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휴전 64주년에 송시열과 한국사회의 사대의식을 생각한다!
서상문(고려대학교 한국전쟁 아카이브 연구교수)
올해로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어느덧 64년이 됐다. 반세기가 더 지난 짧지 않은 세월이다. 동족상잔의 이 전쟁이 남긴 깊고 넓은 한민족의 집단적 상흔과 르쌍티망(ressentiment)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휴전상태의 종식과 평화체제 이행은 그 다음이고, 북핵문제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이웃 나라 중국과 대만은 지난 세기 서로 원수처럼 총부리를 겨누었어도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호방문은 물론, 학술교류, 유학, 관광자유화, 경제교류, 각종 투자 등 많은 분야에서 폭 넓게 교류해오고 있다. 통합의 정도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지금은 군사, 외교, 정치 및 행정, 이념적 통일만 남겨놓고 있다.
우리는 이산가족의 상봉은커녕 아직도 서신교환 하나 제도화 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민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백의민족”, “홍익인간” 어쩌고 하는 근거 박약한 자화자찬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당시 국내외적 상황과 국제정세가 달랐기 때문에 남․북한과 중국-대만의 분단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국제정세가 어떻게 다르든 간에 각기 분단상황을 어떻게 관리해왔는가라는 점에서는 비교가 되고도 남는다.
한반도의 남북분단을 상징한 38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강대국의 패권 다툼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편의적으로 그은 선이었다. 남북으로 갈려도 한 동안은 서로 간에 왕래는 있었다. 그러나 남․북한이 서로 철전지 원수지간으로 고착화 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개시된 한국전쟁은 역사를 미시적으로 보면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이 서로 사전에 긴밀하게 공모한 것이 발발 배경과 원인이다. 물론, 한국 전쟁 연구에서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는 가장 큰 미스터리 중의 하나, 즉 미국 정치지도자들이 국내 군산복합체(혹은 미국이 세계를 제패해 단일국가를 만들려는 일루미나티)와 결탁된 결과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남침전쟁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 채 방관하거나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면 이 전쟁은 남북분단◀ 연합국의 편의적 동북아시아 및 한반도정책◀ 일제 식민지배◀ 일본침략◀ 이완용, 송병준 등 구한말 사대주의자들의 매국행위의 역순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완용, 송병준 등은 중국,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말을 갈아탄 후 일본에 국권을 팔아넘긴 매국노들이다. 그들의 매국행위는 개인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 서양세력과 중국, 일본이 몰려들자 현명하고 사심 없이 대응하지 못한 민족사적 업보이기도 하다.
이 또한 중국을 섬기는 것을 절대시한 안동 김씨 권문세족들의 사대의식에까지 연이 닿는다. 그들의 사대의식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중기부터 누적돼온 적폐였다. 임진왜란에서 그렇게 당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또 다시 두 차례의 호란을 당했던 17세기 동북아에서의 세력 교체기와 19세기 西勢東漸 시대의 급변한 국제정세에 눈을 감은 채 당쟁만 일삼은 국가지도층의 사대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과거 국가지도층이 ‘올인’ 한 사대의 대상은 중국이었다. 그 역사는 대략 고려말 때부터 시작됐다. 고려말 왕명에 ‘忠’자가 붙은 마지막 왕들은 모두 원나라를 섬겼다. 그것이 조선의 친명주의자들로 이어져 대국을 섬기는 것이 조선시대를 관통한 하나의 도리인 것처럼 굳어졌다. 조선조 500년을 관통한 대중국 사대의식을 생성시킨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대표적으로 섬광처럼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조선 최대의 친명주의자로서 인조반정을 주도한 뒤 서인의 영수자리에 오른 최고의 ‘수구꼴통’ 우암 송시열이다.
