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자작시 203

故 추동호 친구의 넋을 기리며

故 추동호 친구의 넋을 기리며 산다는 것은 분명 은혜로운 일이지만 고독을 벗 삼아 숱한 밤을 홀로 지샜을 님아 자주 함께 해주지 못해서 죄스럽네. 한때 기품이 가을날 서리 같이 정갈했었지 심성이 여름날 흰 구름처럼 맑았던 친구야 이 화려한 봄날 목련꽃과 함께 떨어졌구나. 달이 자신의 고적함으로 밤을 지킬 때 무연고의 빈소는 그대의 후덕함으로 채워졌네 혼자 가는 길이지만 결코 외롭지 않을 걸세. 천성이 고결했던 나의 친구여 잘 가라! 그대와 같이한 찰나의 세월, 우린 잠시 떠 있던 덧없는 낮달을 보았노라 그렇제? 소싯적 친우 동호야 애잔한 그 눈빛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걸세 이승에서의 고뇌를 다 내려놓고 편히 쉬시게! 2023. 4. 12. 16:23 초등, 중고등 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를 먼저 보내고 ..

인식의 가식이거나 관성

인식의 가식이거나 관성의 세뇌 똥은 똥이고 씹은 씹일 뿐이다 그런데 비속어라고 언론에서 못쓰게 한다 대신 '대변'과 '성관계'나 '섹스'를 써란다 한자어와 외국어는 정상이라는 소리다. '똥'은 더럽고 '대변'은 깨끗한가? '똥'이라 부르면 쿨내가 진동하고 '대변'이라 부르면 똥에 향내가 나는가? '씹'은 추하고 '성관계'와 '섹스'는 고상한가? '씹'이라 부르면 쾌감이 생기지 않는가? '섹스'라 부르면 오르가즘에 다다르는가? 생명체의 자연스런 생리현상을 뜻하는 것임에도 왜 순우리말은 상스러운 걸로 낮춰보고 한자어나 외래어는 고상한 것이라 생각할까? 미국에선 sex, poop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이 단어들은 저속하지 않다는 것인가? 미국인들도 저질이라는 소린가? 집단무지에 이끌려 터부시 당하는 우리말들 세..

루앙프라방의 새벽

루앙프라방의 새벽 어둠이 물러가기 전 탁발승 행렬이 수행 소요로 전생 업보들을 풀어낸다 저마다 사연들은 묵언에 묻어두고 나눔과 재분배로 잠시나마 펴지는 사바세계. 존재에 대한 연민에 붉어지는 눈시울 보시로 찰나나마 넉넉해지는 자비심이 하늘빛 물들이는 메콩강의 물안개처럼 이방인의 영혼을 촉촉이 적신다. 날렵히 뻗은 용마루 위로 동이 트는데 동자승들이 치는 法鼓의 법음, 사원 앞 꽃 파는 소녀의 미소, 아침 시장의 웃음 짓는 아가씨, 부처의 應身들이 세상소리를 보고 있다. 누구에겐 오지 않는 루앙프라방의 새벽은 경건함과 자기성찰의 바닥 모를 늪이다. 2023. 2. 5. 05:01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雲静 위 졸시는『純粹文學』통권 362호(2024년 1월)에 게재됐습니다.

登幸州山城而讚忠莊公(행주산성에 올라 권율 장군을 기리다)

登幸州山城而讚忠莊公 壬辰亂累卵危時 君逃却忠臣救國 海有舜臣陸有慄 幸州城瑞氣中矎 男追義何競功名* 勵卒此語公精神 忠臣稀奸者得勢 望公忠義成師表 행주산성에 올라 권율장군을 기리다 누란처럼 나라가 무너질 임진난 위기에 임금은 도망쳤는데 충신이 나라를 구했지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뭍엔 권율이 있었네 청사에 빛날 행주산성이 瑞氣에 눈부시구나! 남아는 의로움을 쫓지 어찌 공명을 다투겠는가? 병사들 독려한 이 말이 공의 정신이거늘 예나 지금이나 충신은 드물고 간자가 득세하는데 공의 충정과 의기가 만고에 사표가 될지어다. 2023. 1. 17. 오후 행주산성에서 착상 1. 18. 05:32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작성 *위 졸시 중 제5행의 男追義何競功名은 행주대첩 당시인 1593년 2월 권율 장군(1537~159..

여운과 여백 있는 연말이 되길!

