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의 최초 예견자―雷英夫인가? 毛澤東인가?

雲靜, 仰天 2024. 9. 15. 10:09

‘인천상륙작전’의 최초 예견자―雷英夫인가? 毛澤東인가?


한국전쟁 발발 후 毛澤東(1893~1976)은 상상 외로 이미 7월 초에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런 생각을 북한 김일성에게 전달해 미군 상륙에 대비하라고 당부했지만 김일성은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그런데 모택동 사후 한참 뒤에 당시 주은래(1898~1976)의 군사 참모들 중 雷英夫(1921~2005)라는 이가 자신의 회고록을 내면서 자기가 맨 처음으로 인천상륙 작전을 예견해서 주은래와 함께 모택동에게 보고한 것으로 기록해놨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역사를 왜곡한 것이라고 판단한 나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고증한 논문을 중국어로 2000년에 북경의 유력한 학술지에 실었다. 한국학계와 중국학계 등을 포함한 세계의 한국전쟁 연구자들 사이에 최초로 밝힌 논문이었다.

그 뒤 나의 중국어 논문을 보았던지 뇌영부는 자신의 회고록 개정판을 내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모택동이 먼저 인천상륙작전을 예견했었더라고 고쳐 놓았다. 자기 공이라고 내세웠다가 나의 논문이 발표되어 자기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슬쩍 수정한 것이다. 당시 정황을 보면 그가 모택동이 최초 예견자였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즉 공에 눈이 먼 양심불량자였다.

뇌영부, 그는 중국군 소장(한국군의 투 스타에 해당)으로 진급하여 장군으로 퇴역했다.

역사학자의 역할 중엔 누구든지 과거 사실을 왜곡하거나 침소봉대한 것을 연구 고증해서 원래 있었던 사실대로 바로 잡아주거나 진실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다. 나는 역사학자로서 해야 할 바 본분을 다한 셈이다. 그 중국어 논문제목은「關於‘毛澤東預言美軍仁川登陸’的時間考」,『中共黨史資料』, 第73輯(北京 : 2000年3月)이고, 아래에 한글로 번역해서 제목을 바꾸고 자구를 조금 고치는 선에서 가필했다. 직함은 논문 발표시의 직책이고, 논문 본문에는 각주가 있지만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리니까 각주는 사라졌다. 그리고 중국의 SNS상에는 뇌영부의 최초 예견 주장이 한국학자에게 반박돼 진실이 밝혀졌으니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예견한 공은 모택동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글(아래)도 올라와 있다.

https://baijiahao.baidu.com/s?id=1808783938365543672&wfr=spider&for=pc&searchword=%E9%9B%B7%E8%8B%B1%E5%A4%AB%20%E5%BE%90%E7%9B%B8%E6%96%87


‘인천상륙작전’의 최초 예견자―雷英夫인가? 毛澤東인가?

서상문(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국전쟁발발 후,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원수가 성공시킨 유엔군의 인천상륙은 전쟁의 판도를 일거에 뒤바꾼 획기적인 작전이었다. 북한을 비롯한 소련, 중공측의 공산진영에선 사전에 이 작전을 탐지하고 있었을까? 즉 그들은 이와 관련된 사전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을까? 만약 사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면 방어전략은 수립되어 있었으며, 그 대응은 어땠을까?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한 미 수뇌부를 설득하는 자리에서 맥아더는 이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작전을 결행해야 하는 이유를 들면서 “북한군은 인천상륙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허를 찌를 있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또 상륙작전을 실행하는 즈음의 당시 뉴욕타임즈는 “북한으로선 상륙지로 인천이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수 년 전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당시의 관련문헌에 따르면, 중국의 마오쩌뚱(毛澤東)은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초에 이미 상륙시기와 지점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다. 마오는 미군이 머지않아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란 점을 김일성에게 통보하고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토록 주의를 환기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중국학계에서는 인천상륙작전에 관해 최초로 중국의 최고지도부에 보고한 것은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총참모부 작전부 부부장 겸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군사비서로 있었던 레이잉푸(雷英夫)였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있었다. 바꿔 말하면 마오쩌뚱이 레이잉푸 보다 한달 보름 이상 빨리 예측했던 사실은 근 반세기 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지내온 것이다. 마오는 독자적으로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예견하고 있었던 셈이다.

