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한국전쟁 16

중국 국가수뇌부의 6․25전쟁 발발원인 인식에 대한 ‘마르크스사상’적 비판 試論

중국 국가수뇌부의 6․25전쟁 발발원인 인식에 대한 ‘마르크스사상’적 비판 試論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나는 이 글에서 중국 국가수뇌부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6․25전쟁 발발원인에 대해 비판하려고 한다. 이 비판은 시의를 놓친 감이 없지 않지만, 작년 10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공개적으로 행한 적절하지 못한 발언에서 촉발된 것이다. 그는 부적절 수준을 넘어 사실 마저 은폐, 축소하거나 또는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의 언설을 작심하고 쏟아 냈다. 이에 대해 국내 언론이나 전문가, 정치권은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지금은 아예 잊어버린 사건이 돼버린 상태다. 냄비근성의 우리가 늘 그렇듯이. 이것이 내가 당시 글의 틀을 잡아놓고 쓰다만 이 초고를 꺼내 가필하는 동기다. 또 6․25전쟁 발발원인을..

중공군의 4~6차 공세와 서울 재수복

중공군의 제4차~6차 공세와 서울 재수복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4’후퇴로 37도선의 평택-안성선까지 물러난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력을 회복한 후 1951년 1월 24일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하에 강력한 화력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총반격을 개시했다. 23만 명의 대병력이 동원된 서울재탈환 작전이었다. 이에 대해 다음날 중공군이 즉각 방어에 나섬으로써 중공군의 제4차 전역이 시작됐다. 아군은 미 제1군단이 서울방어를 위해 한강 이남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중공군 제38군단 제112사단과 제50군단을 상대로 20여일 동안 격렬한 공방전을 치른 끝에 인천을 재차 점령했고, 중공군은 2월 18일 한수 이북으로 철수했다. 아군은 2월 19일부터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재개한..

중공군의 3차 공세와 1․4후퇴

중공군의 제3차 공세와 아군의 1․4후퇴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12월 5일, 경무대가 떠들썩했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커든 돌아 가시요!” “우리는 당신네들 보고 남아 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우리는 여기 남아서 싸우겠소, 죽기 밖에 더 하리요!” 자신을 예방해, 중공군의 공격으로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면서 피난을 권유한 미 제8군 사령관 워크 장군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소리친 것이다. 이로부터 꼭 한 달 뒤 정부는 또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된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한미군의 북상이 저지되고, 김일성정권이 기사회생된 것에 흥분한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축전을 보내 “쇠뿔은 단 김에 빼야 한다”면서 미군을 계속 추격하도록..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 상의 절해의 고도 웨이크 섬. 오전 7시 36분부터 시작된 회담에서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는 주저 없이 첫 마디에 “아주 적다”(Very little)고 잘라 말했다. 또 만일 중공군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올 경우 “전례 없는 대학살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라고 역설했다. 중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자신 있게 부정하고, 미국을 움직이는 정치, 군사, 외교의 실력자들이 모두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10월 11일 밤부터 도강을 개시한 중공군 선발대가 맥아더의 호언장담을 비웃듯 압록강 건너 북한의 집결지에서 위장을 끝내고 있었다. 선발대에 이어 19일부터..

毛澤東,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감행 예측 : 전력열세 북한군 전의 꺾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毛澤東,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감행 예측 : 전력열세 북한군 전의 꺾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서상문(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9월 맥아더원수가 성공시킨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서 한국전쟁의 판도를 일거에 뒤바꾼 몇 가지 중대한 전략적 의의가 있었다. 첫째, 수도 서울수복에 유리한 전투국면을 조성해 인천-서울지역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반면, 북한군의 전의를 상실 혹은 저하시켰다. 둘째, 적의 보급선과 후방 지원로를 차단함으로써 남쪽전선에 고착되어 있던 적의 전투력을 마비상태에 빠뜨렸으며, 결국 북한군이 38도선 이북으로 퇴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셋째, 중국지도부로 하여금 전쟁개입을 위한 사전준비로서 중국군의 한중국경 지역 이동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