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澤東,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감행 예측 : 전력열세 북한군 전의 꺾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서상문(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9월 맥아더원수가 성공시킨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서 한국전쟁의 판도를 일거에 뒤바꾼 몇 가지 중대한 전략적 의의가 있었다.
첫째, 수도 서울수복에 유리한 전투국면을 조성해 인천-서울지역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반면, 북한군의 전의를 상실 혹은 저하시켰다. 둘째, 적의 보급선과 후방 지원로를 차단함으로써 남쪽전선에 고착되어 있던 적의 전투력을 마비상태에 빠뜨렸으며, 결국 북한군이 38도선 이북으로 퇴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셋째, 중국지도부로 하여금 전쟁개입을 위한 사전준비로서 중국군의 한중국경 지역 이동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 촉진제역할을 하기도 했다.
북한군이 이 작전에 대한 방어에 성공했더라면 한국전쟁은 달리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을 비롯한 소련, 중공측의 공산진영은 사전에 이 작전의 낌새를 탐지하고 있었음에도 방어에는 실패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북한은 상륙지로 인천이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보도한 바 있지만 毛澤東은 전쟁발발 직후인 7월초에 이미 ‘적’의 상륙시기와 지점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북경 주재 소련대사 로신이 1950년 7월 2일 周恩來로부터 한반도전황에 관한 중국지도부의 군사정세브리핑을 듣고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문에 따르면, 모택동은 “미국이 일본점령군 12만 명 가운데 약 6만 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다면 부산, 목포, 마산 등의 항구로 상륙한 후 철로를 따라 북진할 수 있다”고 보고 “북한군은 이 항구들을 점령하기 위해 속도를 더 내어 신속히 남쪽으로 진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모택동은 “서울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인천지역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쌓을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미군이 이 곳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륙에 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시점인 6월말 내지 7월 초에 이미 미군의 인천상륙을 예견한 모택동의 선견지명은 그의 풍부한 군사적 상상력에 기인한 직관에 따른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맥아더가 6월말 친히 한강전선을 시찰하면서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반격작전을 구상한 시점부터 7월 7일 반격작전을 위해 본국에 전보를 치고, 또 적의 주의력을 흩뜨리기 위한 기만작전과 실제 북한군을 공격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모택동이 인천상륙작전을 예측한 시점 이후에 진행돼 사전에 정보가 누설됐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밖에 달리 설명할 합당한 해석이 없다.
모택동의 상상력은 김일성은 물론 공산측의 대부였던 스탈린도 따라 갈 수 없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 전 기간동안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와 서방으로부터 입수한 정보 및 첩보를 중국과 북한지도부에 제공해왔지만, 슈티코프가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전혀 사전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이상 그도 인천상륙작전에 관해선 알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중국주재 자국 대사로부터 관련 정보를 접하고 있었다.
모택동이 미군의 인천상륙을 직감한 것은 그가 전쟁이 단기간에 쉽사리 끝나지 않고 장기전으로 돌입할 것으로 판단한 근거가 됐다. 또한 중국군의 수송수단과 이동거리 등을 감안해 전쟁초기부터 중국인민해방군 가운데 정예군 25만 여명의 병력을 압록강 대안으로 이동시키고 9월말까지 군사개입에 필요한 모든 작전준비를 마치도록 한 배경이었다.
동시에 모택동은 인민해방군총참모부 작전실 소속의 작전요원들에게도 여러 차례 “한국전쟁의 전황변화를 주의해서 관찰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雷英夫를 비롯한 작전실의 참모들은 8월 중순 수차례에 걸쳐 난상토론 형식의 정세분석을 가한 결과 “미국은 한국전쟁의 전황을 뒤집으려고 궁리하고 있을 것”이며, “적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매우 크며”,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면 9월 15일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뢰영부는 이 판단을 8월 23일 주은래와 함께 직접 모택동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로 전쟁발발 직후부터 미군의 상륙반격 가능성을 예측해온 모택동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직감을 확신했고, 그 즉시 북한과 소련에 미군의 인천상륙에 관한 중국지도부의 판단을 통보했다. “적”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경우 그것이 지니는 전략적인 이해득실을 분석, 강조하면서 대응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특히 중국군 총참모부, 외교부, 군부, 중공 등의 여러 경로를 통해 실제 상륙작전의 진행상황을 보고받게 되자 모택동은 북한지도부에게 자신의 판단을 전해주기로 하고 주은래―倪志亮(북한 주재 중국대사) 라인을 통해 김일성에게 특사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관련해 이 시기 북한특사의 중국방문은 최소 두 차례 이상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정황을 재구성해보면 김일성이 먼저 내각 부수상 박헌영 일행을 북경으로 보내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파병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한 중국지도부가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한 듯하고, 그러자 그는 모택동의 특사파견 요청에 응해 북한군 부총참모장 겸 정보국장인 이상조를 북경에 급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조의 회고에 따르면, 모택동은 이상조를 통해 미리 8월과 9월 상순 사이 북한지도부에 방어전략을 수립함과 동시에 북한군을 즉각 낙동강전선에서 철수시켜 인천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전에 돌입하도록 대비하라고 최소 두 차례 이상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한다. 북한군이 너무 오랫동안 남쪽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으면 적은 더욱 견고해지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후퇴해 적의 포위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어형태를 흐트러뜨린 뒤 하나하나씩 각개격파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또 먼저 한국군을 집중 공격해 병력을 소멸케 한 후 미군을 격퇴하라고 주문하면서 어떨 때는 공격보다 후퇴가 나을 경우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라는 조언도 했다.