레이잉푸는 훗날 그의 첫 번째 회고록에서 자신이 전쟁발발 후 8월 23일 마오쩌뚱에게 미군이 인천상륙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고, 마오는 레이의 이 판단을 토대로 중공동북변방군에 9월 말 이전까지 군사작전을 수행할 일체의 예비조치를 끝내도록 지시했으며, 동시에 김일성에게도 방어전략의 수립과 진지구축작업에 착수토록 촉구한 바 있었다고 기록했다.

마오쩌뚱과 레이잉푸 양자간에 존재하는 시간차는 두 달도 채 되지 않는다. 또 마오쩌뚱이 두 달 빨리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예측했다고 해서 북한이나 중공의 대응에 실질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닌 듯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점은 역사의 진실규명이라는 학문적 합목적성의 추구라는 점에서 명확히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진실을 규명해냄으로써 한국전쟁을 지속시킨 실질적인 한 축인 마오쩌뚱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마음먹고 중공군 파병을 결심한 것이 어느 시점부터였는가 하는 점을 추론해낼 수 있는 ‘방증적 사실’을 간취할 수도 있고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0, 11일 양일 간, 맥아더의 명령하에 66척의 수송선에 분승한 미국 제1해병사단을 주력군으로 한 일본 주둔 미군 동원병력은 고오베(神戶)항을 떠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개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 제7보병사단, 해병 제5여단도 각기 11일과 12일 일본의 요코하마와 부산항을 떠나 집결지인 제주도 서남해상으로 향발했다. 한국군 및 미 제10군단 등으로 구성된 6만9,000여명의 대병력을 투입하는데 총 261척의 수송선이 동원된 대규모 상륙작전이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인천상륙 후, 18일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20일엔 한강을 넘었다. 계속해서 26일에는 미 제10군과 부산 교두보에서 반격을 개시하여 북상해온 미 제8군의 예하부대와 최초로 오산부근에서 합류했고, 마침내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인천상륙 후 13일 째 되던 날이었다.

당초 인천상륙작전의 실행여부를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험한 지형, 극심한 간만의 차이 등의 여러 가지 장애요인으로 인해 미 합참참모부는 처음부터 성공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 작전을 극구 반대했다. 반드시 결행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와 별개로 상륙자체는 성공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여기기는 맥아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과는 맥아더의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미 행정부의 승인을 받았고, 실제 작전수행은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전체 전황을 일변시킨 몇 가지 중대한 전략적 의의가 있었다. 첫째, 수도 서울수복에 유리한 전투 국면을 조성했으며, 둘째, 인천과 서울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반면 북한인민군의 전의를 상실 혹은 저하케 했을 뿐만 아니라 적의 보급선 및 후방지원로를 차단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남부전선에 고착되어있는 적의 전투역량을 마비상태에 빠뜨렸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논급한 몇몇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의 대표적 연구저서들은 모두 한결같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개시 전에 마오쩌뚱은 이미 스탈린에게 중국인민해방군 정보처가 분석한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예측내용을 통지했고, 또한 동시에 북한의 김일성에게도 서둘러 예비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저서의 논자들의 주장은 모두 앞서 소개한바 있는 레이잉푸의 회고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레이잉푸의 회고를 100%의 진실로 받아들였다는 소리다. 당시 레이잉푸는 중공지도부의 한국전쟁에 관한 전황분석 및 연구를 수행하는 스탶진에 참여하고 있었고, 직접 저우언라이 그리고 마오쩌뚱에게 전황을 보고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바 있다. 한국전쟁의 정세변화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 중공 인민해방군총참모부 작전실 소속의 관련 보좌관들은 8월 중순, 수차례에 걸쳐 난상토론 형식의 정세분석을 가했는데 그 결과 일치된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다. 즉 “적군은 인천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매우 크며”, “미국은 한국전쟁의 전황을 뒤집으려고 궁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이 내린 추론의 논거는 모두 일곱 가지였다. 좀 길긴 하지만 모두 원문대로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미군과 한국 괴뢰군의 13개 사단은 낙동강 삼각주의 협애한 거점에 붙박혀서 강고한 진지, 밀집된 병력, 화력과 해․공군력의 절대우세에 의지하여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반격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고 현 상태를 고수하면서 유인책을 구사하고 있다.

둘째, 일본에 주둔중인 미 제1사단과 7사단 2개 사단은 낙동강 지역의 증원군으로 파송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연해에 방어진을 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훈련에 출동되어 제10군단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전략을 취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이며, 다른 곳에서 새로운 전장을 열려고 하는 증후임을 말해준다.

