쏘았느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이런 발언 혹은 주장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나? 미국의 한국 현..

영덕기행② : 장사상륙작전을 아는가?

영덕기행② : 장사상륙작전을 아는가?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원수가 총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되기 이틀 전, 그러니까 9월 13일 동해안에서 있었던 상륙작전을 아는가? 미군과의 의견조율 하에 급조된 소규모의 한국군 병력과 학도병들이 주가 된 "장사상륙작전"이다. 사람들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이 작전의 일환으로 동해안에도 상륙작전이 있었는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영덕에 간 김에 장사해안과 그 해변에 마련돼 있는 상륙작전 기념지 및 Landing Ship Tank, 즉 LST-125 함선인 문산호(모형)를 답사했다. 1943년에 건조된 문산호는 7월 27일 PC-701함과 여수 철수작전에 투입돼 작전을 수행한 함정인데 아주 오래 전에 퇴역했다. 지금 장사 해변에 기념관용으로 전시돼 있는 문산..

6.25전쟁에 대한 중국학계의 인식

6.25전쟁에 대한 중국학계의 인식 중국은 6.25전쟁을 어떻게 볼까? 며칠 전, 친구들의 단톡방에서 친구들과 주고받은 질의응답이 있었다. 우연히 한 친구가 중국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기에 그에 대해 답을 해준 내용이다. 답을 보고난 뒤 질의를 한 친구와 다른 친구도 한 마디씩 코멘트를 했고, 나도 한 마디 덧붙였다. 기왕에 쓴 글인데, 친구들끼리만 보고 덮기엔 아깝다 싶어 블로그에 올린다. 중국 역사학계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궁금했었는데, 그들이 보는 전쟁의 의의, 중공군의 참여나 전쟁의 승패에 대한 평가 등등은 어떠한가? 아 대단히 좋은 질문이네! 내가 보는 관점에선 답은 대략 아래와 같아. 첫째, 중국은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북한 간의 내전으로 벌어진 것이 한국전..

'정의의 진격' 제1부 다큐멘터리 영상

'정의의 진격' 제1부 다큐멘터리 영상 ‘정의의 진격’은 6.25전쟁 중인 1951년 국방부 정훈국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화다. 감독 한형모의 주도 하에 김학성, 심재흥이 촬영했고, 편집은 양주남이 맡았다. 아래에 올려놓은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전쟁 당시에도 입수가 쉽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등장한다. 북한군이 자신들을 촬영한 내용도 있고, 어떻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군을 촬영한 장면도 많이 나온다. 6.25전쟁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나, 6.25전쟁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다 같이 귀중한 자료다.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과 원산, 탈환 직후 평남 숙천 지역의 공수작전까지 촬영돼 있다. 끝까지 시청하면 6.25전쟁 초반기 상황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2021. 4. 20. ..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 전쟁비용으로 얼마를 썼을까?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 전쟁비용으로 얼마를 썼을까? 전쟁비용은 전쟁수행 뿐만 아니라 전쟁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3년 1개월여 동안 치러진 한국전쟁에서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남·북한, 미국, 중국이 쏟아 부은 전쟁비용은 얼마나 됐을까? 또한 멀찌감치 막후에서 북한을 지원한 소련이 사용한 전쟁비용은 어땠을까? 이 국가들 외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투병을 보내 참전한 여타 영국, 프랑스 등을 포함해 자유진영 국가들의 전쟁비용까지 모두 더하면 전체 한국전쟁의 비용은 천문학적인 규모가 될 것이어서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참전 각국 혹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진영별 전체 전쟁비용으로 얼마가 쓰였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도 세세하게 연구된 바가 ..

한국전쟁 초기 북진에 패퇴한 김일성의 후퇴와 대응

한국전쟁 초기 북진에 패퇴한 김일성의 후퇴와 대응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한국전쟁 발발 제68돌이다. 지금까지 한국전쟁과 관련된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지만 1950년 9월말 한국군과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북진에 밀려 퇴각한 김일성의 행적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부산 교두보에서 개시한 유엔군의 전격적인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이 괴멸되고 서울 수복이 임박함에 따라 김일성이 급히 이북으로 올라간 9월말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평양 함락 전 극비리에 평양을 빠져나간 10월 13일까지 약 2주간은 전쟁의 성격이 전환되는 중대한 시점이었다. 이 시기 김일성은 과연 어떻게 도피를 했고,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9월 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이 탈환되고 서울 수복 이틀 전..

한국전쟁 휴전 64주년에 송시열과 한국사회의 사대의식을 생각한다!

한국전쟁 휴전 64주년에 송시열과 한국사회의 사대의식을 생각한다! 서상문(고려대학교 한국전쟁 아카이브 연구교수) 올해로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어느덧 64년이 됐다. 반세기가 더 지난 짧지 않은 세월이다. 동족상잔의 이 전쟁이 남긴 깊고 넓은 한민족의 집단적 상흔과 르쌍티망(ressentiment)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휴전상태의 종식과 평화체제 이행은 그 다음이고, 북핵문제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이웃 나라 중국과 대만은 지난 세기 서로 원수처럼 총부리를 겨누었어도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호방문은 물론, 학술교류, 유학, 관광자유화, 경제교류, 각종 투자 등 많은 분야에서 폭 넓게 교류해오고 있다. 통합의 정도가 우리와는 ..

6․25전쟁 피해자의 통한, 겨레의 통한

6․25전쟁 피해자의 통한, 겨레의 통한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올해도 어김없이 “6․25사변”일이 돌아왔다. 광기의 집단행위인 전쟁은 파괴와 살상이 수반되고, 적개심으로 수행된다.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동족상잔이었다. 그렇기에 당한 우리의 적개심은 더욱 크다. 불시에 침략을 받아 숱한 부모형제, 처자식과 전우들이 죽어갔고, 천만 명이 생이별을 당했으니 철천지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온갖 신산한 고초를 겪은 전쟁피해자는 전쟁발발 후 60여년이 지나도 참상을 잊지 못한다. 단장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어쩌면 무덤까지 갖고 갈 기억이요, 내상일 수 있다. 북한은 사죄는커녕 연평해전, 천안함공격으로 상처를 덧나게 했다. 이들의 대북 분노와 적개심이 누그러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