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한국전쟁

한국전쟁 초기 북진에 패퇴한 김일성의 후퇴와 대응

雲靜, 仰天 2018. 6. 26. 08:14

한국전쟁 초기 북진에 패퇴한 김일성의 후퇴와 대응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한국전쟁 발발 제68돌이다. 지금까지 한국전쟁과 관련된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지만 1950년 9월말 한국군과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북진에 밀려 퇴각한 김일성의 행적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부산 교두보에서 개시한 유엔군의 전격적인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이 괴멸되고 서울 수복이 임박함에 따라 김일성이 급히 이북으로 올라간 9월말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평양 함락 전 극비리에 평양을 빠져나간 10월 13일까지 약 2주간은 전쟁의 성격이 전환되는 중대한 시점이었다. 이 시기 김일성은 과연 어떻게 도피를 했고,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9월 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이 탈환되고 서울 수복 이틀 전 긴급히 소집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김일성은 박헌영, 김두봉 등 당내 주요 지도자들이 대부분 중국에 군대파병을 요청하자는 의견에 밀려 하는 수없이 중국지도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전쟁초기부터 북한에 군대를 파병할 의향을 표시한 것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다가 방침을 바꾼 것이다.

 

그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중국군이 북한으로 들어올 때까지 38도선을 넘어 북한으로 도주해오는 패잔병의 수습 및 재편성, 교육훈련, 방어준비 등 자유진영의 북진에 대비한 지연전 준비에 들어갔다. 남쪽에서 퇴각하기 시작한 북한인민군 패잔부대들은 제각기 미 공군의 폭격으로 교량과 역사들이 파괴돼 철도가 마비되고 수송차량 마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느리게 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또 중국 둥베이 지역에서 급히 새로 편성된 부대들도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진남포, 해주, 원산, 청진을 방어하기 위해 편성된 혼성부대들도 훈련용 무기뿐이었다.

 

서울이 완전히 탈환되자 당황한 김일성은 10월 5일 전까지 38도선 이북 지역에 방어선 구축을 완료하기 위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취했다. 이 시기 북한지도부에게 전황은 개전 이래 최악으로 치달았다.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때문에 “당혹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보였다.

 

한국군의 북진 개시 소식과 맥아더의 항복권고 통첩이 10월 1일 같은 날 동시에 전해지자 다급해진 김일성은 먼저 방송연설로 전체 북한군에게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다 할 때까지 용감하게 싸워 북한지역을 사수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후방 주민들에게는 전방에 대한 보급 보장과 북한군의 철수시 “반드시 모든 물자와 일체의 철도 운수기자재를 옮겨가도록 해 적에게 한 대의 기차, 한 대의 자동차, 한 톨의 양식도 남겨주지 말 것”을 지시했다.

 

김일성은 10월 1일 밤늦은 시각에 북한 주재 중국대사 니즈량과 정무참찬 차이청원을 초치해 “맥아더가 날더러 손들라고 하는데 우리는 원래 그렇게 하는 습관이 없습네다”라고 하면서 중국수뇌부가 압록강 대안에 집결시켜 놓은 중국군 제13병단을 신속하게 파견해주길 요청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회답을 받기 전에 이미 북․중 외교라인을 통해 베이징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군대파병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그 뒤로도 맥아더의 항복권고 방송을 두 차례나 청취했지만 일체 답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항복권고란 바로 무조건 투항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맥아더의 항복권고를 비웃기까지 했던 김일성은 애초부터 항복할 마음이 없었다.

 

김일성이 38도선상의 횡적 방어를 위한 북한군 부대를 배치한 방어선은 10월 10일 서부전선, 중․동부전선, 동해안의 동부전선 등 세 경로로 나뉘어 전개하기 시작한 유엔군의 북진에 무너졌다. 이어서 김일성은 평양방어를 위해 38도선과 평양 사이에 평양을 포함해 총 4개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1선은 38도선을 따라 구축된 것이며, 약 500m의 종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2선은 제1선으로부터 후방으로 약 5㎞ 지점에 구축돼 있었고, 제3선은 이 보다 좀 더 후방에 있는 주요 지형지물을 연결하는 선에 구축돼 있었다. 이 방어선은 동쪽의 방어에 치중한 게 아니라 남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었다. 마지막 제4선은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평양 내에 배치된 1만 명 전후의 병력이었다.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이 편제 인원의 20% 선에 머물러 있었고, 전투를 벌이던 보병연대들은 100~120명뿐이었음을 감안하면, 평양방어에 투입된 전체 병력 수는 정상적인 편제의 1~2개 사단 병력 정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신편 사단에는 전투에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와 무기도 보급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포병과 전차는 편제돼 있지도 않았다.