셋째, 미국, 영국은 지중해, 태평양에 많은 함선을 보유하고 있는데, 최근 일본-한국해협에 집결키 위해 이동 중에 있다. 이것 역시 상륙과 전쟁확대를 겨냥한 동향이다.

넷째, 한국은 좁고 기다란 반도인데, 남북은 800~900㎞, 동서는 겨우 100㎞에서 300㎞정도이다. 3면이 바다여서 인천, 원산, 남포, 군산, 흥남 등지와 같이 상륙 가능한 곳이 아주 많다. 이 가운데 적이 상륙하기에 인천이 가장 유리하다. 인천은 현재 낙동강을 공격하고 있는 북한인민군을 갈라 버릴 수 있는 관계로, 인민군의 후방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고 또한 낙동강으로부터의 북상 반격에도 호응이 가능하다. 그럴 경우, 인민군을 협공하거나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게 된다.

다섯째, 미 제8군과 맥아더 등 고위 지휘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작전에 참여했고 풍부한 상륙작전의 경험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한국전에서 미국 해․공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추진하기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진퇴도 용이하다.

여섯째, 북한인민군은 주력이 낙동강을 치고 내려올 때까지는 크게 승리했으나 한편으로 그것은 위기가 잠복되어 있는 일시적 승리였다. 즉 계속적인 전투로 인한 병사들의 극심한 피로, 병력분산뿐만 아니라 보급선이 400~500㎞로 늘어나 후방이 뻥 뚫렸다. 각 방면의 상황에서 보면, 인민군의 8월 공세는 사실상 이미 주동적인 입장에서 피동적인 상황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반면 적의 병력은 집중되어 있고 진지는 견고하다. 보급과 공수가 모두 용이하여 전략상 이제 주도적 위치로 바뀌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일곱 째, 위에서 인용한 여섯 가지 전황 외에 마지막으로 중공 작전부의 스탶진들이 감안한 또 한 가지 근본문제는 미국의 자존심과 결부된 문제였다. 즉 “미국은 제국주의진영의 우두머리로서 강대한 육․해․공군력과 공업기반을 갖추고 있는 데다 원자탄까지 보유하고 있다. 현재 유엔군의 깃발로 전쟁을 일으켜 유엔군총사령관의 명의로 북한인민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들은 절대로 전쟁초기의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패권적 지위와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가능한 한 우세를 드러내려 할 것이 틀림없으며, 인민군과 더욱 가열찬 교전을 벌일 터이다. 그들은 역량이 지지 불가능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이 전쟁에서 쉽게 손을 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정황판단에 따라 레이잉푸는 미군이 9월 15일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판단을 8월 23일 저우언라이를 거쳐 마오쩌뚱에게 보고하였고, 마오는 이를 극히 중요한 사안으로 받아 들였다고 회고했다.

요컨대 최초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예측한 것은 그가 책임자로 있는 총참모부작전실이었지 마오쩌뚱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조라면 마오는 단지 레이잉푸의 보고를 듣고 난 후 전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계속되는 레이잉푸의 회고에 따르면 마오쩌뚱은 즉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고 전해진다.

첫째, 동북변방군에 모든 필요한 작전준비를 9월말까지 완료토록 명령을 내렸다. 동북변방군이 9월 말 이전에 압록강까지 치고 들어갈 수 있도록 전쟁준비가 끝날 경우 “우리는 주동적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미 늦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북한과 소련 지도부에 미군의 인천상륙에 관한 중국지도부의 판단을 통고하고 즉각 대응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즉 중국은 소련과 북한 측에 인천상륙이 지니는 전략적인 이해득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특히 북한 지도부에게는 인민군을 즉각 낙동강전선에서 철수시켜 인천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전에 돌입하도록 충고했다.

셋째, 총참모부와 외교부로 하여금 적의 상륙에 관한 동향을 면밀히 관찰토록 지시했다.

만약 레이잉푸가 회고한 지금까지의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마오쩌뚱은 8월 23일 이전에, 다시 말해 레이잉푸가 보고해오기 전에는 미군의 인천상륙을 예측할 수 없었거나,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오가 내린 조치와 명령, 특히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이 점을 통보한 시점도 분명 8월 23일 이후가 된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앞뒤가 모순되지 않고 이치에 맞다.

