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한국전쟁

중국 국가수뇌부의 6․25전쟁 발발원인 인식에 대한 ‘마르크스사상’적 비판 試論

雲靜, 仰天 2012. 3. 31. 06:52

중국 국가수뇌부의 6․25전쟁 발발원인 인식에 대한 ‘마르크스사상’적 비판 試論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나는 이 글에서 중국 국가수뇌부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6․25전쟁 발발원인에 대해 비판하려고 한다. 이 비판은 시의를 놓친 감이 없지 않지만, 작년 10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공개적으로 행한 적절하지 못한 발언에서 촉발된 것이다. 그는 부적절 수준을 넘어 사실 마저 은폐, 축소하거나 또는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의 언설을 작심하고 쏟아 냈다.
 
이에 대해 국내 언론이나 전문가, 정치권은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지금은 아예 잊어버린 사건이 돼버린 상태다. 냄비근성의 우리가 늘 그렇듯이. 이것이 내가 당시 글의 틀을 잡아놓고 쓰다만 이 초고를 꺼내 가필하는 동기다. 또 6․25전쟁 발발원인을 정확하게 알리기 위한 노력은 특별한 때에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글 몸으로 들어가면 먼저 6․25전쟁 발발원인에 대한 중국 국가수뇌부의 인식과 평가 내용을 밝히겠다. 은폐, 축소, 사실 해석의 자의성이 주된 내용이다. 그러한 인식과 평가를 가능하게 만든 사상적 거푸집은 이른바 ‘마르크스사상’에 대한 몰이성적 맹신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오쩌둥(毛澤東) 등 중국공산당 수뇌부는 어떤 경우 명백한 사실까지 은폐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로 인해 이 문제는 국가지도자의 도덕적 자질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본고에서 말하는 '마르크스사상'이란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따라 역사가 결정된다고 보는 유물사관을 신성불가침의 ‘경전’으로 삼으면서 마르크스-레닌-트로츠키-스탈린-마오쩌둥-호치민 등 러시아 10월혁명을 지지하고, 1919년 탄생한 코민테른의 노선을 추종한 계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언설로 제한한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변형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한 칼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류의 수정주의 이론은 제외한다. 주체사상 같은 걸 만든 김일성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단지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의 수장에 불과할 뿐, 그의 사상도 마르크스 사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다만 참고로, 원래 마르크스사상에서는 협의와 광의의 두 가지로 나뉜다. 마르크스의 사상 및 주의만은 협의의 마르크스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라고 하고, 마르크스는 물론 마르크스 이외 마르크스 추종자로서 그의 사상이나 주장에 대해 변형적 해설과 해석을 가한 레닌, 베른슈타인, 심지어 김일성의 사상까지 포함된 경우 광의의 마르크스사상이라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사실판단의 오류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도 레닌주의가 포함된 광의의 마르크스사상(구체적으로는 계급투쟁, 제국주의론, 정의의 전쟁론, ‘국가와 혁명’론 등)과 중국 전래의 大同思想이다. 학술상의 以夷制夷인 셈이다. 여기에다 우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복기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테다.

  

중국 국가수뇌부가 6․25전쟁 발발원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해오고 있는지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6․25전쟁은 남북한 간에 발생된 내전이며, 중국은 이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둘째, 미국이 한민족 간 내전에 정당한 이유 없이 개입해 북한의 민족통일전쟁에 간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진함으로써 중국의 국가안전을 위협했다. 요컨대 미국을 제국주의 침략자로 규정한 것이다.
 
셋째, 중국은 미국의 중국침략에 대항해 부득이 하게 군대를 보내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지원하며,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의 ‘抗美援朝, 保家衛國’ 명분으로 침략이 아닌 ‘방어전쟁’, 불의가 아닌 ‘정의의 전쟁’을 수행해 세계 최강의 미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참전은 미국의 ‘제국주의침략’에 대항한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요구한 바 있는 참전에 대한 사과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현 중국정부가 중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1950년 10월 중순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눠 전자를 한반도 민족내전, 후자를 ‘抗美援朝戰爭’으로 구분해 별개의 전쟁이라고 강변하는 이유다.
  