우암이 한국전쟁 발발과 무슨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을까마는, 그래서 그에게 모든 역사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대중국 사대주의 전범이라는 역사적 평가는 비켜 갈 수가 없는 듯하다. 여기서 송시열을 온전히 논하기란 지면이 부족하다. 다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한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는 임진왜란 시 조선이 왜군을 물리친 것은 명나라가 지원군을 보내준 덕분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망극하신 은혜”라고 보고 태조 이성계 이래 명과 조선은 군신의 관계를 맺은지 250년이 넘는다고 주장한 사실이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쳐서 조선을 구해준다는 명분으로 지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제13대 황제였다.
우암은 생각과 말로는 북벌론을 찬성하는 것처럼 내세웠다. 이에 반해 소현세자의 아우였던 효종은 실제 행동으로 군사를 육성해 동북아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효종은 망해가는 명을 받드는 것이 무의미하고, 만주에서 발흥해 동북아에서 새로운 강자로 욱일승천한 만주족의 청나라를 쳐서 외교와 국방에서도 명실상부하게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로 ‘리셋’하고자 했다. 북벌론은 그 의지의 표명이었다. 우암은 효종의 북벌론에 대해 입으로는 찬성한다고 하면서도 뒤로는 방해하거나 저지하고자 했다. 우암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정책에 호응한 듯한 발언들은 사변과 언변에 그친 지상병담이었다. 청나라 오랑캐를 치자고 주장한 북벌론도 사실 명분으로만, 이념적으로만 주장한 지상병담의 북벌론이었을 뿐이다.
북벌론을 주도하던 효종에게 우암은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 즉 군신관계로 받들자는 숭명의리론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기울어가는 명에 대한 사대의 주장은 송시열이 실제 북벌을 도모하기 위해 오랜 기간 절치부심, 와신상담하면서 군비에 힘을 쏟던 효종에게 비밀리에 올린 상소문인 ‘기축봉사’(己丑封事)에 응축돼 있다. 조선을 구해준 중국의 명조를 배신해서는 안 되고 끝까지 받들어야 한다는 숭명의리를 내세운 것이다.
기축봉사의 핵심적 요체는 공자가『春秋』에서 말한 大一統사상인데, 이것이 우암의 사대사상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공자의 대일통사상은 주나라가 섬겨야 할 중심 국가이니 모든 이민족과 나라들은 모두 주나라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시 우암은 명나라가 힘이 다해가는 빈사 상태의 망국이었음에도 청나라가 오랑캐 나라라는 이유로 명나라를 영원히 섬겨야 할 대일통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는 현대 일부 상층 한국인들의 의식을 침식하고 있는 정도가 가히 병적 수준임에도 본인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대주의의식을 최초로 이념화, 교조화한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암 이전에도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이나 발언이 없지 않았지만, 이와는 맥락이 달랐다. 예컨대 이성계가 명나라의 요동지역을 치자고 군사를 일으킨 ‘요동정벌’에서 ‘위화도 회군’을 했을 때 내세운 ‘4대불가론’의 내용 중 소국은 대국에 대들어선 안 된다는 첫째 조항이 그것이다. 고려 말 원나라의 힘을 믿고 국정을 농단한 기철 일당도 원나라를 하늘처럼 상국으로 떠받들었다. 더 올라가면 신라의 김춘추도 대당 외교시에 당나라를 상국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외교적인 수사나 정치적 명분 혹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상국을 이용하고자 한 책략에 따른 일시적인 생각에 그쳤던 것들이다. 우암처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모화사상(慕華思想)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해서 자신의 내면에 일체화한 것은 아니었다. 우암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실로 신종 황제의 은혜를 입어 거의 빈터가 된 종묘사직이 다시 있게 되고, 생민(生民)이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생민의 털 한 터럭에 황은이 미치지 않은 바 없습니다”라고 강변한 그였지 않았던가?
