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한국전쟁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6·25한국전쟁 인식 변화의 정치학

雲靜, 仰天 2024. 10. 19. 22:08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6·25한국전쟁 인식 변화의 정치학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이 달 10월 19일로서 중공군(중국은 국가 군대가 없고 중국공산당에 소속된 군이어서 ‘중국군’은 잘못된 용어임)이 한반도에 발을 디딘지 75년 되는 해다. 이날 제1진으로 25만 748명의 중공군 군대가 북한으로 극비리에 잠입해 들어왔다. 그런데 최초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그보다 3일 전인 10월 16일 밤 정찰 임무를 띠고 먼저 잠입한 ‘선발대’ 제12사단 제370연대 병력이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중공군의 한반도 파병이 개시된 정확한 날짜는 1950년 10월 16일이었다.
  
참전 후 중공군은 군사적, 정치적 남북통일을 목전에 둔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함으로써 통일을 가로 막았다. 1953년 7월 휴전으로 패망 직전의 북한 김일성 정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 뒤 중공군은 철수를 하기 시작해서 1958년 10월 25일에 마지막 부대가 북한 땅을 떠났다. 3년 1개월 간 지속된 6·25 한국전쟁(이하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안겨 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살상됐고 전국토가 초토화되어 산업시설도 거의 모두 파괴되다시피 했다. 남북 간에는 천만 명이라는 이산가족을 발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호 적대 감정과 불신감이 극도로 팽창해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원인이 됐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전쟁을 ‘6·25전쟁’이나 ‘한국전쟁’이라 하지 않고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그 이면에는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역사왜곡과 은폐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북한과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하게 국내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애국의식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면서 중화주의를 고취하고 부추겨서 중공 일당 독재의 정당성 확보, 그리고 시진핑(習近平, 1953~)이 헌법 내용까지 수정해서 제3기로 집권하게 된 필요성을 은연 중에 선전하는 동기도 섞여 있다. 따라서 중국의 한국전쟁 인식에 대한 이해의 열쇠말인 이 용어의 생성 기원을 제시함과 동시에 이 용어는 역사왜곡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말에 내재돼 있는 중공 수뇌부의 한국전쟁 인식, 중국 국내외 정치 및 국제관계와 얽힌 정치학을 이해할 필요도 있다.
  
중국의 한국전쟁 기술은 시진핑 집권 제3기에 들어온 뒤부터 북한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중공 일당전정(專政, 독재의 중국식 표현)이라는 국가 권력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변하지 않을 게 있다. 첫째가 한국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으로서 중국과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중국은 군대 파병을 개시한 1950년 10월을 기준으로 그 이전 북한의 남침, 한국군과 유엔군의 참전과 북진까지를 ‘조선전쟁’이라고 부르고 이 전쟁은 중국과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군대 파병 이후는 ‘항미원조전쟁’이라 한다. 둘째,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사전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및 김일성(1912~1994)과 한국전쟁 모의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셋째, 중국이 파병 개입한 것은 미 제국주의의 중국 안보위협 때문이고, 국가 차원에서 군대를 파병한 게 아니라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북한)을 돕고,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항미원조 보가위국’(保家衛國)을 위해 스스로 자발적으로 북한에 들어간 지원병이라는 입장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용어는 1950년 10월, 당시 중공 주석으로서 최고 권력자인 마오쩌둥이 중공 당내외 다수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공군을 북한 땅으로 들여보내기로 한 파병을 결정한 전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당시 마오쩌둥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도록 고안해낸 정치적 선동 용어였다. 한국전쟁 파병 전후부터 시작된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규탄대회를 전국적 규모의 정치운동으로 연계시켜서 항미원조운동을 벌인 마오쩌둥의 구상과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근년 2021년 2월 중공 당사 연구실에서 펴낸 ‘중국공산당 간사’(中共中央黨史硏究實中國 共産黨簡史編寫組 編著, 『中國共産黨簡史』, 北京人民出版社, 中共黨史出版社)에도 한국전쟁에 대해선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이 폭발했다”(朝鮮內戰爆發)고만 기술돼 있다. 그리고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제시돼 있다.