중국정부의 이 같은 공식 입장은 중국의 국가기관에서 발행된 모든 6․25전쟁 관련 공간사에는 물론, 대학 및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즉 북한을 침략의 주체라고 명기하지 않고, 어느 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했다’는 식으로 중립적으로 기술해놓고 있는 것이다. 또 미국의 주도로 이뤄진 유엔군의 참전을 그것이 불법침략 저지와 평화수호 행위임을 외면한 채 ‘제국주의침략’이라고 호도하기도 한다. 이 내용들은 국가가 전일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교육을 통해 자국민에게 주입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 통수권자인 마오쩌둥이 전쟁 전부터 전쟁모의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을 중공 지도부가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손으로 하늘을 가리듯 진실을 가린 명백한 역사 비틀기다. 반박은 사실에 입각해 구체적이고 정확할수록 설득력을 얻는 법이다. 상기 세 가지 인식에 대해 사실을 근거로 축조적으로 비판해보자.

  

첫째, 6․25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진영의 주요 일원으로 민주주의 진영에 대해 도발한 국제전이었다. 또 남침전쟁이 자신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마오쩌둥이 이미 전쟁 전에 스탈린의 남침동의 요청을 수락하고,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지지한 사실을 감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이는 휴전 후 40년 가까이 지난 1990년대 초 소련 붕괴에 따라 공개된 당시의 소련자료들에서 밝혀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입증된다.
  
소련자료들에 의하면, 애초부터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세계적화의 일환으로 간주했고, 마오쩌둥도 이에 동의했다. 스탈린은 전쟁 전부터 수차례에 걸쳐 대량의 각종 무기 장비들을 북한에 제공했다. 마오쩌둥도 1949년부터 김일성에게 중국 체류 한인 출신 중공군 병사 최소 5만여 명 이상을 북한에 넘겨주어 북한군의 전력을 보강케 했다. 그런데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이 남침승인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다. 미군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군의 개입은 미국이 인정해오고 있는, 소련의 권익을 보장한 얄타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강력한 요청에 못 이겨 이듬해인 1950년 1월 중국 내 소련의 기득권을 포기하기로 한 신중소동맹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기존 동북아전략구도의 판을 새로이 짰다. 즉 중소동맹으로 중국의 뤼순(旅順), 다롄(大連)항구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약정함에 따라 그때까지 소련의 동북아 기지 역할을 해온 이 항구들을 대신할 부동항을 한반도에서 찾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남한을 손에 넣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스탈린은 복안으로 남침전쟁 도발에 혈안이 돼 있는 김일성을 이용하기로 하고, 그를 두 번째로 모스크바에 호출했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4월 마오쩌둥의 사전 동의를 전쟁승인의 조건부로 남침에 동의했다. 김일성으로선 마오쩌둥이 동의를 해주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가 거부하면 남침이 성사되지 않거나 혹은 연기될 수 있는 고빗사위 상황이었다.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한 김일성은 급거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 화이런탕(懷仁堂)을 방문해 5월 15일 마오쩌둥에게 한반도적화를 위한 남침전쟁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글의 모두에서 봤듯이 두 사람은 전쟁을 도발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것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 적화통일 남침전쟁에 동의한 사실을 확인한 뒤 동의의사를 표시했다. 그는 “타이완(臺灣)을 해방한 후에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 적화통일 문제에 동의한 이상 준비중인 타이완 해방작전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무력통일을 제1순위로 두기로 했다”고 하면서 김일성의 3단계 침공방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일성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전술적 조언까지 해줬다.
  
한 마디로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음―김일성과 달리 최악의 경우 미군의 참전까지 상정한 상태에서 남침계획을 동의한 것이다. 이렇듯 두 사람의 군사지원, 특히 마오쩌둥의 남침 동의는 김일성이 남침을 결행할 수 있게 된 결정적 조건이 됐다. 마오가 김일성의 동의요청에 동조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의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스탈린이 남침동의를 없던 일로 했거나 보류했을 것이고, 그렇게 됐을 경우 한반도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 지도부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중국이 남침전쟁 도발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둘째, 미국의 참전은 한반도 침략이 아니라 북한의 침략을 응징하고, 평화를 수호하려는 유엔의 결의에 따라 유엔군의 일원으로 개입한 정당한 자위권의 발동이었다. 김일성의 남침 개시 후 마오쩌둥은 한반도로 전개해온 미군의 참전목표가 북한침략군을 격퇴해 남침 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 바꿔 말해 38도선을 넘어 중국을 위협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오는 전쟁초기부터 ‘미국 위협론’을 부풀려 왔으며, 미국행정부가 북진을 논의하기도 전인 1950년 8월 중순 경 이미 파병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게다가 미군이 중국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진을 강행했다는 주장도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중국정부는 이 해 10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유엔군의 북진 과정에서 분명히 중국지도부에 중북 국경지역에서의 중국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할 것이라고 통보한 사실을 고의로 언급하지 않았다.
  