그런데 러시아정부가 수 년 전 공개한 관련 자료들은 위의 내용과 크게 다르다. 당시 뻬이징 주재 소련대사 로신이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문에 따르면, 로신은 1950년 7월 2일 한반도 전황에 관한 중공의 군사정세브리핑을 들었는데, 이때 전황에 관해 마오쩌뚱이 내린 개인적 판단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즉 마오는 “미국이 일본점령군 12만 명 가운데 약 6만 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다면 부산, 목포, 마산 등의 항구로 상륙한 후 철로를 따라 북진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인민군은 이 항구들을 점령하기 위해 속도를 더 내어 신속히 남쪽으로 진군해야 한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마오쩌뚱은 “서울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인천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쌓을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미군이 이 곳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요컨대 마오쩌뚱은 레이잉푸보다 거의 두 달 가까이 먼저 미군의 인천상륙가능성을 예견한 것이다. 만약 이 전문내용이 정확하고 사실에 해당될 경우, 마오가 내린 전황변화에 대한 예측은 레이잉푸의 판단에 따른 게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로신의 이 전문내용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 당내 사정을 감안해볼 때 마오쩌뚱 본인이 하지도 않은 말이 뻬이징 정가 및 외교가에 떠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신 또한 그 자신이 듣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어 감히 스탈린에게 보고할 수 있었겠는가? 로신의 보고전문은 그가 7월 2일 저우언라이로부터 마오쩌뚱과 중공지도부가 평가한 한반도의 정치군사 상황을 직접 전해 듣는 자리에서 스탈린에게 정세분석을 전해 달라는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에 보고한 로신의 공문서가 날조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위와 같은 전제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 추론을 전개할 수 있다. 즉 레이잉푸는 7월 2일 이전에 이미 마오쩌뚱에게 상기 판단내용을 보고했지만 그가 이를 8월 23일로 잘못 기억했거나 혹은 그게 아니라면 레이잉푸의 회고대로 8월 23일 그 날짜에 마오에게 보고했든가 이다. 요컨대 레이잉푸의 회고는 사실이 아니면 착오이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기억의 착오인가? 역사적 사실인가? 이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정황을 토대로 추론해보면, 전자의 가능성 즉, 레이잉푸가 7월 2일 이전에 마오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결론은 레이잉푸의 회고대로 그의 보고시점은 8월 중순이었다.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정황들이 이 추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첫째, 레이잉푸가 그의 회고록에서 북한인민군과 미 제8군의 워크장군이 이끈 13개 사단이 낙동강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면서 지체국면에 들었다고 정확하게 묘사한 당시 전황은 분명 7월초 시점에선 발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둘째, 레이잉푸가 낙동강전선에 관한 북한인민군의 8월 공세에 대해 전황을 분석하면서 “때는 바로 찌는 듯한 혹서의 8월”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김일성이 “8월은 조선인민군이 승리할 달”이라고 선포한 문헌을 인용하여 자신의 기억을 되살린 점이다.

셋째, 레이잉푸가 총참모부작전실이 획득한 정보를 토대로 미국대통령 고문 해리만 및 그의 군사비서 등 정부 고위층 인사들이 8월에 여러 차례 토오쿄에 들러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를 만났다는 동향에 주목하여, 미군이 상륙한다면 밀물이 크게 밀려올 다음달 9월 15일이 될 거라고 예측한 점이다. 맥아더 측의 이런 움직임은 실제로 8월 23일에 예정된 토오쿄 전략회의를 위한 사전 예비모임이 중국측 첩보망에 포착된 것인데, 말하자면 이미 기 발생된 사실로서 레이잉푸의 회고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레이잉푸의 회고는 정확한 당시 실황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추출해내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즉 한마디로 마오쩌뚱이 7월초에 인천상륙작전을 예견한 것은 레이잉푸로부터 보고를 접하기 전에 내린 그의 독자적 판단이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는 이렇다. 맥아더 회고록에 따르면, 7월초라는 시각은 맥아더가 친히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어떤 형태든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반격작전의 필요성은 인식했지만(6월29일) 그 반격작전이 어떤 형태가 될 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맥아더의 반격작전 구상은 이제 막 그의 머리 속에서 생성 중이었고, 따라서 수립도 되지 않은 ‘인천상륙작전’이 누설될 리가 만무했다. 반격작전을 위해 맥아더가 처음으로 워싱턴에 병력증원을 요청한 것은 7월 7일이었고, 그 후 7월 23일에 가서야 9월 중순 상륙작전을 발동할 예정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또한 맥아더는 상부보고 후에도 작전의 성공여부는 기밀유지에 있다고 보고 언론보도를 제한했으며 극히 비밀리에 이 작전을 준비시켰다. 물론 준비과정에서 부산항 부두에 정박 중인 유엔군 및 한국군을 실은 수송선은 인민군 간첩들에게 목격되긴 했지만, 그것도 7월과 거리가 먼 9월의 일이었다. 또한 한국전쟁 전 기간동안 북한 주재 소련군사고문 슈티코프와 서방에서 입수한 정보 및 첩보를 중국과 북한지도부에 제공해왔던 스탈린도 인천상륙작전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슈티코프도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전혀 사전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고, 스탈린은 오히려 중국주재 자국 대사로부터 관련 첩보를 접하고 있던 상태였다.

