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시 17

역마살

역마살 태어나는 것 자체가 역마살이다 하행선으로 이 땅에 내려 왔다가 저 하늘로 올라가는 상행선을 타고 역마는 달린다 은하계 속으로 영원의 시공간에 티끌로 나투는 일 육도를 탈리 못해 自性 없이 돌고 돌아 다음에 설 역은 이름 모를 혹성 그 다음 역은 빅뱅 이전의 카오스일까? 어딘가에서 건너와 욕망에 끄둘리다 또 다시 無明處로 흘러 흘러가는 것 삶이란 특별한 뜻이 있는 게 아니야 거뭇거뭇하거나 알룩달룩한 무엇일뿐 바보 천치처럼 모르고 사는 게 약이지 하릴없이 지내다 다음 역으로 떠나야 해 반석겁과 찰나 사이로 펼쳐지는 白駒過隙의 수미산역 이 곳에까지 와서 잠시 머물다 가지만 더는, 더 이상은 미련없이 삼세에 드리워진 역마살을 끊어야지 2023. 11. 8. 13:41 서울발 포항행 KTX열차 안에서 雲静..

떠도는 바람

떠도는 바람 바람이 멎어설 데는 없다 곤고한 몸 눕힐 한 뼘의 땅도 없다 익명 사회의 광장에서도, 다툼 없고 언걸 없는 한적한 해변에서도, 심지어 인정이 도타울 고향에서도··· 바람만의 운명인가요? 막다른 골목 안에서 이는 회오리처럼 어제도 실성한 듯 저절로 돌았고 막차 끊어진 역사에 홀로 앉은 이 밤도 내일도, 다시 모레도 혼자 돌고 돌아야 할 터 세상에 안기지 못해 거친 들판을 서성이는 기의 응어리 어디서든 머물 곳이 없는 나는, 나는 명왕성의 지표를 떠도는 바람이다 겨울 눈꽃이 피면 가을바람은 잊어야 한다 이젠 잡아도 내가 거하고 싶잖은 바람이다. 2023. 11. 2. 00:22 전철 3호선 지축역에서 雲静 초고

루앙프라방의 새벽

루앙프라방의 새벽 어둠이 물러가기 전 탁발승 행렬이 수행 소요로 전생 업보들을 풀어낸다 저마다 사연들은 묵언에 묻어두고 나눔과 재분배로 잠시나마 펴지는 사바세계. 존재에 대한 연민에 붉어지는 눈시울 보시로 찰나나마 넉넉해지는 자비심이 하늘빛 물들이는 메콩강의 물안개처럼 이방인의 영혼을 촉촉이 적신다. 날렵히 뻗은 용마루 위로 동이 트는데 동자승들이 치는 法鼓의 법음, 사원 앞 꽃 파는 소녀의 미소, 아침 시장의 웃음 짓는 아가씨, 부처의 應身들이 세상소리를 보고 있다. 누구에겐 오지 않는 루앙프라방의 새벽은 경건함과 자기성찰의 바닥 모를 늪이다. 2023. 2. 5. 05:01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雲静 위 졸시는『純粹文學』통권 362호(2024년 1월)에 게재됐습니다.

대단한 가문

대단한 가문 뉘집인진 모르겠다만 대단한 가문이다 후손들이 저리도 조상을 잘 모시니. 중시조인 듯 봉분묘가 맨 위에 자리하고 그 아래로 차례차례 후대 조상 비석들이 묘들과 함께 빼곡히 들어서 있다 땅속 파고들다 만 벙커버스터 미사일처럼 여러 기가 산자락 곳곳에 꼿혀 있다. 공명도 좋고 人死留名도 좋다지만 혈이 뚫린 땅이 아프지 않을까? 말 없는 신음 소린 듣지 못하는가? 세월 지나면 다른 후손 묘비들은 어쩌나? 산자락 아래 마을에까지 앉히려나?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누구나 남기고 가는 한 줌 가루 동해바다에 뿌린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따라 누울 자리도 그곳이다. 2022. 8. 27. 15시경 직관 8. 28. 04:02 옮겨씀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