셋째,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중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개입했다는 “抗美援朝戰爭”논리도 牽强附會다. 마오의 참전 개입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국익을 고려한 능동적 결정의 결과였다. 당시 중공 당내는 물론, 중국 내 비중공 민주인사들을 포함한 전체 정치권에서도 참전 반대의견이 절대 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참전을 강행했는데, 그 배경에는 국내외적 동기와 목적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1950년 2월 맺은 중소동맹조약으로 스탈린이 한 약속, 즉 과거 소련이 획득한 중국내 권익을 환수해주겠다는 약속을 보장 받기 위해 그에게 신뢰를 보여줌과 동시에 몇 가지 자신의 국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시상황을 이용하고자 한 동기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국내 정치적 목적에는 대략 다섯 가지 동기가 설정돼 있었다. 1) 스탈린이 약정한대로 소련세력의 중국철수를 성사시켜 신중국이 명실상부하게 자주국가라는 점을 과시하려는 것, 2) 대륙 도처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중국국민당의 잔류부대, 특무와 토비들의 섬멸을 통한 국내정치의 안정, 3) 臺灣과 티베트에 대한 공략을 통한 국가 정치적 통일의 완성, 4) 피폐된 경제를 전전 수준으로 회복시켜 국가재정의 안정 및 민생안정의 도모, 5) 토지개혁의 추진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토대 구축 등이다.
  
또한 중국의 참전은 “미 제국주의에 강요된” 피동적 “정의의 전쟁”도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국제질서를 무시한 침략이었다. 중국이 말하는 이른바 ‘정의의 전쟁’이란 강대국이 패권을 추구하기 위해 정의로운 약소국을 침략했을 때 이에 항거하는 전쟁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마오는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은 북한이 정의로운 신생국 남한을 침략하겠다고 했을 때 김일성을 적극 만류했어야 했다. 그것이 1920년 반제, 반패권, 반침략의 기치로 떨치고 일어난 중국공산당의 창당정신이 아니었던가! 일제의 악랄한 침략에서 해방된 중국이 정의로운 국가라고 한다면 한날한시에 일제의 모진 질곡에서 벗어난 한국도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었는가?
 
만류하기는커녕 마오는 자신을 찾아온 김일성에게 남침의지를 더욱 고무, 증장시켰고, 미군이 개입하면 군대까지 보내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38세에 불과한 그의 만용을 부추긴 셈이 됐다. 또 미군의 북진을 북한의 점령에 그치지 않고 최종적으로 중국침략에 있다고 자의적으로 예단하고, 이를 명분으로 개입한 것임은 물론이다. 실제로 전진방어를 명분으로 선전포고 없이 ‘정의의 전쟁’으로 호도하면서 1차로 25만여 명의 대군을 타국에 보낸 것은 침략이 아니고 뭔가?
  
결과적으로 스탈린과 함께 마오쩌둥도 국제 公道에 어긋나는 정당성 없는 남침전쟁을 승인해줌으로써 이웃민족을 서로 싸우게 만든 동족상잔의 아픔을 안겨준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처럼 중국의 정의롭지 못한 부당한 정치, 외교, 군사적 개입으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됐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다.
  