첫째, 당시 미국 정부가 즉각 조선 내전에 무장 간섭을 하기로 결의를 하면서 미 제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해 중국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했고, 중국의 통일대업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둘째, 10월 초 미군이 중국 정부가 발한 두 차례의 경고를 무시하고 38도선을 넘어 전화를 중국-북한 변경 지역으로 확대해 직접 신 중국의 국가 안전을 위협한 데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북한 조선노동당과 정부가 중국의 출병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전쟁 도발 전 김일성, 스탈린과 함께 남침을 모의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까지 엄청난 대군을 보내 일패도지에 빠진 김일성을 군사적으로 도와서 결국 그를 기사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목전에 다다른 북한전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통일을 무산시킨 사실을 감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성격마저도 비튼 중대한 역사왜곡이다. 우리는 전쟁 당사국으로서 마오쩌둥이 항미원조전쟁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증거는 차고 넘친다. 실상은 다음과 같았다.
  
1950년 5월 15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로 자신을 찾아와 한반도적화를 위한 남침전쟁을 동의해줄 것을 요청한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1900~1955)에게 중국은 타이완(臺灣)을 해방한 후에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적화 통일문제에 동의한 이상 준비 중인 타이완해방 작전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무력통일을 제1순위로 두기로 했고, 김일성의 3단계 침공방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몇 가지 전술적 충고까지 했다. 또 중국 내 거주하던 항일전에 투입된 한국적 병력을 최소 5만 명 이상을 김일성에게 흔쾌히 넘겨주기도 했다.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탈린의 전쟁 동의와 마오쩌둥의 이러한 지지와 지원이 있었다.  
  
이래도 중국이 한국전쟁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동의요청에 동조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한반도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 있다. 김일성의 남침준비를 지원해온 스탈린이 마오쩌둥의 사전 동의를 전쟁승인의 조건부로 내건 것이 마오쩌둥의 동의거부로 성사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남침 후 마오는 유엔결의에 따라 한반도로 전개해온 미군의 참전목표가 북한침략군을 격퇴해 남침 전 상태(status quo)로 되돌리는 것, 즉 38도선을 넘어 중국을 위협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파병의지를 갖고 있었다. 마오의 머리 속에는 참전을 강행함으로써 과거 소련이 획득한 중국내 권익을 환수해주겠다는 스탈린의 약속을 보장 받고, 몇 가지 자신의 국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동기가 숨겨져 있었다. 어차피 미군이 북한 점령 후 중국으로 공격해 올 것으로 예단한 마오가 국내에 가만히 앉아서 미군을 기다리기 보다는 압록강을 건너 북한 땅의 일부 지역에 미군 진격을 저지하고 자국 영토를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지대(글라시스 glacis라고 함)를 확보할 요량으로 군대를 북한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또한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중공 수뇌부에게 중북 국경지역에서의 중국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할 것이라고 통보했음에도 마오는 ‘미국위협론’을 부풀리고 ‘정의의 전쟁’으로 호도하면서 대군을 북한에 들여보낸 것이다.
  
다음으로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중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개입했다는 “항미원조전쟁”과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주장이나 논리도 견강부회이자 모순이다. 침략을 응징하고 전쟁 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유엔의 결의에 따라 파병된 유엔군은 실제로 북진시 중국정부에 중북국경지역에서의 중국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중국은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의 ‘정의의 전쟁’ 개념을 차용해서 ‘정의의 전쟁’을 강대국이 패권을 추구하기 위해 정의로운 약소국을 침략했을 때 이에 항거하는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마오는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은 북한이 중국과 한날한시에 일제의 모진 질곡에서 벗어난 신생국 남한을 침략하겠다고 했을 때 김일성을 적극 만류했어야 했다. 그것이 반제, 반패권의 기치로 떨치고 일어난 중공의 창당정신이 아니었던가? 그렇기는커녕 마오는 김일성의 남침을 지지하고 병력을 지원함으로써 이웃민족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미군이 개입하면 군대까지 보내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침을 고무시켜 당시 38세에 불과한 김일성의 만용을 부추긴 셈이 됐다.
  