다음으로 문제의 인천상륙작전은 7월 7일 이전의 사전 기밀누설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본고의 의도와 관련해서 사족을 다는 첨언이긴 하지만 우리는 상륙지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유엔군이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유언비어 전파, 양동작전을 펴면서 적의 시선을 교란시켰던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동작전의 몇 가지 대표적 예를 들어보자. 전함 미주리호가 이끄는 수척의 구축함은 엉뚱하게 9월 13일 새벽(인천상륙 이틀 전), 동해안 전선의 인민군이 주둔한 강원도 삼척 앞 바다에 나타나 400㎜ 함포사격을 가함으로써 상륙지점을 위장했다. 한편 미국의 항공모함과 순양함은 평양의 외항과 진남포 일대를 집중 포격하는가 하면 청천강하구의 달양도를 공격하여 적의 주의를 교란시키는 심리전을 펴기도 했다. 서해안 중 상륙최적지로 알려진 군산에선 한층 적극적인 기만전술이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제5항공대는 9월 5일에서 13일까지 군산주위 50㎞이내의 도로와 철로를 맹렬하게 폭격했다. 또 9월 12일 밤, 영국항공대는 미 육군장교 루이스가 지휘하는 미 육군 돌격대와 영국 해병돌격대를 조직하여 군산해안으로 상륙을 시도했다. 목적은 물론 양동작전을 가장한 정찰전투를 통해 적정 정보수집을 노린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군산상륙의 의도를 내비치면서 연안에 대한 교통두절을 시도하여 인민군으로 하여금 군산지역에 증원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판단하게끔 만듦으로써 다가올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의도 자체를 은폐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같은 기만작전 외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지휘 중에 실제로 미군 2개 사단과 한국군 1개 사단으로 인민군의 낙동강포위망을 분쇄할 목적으로 10월 15일 군산에 상륙토록 지시했는데,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의 이행거부로 유야무야된 것은 별도 문제였다. 맥아더가 7월 7일 반격작전을 위해 본국에 전보를 쳤을 때부터 그 후 적의 주의력을 흩뜨리기 위해 아무 곳이나 지분대는 위와 같은 기만작전을 포함하여 북한인민군을 공격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마오쩌뚱이 인천상륙작전을 예측한 시점 이후에 진행된 것이다. 요컨대 마오쩌뚱은 상륙에 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시점인 7월 2일 이전에 이미 독자적으로 미군의 상륙가능성과 상륙지점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내가 주장하는 ‘마오쩌뚱의 독자 예견설'은 확실해진 셈이다.

그러면 마오쩌둥은 과연 어떻게 인천상륙작전을 이처럼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사실을 입증하는 명백한 역사적 문헌이나 또 다른 증언이 나오지 않고 있는 현재로선 마오쩌뚱의 사전 예측은 그의 풍부한 군사적 상상력에 기인한 직관에 따른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밖에 달리 설명할 합당한 해석이 없다. 이 결론에 입각하여, 마오가 예견에서부터 스탈린과 김일성에 통보하기까지 전 기간동안 진행된 과정을 종합적으로 재구해보면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진행됐었다.

주중 소련대사 로신의 전보가 전해주듯이 마오쩌뚱은 이미 6월말에서 7월 초경에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걸로 직감했다. 이것은 그가 전쟁이 단기간에 쉽사리 끝날 게 아니라 장기전으로 돌입할 것으로 판단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마오는 7월 10일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대리 니에룽쪈(聶榮臻)에게 인민해방군 4개 야전군, 3개 포병사단 전부를 압록강 대안으로 이동시켜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레이잉푸를 비롯한 작전요원들에게도 “한국전쟁의 전황변화를 주의해서 관찰하라”고 여러 차례 지시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는 8월 23일 레이잉푸로부터 전술한 바 있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 보고는 미군의 상륙을 의식하고 있었던 마오쩌뚱의 생각을 더욱 굳혀 주었고, 그 즉시 저우언라이에게 김일성으로 하여금 세 가지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저우언라이의 특사파견요청에 따라 북한지도부로부터 뻬이징에 급파된 것은 이상조(李相朝)였다. 이상조는 당시 북한인민군 부총참모장직에 있었다. 그가 훗날 소련으로 망명한 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마오쩌뚱은 이상조를 만난 자리에서 미군이 해상으로 우회하여 인민군 배후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상륙 지점으로 세 곳을 꼽았는데 그 가운데 인천이 포함돼 있었다. 마오는 이상조에게 한시바삐 김일성에게 이 점을 알리고 미군의 상륙을 저지할 방어책을 마련토록 하라고 요구했다.

