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시 20

한 해가 끝나는 날 밤

한 해가 끝나는 날 밤아무도 찾지 말아야지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말고오직 딱 한 사람자기 자신만 불러내자침묵을 전령으로조곤 조곤 되물어보자어처구니없이 가버린서럽게 저문 지난 한 해 잘 살아냈느냐고꿈이 말라버린 다가올 한 해도감당해낼 수 있겠느냐고스스로 위안하고 다독이자최후의 날을 맞는 것처럼철 지난 허재비처럼 홀로 묵언으로한 해가 끝나는 마지막날 만큼은2024. 12. 31. 08:47일본 가고시마 魂稚喜笑에서雲靜 초고

샛별 부부

샛별 부부곁에 있어도 한 세월떠나가도 한 세월육신이 떠나면먼저 가는 부는 뒤돌아보지 마라남겨진 부는 눈물을 보이지 마라中陰神이 구천에서 떠돌지 않도록먼저 간 이가 기억에서 희미해지고몸이 떠났다는 생각도 떠나고 나면무엇으로 살아 갈까?원앙 같은 한쌍이라도,궁합이 찰떡 같은 부부라 해도세상 인연 다하면 저마다 혼자 간다새벽 하늘에 홀로 지는 샛별처럼2022. 8. 11. 13:30포항 달전 기차역 대합실에서 문득 떠날 걸 생각하니 떠올라서 쓰다.雲静 초고

루앙프라방의 새벽

루앙프라방의 새벽 어둠이 물러가기 전 탁발승 행렬이 수행 소요로 전생 업보들을 풀어낸다 저마다 사연들은 묵언에 묻어두고 나눔과 재분배로 잠시나마 펴지는 사바세계. 존재에 대한 연민에 붉어지는 눈시울 보시로 찰나나마 넉넉해지는 자비심이 하늘빛 물들이는 메콩강의 물안개처럼 이방인의 영혼을 촉촉이 적신다. 날렵히 뻗은 용마루 위로 동이 트는데 동자승들이 치는 法鼓의 법음, 사원 앞 꽃 파는 소녀의 미소, 아침 시장의 웃음 짓는 아가씨, 부처의 應身들이 세상소리를 보고 있다. 누구에겐 오지 않는 루앙프라방의 새벽은 경건함과 자기성찰의 바닥 모를 늪이다. 2023. 2. 5. 05:01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雲静 위 졸시는『純粹文學』통권 362호(2024년 1월)에 게재됐습니다.

대단한 가문

대단한 가문 뉘집인진 모르겠다만 대단한 가문이다 후손들이 저리도 조상을 잘 모시니. 중시조인 듯 봉분묘가 맨 위에 자리하고 그 아래로 차례차례 후대 조상 비석들이 묘들과 함께 빼곡히 들어서 있다 땅속 파고들다 만 벙커버스터 미사일처럼 여러 기가 산자락 곳곳에 꼿혀 있다. 공명도 좋고 人死留名도 좋다지만 혈이 뚫린 땅이 아프지 않을까? 말 없는 신음 소린 듣지 못하는가? 세월 지나면 다른 후손 묘비들은 어쩌나? 산자락 아래 마을에까지 앉히려나?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누구나 남기고 가는 한 줌 가루 동해바다에 뿌린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따라 누울 자리도 그곳이다. 2022. 8. 27. 15시경 직관 8. 28. 04:02 옮겨씀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

자존의식

자존의식 나혼자는 나혼자일뿐이다나는 어쩌다 그의 노래를 들게 될 뿐열광하거나 쫓아다니는 광팬은 아니다가요는 기능이어서 아무리 잘 부른다해도관심은 가하지만 추종까지 할 건 아니다무슨 가왕이랍시고 떠받들 것까지도 없다노래는 뛰어날 지 몰라도 사는 건 별개다그냥 허물 적지 않은 한 인간일 뿐이다나혼자는 나혼자이고, 나는 나다.폭팬이 되어 혼쭐 두고 다니기보다 혼자서라도 생각을 보듬는 존재여야 한다독립된 자아가 자존적 인간관계를 맺는다그것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나라가 견실해지는 건 그것 때문이다.정치인들은 거개가 용속한 자일 뿐선한 시민들보다 못한 자가 9할 이상이다국민이라는 추상성을 우롱하는데도 지지만 한다비판은 없는 골빈당들의 팬덤이 근본을 망친다지배욕의 다른 형태인 그것에 정신이 좀먹힌다.총통은 총통이..

세상 인심 Ⅱ

세상 인심 Ⅱ 육순 중반에 친구가 박사학위를 받았다 회사 운영하면서 받은 거라서 더욱 값지다 이 기쁜 소식을 동기회 밴드에 올렸다 헌데 몇날 며칠이 지나도 누구 하나 축하 댓글 다는 이가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귀찮아서 그런지 돈도 벌고 박사도 된 게 배가 아파서? 축하댓글 달면 자신이 아부하는 걸로 비칠까봐? 학위취득 소식 축하글을 올린 자가 미워서? 정말 이유를 알 수 없구나! 인간성 나쁘지 않고 인심도 잃지 않았다 동기, 동문회장 맡아 기천만 원씩 쾌척도 했다 밥 사고 술 살 땐 왁자지끌 많이도 모였다 염량세태는 인간사 고금동서의 진리다. 동기라 해도 속을 알 수 없는 건 매한가지 인간이란 게 원래 그런 존재인지 알고도 서로 모른 체 눈치만 살핀다 남들 앞에선 못본 체 하고 뒤로는 친한 척한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