첫째, 전후 마오가 신생 약소국들과 관계를 모색하려고 했던 사실에서 볼 때 남침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있었던 한중 간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교류 가능성이 완전히 결딴났다. 사실 1945년 해방 직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 중국공산당 내 서열 4위의 저우언라이 등 중국지도부가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귀국환송식을 베풀어주면서 한민족의 미래를 축원해준 바 있다. 이때만 해도 중국공산당은 미국과의 관계정립을 기대했기 때문이다―미국과의 관계개선 노력은 1950년 초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결렬됨에 따라 그러한 우의는 일거에 물거품이 되었고, 세계혁명과 민족해방의 의지만 한반도 상공을 뒤덮게 됐다. 이는 국가지도자가 어떤 역사인식과 정치이념을 가지느냐에 따라 국가, 민족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을 예시하는 사례다. 국가지도자의 역사관과 세계관은 자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웃 국가와 민족의 행불행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둘째, 한반도의 정치 및 군사적 통일은 성사 일보 직전에서 무산됐고, 와해상태의 북한정권이 기사회생했다. 그 여파로 한민족은 60년 이상 상호 강렬한 적대의식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갈등을 겪었다. 남북분단의 고착화는 남․북한 간의 불필요한 소모전의 기원이 됐다. 현재도 분단이 지속되고 있고, 크든 작든 우리는 그 파장 속에 살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중국정부는 1992년 8월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인 한중 수교시 우리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참전에 대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데다 북한정권을 의식하거나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도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남침전쟁 지지, 그리고 전쟁발발 원인에 대한 중국수뇌부의 왜곡은 사상적, 이념적으로 이른바 ‘마르크스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글머리에서 정의한대로 마르크스사상이란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 중 레닌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이론들의 교직된 체계를 말한다. 즉 유물사관, 마르크스 자신의 계몽주의 발전사관에 토대를 둔 ‘역사발전 5단계설, ‘자본주의의 붕괴 필연론’, ‘생산수단의 사회화’,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유재산의 국가소유에다 레닌의 ‘제국주의간의 전쟁발발 필연론’과 ‘정의의 전쟁론’, ‘국가와 혁명’론, 마오쩌둥의 ‘인민해방전쟁론’ 등이 가미된 복잡한 착종을 이루는 혼합물이다. 이런 이론들이 광의의 의미에서 소위 ‘마르크스사상’의 얼개를 이루는 요소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역사결정론에 뿌리를 두고 있고, 각기 자신이 처한 당대의 현실에 대한 진단 오류나 인간의 자유의지, 즉 인간의지의 자율성, 능동성 등을 간과한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는 것들임은 물론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이를 세세하게 논의할 순 없다. 하지만 큰 틀에서 마르크스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성분들을 해체한 후 다시 이를 재조합해볼 필요는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물질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파악했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하부구조가 국가의 법률, 제도나 종교, 예술, 문화, 학문과 사상 등의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쳐 결국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결정한다는 역사 혹은 경제결정론으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는 이 이론으로 한 때 부르주아지계급에 착취당하고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에 소외당하던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자각시켰고, 유럽의 좌파적 지식인들에게는 진보개념과 실천의지를 일깨웠다.
 
19세기 중후반 당시 유럽의 노동자들은 ‘시민이면서도 시민이 아닌 자,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자’들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생산물의 불공정한 분배, 빈부격차가 야기한 각종 정치, 경제, 사회문제들이 유럽사회를 뒤덮은 암담했던 그 시대에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공헌이다. 자신의 노동력 밖에는 삶을 연명하는 수단을 가지지 못한 최하층 노동자들에게 개선의 희망을 선사함으로써 세계사의 한 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공헌은 작지 않다. 또 동구권의 몰락에 이어 사회주의 전체가 주저앉은 지 오래된 지금,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극성을 부리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대안이 될 수 있을 만큼 유효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고 쟁취하는 수단으로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사유재산의 사회화(부정)을 역설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미래 역사의 비극을 잉태한 셈이었고, 마르크스를 20세기 냉전의 사상적, 정치적 설계자로 만든 이유였다. 지난 20세기는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그의 사상에 지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숱한 추종자들과 자기 분신을 만들었다. 봉신방이나 손오공처럼!
 
레닌은 마르크스이론에다 소수 직업적 혁명가들의 폭력혁명과 계급투쟁, 그리고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제국주의전쟁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정의의 전쟁론’ 등을 첨가했다. ‘일국사회주의 이론’(socialism one country)의 스탈린, 도시혁명에 치중한 레닌 및 스탈린, 농촌혁명에 치중한 마오쩌둥의 전략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킨 ‘전인민의 거족적인 혁명전쟁론’의 호치민, ‘주체사상’으로 왕조적 독재체제를 구축한 김일성도 사이비이긴 하지만 대표적인 그의 손오공들이다.

  

중국의 마오쩌둥 역시 마르크스의 주목할만한 제자였다. 모든 정치문제를 경제문제로 환원한 마르크스의 역사결정론,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이론을 맹신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한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충실한 신도였다. 그러나 마오는 마르크스를 공산주의사상의 비조로 여기면서도 스스로 마르크스와 레닌을 모두 넘어섰다고 주장하는 파격적 제자였다.
 