 

이런 와중에 김일성은 북한 전체 주민들을 대상으로 10월 10일과 11일 이틀 연속으로 평양의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국민 호소 방송을 내보냈다. 그는 방송에서 “미국 강도 놈들"이 무력침공을 계속하고 있어 "부득이 전략적인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인민군 장병들”은 “조국의 촌토를 사수하며 우리의 도시와 농촌을 수호하기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쳐 용감하게 싸워 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는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에 이날 김일성은 대외 방송 때의 태연한 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었다고 적었다.

 

결국 김일성은 평양방어도 여의치 않음을 깨닫고 평양방어를 박헌영에게 맡기고 자신은 유엔군의 북진개시 선언 이틀 전 평양철수를 결정하고 평양을 빠져나갔다. 평양 후방의 덕천 지역으로 이동한 김일성은 평양을 물러난 뒤 북한군 임시지휘소를 개설해놓은 덕천에서 각종 지휘를 이끌었다.

 

박헌영에게는 지연작전의 일환으로 북한군에게 평양방어 시간을 좀 더 끌도록 할 목적으로 평양 시내 곳곳에 대량의 지뢰를 매설하고, 각처에 모래주머니와 철조망 등으로 장애물을 쌓았으며, 고지에 견고한 참호를 만들어 놓는 등 저항을 시도했다. 그리고 의용군과 심지어 고령자들까지 강제로 끌고 와 저항하게 했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마침내 평양의 정부 관원이든, 외교관이든, 민간인이든 가릴 것 없이 저마다 평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당, 정의 주요 기관, 주요 학교와 단체들도 김일성이 미리 10월 9일에 임시 “수도”로 정해 놓은 강계로 철수했고, 각국 외교사절들은 만포로 피하도록 조치됐다. 얼마 후 10월 21일 북한은 방송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공표하면서 강계가 아니라 신의주로 옮겼다고 위장하고 은폐했다.

 

북한군의 평양수비대도 대략 10월 17일 전후부터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북한군의 평양방어사령부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입성을 눈앞에 둔 시점 1개 연대만 평양에 남긴 채 사리원과 철원 및 평강 방면에서 후퇴한 병력과 합류한 후 그 주력을 청천강 쪽으로 철수시켰다. 10월 18일 평양상공의 정찰기에서 내려다 본 AP통신 기자는 이때를 이렇게 묘사했다.

 

“포위된 북한의 수도는 공중으로부터는 죽음이 지배하는 텅 빈 성벽"으로 보였으며, "도시가 아닌 듯”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갑작스런 페스트에서 도망가버린 죽은 자들의 어두운 커뮤니티”였다고 했다. 10월 19일, 한국군 제1사단을 선봉으로 한 자유진영군은 5개 사단이 평양을 남동쪽에서 공격해 들어가 피아 간의 공방전 끝에 평양 전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하지만 자유진영군은 김일성의 포획과 북한군 주력의 완전 소멸이라는 최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북한군 주력이 청천강을 향해 후퇴할 이 시기, 김일성은 언제 평양을 빠져 나갔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했을까?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요구한 덕천, 영원 산악지대에서의 전략적 방어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때는 이미 평양을 빠져나간 지 오래된 시점이었다.

 

소련 군사고문의 보고서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10월 13일 11시 현재까지는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 그가 평양을 빠져나간 시점은 10월 13일 밤이었거나 혹은 14일 새벽이 유력해 보인다. 김일성은 10월 13일 밤, 혹은 14일 새벽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는 우중을 "SHC"라는 소련제 고급 승용차로 순천을 거쳐 덕천으로 가서 그곳에서 북한군의 임시지휘소를 열어 전쟁지도를 계속하면서 덕천의 지세를 답사했다. 마오쩌둥의 전략방침을 실제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 지세를 답사하면서 연구한 것이었다.

 

희천에서 한국군 제7연대에 투항한 김일성의 호위군관의 진술에 따르면, 김일성이 덕천에서 개천으로 가서 청천강을 건너 도주하던 중 희천에 이르렀을 때 승용차길이 막혀 반공애국주민들의 봉기를 만났다고 한다. 이 진술에 따르면, 그는 민중을 피해 적유령산맥으로 숨어들어 해발 1,500m의 개고개, 1,900m의 승적산을 넘어 적유령 산맥의 분지에 있는 전천이라는 마을을 거쳐 쌍방동 등 산골마을만 골라서 숨어 헤맸다고 한다.

