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한국전쟁

6.25전쟁 최대 미스터리, 채병덕 소장의 죽음

雲靜, 仰天 2021. 1. 4. 18:39

6.25전쟁 최대 미스터리, 채병덕 소장의 죽음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총참모장(당시 직위명칭) 채병덕 소장의 죽음은 한국전쟁의 10대 의문, 10대 미스테리 중의 하나다. 일본육사 출신으로 광복 후 군문에 들어와서 전투병과가 아닌 영관급 병기장교에 불과한 그를 국군 최고 책임자로 발탁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당시에도 채병덕은 북한에 매수된 북한군 첩자였다는 소문들이 나돌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해서 전쟁 중에, 그것도 전쟁 초기에 죽게 됐을까? 타살일까? 자살일까? 이 의문들을 일정 부분 해소해 주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 글쓴이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예비역 준장 박경석 장군이다. 박 장군의 동의를 얻어 해당 글을 올린다. 원문은 박 장군의 개인 카페(인터넷 다음의『박경석 서재』)에서 볼 수 있다.―2021. 1. 4. 16:14, 雲靜 編註

 

한국전쟁 발발시 그는 한국군의 지휘를 총괄한 책임을 맡은 총참모장(당시 직함)이었다.

아래 박경석 장군이 남긴 기록의 근거자료는 미군이 남긴 전사기록들, 박경석 장군이 과거 군 내 원로들이 많이 생존하고 있던 시절 직접 그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박경석 시대 에세이-정의와 불의, 그 기로의 선택

 

제3장 5 채병덕 소장의 죽음 [1] [2] [3] [4]

 
[1] 나의 X 파일 1
 
2005년 6월호 군사저널 한국전쟁 특집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풀리지 않는 10대 미스터리를 발표했다.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진실 규명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학계의 찬사와 격려가 있었다.
 
한편, 일각에서 부정적 측면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몇몇 사람이 전화로 폭언을 해왔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폭로’라는 어휘에 대해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그 이유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진실 규명은 폭로가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으로 군사저널 2006년 1월호에서 나의 X 파일 Ⅱ 『국군포로는 없다』를 발표하자 극우 계통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빨갱이’라고 몰아대면서 죽이겠다고 협박해 왔다. 나는 그에게 진실을 밝힌 것뿐이라고 말하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순국(殉國)이 있고 종교를 위해 순교(殉敎) 그리고 지아비를 위해 순절(殉節)이 있었지만 바른 글을 쓰다 죽은 순필(殉筆)이 없다고 하면서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니 협박 전화를 끊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많은 과오가 베일에 가려진 채 근대사를 얼버무렸다. 잘못을 덮어버리는 것이 곧 미덕인 양 흑백을 가리는 일들에 화살을 쏘아댔다.
 
정부가 과거사 정리에 대한 일을 시작하자 보수층 일각에서는 빗발치는 비난을 퍼부었다. 물론 정부의 과거사 규명의 방향이 모두 옳다고 보지 않는다. 더러는 엉뚱한 것도 있었고 분노를 자아내게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나는 그 내용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왜곡된 과거사가 너무 많았다고 보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선과 악, 긍정과 부정, 선행과 실책 등을 잘 가려 역사에 바르게 기술되어야 우리나라가 발전 지향적인 새 세기를 잘 헤쳐나 갈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잣대만을 가지고 조금만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좌익이다.’, ‘빨갱이다.’하고 악담을 하는 일부 극우 보수층 주장이 지나치다고 나는 보고 있다.
 
‘나의 X 파일 3’은 장장 반세기 더욱이 오늘날까지도 왜곡되고 있는 한국전쟁사 일부를 바로잡게 하기 위해 발표하게 되었다.
 
6.25전쟁 전후의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엉뚱하게 쓰여 있음을 바로 잡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2002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채병덕 장군’은 채병덕 소장의 실책과 미스터리를 조목조목 해명하기 위한 문맥으로 되어 있어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을 산 바 있다.
애당초 그 책의 발간 동기부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채병덕 소장의 최측근이었던 손희선 예비역 소장이 옛 직속상관의 명예회복을 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당시 국방장관 김동신을 접촉 후에 성사시켰었다. 그의 배후에는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는 백선엽 장군이 있다. 그 책의 편집 직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측에서 출간에 대한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필자도 백선엽 장군이 주관하는 회의에 손희선 예비역 소장과 함께 참석하였다.
 