레닌이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오쩌둥도 마르크스사상을 중국이 처한 정치, 경제, 사회의 구체적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적용, 즉 탄력적으로 변용시켰다. 마오는 레닌사상의 연장선에서 정치권력은 오로지 총구에서 나오고, 무력만이 제국주의의 지배와 중세의 질서, 관습이 횡행하는 구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마르크스와 달리 농민들의 혁명잠재력에 주목하고, 그들을 해방시키고,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해 무상으로 분배해주겠다는 것을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다. 그것이 중국농민의 혁명의지를 불태우게 했고, 결국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된 에너지였다.
  
하지만 마오는 혁명으로 국가권력을 움켜쥐자마자 소련모델을 도입해 도시민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 공업화를 우선시함으로써 혁명의 최대 지지자였던 농민계급의 권익을 배신했다. 그는 농민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토지도 주지 않았고, 노동자들에게 주겠다고 한 공장도 주지 않았으며, 지식인들에는 자유와 민주를 주겠다고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따라서 마오의 정치사상은 스탈린 사망 후 소련에서 그랬듯이 “사회주의의 적법성”이 검증됐어야 했다. 마오가 오히려 공산혁명 이념의 최대의 배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농민이 대다수인 제3세계 후진국의 ‘혁명 수출시장’도 이른바 그의 사상체계를 가리키는 ‘마오이즘’(Maoism)의 장기 생존에 한 몫 했다. 오히려 그는 우상화 됐고, ‘마오이즘’은 신성불가침의 교조적 가치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이 현대 중국의 운명이자 한계였다. 모름지기 한계를 극복하는 게 역사발전의 순리요, 사명이지만 중공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적확하게 이야기하면 중공은 그러한 극복을 할 수 없는 사상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자신의 ‘마오이즘’을 세계 공산주의운동사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반열에 올려놓으려고 한 인위적 작위가 기존 세계질서를 뒤틀리게 만든 요인이었다. 즉 마오는 자신이 달성한 중국‘민족혁명’의 방식과 ‘인민해방전쟁’의 당위성을 세계의 여타 국가들에서도 수용해야 할 전술이거나 달성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내세웠다. 또 놀랍게도 과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듯이 중국이 ‘세계혁명’의 토대나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경우 ‘세계혁명’과 ‘민족해방’은 자본가계급에 대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다른 이름이다. 마오는 이 생각과 이념을 소련과 소련 추종세력 이외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수출하려고 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상적 연원이었다. 그가 베이징 中南海의 깊숙한 권부로 자신을 찾아온 김일성을 만류하거나 제지하지 못한 한계가 여기에 있었다. 또 자신이 남침전쟁 모의에 가담한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오히려 나중에 마오는 6․25전쟁에서 미군의 북진을 저지한 것을 공으로 내세워 자신의 참전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로 중공 당내에서 개인숭배의 발판을 구축했다.
  
마오이즘에 토대를 둔 6․25전쟁 참전에 대한 일방적 정당화는 중공지도부에 변함없는 공동 가치로 전승돼 왔다. 6․25전쟁 발발 후 한 갑자가 지난 2010년 10월 25일 중국 국가부주석 시진핑(習近平)이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抗美援朝戰爭 참전 제60주년 좌담회’에 참석해 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군 노병들에게 행한 발언이 이를 말해준다. 차기 국가 최고 지도자로 내정돼 있는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北京에서 거행된 항미원조 제6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왼쪽에서 네 번째)과 시진핑 부주석(후진타오 뒷쪽)이 참전 '志願軍'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있다.

즉 “위대한 抗美援朝戰爭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으며, “제국주의가 중국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국외교부도 시진핑의 이 발언이 그의 개인적 사견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정론이라고 다시 한 번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요컨대 중국 국가수뇌부와 중국정부가 6․25전쟁을 침략자와 피침략자가 뒤바뀐 주객전도 식으로 사실을 교묘히 비틀어 놓은 셈이다.
  
시진핑 부주석의 이 발언내용 자체로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아쉽지만 중국수뇌부의 역사인식이 변화하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대가 무산됐을 뿐이다. 국내외 중국공산당 및 마오쩌둥 전공자라면 그의 발언이 중국수뇌부의 집단 공유의식이며, 중국정부의 입장을 되풀이 한 것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대응 자세와 사태파악의 수준이다. 당시 시진핑의 발언이 의도한 바를 꿰뚫어본 국내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의 발언을 중국내부 정치용 발언으로 대수롭지 않게 본 학자들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역사주권을 지키겠다는 기백을 보이기는커녕 시 부주석 발언의 배경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해 매우 안타까웠다.
  