꾸루모닝구! 이제 내일이면 이 해가 넘어가는 마지막날이다. 해는 겨울 "망개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지듯이 떨어진다. 이런 저런 생각에 새벽녘이 돼도 잠이 오지 않아서 뭔가 눈앞에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로 끌적거리다 보니 하이꾸(俳句) 몇 수가 지어졌다. 일본의 하이꾸는 반드시 계절을 알리는 단어('季語'라고 함)를 넣어 3행의 총 17자(각 행은 5•7•5자)로만 써야 하는데 짧기가 세계 최고인 정형 단시다. 생각의 여운과 여백미가 생명인 하이꾸 졸시들을 감상하시면서 마지막 해가 넘어감에 여백이 남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올린다. 季語는 冬, 枯れ野原, 年の暮れ, 乙子月, 吹雪 등을 사용했다. 冬の夜 夜泣きする▶よなきする 宿無の猫▶やどなしのねこ 冬が眠る▶ふゆがねる 겨울 밤 밤울음 우는 집 없는 고양이 겨..

상어야 미안하다

상어야 미안하다 상어는 부레가 없어 지느러미로 쉼 없이 헤엄친다 그래야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 바다에 버려진 상어는 지느러미만 모두 떼이고 고통스럽게 흐느적대다 이내 죽고 만다 그렇게 죽어가서 지금 멸종위기다. 상어들이 비명도 없이 죽어갈 때 인간들은 값비싼 '샥스핀' 요리를 즐긴다 스프에 쳐진 양념 맛인 줄도 모르고 지느러미 맛이 아니란 걸 모른 채 상어멸종이 자기와 뭔 상관이란 듯이. 상어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한 때 모르고 나도 샥스핀을 맛있게 먹었어. 2022. 9. 8. 12:1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대단한 가문

대단한 가문 뉘집인진 모르겠다만 대단한 가문이다 후손들이 저리도 조상을 잘 모시니. 중시조인 듯 봉분묘가 맨 위에 자리하고 그 아래로 차례차례 후대 조상 비석들이 묘들과 함께 빼곡히 들어서 있다 땅속 파고들다 만 벙커버스터 미사일처럼 여러 기가 산자락 곳곳에 꼿혀 있다. 공명도 좋고 人死留名도 좋다지만 혈이 뚫린 땅이 아프지 않을까? 말 없는 신음 소린 듣지 못하는가? 세월 지나면 다른 후손 묘비들은 어쩌나? 산자락 아래 마을에까지 앉히려나?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누구나 남기고 가는 한 줌 가루 동해바다에 뿌린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따라 누울 자리도 그곳이다. 2022. 8. 27. 15시경 직관 8. 28. 04:02 옮겨씀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

경계인

경계인 이 땅에선 직언하는 자는 죄다 警戒人이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설 수 없는 의심스런 境界人 회색지대가 없어 마음 둘 곳 없는 驚悸人이다. "정부미" 땐 바른 말 많이 해서 좌파로 몰렸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맡은 바 일을 잘 해도 왜 국민세금 낭비하냐 말하는 순간 빨갱이가 된다. "국뻥부" 다닌다고 진보측에선 우파로 봤다 처음 만나 호감 갖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내미는 명함을 보면 슬그머니 얼굴을 돌려버린다 심지어 좌파로 가장한 우파 프락치로도 봤다. 그런 세월을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만큼 살았다 퇴임 후에도 똑 같이 취급당한다 이마엔 천형처럼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 패거리들의 집단 무지와 탐욕에 설 자리를 거세당한 비감과 통한의 날들 산다는 게 뭔지 서글퍼지면 보슬비마저 재키나이프마냥 속을 저미고..

茶山의 유배시 '獨坐'에 답하다

茶山의 유배시 '獨坐'에 답하다 獨坐 旅館蕭寥獨坐時 竹陰不動日遲遲 鄕愁欲起須仍壓 詩句將圓可遂推 乍去復來鶯有信 方言忽噤燕何思 只饒一事堪追悔 枉學東坡不學棋 裊娜煙絲寂歷中 春眠起後野濛濛 山雲遠出强如月 林葉自搖非有風 眼向綠陰芳草注 心將槁木死灰同 縱然放我還家去 只作如斯一老翁 홀로 앉아서 쓸쓸한 빈 여관에 홀로 앉아 있는데 대나무 그늘은 꼼짝 않고 해는 더디네 향수가 도지려는 걸 억지로 눌러놓고 지어놓은 싯구들을 다듬는다. 잠시 갔다 다시 오니 꾀꼬리는 소식이 있는데 제비는 무슨 생각인지 입을 다물어버리는구나 두고 두고 후회가 되는 한 가지는 소동파를 배우느라 바둑을 못 배운 거라네. 늘어진 버들가지는 적막 속에 있는데 봄잠에서 깨고보니 들빛이 어둑 어둑하고 먼 산에 구름이 걷혀서 달이 뜬 듯 환하구나 나뭇잎이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