이상조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9월 8일 김일성에게 마오쩌뚱과의 담화내용을 전하였으나 김일성은 마오의 충고를 건성으로 흘려들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마오쩌뚱이 우려한 미군의 인천상륙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했다. 마치 김일성의 불찰이었다는 어조였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이상조의 회고와 조금 달랐다. 김일성은 이상조의 보고 보다 10여일 이른 8월 28일, 즉 상륙개시 18일 전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이른바 ‘반상륙방어명령’을 내리고 방어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또 다음날 29일에는 내무성, 민족보위성, 각도 인민위윈회, 각도 내무부장 연석 협의회를 소집하고 “지금 적들은 대 병력을 동원하여 동서 해안으로부터 상륙을 시도하고 있다”고 강조한 후 ‘후방 보위’에 튼실을 기할 것과 상륙저지를 지시했다.

그런데 전후 상황으로 보아 김일성은 지시만큼 스스로 방어에 관건적 역량을 집중하지는 않은 듯 했다. 그는 오히려 낙동강전선을 최후의 승부처로 생각하고 그 방어선 돌파에 치중한 양상을 보여줬다. 이를 보면 마오쩌뚱이 1949년 5월과 ’50년 5월 두 차례나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김일성에게 경고했는데도 김일성은 이를 무시해버렸다고 지적한 저우언라이의 언급은 상당부분 사실에 부합하는 듯 하다. 우리는 이 판단의 적실성을 높여주는 대목으로 김일성이 사후인 9월 17일에야 조선노동당중앙위원 정치위원회를 긴급히 소집하고 서울지구를 방어하기 위해 낙동강전선의 인민군을 서울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하고, 예비부대 창설을 명령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런 정황과 관련하여 이 시기 북한 특사의 중국방문은 두 차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상조가 회고한 9월 8일의 보고는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 보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김일성은 8월 23일 중공지도부의 경고 직후 이미 마오쩌뚱의 충고를 전해 듣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금까지 중국학계에서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최초 예견자가 레이잉푸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져 왔다. 이 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로신의 7월 2일 전문’이 공개됨으로써 이제 수정돼야 한다. 그리고 최초 예견자라는 역사적 진실의 자리에 마오쩌뚱을 앉혀야 한다. 레이잉푸의 8월 23일 보고는 단지 마오로 하여금 자신의 판단을 더욱 확신케 해준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마오가 김일성에게 통보하는 등, 발 빠른 대응조치를 지시토록 한 참모기능을 했을 뿐이다.

과거의 역사사실을 재구성할 때 각종 회고록은 일차 사료 못지않게 중요한 자료이다. 그것은 때로 공식적인 문헌(archives)에서와 같이 어떤 사안이 생성된 배경이나 분위기를 감지키 어려운 1차 사료들간의 공백을 메우기도 하며, 또 때로는 화자의 내면적 동기나 심리상태까지 추론케 해주는 방증자료로 활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고록 집필자는 진실을 왜곡하는 비역사적 행위임을 알면서도 왕왕 과거의 진실을 밝힌다는 역사의식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정당성을 강조하거나 혹은 특정 사안을 미화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양심상의 죄악이자 사람들로부터 과거를 제대로 알 권리를 박탈하는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점을 의식, 혹은 반성해서였을까? 본문에서 인용한 ‘로신의 7월 2일 전문’이 공개된 후, 레이잉푸는 그의 회고록을 개정하면서 1993년에 출간된 첫 번째 회고록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다음과 같이 첨가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미군의 이 행보는 이미 마오쩌뚱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 마디는 우리에게 회고자의 기록에 따라 훗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며, 레이잉푸가 기록한 인천상륙에 대한 예견 부분이 중국에서 왜 그토록 오랫동안 의심받지 않은 정설로 받아 들여졌는지 그 이유를 시사해주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