그렇다면 시진핑 부주석의 발언은 전쟁 직전 마오쩌둥이 깊이 간여한 남침지지 행적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모르고 한 것일까? 아니면 알고도 그랬다면 어떤 연유에서, 또 무슨 의도가 있었을까? 그가 왜 그 시점에 새삼스런 내용을 공개 발언했을까? 시진핑 부주석의 발언은 결과적으로 국내정치적 의도와 북한 그리고 심지어 한국정부에까지 파급을 미치도록 고안된 고도의 전략적 발언이었다.
  
먼저 국내정치용부터 살펴보자. 그의 발언은 중국공산당 수뇌부 내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수차례 촉구한 정치개혁 여부를 둘러싸고 찬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치개혁 주장은 곧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 후의 당내 역학관계와 맞물려 있었고, 정치개혁이 아니면 장기집권이 불가능하다고 공공연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개혁파’를 중심으로 북한수뇌부의 3대 세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당내에 존재했었다. 북한의 3대 세습을 인정하면 중국공산당의 이미지가 좋을 게 없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 부주석은 당내 자파 권력 안배문제를 염두에 두고 북한의 권력세습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정치개혁파를 견제한 것이다. 즉 6․25전쟁에 대한 중공 당론과 참전노병들을 정치적 ‘오브제’(object)로 활용하면서 중북혈맹을 강조한 聲東擊西였던 셈이다. 참전 노병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체제 및 당내 정치개혁파를 부정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일석삼조의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시진핑의 발언은 국내정치적 용도를 넘어 대외관계의 영역으로 경계가 확장된다. 우선 일차적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그의 진의와 별개로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비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가 계산에 넣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길들이기”라는 부차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상황으로 파생된 것이다.
 
적확하게 말하면, 중국이 우리를 길들이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 가에 따라 스스로 중국에 다시 한 번 길들여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발언의 시점이 공교롭게도 한국정부가 G20정상회의를 앞두고 의장국으로서 환율문제를 거론하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의 대중국 압박을 시도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한미관계의 이완을 겨냥한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다목적적 동기마저 감지된다.
  
우리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국내 여론 무마용에 불과했다. 정부는 외교통상부를 통해 반박성명을 내면서도 시진핑 부주석의 발언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고 우회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중국정부로부터 강력한 시정요구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 받아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다 정부의 반박성명도 반박사설을 낸 몇몇 중앙일간지와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의 반박 및 시정 촉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회창 대표는 시 부주석의 발언에 대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적화(赤化) 침략전쟁에 3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고 전국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던 한국과 한국 국민을 무시한 발언”이라고 비판하면서, “중국 측에 해명과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했던 것이다.
 

시진핑의 발언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이회창 대표.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정부에 강경한 대응을 주문한 이회창 대표의 발언을 제외하고는 정치권은 대체로 중국과의 관계에 좋을 게 없다는 이유로 적극적 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마치 2008년 북경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발생한 티베트사태에 대해 국내 시민사회가 인류보편의 인권문제라는 관점에서 표출한 정당한 의사표현에 불만을 가진 국내 중국유학생들의 조직적 반한시위가 분명 우리의 주권을 우롱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에 제대로 항의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타인의 일에 별반 관심이 없는 중국인들이, 그것도 유학생들이 자신이 유학하고 있는 외국에서 그러한 시위를 자발적으로 했다는 건 퍼뜩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4581179
  
한국불교도들과 그 자신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한국방문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우리 정부가 중국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이는 수년 전 몽골 정부가 경제교류를 단절함은 물론, 베이징에서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철도까지 봉쇄하겠다는 중국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계획대로 의연하게 달라이 라마를 초청한 경우와 참으로 대비된다.
  
역으로 만약 한국 정치권에서 티베트 혹은 타이완의 독립과 관련해 중국정부의 입장과 다른 발언이 나온다면 중국의 당정 지도자들이 한중 양국관계에 좋을 게 없다는 같은 이유로 대응을 자제하겠는가? 답은 스스로 자문해보라. 이 대목에서 나는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저자세를 보고 전후 미국이 한반도에서 중국과 일본세력을 대신한 이래 사라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잔영을 보는 것 같은 旣視感을 느낀다.
  