중국의 정의롭지 못한 부당한 전쟁개입으로 한반도통일은 성사 일보 직전에서 무산됐고, 와해상태의 북한정권은 회생했다. 그 파장으로 한민족은 지금까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갈등을 겪었으며, 남북분단의 고착화는 남북한간의 불필요한 소모전의 기원이 됐다. 마오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12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4차 회의에서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영웅의 인민전쟁”이라고 언급했다. 미국에 이겼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도취에 빠진 마오는 중공의 “위대한 승리”로 세계대전의 발발 시간을 지연시키게 됐다면서 만약 적이 다시 전쟁을 걸어온다면 중국은 더 자신 있게 대적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마오쩌둥의 지시나 명령은 그의 재세시 당 안팎에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지상 명령이었다. 그의 발언은 중공의 공식 당론이 됐다. 마오의 명령은 말 한 마디에 산천초목이 떨 정도로 공포스런 것이었음과 동시에 역사가들에게도 마오쩌둥이 말한 틀 속에서 역사를 기술하라는 지침이나 다름없었다. 역사가, 교육계와 언론에선 아무도 이와 다른 얘기를 못해 왔다. 필자가 아는 중국 내 일급 한국전쟁 전문가는 중공의 가이드 라인을 벗어난 주장을 했다가 체포돼 오랜 영어의 몸이 된 바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라고 중립적으로 기술해서 마오의 지원 하에 김일성이 남침 전쟁을 도발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이는 북한을 의식해서 중립적 표현을 쓴 것이다. “미 제국주의”가 군대를 한반도에 보내 북한을 침략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고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상황에서 마오쩌둥의 현명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으로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해서 “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가르쳐오고 있다.
  
중국의 항미원조전쟁 선전과 교육은 전쟁에서 한 패가 됐던 북한과 원칙적인 궤를 같이 해왔지만 지엽적으로는 미중관계와 북한과의 관계 변화에 따라 자국 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조금씩 내용을 달리 해왔다. 북한의 한국전쟁 교육은 철두철미하게 반제 반미의 계급투쟁교육이다. 북한당국은 북한의 교과서에다 “조선전쟁은 미제의 사주를 받는 남조선 괴뢰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못 박아놓고 있다. 북한주민들에게 ‘북침’으로 세뇌시키는데 북한당국의 최상위 지침서 역할을 하는 ‘교과서’는 북한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가 펴낸 『조선전사』다.
  
북한처럼 중국도 기본적으로 사상과 교육을 중공이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는 일당독재 국가다. 중국 학생들은 초중고 9년 간의 의무교육 과정 중에 마오쩌둥의 주장을 배운다. 전쟁의 배경과 관련해서 전쟁 전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준비한 사실뿐만 아니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전쟁동의 및 지원에 관한 사실을 누락시키고 가르친다. 또한 북한이 한국전쟁을 도발한 사실과 침략 주체를 밝히지 않고 단지 “1950년 6월 조선내전이 폭발했다고”만 기술된 교과서로 6·25전쟁을 내전으로 배운다. 교과서에서 내전이라고 규정한 것은 미국이 군대를 보내 중국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에 중국은 한반도전쟁에 간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부득불 참전하게 됐다는 논리를 펴는 중국관방학계의 통설이 반영된 결과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가이드라인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 교육은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장쩌민(江澤民, 1926~2022)-후진타오(胡錦濤, 1942~)를 거쳐 시진핑 제1기 집권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미중관계가 상대적으로 양호했으며, 중북관계도 크게 마찰이나 갈등 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때여서 중공 수뇌부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 마오쩌둥 및 중공 중앙의 입장을 그대로 견지해왔다. 1992년 8월 한중수교시 중국이 우리 정부에게 중국의 참전에 대해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은 심리적, 역사적 배경이었다.
  