당시 필자는 “옛 직속상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명예회복 차원에서 발행할 모양인데 그 의리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바른 역사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군사편찬연구소 측에서는 “이미 김동신 장관이 결재가 나서 공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회의 소집 목적이 무엇인가”하고 반문하니 당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더욱이 문제는 채병덕 소장의 죽음이 결코 명예롭지 못한데도 당사자들과 연관성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쇠고개에 ‘채병덕 장군 전사비’를 세워 그 일대를 공원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필자는 옛 상관에 대한 진실 규명으로 인해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칭찬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른 역사를 남겨야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필자의 ‘X파일 3’을 밝히기로 하였다.
 
[2] 영남편성관구사령관
 
6.25한국전쟁 초기의 혼란상과 그 전후에 있었던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실책과 과오는 이형근 장군의 회고록 ‘軍番 1번의 외길 人生’의 10대 미스터리와 8명의 선배 장성의 증언을 중심으로 군사평론가협회 군사논단에 발표한 바 있으므로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 다만 북한 인민군이 모든 전선에서 파죽지세로 국군과 미군을 밀어붙이고 있을 때부터 기술하겠다.
 
김일성이 ‘대전만 점령하면 국군과 미군이 항복한다.’고 장담했지만 그게 실현되지 않자 ‘'대구를 빼앗아야 결판이 난다’라는 말로 바꾸어 각 전선에서 피나는 독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국군은 미군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호남을 상실하면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내용인즉 6.25 초전 실패로 좌천되어 영남편성관구사령관이라는 희한한 직책명으로 전직 총참모장답지 않게 소수 측근만을 데리고 전선 후방을 떠돌아다니던 채병덕 소장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군의 고위층은 물론 말단 사병에 이르기까지 채 소장의 죽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채병덕 소장은 전쟁 초기의 실패 책임을 지고 해임되자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면서 늘 실의에 차 있었다고 한다. 그의 측근들은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었고 보국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는데 그 점 사실로 믿고 싶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7월 24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을 불러 영남편성관구사령관이라는 보직을 주었다. 그러나 그 보직은 급조된 가공의 명칭일 뿐 집무실은 물론 단 한 명의 정식 부하 장병이 없는 문책성 직명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경남 하동을 언급하면서 그곳은 꼭 지켜야 될 곳이라고 말 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아니고 하동으로 가게 된 사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지어냈다는 말이 유력하다.
 
새로운 보직이 주어지자 채 소장은 다음날 아침에 정래혁 중령을 대동하고 하동 쪽으로 찝차를 달렸다. 그러나 그 지역에 도착하자 채 소장은 크게 실망했다.
 
하동읍과 그 일대는 글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다. 더욱이 하동을 방어할 부대는 물론 병력 또한 없었다. 전선에서 패해 산발적으로 후퇴하는 낙오병이 있을 뿐이었다.
 
채 소장이 하동읍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한숨을 크게 쉬면서 망연히 주변을 살피고 있자 보다 못한 정래혁 중령은 “제가 이곳에 남아 정보를 수집하면서 밀려 내려오는 부대를 수습하여 방어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채 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 중령을 남긴 채 곧바로 찝차로 진주를 향했다.
 
채 소장은 그 길로 진주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19보병연대를 찾아가서 연대장 무어 대령을 만났다. 요란스러운 복장에 왕별 두 개를 단 뚱뚱한 한국군 장성이 나타나자 무어 대령은 당황하였다.
 
“나 한국군 채병덕장군이요”
“네? 그렇다면 총참모장으로 계시던 채 장군이십니까?”
“그렇소. 당신한테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나는 한국군의 영남지역 책임자이기 때문에 미군과 협조하러 왔소.“
 
무어 대령은 그 기세에 눌려 자기의 임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한국군과 협조하겠다고 대답했다. 비록 전쟁 초기의 패전 책임을 지고 그 직에서 떠났다고는 하나 일국의 육군을 책임졌던 장군의 협조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채 소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적은 호남지역을 석권하고 동쪽으로 계속 공격해오고 있어요. 진주에서 적을 기다린다면 대구 부산의 허리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어요. 따라서 하동까지 전진하여 적을 막는다면 적의 위협을 상당기간 저지할 수 있다고 봐요.”
 
무어 대령은 지도를 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좋습니다. 장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고맙소. 나는 공격대대를 따라 고문 역할을 하며 돕겠소.”
 
일국의 전직 육군총참모장이 연대의 공격제대인 보병대대의 고문관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까지의 사실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긍정과 부정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대목이다. 채 소장의 충정을 이해한다는 쪽과 해프닝이며 난센스라는 해석이다.
 
채병덕 소장에게는 부대와 병력이 없었다. 다만 휘하에는 정래혁 중령, 박현수 중령, 이상국 소령, 김영혁 대위뿐이었다.
 