시진핑 부주석이 노린 중국 국내용 정치적 동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크게 왈가왈부 관여할 일은 아니다. 다만 중공 중앙당교나 중국외교부 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는 국가최고 기밀을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인 그가 특히 중앙당교 문서보관서 안에 깊숙이 밀장된 극비자료들의 열람을 통해 6․25전쟁의 발발원인과 성격을 잘 알면서도 왜곡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은 그만큼 한국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방증하고, 그런 그가 장차 행할 한반도정책이 심히 우려스럽다는 점이다.
 
국가최고 기밀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는 시진핑이 자신의 혁명선배 마오쩌둥이 6․25전쟁 도발모의에 관여한 행적의 실상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그가 이 문서들이 말해주는 진실을 알고도 오로지 6․25전쟁 참전 노병들을 위무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았다는데서 마오의 구시대적 잔영을 본다.
  
시진핑 부주석의 발언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역사왜곡이자 마르크스사상과도 충돌되는 자기모순이 있다.
  
첫째, 그가 미국의 참전을 ‘제국주의 침략’인 것처럼 암시한 발언은 1950년 당시 국제사회의 대변자인 유엔의 존재와 기능을 부정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이 주장에는 ‘역사발전 5단계설, ‘자본주의의 붕괴 필연론’,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제국주의간의 전쟁발발 필연론’, ‘정의의 전쟁론’ 등이 연역적으로 전제돼 있다. 여기서 상세하게 거론할 계제는 아니지만 상기 이론들은 모두 적실성이 떨어지는 철 지난 사유물들이다. 주지하다시피 거시적으로 보면 마르크스가 해석한대로 인류(주로 서양)역사에서 생산양식의 변화에 따라 사회경제체제의 발달정도가 원시공산사회→고대노예제→중세농노제→근대 자본주의사회로 변화한 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마지막 단계로 상정한 공산주의는 더 이상 실현이 불가능하고, 이미 파탄 난 실험으로 끝난 지 오래다.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면서 여전히 생존하고 있다. 어쩌면 적지 않은 결함이 있음에도 자본주의제도 보다 더 나은 제도는 나올 수 없을지 모른다. 또한 인간성을 파괴하는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추구할 게 아니다.
 
오히려 중국의 전통 사상 가운데 계급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大同社會를 지향할 일이다. 고대 유가들이 최고의 이상사회로 묘사한 大同社會에서는 권력과 재물을 전 민중의 공유로 하고(天下爲公),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 평등 개념의 실천, 그리고 민중들에게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安居樂業)은 오늘날 인류의 산적한 문제를 푸는 해법 가운데 하나다. 후진타오(胡錦濤)의 ‘과학발전관’과 ‘調和社會論’이나 시진핑 부주석의 차기 지도이념으로 알려진 ‘과학적 사회주의’도 따지고 보면 그 기저에는 大同社會의 이상이 스며들어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중국수뇌부는 역사해석을 달리 할 채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레닌이 자본주의국가들 간에 제국주의전쟁은 반드시 발발할 거라고 한 단언도 국가 간의 전쟁이 국가지도자의 노력이나 국제사회의 중재로 방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를 실증하는 많은 예들이 있다. 단적으로 1960년대 초 쿠바미사일 위기 시 소련의 흐루쇼프와 미국의 케네디의 타협으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해소된 경우가 있지 않았는가? 또 6․25전쟁 당시 미군의 북진 시 미국과 중국의 수뇌부가 서로에게 보낸 경고의 의미를 진중하게 신뢰하고 대화를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전쟁 필연론을 과신한 나머지 “미 제국주의”가 반드시 침략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단정해버린 것이다.
  
둘째, 시진핑 부주석이 중국군의 참전을 제국주의가 강요한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순이다. 미국이 패권을 추구하기 위해 참전했는가? 더군다나 극비리에 남침을 획책한 북한정권이 정의로운 ‘국가’였는가?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중국수뇌부 스스로 강대국이 정의로운 약소국을 침략했을 때 이에 항거하는 것이 ‘정의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이상 오히려 침략을 한 북한을 응징하고, 남한을 지원했어야 맞다.
 
