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제3차 공세와 아군의 1․4후퇴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12월 5일, 경무대가 떠들썩했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커든 돌아 가시요!” “우리는 당신네들 보고 남아 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우리는 여기 남아서 싸우겠소, 죽기 밖에 더 하리요!” 자신을 예방해, 중공군의 공격으로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면서 피난을 권유한 미 제8군 사령관 워크 장군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소리친 것이다. 이로부터 꼭 한 달 뒤 정부는 또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된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한미군의 북상이 저지되고, 김일성정권이 기사회생된 것에 흥분한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축전을 보내 “쇠뿔은 단 김에 빼야 한다”면서 미군을 계속 추격하도록 종용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강공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던데다 미국과의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마련하고자 한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제3차 전역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극도로 지친 병력으로는 미군을 추격할만한 형편이 못 된다고 판단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군을 휴식과 부대정비에 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보급품을 확보하면서 2~3개월 간의 충분한 휴식과 부대정비를 마친 후 이듬해 봄쯤 38도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부대정비와 휴식은 서울을 점령한 뒤 그 곳에서 하고 즉각 공격을 재개하라고 했다. 12월 31일, 팽덕회는 중북연합군 9개 군단(중공군 제38․ 제39․ 제40․ 제42․ 제50․ 제66군단, 북한군 제1․제2․ 제5군단) 30여만 명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의 제3차 전역은 이렇게 시작됐다.
중공군은 아군의 전투력을 파괴하기보다 서울 점령 후 37도선까지 수중에 넣는 것이 목표였다. 서부전선의 주공 5개 군단과 중부전선의 조공 4개 군단이 문산 우측의 한국군 제1사단과 동두천의 한국군 제6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51년 1월 2일, 한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 주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중부전선의 국군 제3사단도 집중공격을 받아 패퇴했다. 서울 동측방의 한국군이 무너지자 서울지역 10여만 명의 아군이 후퇴할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처했다.
이 위기상황을 방치할 경우 아군 주력이 적군에게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포기했다. 그리고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을 잇는 선으로 후퇴시켰다가 1월 3일 다시 수원과 오산을 지나 단숨에 37도선까지 물러나게 한 후 1월 6일 평택-안성 방어선을 형성케 했다.
1월 4일 밤, 서울은 중공군 제39군단 예하 1개 사단, 제50군단과 북한군 제1군단의 손에 손쉽게 떨어졌다. 또 다시 70만 명에 달한 피난민 행렬이 이어졌다. 적군은 1월 7일과 8일 수원과 인천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기동력이 뛰어난 미군을 따라 잡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군수물자를 소진한 중공군은 더 이상 남진하지 않고, 1951년 1월 8일을 기해 대략 37도선에서 추격을 멈췄다. 제3차 전역이 여기서 끝난 것이다.
위 글은 2010년 5월 24일자『朝鮮日報』, A10면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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