며칠간 줄곧 내린 비로 대부분의 하천은 범람하여 차량기동은 물론 항공관측이 불가능했다.
7월 26일 어두워질 무렵 화개장 쪽으로부터 패전한 낙오병이 밀려오고 있었다. 중대 병력을 넘지 못했다.
 
[3] 채병덕 소장의 죽음과 미군 대대의 괴멸
 
정래혁 중령은 낙오병을 수습하여 1개 중대 병력이 되자 하동교의 동쪽 강변에 배치하고 진주 쪽에서 지원부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산병호에서 제각기 “적이다”하고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사격명령을 내렸지만 총을 버려서 안 가진 자가 가진 자보다 훨씬 많았으므로 사격의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적은 사격이 시원찮음을 알아차리고 단숨에 돌격을 감행하자 순식간에 사방에 흩어져 달아나 벼렸다.
 
이렇게 하여 하동을 적에게 허무하게 내 준 것도 모르고 미 제19보병연대에 배속된 미 제 29보병연대 제3대대를 하동을 향해 진출시켰다.
 
대대장 못트(Horald W. Mott) 중령은 7월 26일 새벽 하동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폭우가 쏟아져 진주-원전 간의 도로는 물이 넘쳐 통행이 어려워졌다.
 
대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쩔쩔매고 있을 때 날이 새버렸다. 대대가 도로상의 많은 도랑에 차량이 빠지는 등 고생을 하고 있을 때 하동에서 패하여 오고 있는 정래혁 중령의 패잔병을 만났다. 대대는 이들로부터 하동이 적 수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동방면의 적정을 파악한 대대장 못트 중령은 부대대장 라이블 소령 및 대대 참모들과 협의한 결과 대대 단독으로 하동을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연대장 무어 대령에게 하동공격 중지와 현지에서의 방어를 건의하려 하였으나 연대장 무어 대령은 연대 참모와 숙의 끝에
 
“대대단위의 방어가 얼마나 취약한가는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알 수 있다. 반면에 공격은 미군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며 병사의 사기를 고무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채병덕 장군과 약속한 바 있으므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하동을 점령한 적은 자만에 취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곳에 일격을 가하여 콧대를 꺾어 놓겠다.”라고 말하면서 하동공격의 강행을 명령했다. 그러나 바로 날이 어두워져 공격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7월 27일 오랜만에 비가 그쳤다. 못트 중령이 지휘하는 미 제29보병연대 제3대대는 야영지에서 출발하여 하동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대대가 한 시간 남짓 행군을 하여 선두 L중대가 하동의 쇠고개에 이르렀을 때 중대장 샤라 대위는 적병 10여 명이 앞쪽 능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중화기 소대장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2문의 75mm 무반동총으로 즉각 사격을 가했다.
 
중대장은 적이 쇠고개를 먼저 점령하면 하동으로 이르는 통로가 봉쇄될 것으로 판단하고 중대병력을 고갯마루로 전진케 하여 통로의 양쪽을 점령케 하였다.
 
채병덕 소장과 동행중인 대대장 못트 중령은 중대장 샤라 대위의 보고를 받고 고갯마루의 양쪽을 확보하면서 곧 있을 항공지원과 함께 하동으로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대대장 못트 중령에 이어 대대참모들이 쇠고개에 올랐고 뒤이어 채병덕 소장이 박현수 중령, 이상국 대위를 대동하고 고개에 오르고 있었다.
 
고개에 오르자 일행은 쌍안경으로 적측을 관측하고 있었다. 전방 181고지에는 적병의 움직임이 관측되었고 곧 이어 K 중대를 투입시켰다.
 
이때 국군과 인민군의 복장이 비슷해서 여간하여 식별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L중대장 샤라 대위는 “가깝게 적이 접근할 때까지 사격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그 때 다가오는 무리가 국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한 무리가 다가오자 채병덕 소장은 선두의 병사에게 “너희들은 적이냐 아군이냐”고 소리쳤다. 그 때 거리는 약 5미터.
 
그 무리는 놀라면서 즉각 산개하자 L중대장 샤라 대위는 사격명령을 내렸다.
 
이때 그 무리도 사격을 가했다. 적의 초탄이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채병덕 소장의 두부를 관통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근처 대대장 못트 중령 일행 또한 전상을 입었다. 전상을 입은 대대장 못트 중령은 더 이상 적을 막아낼 기력을 상실한 채 전장을 이탈하면서 철수를 명령했다.
 
적의 공격은 더 맹렬히 계속되었다. 기관총 사격을 가하며 철수하는 대대병력과 그 일대에 포위망을 구성하며 협공해 왔다. 대대 장병은 방향을 잃은 채 풍덩 풍덩 하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때가 장마철이라 물이 범람하고 있을 때여서 익사자가 속출하였다.
 