그러기는커녕 마오쩌둥은 오히려 전쟁 전 김일성-스탈린과의 3자 간 남침전쟁 모의에 참여한 것도 모자라 적게 잡아도 5만여 명이 넘는 한인 병사들까지 출신지가 각기 다른 (남한출신도 다수 있었음) 그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일괄적으로 북한으로 넘겨버렸다. 이 모든 행위는 마오쩌둥이 레닌의 ‘제국주의전쟁 필연론’을 기계적으로 맹신한 만큼 미국을 제국주의로 단정하고, 유엔의 세계평화수호 행위를 되레 침략으로 규정함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선두주자인 미국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서도 자본주의국가나 체제는 정의롭지 않고, 사회주의국가나 체제는 정의롭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역사를 현실정치에 이용하는 중국의 오랜 전통을 이어 받았듯이 시진핑 부주석도 마오처럼 역사문제를 현실정치에 활용하려고 했었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정치영역에서 국가지도자가 자국의 군 원로들을 위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하는 수준이라면, 그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 노병들이 진실, 정의, 평화 등의 범인류적 가치를 생각하는 진정한 무인이 아니라 오로지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왜소한 군인이 된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할 국가적 비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또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목적으로 그렇게 발언했다면 그것 또한 “대국”의 지도자답지 않은 처사다. 중국이 현재 G2반열에 있음에도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함수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진핑 부주석의 상기 발언은, 그러한 인식을 가진 지도자가 가까운 장래에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됐을 때 추구할 한반도정책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한중관계에 대해 불안감과 우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중국수뇌부가 공식적으로 중국공산당 강령인 소위 “마르크스 및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렇다는 얘기다.
 
중국은 진정 한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 북한과의 이념적 편향이라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김정은의 3대 세습까지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여서는 안 된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발언으로 북한만 감싸고돌고 한국을 중국과의 상보적인 파트너로서 대하지 않을 경우 그로 인해 형성될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정서적 반발감도 고려해야 한다.
  
시진핑 부주석은 북한을 비호하면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을 때가 아니라 13억이 넘는 중국인민을 어떻게 인류 보편의 가치인 인권의 실현과 복지사회로 예인할 것인가에 관심과 능력을 집중해야 한다. 중국이 세계 경제체제에 발을 들여놓은 상황에서 중국내 복잡한 구성원들 간의 정치, 사회, 민족 갈등으로 인해 점증하는 합리성과 민주화의 욕구에 부응하려는 의무와 노력에 치중해야 한다. 이른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전하게 지탱하겠다면 말이다.
 
또한 시진핑 부주석에겐 향후 자신의 ‘과학사회주의’가 실현되려면 현재 중국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2009년 말 현재 7억 9,800만 명으로 전체 중국인 중 3명에 2명이면서도 이들에 대한 처우는 세계 하위 수준인 자국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민권적 자유와 권익을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들이 세상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창했던 마르크스의 이상임과 동시에 중공공산당의 창당정신에 부합하는 길이다.
  
일국의 최고지도자는 부끄러운 자국의 역사도 사실대로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인류 보편적 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 그래야만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할 수 있고,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 이끌 수 있다. 한반도평화의 안정적 관리를 내세우는 중국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덕목과 식견은 역사의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에서 갖춰진다. 또한 일본의 역대 정치지도자들이 전전 일본군의 중국침략과 난징(南京)대학살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발뺌할 때 중국인민들이 느끼는 분노를 중국수뇌부의 6․25전쟁 왜곡으로 인해 한국국민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慧察할 수 있지 않을까?
  
마오쩌둥 식의 혁명전쟁론과 공산주의사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중국지도부의 사상적 한계는 지속될 것이다. 한술 더 떠 현재 중국은 국외전쟁에 개입을 용이하도록 방어전쟁의 개념을 선제방어개념으로 확대했다. 또 목하 주변국들의 우려가 점고되고 있을 정도로 아시아에서의 행동반경을 넓히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중국수뇌부의 역사인식이 진실에 가까이 가게 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대응도 결연하지 못하다. 그래서 새삼스레 나라도 시진핑 국가부주석에게 꼭 한 마디 충심어린 苦言을 드리려고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인류의 스승 공자가 일찍이 “過猶不及”이라고 했듯이 국가정책의 실행에서도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함은 같다는 중용정신을 되새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2011. 11. 12
雲靜
 
위 글은 『군사논단』, 통권 제68호(2011년 겨울호, 12월 25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