후진타오 집권기에 들어와선 노골적으로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을 소환하는 일이 잦았다. 김일성의 남침전쟁 도발 후 60년이 지난 2010년 10월 25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항미원조전쟁 참전 제60주년 좌담회’도 그 일환이었다. 그들에 대한 훈·포장 수여, 최고 지도자가 주최하는 좌담회 개회 및 격려가 이어졌다. 동시에 전몰용사의 대규모 추모제 거행, 미국을 물리쳤다는 내용의 영화나 드라마,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을 통한 선전 및 홍보에 주력해오고 있다. 신의주의 압록강 대안에 위치한 단둥(丹東) 소재 항미원조전쟁기념관은 1958년에 개관한 뒤 대대적 개편 및 수리를 마치고 2020년 9월에 재개관됐다. 십여 년 전, 필자가 가본 바에 따르면 이곳에 전시된 항미원조전쟁의 내용은 약간의 어구만 바뀔 뿐 내용은 여타 매체나 교과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과 천편일률적으로 같았다.
  
이런 식으로 세뇌된 결과 14억 2,00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은 거의 모두 북침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들은 과거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남침도발을 동의해준 사실도 전혀 모른 채 중국의 참전을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정의의 전쟁”으로만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이런 내용의 교육을 통해 세뇌된 중국 학생들은 커서도 평생 동안 북침인지, 남침인지 진실을 모른 채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무찔러 북한을 위기에서 구하고 중국의 안전을 지킨 자국의 위대성이 부각된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북한은 미국에 침략 당했고 남한은 “미국의 주구”가 됐다고 중공은 선전해왔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한국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당시 중국국가 부주석이었던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 한 그 회합에서 한국전쟁을 주객전도 식으로 사실을 왜곡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 노병들을 위무하면서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으로서 “제국주의가 중국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시진핑이 주도한 중공의 역사결의 형태로 내려진 한국전쟁에 대한 그의 이러한 평가 역시 마오 이래 중공 역대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외면한 단장취의(斷章取義)로서 완전 날조임은 물론이다. 중국외교부도 이 발언이 그의 개인적 사견이 아니라 중국정부의 정론이라고 못 박았다. 중국외교부가 강조했듯이 시 부주석의 발언내용은 중국정부의 정론이다. 문제는 왜 이 시점에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공개 발언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발언은 당시 중공 수뇌부 내 원자바오(溫家寶, 1942~) 총리가 수차례 촉구한 정치개혁 여부를 둘러싸고 찬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정치개혁 주장은 곧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 후의 당내 역학관계와 맞물려 있었고, 당내에 ‘정치개혁파’를 중심으로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당내 자파권력 안배문제를 염두에 둔 시 부주석의 발언은 한국전쟁에 대한 중공 당론과 참전노병들을 정치적 ‘오브제’로 활용하면서 중북혈맹을 강조한 성동격서인 셈이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가 계산에 넣은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길들이기”라는 부차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상황으로 파생된 것이다.
  
시 부주석이 노린 중국 국내 정치적 동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왈가왈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다만 당시 중공 당교에 소장돼 있는 중공 최고 기밀을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그가 한국전쟁의 발발원인과 성격을 잘 알면서도 사실을 왜곡한 것은 그만큼 한국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는 점을 방증하고, 그런 그의 인식이 그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한 심리적 요인이었다. 특히 발언의 시점이 공교롭게도 한국정부가 G20정상회의를 앞두고 의장국으로서 환율문제를 거론하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의 대중 압박을 시도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한미관계의 이완을 겨냥한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다목적 동기마저 감지된 바 있다.
  
시진핑 집권 제2기에 들어와서도 마오쩌둥 이래 집단정신으로 내려오고 있는 전쟁에 대한 원칙적인 평가와 입장은 바뀌지 않았지만 미중관계와 중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기술 내용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서술상의 미묘한 변화는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이 발발했다. 조선인민군은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한국군은 절절히 패퇴했다”고 기술함으로써 한국전쟁을 중립적으로 기술해온 과거와 달리 남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점이다.