7월 28일. 조사에 의하면 못트 대대의 피해는 전사 2명. 전상 52명. 행방불명 3백 49명이었다.
 
이 전투는 북한 공산군이 계획적으로 고개를 개방해놓고 미군을 유인, 일격에 미군 대대를 괴멸시킨 전투로 유명하며 미군은 이 비극을 ‘하동의 함정’이라고 부르면서 교훈으로 삼고 있다.
 
그 후 9월 말의 반격을 통하여 미 제25보병사단이 하동을 탈환하였을 때 유기된 시체 3백13구를 발견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하천변에 방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적의 박격포탄과 기관총 사격을 피해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하동의 비극은 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무어대령이 한국군 채 소장의 부탁으로 하동을 공격하다 대대병력이 괴멸되었으므로 북한 공산군의 함정뿐만 아니라 채병덕의 함정이 아니었나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어째서 전직 총참모장이며 육군소장이었던 그가 겨우 1개 대대병력의 미군 고문을 떠맡았는지 알 수 없다. 이 의문에 대해 당시 한 때 채병덕 소장을 수행했던 정래혁 장군은 훗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채병덕 장군이 왜 미군 1개 대대의 안내역을 맡았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하동은 적이 이미 점령했다는 것을 내가 말해 주어 그는 알고 있었는데도 쇠고개 마루턱에 서 있다가 그들의 최초 사격의 총탄으로 두부를 관통당하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가 너무나 부주의 한 탓이며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죽어야 할 곳을 찾고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채병덕 소장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일일이 기록할 수 없다. 국군이 초전의 책임을 물어 사살했다는 설도 파다했다, 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불확실한 내용으로 그를 욕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채 소장의 죽음으로 북한 공산당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전투력이 현저히 저하되고 있는 상황의 인민군 사단들에게 이 사실을 확대 보도함으로써 마치 국군이 전멸한 것처럼 인식케하여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 공산군은 통일이 눈앞에 전개되었다는 희망으로 죽음을 다하여 남진과 동진을 계속하였다.
 
한편, 국군에는 더 희한한 소문이 돌아 부대의 사기면에서 한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채병덕 소장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그 원인(遠因)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있었다. 일본군 병기 소령 출신인 그를 총참모장으로 두 번씩이나 앉혔다는 자체가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38선 상에서 이북과 명태교역을 하다 파면된 그를 다시 총장으로 기용했을 때부터 세간에서는 별별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적재적소(適材適所)란 적합한 직위에 맞는 인재를 써야하는 것이 인사원칙인데 육군의 병기감 재목을 총참모장직에 두 번씩이나 임명한 자체로부터 문제는 배태되어 있었다.
 
[4] 하동의 비극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 보병 대대의 괴멸은 더러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산 죽미령 고개에서의 스미스 대대가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미 제24사단 제21보병연대의 제1대대의 괴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스미스 대대는 괴멸 직후 후퇴, 병력이 수습되어 상당 수준의 전투력이 회복되어 7월 11일 조치원 개미고개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하동 동산리 쇠고개에서의 못트 대대의 괴멸은 더욱 처참한 괴멸로 세계 군사학계의 전사에는 ‘하동의 함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못트 대대의 하동 참패가 한국전쟁시 초기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의 권유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군의 최대 치욕으로 남아있는 명백한 전사(戰史)이다.
 
한 나라의 총장 경력의 장군이 미군 대대의 고문 역할을 맡아가며 줄줄 따라다녔다는 사실은 비극이라기보다 희극에 가깝다. 더구나 채병덕을 가까운 거리에서 두부에 관통상을 입힌 국군 복장의 괴한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 그 괴한이 초전의 국군 괴멸에 이르게 한 채병덕을 응징했다는 것이다. 왜 채병덕만 사살하고 사라졌느냐는 의문이다. 그 후 연결된 미군의 참담한 죽음은 채병덕의 죽음과 시간상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런 희극의 주인공이 죽은 장소에 ‘고 채병덕 장군 전사비’를 세워 그를 영웅으로 둔갑시킨 사건은 역사의 무지에서 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史實)이다. 국군의 열혈 전사 의거를 감추기 위해 백선엽이 주선해 전사비를 세웠다고 항변하는 참전 용사가 많았다.
 
바로 그 자리에 채병덕 전사비 대신 채병덕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던 전사자와 행방불명자 349명(유기 시체 회수 313구)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비를 세웠어야 했다. 분명한 진실은 채병덕의 죽음은 전사가 아니라 횡사라는 사실이다.
 
현재는 채병덕 전사비를 피살 장소에서 하동호국공원에 옮겼다고 한다. 분명한 패장의 추앙은 흔치 않은 경우라 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