중요한 것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고 즉각 후퇴해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모택동의 메시지가 박헌영 등의 북한측 방문단을 통해 김일성에게 전달됐다는 점이다. 즉 모택동은 이상조를 접견한 자리에서 미군이 해상으로 우회해 북한군의 배후지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예상 가능한 상륙지점으로 세 곳을 꼽았는데, 그 가운데 인천이 포함돼 있었다.
또 직접 지도로 인천을 가리키면서 ‘적’의 상륙이 유력한 곳이라고 강조한 후 한시바삐 김일성에게 이 점을 알리고 미군의 상륙을 저지할 방어책을 마련토록 조언했다. 이상조는 자신이 9월 8일 김일성에게 모택동과의 담화내용을 전하였으나 김일성은 毛의 충고를 건성으로 흘려들었고, 그로부터 1주일 후 모택동이 우려한 미군의 상륙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상조의 회고와 달리 그가 회고한 9월 8일의 보고내용은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 보고였다. 또 김일성은 이상조의 보고보다 10여일 이른 8월 28일에 이미 주중 북한대사 이주연 등의 북중 외교라인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상기 모택동의 충고와 대책을 전해 듣고 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이른바 “반상륙방어명령”을 내리고 방어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또 그는 다음날 29일에는 내무성, 민족보위성, 각도 인민위윈회, 각도 내무부장 연석 협의회를 소집하고 참석자들에게 “지금 적들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동서 해안으로 상륙을 시도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후방 보위’에 튼실을 기할 것과 ‘적’의 상륙저지를 지시했다.
김일성은 특히 자신이 예상한 상륙지역인 서해안의 인천, 초도, 남포, 안주, 철산, 다사도와 동해안의 원산, 함흥, 신포지역의 해안방어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했다. 또 그는 동해안과 서해안지역의 제1선은 북한군이 방어하고 있지만, 이 지역 이외 내무기관이 책임지고 있는 지역과 제2선에 대해서는 기존의 내무원들과 자위대원들로는 해안방어가 불가능하다며 “각 도가 적극적으로 모든 도민을 해안방어에 참여하도록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해안지역에 참호를 파고, 빈틈없는 방공대책의 수립과 자위대원의 조직확충과 무기, 탄약 지급, 주민소개 등의 후방방어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하는 등 나름대로 ‘적’의 상륙에 대비했다.
그렇지만 김일성은 중국지도부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전해 듣기 전인 9월 이전까지는 상륙군의 규모와 상륙지점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대충 동서해안으로 짐작했을 뿐이다. 그가 인천지역 일대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지 않고 대충 예성강과 금강 사이의 해안선방어에 집중한 이유였다. 그가 유엔군의 상륙지와 목적지가 인천―서울지역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상기 9월 8일 이상조가 전해준 중국지도부의 충고를 전해들은 후였다. 이 방어임무를 맡을 부대로 ‘인천방어지구경비사령부’를 창설했고, 이 지역을 크게 3개 지역(금강하구~삽교천, 삽교천 하구~고간리와 부평, 부평~예성강)으로 나눠 방어하도록 했다.
그러나 곧 김일성은 1차로 5개 예비사단을 낙동강전선에 투입한데다 한국군과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기 직전인 9월 13~14일 경에 또 다시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9사단 예하 일부 병력과 서울 주둔 제18사단 마저 낙동강으로 내려 보냄으로써 유엔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지 못하고, 최후의 승부처로 생각한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치중한 돌이킬 수 없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한미 연합군이 인천상륙을 개시한 후에야 ‘적’의 전략적 의도를 알아차린 김일성은 9월 17일 긴급히 조선노동당중앙정치위원회를 소집하고, “인천사수”, “서울사수”를 외치며 황급히 낙동강전선의 북한군을 서울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예비부대 창설 명령에 따라 철원에서 예비부대로 편성된 1개 여단과 사리원에서 편성된 1개 독립연대를 긴급히 경인지역에 투입했다. 낙동강전선으로 남하하던 북한군 제18사단도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천안부근에서 중도에 인천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 사실들로 보아 김일성은 낙동강전선에 대한 총공격에 골몰한 나머지 인천지역방어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거나, 혹은 생각대로 방어가 여의치 못했던 듯하다. 결국 그는 약 1주일 가까이 방어하다가 대략 9월 23일부터 북한군을 전격적으로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의 권고로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서울진격을 저지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사전에 인천-서울지역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중국측의 권고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가 준비를 제대로 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북한군이 안고 있던 병력의 열세, 열악한 무기 장비, 제공권 상실, 후방 군수물자의 보급미비 등으로 인해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막기는 역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게 당시의 객관적인 정세였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위 졸문은『국방저널』, 2008년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국방저널에는「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공산측의 대응」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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