2021년 11월 11일 중공 제19屆 6중전회 두 번째 회의에서 통과된 ‘역사결의’(中共中央关于党的百年奋斗重大成就和历史经验的决议)에 대한 11월 30일의 부연설명과 지시를 내린 자리에서 시진핑은 과거 두 번의 역사결의(1945년과 1981년)와 달리 한국전쟁에 개입한 항미원조전쟁에 대해서 또 다시 거론했다. 사실, 중공 지도부는 매년 항미원조전쟁 기념일 마다 기본 입장을 확인해오곤 하지만 이를 중공 당의 역사결의에까지 삽입한 건 이례적이다. 중국에선 고대로부터 권력자들이 역사를 정치에 활용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듯이 중공 역시 중대한 고비 때마다 역사를 소환시켜 “역사결의”로 당의 기강을 잡고 인민들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다잡는다. 당내 노선투쟁이나 권력투쟁에 이긴 자가 역사를 개필하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가 과거도 장악하는 전형적인 예다.

“1950년 조선전쟁도 국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무력위협에 직면한 국가적 위기였다.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保家衛國) 역사적 정책결정으로 침략자 군대의 국경진입 위험을 면했으며, 신중국의 안전을 수호했다.”

시진핑의 위 발언은 당내 분파를 가차 없이 처리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공의 이념과 이론을 다루는 기관지 중의 한 유력 매체인 『求是』 2022년 1월호에 머리기사로 게재됐다. 중공 당내 사실상의 종신제인 3연임을 합법화 한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면서 당 노선을 정리하고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으로 올려놓은 것에 대해 반발과 잡음이 없도록 당내 기강을 잡는 차원에서 이뤄진 발언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진핑이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용어를 고집하고 한국전쟁의 역사를 비틀고 왜곡하는 동기나 목적은 시진핑 정권 출범과 함께 미국과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애국주의, 혁명영웅주의, 중공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함으로써 항미원조전쟁을 중국인들의 결집을 호소하는 명분으로 활용하고 중공 일당 독재의 정당성을 유지하면서 미국에 대한 적대 의식을 고취하는 것에 있었다. 마오쩌둥이 역사를 현실정치에 이용하는 중국의 오랜 전통을 이어 받았듯이 시 부주석도 마오처럼 역사문제를 현실정치에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보란 듯이 이렇게 버젓이 한국전쟁사를 마음껏 비틀고 강변하는 데도 국내 정치권은 애초부터 문제의식이 없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줄곧 몸을 낮춰오고 있다. 정치인들은 중국과의 관계에 좋을 게 없다는 이유로 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대세다. 미국이 전후 한반도에서 중국과 일본세력을 대신한 이래 사라진 듯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잔영을 본다. 중국이 우리를 길들이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 가에 따라 스스로 중국에 다시 한 번 길들여지게 되는 상황이다. 정치계에선 단지 자유선진당의 이회창 대표 한 사람만 시진핑 발언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비판했을 뿐이다. 2010년 당시 그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적화 침략전쟁에 3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고 전국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던 한국과 한국 국민을 무시한 발언이라고 비판하면서, 중국 측에 해명과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한 바 있다.
  
이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국내 정치권에서 중국의 이러한 역사왜곡에 대해 사실에 입각해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한 정치인은 드물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그렇게도 기개가 없는가? 이는 적지 않은 정치인, 학자들 상당 부분이 중공의 환대나 얼마 되지도 않을 금전적 대우 그리고 중국 초청 기회 등에 눈이 멀어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발언을 해오는 매국적 친중인사가 돼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들듯이 모시면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그들의 저의와 목적이 무엇일까? 만약 중공이 북한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땐 뭐라고 할까? 또 한국 정치권에서 티베트와 대만과 관련해 중국정부의 입장과 다른 발언이 나오면 중국의 당정지도자들이 양국관계에 좋을 게 없다는 같은 이유로 대응을 자제할 것으로 볼까?
  
전반적으로 볼 때 한국사회는 역사주권을 지키겠다는 기백은커녕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왜곡, 중공의 ‘항미원조전쟁’ 용어에 감쳐진 정치적 함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위 졸고는『월간 조선』, 2024년 11월호(11월 17일)에 제목이「당내 논쟁, 미중 갈등, 시진핑 독재 강화 때마다 '항미원조' 소환」으로 바뀌어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