하지만 신종이 군대를 조선에 구원군으로 보낸 것이 정말 조선을 위한 눈물겨운 지원이었다고 보면 큰 오인이다. 명분에 불과하긴 했지만, 중국을 쳐서 천자의 자리를 넘보고자 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내건 ‘征明假道’에 대처해야 했던 자국의 안보 및 이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대군을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여기서 이 점을 소상히 언급할 계제는 아니지만, 마치 한국전쟁 때 미국이 대군을 한반도에 보낸 걸 꼭 자국의 이익은 전무한데 단지 한국의 공산주의 적화를 막기 위해 순전히 희생만 한 것으로 보는 어법 및 시각과 닮아 있다. 또 오늘날 주한 미군의 주둔을 두고 순전히 한국을 위한 것이라고만 알고 주장하는 확증, 혹은 확신편집자들과도 유사하다. 우암의 눈엔 천한 승병과 지방(특히 자신이 속한 기호학파와 정적 관계에 있던 영남) 유생과 그들을 따르던 ‘상것’들의 의병 구국활동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꼭 20세기 일제패망 후 이승만이 등용한 친일파들과 그 후의 ‘무조건적인 친미주의자’들에게 김구를 위시한 재중국 한국독립운동 인사들이 무시되거나 경원시 됐듯이 말이다.
송시열의 논리와 주장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역사는 흘러 400년이 지난 뒤인 20세기 중반 한국전쟁 이후부터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보수’가 아닌 ‘극보수 꼴통’(무엇이든 ‘극’한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인사들과 그 진영에서 주장하는 논리와 동일하다. 단지 중국 대신 미국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을 뿐, 군대를 보내 우리를 패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대국을 배신해선 안 되며, 그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저버려선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에겐 독립국가 간의 자존과 호혜 평등에 입각한 외교는 없고 ‘혈맹’만이 전부인 듯이 신주 모시듯 한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전쟁 첫해 북한군의 남한 전역 점령을 저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미군이 그해 10월부터 개시된 중국군의 한반도 무단 불법침략을 막아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제패망 후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의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는가? 한반도를 침략한 중국에게 일차적으로 통일이 저해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그 하부 차원에서는 한국전쟁 첫해인 1950년 10월에만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수뇌부가 25만 5,000명이라는 대군을 극비리에 북한 땅에 잠입시킨 전략적, 외교적 요인의 일부를 미국 지도부가 제공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 눈을 감아선 안 된다. 역사를 볼 때 음과 양을 동시에 보는 눈이 필요하다. 功과 過를 다 놓치지 않는 치밀한 눈과 양심이 필요하다.
당시 중국의 총리이자 외교부장이었던 저우언라이는 공개적으로 한국군만 38도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지만, 만약 미군이 38도선을 넘어올 경우 반드시 군대를 보내 개입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워싱턴은 이 경고를 그냥 ‘허풍’, ‘공갈’이라고 보고 무시해버렸다. 워싱턴의 미국 수뇌부에서 북진통일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대세를 이루자 미국은 전략을 편의적으로 운용해 중국의 경고를 무시했던 것이다.
자나 깨나 북진통일을 외쳐온 이승만의 한국정부에게도 중국의 경고는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당시 미군의 북진결정이 없었다고 해서 중국이 파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오늘날 중국이 자국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한 마디로 일축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이 대군을 파병해 코앞에 있던 남북통일을 가로 막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사물과 역사를 균형감 있게 보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는 외눈박이의 취사선택적 시각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의 원인도 같이 봐야한다.
다시 송시열로 되돌아가면, 그는 일부 고위층 한국인이 주변 강대국들에게 할 말 제대로 하지 못하고 미리 알아서 기는 사대사상 그리고 그로 인한 보수화의 주춧돌(定礎)을 놓은 수구꼴통의 원조격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암이 뿌리고, 그의 사상적 추종자와 정치적 붕당들이 계승한 사대주의와 그 의식은 조선의 정치적 명분이자 정치권력의 정통성으로 기능하면서 그 후 우리역사에 깊고도 넓은 파장을 드리웠다. 그 결과는 전국토가 유린되고 수십만 명이 죽거나 적국에 끌려간 전대미문의 국난을 당하고도 지도층의 반성은커녕 300년 가까이 끈질기게 지속된 당쟁이었다.