 

이 증언은 김일성이 혼자서 숨어서 다닌 것처럼 돼 있다. 김일성은 원래 전쟁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속한 최고사령부의 호위를 그가 평양에 세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에게 맡겼고, 이 조직을 ‘친위중대’라고 불렀는데 이때는 그 호위병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의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과거 학계에서 북한군은 평양에서 후퇴한 뒤로 조직적인 저항도 없었고, 방어진지도 편성하지 않았으며, "일방적으로 철수만 하였다"고 한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밝힌 바 있다. 이 시기 김일성은 도피 중에 있었지만 자유진영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북한군의 퇴각을 촉진하기 위해 지연전을 수행시키면서 중국군의 북한 진입에 대한 준비 그리고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와도 만나 작전 및 중북양군의 협력에 대해 협의했다. 그리고 그는 방송연설을 통해 전체 북한군에게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다 할 때까지 용감하게 싸워 북한지역을 사수하라는 호소를 되풀이 하면서 전군에 더 이상 “퇴각할 곳이 없다”면서 진지를 사수하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이 펑더화이와 만나 작전 토의를 하고 있다.

 

또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들의 군내 “정치교양사업”을 강화하고, 만약 명령 없이 무기를 버리고 함부로 전투에서 이탈하는 자들이 있다면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또한 전선 혹은 전장에서 도주하는 자와 유언비어 살포자를 색출하기 위해 각 군단과 사단 지휘관들에게 "독전대"를 조직해 후방 방어부대들과 혼성부대들 속에 투입시키도록 지시했다.

 

김일성은 평양방어가 실패한 뒤에도 계속해서 자유진영군의 북진을 청천강 이남 지역에서 축차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한 첫 번째 방어지역으로 선정한 숙천 남방 13㎞ 지점의 영유-어파리 선에서 평양을 빠져나온 병력을 수습해 방어전을 치렀다. 그러나 결과는 미군의 공수작전으로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당시 영유-어파리 지역은 이 두 곳을 횡으로 잇는 고지군으로 이뤄져 있어 일종의 천연방어선으로서 평양 이북-청천강 이남의 서쪽 지역들 중 방어하기에 가장 유리한 곳이었음에도 북한인민군은 미군의 공수작전에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던 것이다.

 

1950년 11월 중국군의 제2차 전역이 진행되자 김일성은 후방방어 강화를 위해 전선사령부를 설립하고 신규예비부대와 해안방어부대를 편성하는 등 전인민적 차원에서 방어체제를 구축했으며, 방공 및 야간수송대책 강화에 주력했다. 이 시기 김일성 자신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 공군의 우박 같은 폭격을 피해 미 공군 조종사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은 평안북도 고산진(현 고산)이라는 조그마한 인적 드문 곳에 숨어서 전쟁을 지도했다.

 

김일성이 이곳까지 어느 경로를 밟아서 갔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대체로 창성▶ 유평▶ 창성▶고산진으로 갔을 것이라는 필자의 주장 그리고 평양을 떠나 덕천▶ 개천▶ 청천강▶ 희천▶적유령산맥▶ 해발 1,500m의 개고개▶1,900m의 승적산을 넘어 적유령 산맥의 분지에 있는 전천▶ 쌍방동 등 산골마을로만 다니면서 고산진으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이 고산진이라는 점에 대해선 의심할 바 없다.

 

당시 고산진은 만포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서남쪽으로 약 20여 ㎞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만포와 위원의 중간 지점에 있고, 강을 건너면 바로 중국의 지안(輯安)이 나온다. 이곳은 압록강 중에서 가장 강폭이 좁고 수십도 얕아서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이었다. 중국으로 피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최악의 경우 김일성은 여차하면 이곳에서 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려는 의도였다. 고산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김일성이 왜 강폭이 좁고 강물이 개울처럼 흐르는 이곳을 피신처이자 극비 임시지휘소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 김일성의 임시지휘소는 압록강에 면해 있던 평안북도 고산진에 있었다. 사진은 중국 쪽에서 바라본 고산진 전경이다. 사진 중간의 언덕 위에 보이는 낮은 기와집이 김일성이 거처하면서 북한군을 지휘한 임시지휘소였다. 전면 좌측에 물로 보이는 곳이 압록강 상류다. 사진출처 : 서상문,『6·25전쟁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6년), 하권, 585쪽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6·25전쟁』(2010년), 제7권, 117쪽.
김일성은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북한군을 지휘했다.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폭도 크지 않고 수심도 깊지 않아서 중국으로 피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김일성은 한미군이 압록강 어귀까지 진격해오는 등 상황이 여차하면 이곳에서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