다중 속의 고독

다중 속의 고독 한국인은 배고픈 건 참아도 남 잘 돼서 배 아픈 건 참지 못한다. 자신보다 조금만 잘났다 싶으면, 자기보다 똑똑하고 깨끗하다 싶으면 눈 뜨고 못 보는 이가 대부분이다. 뒤에서 험담해서 자기위안으로 삼는다. 다수는 자기 성격 탓에 침묵하지만 대개는 자존감 없거나 순수치 못해서 그렇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니 그렇다지만 자주 이리 속고 저리 뒷통수 맞고 해서 학교 동기들에게라도 안겨볼까 했더니 그들도 배가 고픈지 아픈지 알 수가 없네. 잘났다 싶은 이는 어디서든 안길 데가 없다.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마음 붙일 곳이 없다. 함께 해도 늘 적막강산에 혼자 서 있다. 홀로 피어 세찬 비를 맞는 꽃이여, 한 떨기 오이꽃이여! 2022. 6. 29. 12:09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静 초고

카테고리 없음 2022.06.29

졸시, PEN문학지에 실리다!

졸시, PEN문학지에 실리다! 시인 등단 후 처음으로 졸시 한 편이 권위있는 문학지에 실렸다. 작년 3월에 등단했으니 꼭 1년 만이다.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끌적거려오고 있어 그간 쌓인 시들이 160수(한글시 뿐만 아니라 영시, 한시, 하이쿠 포함)가 넘어도 졸시를 문학지에 실어보겠다고 시를 보내고 한 적이 없다. 투고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중에 시 게재가 결정된 후에 원로 시인 한 분에게 졸시 게재가 결정됐다고 말씀드렸더니 등단 1년만에 권위있는 문학지에 작품이 실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하셨다. 원로 분께서 괜히 내게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사실, 이미 작년에 펜문학지 회원으로 가입했지만 나는 문단에서 이 문학지의 평가가 어떤지는 잘 모른다. 아직도 마음 한 곳엔 익숙한 학계와..

茶山의 유배시 '獨坐'에 답하다

茶山의 유배시 '獨坐'에 답하다 獨坐 旅館蕭寥獨坐時 竹陰不動日遲遲 鄕愁欲起須仍壓 詩句將圓可遂推 乍去復來鶯有信 方言忽噤燕何思 只饒一事堪追悔 枉學東坡不學棋 裊娜煙絲寂歷中 春眠起後野濛濛 山雲遠出强如月 林葉自搖非有風 眼向綠陰芳草注 心將槁木死灰同 縱然放我還家去 只作如斯一老翁 홀로 앉아서 쓸쓸한 빈 여관에 홀로 앉아 있는데 대나무 그늘은 꼼짝 않고 해는 더디네 향수가 도지려는 걸 억지로 눌러놓고 지어놓은 싯구들을 다듬는다. 잠시 갔다 다시 오니 꾀꼬리는 소식이 있는데 제비는 무슨 생각인지 입을 다물어버리는구나 두고 두고 후회가 되는 한 가지는 소동파를 배우느라 바둑을 못 배운 거라네. 늘어진 버들가지는 적막 속에 있는데 봄잠에서 깨고보니 들빛이 어둑 어둑하고 먼 산에 구름이 걷혀서 달이 뜬 듯 환하구나 나뭇잎이 절..

不垢不淨

不垢不淨 술 취해 반쯤 인사불성 된 직장 동료가 토한다 노래방 안락의자에 뒤로 기대어 누운 채 쿨럭 쿨럭, 쿨럭 쿨럭 가슴팍으로 용암처럼 꾸역꾸역 나오는 토사물 초겨울 한기 도는 실내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바로 윗도리를 벗어 두 손으로 쓸어 담았다. 토해낸 음식물이 더럽고 역하다고? 그러기 불과 두 시간 전, 술과 음식을 우리는 함께 맛있게 먹었다네 자체로는 더러워할 것도, 깨듯하달 것도 없지 찰나에도 생각은 오만 가지라 실체가 없는 걸 2022. 3. 27. 10:1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