구한말 일본이 한국 사대부나 지식인들에게 “일본과 대한제국이 대등한 입장에 서서 합방하자”고 회유한 것이 먹혀 들어가 결국 나라를 내주게 된 것은 천추에 씻지 못할 수치였다. 당시 일본의 어떤 학자는 합방하면 새 나라의 국호를 ‘大東’으로 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일진회로 대표되는 일부 매국노들은 일본의 이러한 농간에 철저하게 속은 나머지 고종 정권 대신 한일 두 나라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이 되면 좀 더 나은 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의식은 부지불식간에 중국, 일본, 미국 등 강대국을 대하는 한국 엘리트들의 의식에 깊이 투영됐다. 그것은 아직도 강고하게 남아 대외 정책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독립주권 국가임에도 일부 고위층 중엔 강대국에 할 말 다 하지 못하고 저자세를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게 단적인 예다. 미국이 북한과 중국을 겨냥한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배치 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사드 배치를 정말로 반대하고자 했다면 논리적으론 한국 국회의원들이 왜 줄지어 사드의 주인인 미국에는 가지 않고 중국을 찾아갔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번지수를 잘못 찾은 사대주의적인 발상과 자세가 아닌가? 또 일본대사관이 해마다 서울 도심 한 복판의 호화 호텔에서 거행해오고 있는 일왕의 생일 기념 축하연과 자위대 창설기념 행사에 서로 뒤질세라 몰려가는 유력인사가 어디 한 둘인가? 두고 보라. 북핵문제에 대한 협조가 필요하다고 해서 계속 지나치게 일본에게 유화적으로 나가면 언젠가 군비를 확장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했던 것처럼 주변국이 또 다시 화를 입을 날이 올 것이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정부차원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외국인들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외교목적의 하나로 삼아오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는 친분을 가장하거나 교류를 명분으로 그들의 이해에 맞게 행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마치 구한말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일본 극우세력이 한국을 침식하기 시작해 우리사회에는 이미 일본의 자금을 지원 받거나 아니면 무턱대고 친일적 언행을 하고 다니는 ‘신친일파’가 부쩍 많아졌다. 중국과 프랑스, 일본의 침략 및 지배, 미국의 침공을 받은 베트남민족은 전국민이 합심해 오늘날 중국이나 미국에게 할 말 다하며 사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대의식이 횡행하고, 그 행위들이 조금도 견제를 받지 않고 버젓이 보란듯이 자행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정말 무엇이 문제인가? 가령, 실리 보다 명분을 우선시하는 경직된 사고, 흑백 논리, 견고한 주체의식의 결여는 어디서 왔으며, 강대국에 필요 이상으로 기대는 사대의식과 사대주의가 어디서 비롯됐는가 말이다. 문제의 근원은 그렇게 만든 과거사 그리고 사악한 기득권층의 창백한 영혼, 국가 지도층의 소아적 당리당략과 정쟁에 있다. 친중이든, 친일이든, 친러든, 친미든, 송시열은 오늘날도 걷히지 않고 있는 상층 일부 한국인의 사대주의의 남상(濫觴)으로서 그 비조였다.
국운이 흔들리고 있는 나라를 언제까지 그들의 아류들에게 맡겨둘 순 없다. 일반시민들만이라도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한다. 시민들은 구한말, 더 멀리는 우암의 아류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정당하지도 않고 과도한 부귀영화를 누려오면서 반세기 이상 여야 정치인, 고위 행정관료, 법조계, 언론 등 소위 잘 난 자들끼리 협력해 부를 나눠 가지는 이른바 ‘엘리트 카르텔체제’를 타파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엔 진정한 의미의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없다! 그들 대부분은 단지 탐욕으로 가득한 정치꾼들일 뿐이다. 우암이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듯이 말이다.
2017. 6. 27. 09:07
구파발에서
雲靜
위 글은『호미예술』, 제29집(2017년 10월)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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