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작품 14

상어야 미안하다

상어야 미안하다 상어는 부레가 없어 지느러미로 쉼 없이 헤엄친다 그래야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 지느러미만 모두 떼이고 바다에 버려진 상어는 고통스럽게 흐느적대다 이내 죽고 만다 그렇게 죽어가서 지금 멸종위기다. 상어들이 비명도 없이 죽어갈 때 인간들은 값비싼 샥스핀 요리를 즐긴다 스프에 쳐진 양념 맛인 줄도 모르고 지느러미 맛이 아니란 걸 모른 채 상어멸종이 자기와 뭔 상관이란 듯이. 상어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한 때 모르고 나도 샥스핀을 맛있게 먹었어. 2022. 9. 8. 12:1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대단한 가문

대단한 가문 뉘집인진 모르겠다만 대단한 가문이다 후손들이 저리도 조상을 잘 모시니. 중시조인 듯 봉분묘가 맨 위에 자리하고 그 아래로 차례차례 후대 조상 비석들이 묘들과 함께 빼곡히 들어서 있다 땅속 파고들다 만 벙커버스터 미사일처럼 여러 기가 산자락 곳곳에 꼿혀 있다. 공명도 좋고 人死留名도 좋다지만 혈이 뚫린 땅이 아프지 않을까? 말 없는 신음 소린 듣지 못하는가? 세월 지나면 다른 후손 묘비들은 어쩌나? 산자락 아래 마을에까지 앉히려나?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누구나 남기고 가는 한 줌 가루 동해바다에 뿌린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따라 누울 자리도 그곳이다. 2022. 8. 27. 15시경 직관 8. 28. 04:02 옮겨씀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

다중 속의 고독

다중 속의 고독 한국인은 배고픈 건 참아도 남 잘 돼서 배 아픈 건 참지 못한다. 자신보다 조금만 잘났다 싶으면, 자기보다 똑똑하고 깨끗하다 싶으면 눈 뜨고 못 보는 이가 대부분이다. 뒤에서 험담해서 자기위안으로 삼는다. 다수는 자기 성격 탓에 침묵하지만 대개는 자존감 없거나 순수치 못해서 그렇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니 그렇다지만 자주 이리 속고 저리 뒷통수 맞고 해서 학교 동기들에게라도 안겨볼까 했더니 그들도 배가 고픈지 아픈지 알 수가 없네. 잘났다 싶은 이는 어디서든 안길 데가 없다.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마음 붙일 곳이 없다. 함께 해도 늘 적막강산에 혼자 서 있다. 홀로 피어 세찬 비를 맞는 꽃이여, 한 떨기 오이꽃이여! 2022. 6. 29. 12:09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静 초고

카테고리 없음 2022.06.29

德 德은 속을 다 내다버리는 삶에서 온다 덕을 베풀거나 쌓아야 한다는 게 보통이지 이 생각에 끄둘려서 울화가 치밀어도 참고 무시당하고 기만 당해도 모른 체 하고 산다. 바른 눈을 가진 이라면 생각이 바로 박힌 자라면 덕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지인에게 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큰 덕이지. 덕은 참는 것에서 온다지만 살다보면 참는 게 능사가 아닐 때가 더 많아 아무에게나 덕이 쌓이는 건 아니라네 인간만사 대가 없는 덕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덕 쌓으려다 생긴 상처는 뭘로 치유될까? 덕을 베풀려다 오해 받거나 뒤통수 맞아 마음에 든 시커먼 멍은 어떻게 삭아질까? 자신을 다치지 않게 하는 거야말로 참덕이지. 2022. 5. 11. 10:33 2호선 전철 안에서 雲靜

덧없는 사죄

덧없는 사죄 "엄마, 그만 자라 쫌! 앉기만 앉으면 조노?" "아이 참, 뻐스 안이다 뻐스 안!" 세월이 흘러 타박하던 아들은 잘 먹고 잘 잔다 육체노동도 하는 거 없이 편히 지낸다 그런데 오후만 되면 왜 그리 잠이 쏟아지는지 어디서든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잦다. 어무이 나이가 돼보니 이제야 알겠네요 356일 매일 서너 시간 밖에 못 주무시고 평생 종일토록 중노동에 얼마나 곤하셨을까? 그때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파김치가 되듯이 일만 하시다 중풍 맞아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장사를 하셨다 그러다 또 풍이 와서 자식도 몰라본 채 가셨다 이승에서 남기신 마지막 한 마디 "곱다!" 쉰 다 돼 장가 든 아들 며느리 손 잡고 하신 말 조시던 모습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따갑다 죄스럽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어머니 이젠 ..

졸시, PEN문학지에 실리다!

졸시, PEN문학지에 실리다! 시인 등단 후 처음으로 졸시 한 편이 권위있는 문학지에 실렸다. 작년 3월에 등단했으니 꼭 1년 만이다.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끌적거려오고 있어 그간 쌓인 시들이 160수(한글시 뿐만 아니라 영시, 한시, 하이쿠 포함)가 넘어도 졸시를 문학지에 실어보겠다고 시를 보내고 한 적이 없다. 투고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중에 시 게재가 결정된 후에 원로 시인 한 분에게 졸시 게재가 결정됐다고 말씀드렸더니 등단 1년만에 권위있는 문학지에 작품이 실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셨다. 원로 분께서 괜히 내게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사실, 이미 작년에 펜문학지 회원으로 가입했지만 나는 문단에서 이 문학지의 평가가 어떤지는 잘 모른다. 아직도 마음 한 곳엔 익숙한 학계와..

목련이 피는 곡절

목련이 피는 곡절 겨우내 응축된 地氣가 허공에 봉긋 봉긋 산통을 밀어낸다. 순백이 무엇인지 알게끔 너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너가 있듯이 꽃이 잎 되고 뿌리가 열매 되도록 땅과 하늘이 맺는 존재의 확인 지상 최후처럼 나투듯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떨어져야만 얻는 영생 자지러지는 한 송이 마음 봉우리 목련이 피는 곡절 2022. 4. 3. 18:1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不垢不淨

不垢不淨 술 취해 반쯤 인사불성 된 직장 동료가 토한다 안락의자에 뒤로 기대 누운 채 쿨럭 쿨럭, 쿨럭 쿨럭 가슴팍으로 용암처럼 꾸역꾸역 나오는 토사물 초겨울 한기 도는 실내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바로 윗도리를 벗어 두 손으로 쓸어 담았다. 토해낸 음식물이 더럽고 역하다고? 불과 한 시간 전, 깨끗한 술과 음식을 우리는 함께 맛있게 먹었다 자체로는 더러워 할 것도 없고 깨듯하달 것도 없지 찰나에도 생각은 오만 가지라 실체가 없는 걸 2022. 3. 27. 10:1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