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자작시 205

故 추동호 친구의 넋을 기리며

故 추동호 친구의 넋을 기리며 산다는 것은 분명 은혜로운 일이지만 고독을 벗 삼아 숱한 밤을 홀로 지샜을 님아 자주 함께 해주지 못해서 죄스럽네. 한때 기품이 가을날 서리 같이 정갈했었지 심성이 여름날 흰 구름처럼 맑았던 친구야 이 화려한 봄날 목련꽃과 함께 떨어졌구나. 달이 자신의 고적함으로 밤을 지킬 때 무연고의 빈소는 그대의 후덕함으로 채워졌네 혼자 가는 길이지만 결코 외롭지 않을 걸세. 천성이 고결했던 나의 친구여 잘 가라! 그대와 같이한 찰나의 세월, 우린 잠시 떠 있던 덧없는 낮달을 보았노라 그렇제? 소싯적 친우 동호야 애잔한 그 눈빛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걸세 이승에서의 고뇌를 다 내려놓고 편히 쉬시게! 2023. 4. 12. 16:23 초등, 중고등 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를 먼저 보내고 ..

샛별 부부

샛별 부부곁에 있어도 한 세월떠나가도 한 세월육신이 떠나면먼저 가는 부는 뒤돌아보지 마라남겨진 부는 눈물을 보이지 마라中陰神이 구천에서 떠돌지 않도록먼저 간 이가 기억에서 희미해지고몸이 떠났다는 생각도 떠나고 나면무엇으로 살아 갈까?원앙 같은 한쌍이라도,궁합이 찰떡 같은 부부라 해도세상 인연 다하면 저마다 혼자 간다새벽 하늘에 홀로 지는 샛별처럼2022. 8. 11. 13:30포항 달전 기차역 대합실에서 문득 떠날 걸 생각하니 떠올라서 쓰다.雲静 초고

루앙프라방의 새벽

루앙프라방의 새벽 어둠이 물러가기 전 탁발승 행렬이 수행 소요로 전생 업보들을 풀어낸다 저마다 사연들은 묵언에 묻어두고 나눔과 재분배로 잠시나마 펴지는 사바세계. 존재에 대한 연민에 붉어지는 눈시울 보시로 찰나나마 넉넉해지는 자비심이 하늘빛 물들이는 메콩강의 물안개처럼 이방인의 영혼을 촉촉이 적신다. 날렵히 뻗은 용마루 위로 동이 트는데 동자승들이 치는 法鼓의 법음, 사원 앞 꽃 파는 소녀의 미소, 아침 시장의 웃음 짓는 아가씨, 부처의 應身들이 세상소리를 보고 있다. 누구에겐 오지 않는 루앙프라방의 새벽은 경건함과 자기성찰의 바닥 모를 늪이다. 2023. 2. 5. 05:01 라오스 루앙프라방에서 雲静 위 졸시는『純粹文學』통권 362호(2024년 1월)에 게재됐습니다.

장기천 둑방길

장기천 둑방길 꽃 다운 나이에 장기로 시집온 외숙모 시집살이 수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남 모르게 애가 탔다. 칠거지악 인식이 남아있던 그 시절 시댁식구들이 씨받이 후사를 얻으려 하자 말 없이 어린 생질 손 잡고 시댁 큰집이 있는 용전으로 가는데 서편제 소리가 허공에 흩날리고 허허벌판 장기천 둑방길엔 샛바람이 찼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고희를 눈앞에 둔 생질에게 날아든 황망한 부고 한 통 외숙모 상이 이미 치르졌다는 말에 부슬부슬 비 내리는 선창가에서 종일토록 둑방 걷던 새색시 고운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구룡포항엔 겨울 보슬비가 그칠 줄 모른다. 2023. 1. 14. 05:59 보슬비가 내리는 구룡포 선모텔에서 雲静 위 시는『PEN문학』2024년 5-6월호(Vol. 179)에 발표됐습니다.

登幸州山城而讚忠莊公(행주산성에 올라 권율 장군을 기리다)

登幸州山城而讚忠莊公 壬辰亂累卵危時 君逃却忠臣救國 海有舜臣陸有慄 幸州城瑞氣中矎 男追義何競功名* 勵卒此語公精神 忠臣稀奸者得勢 望公忠義成師表 행주산성에 올라 권율장군을 기리다 누란처럼 나라가 무너질 임진난 위기에 임금은 도망쳤는데 충신이 나라를 구했지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뭍엔 권율이 있었네 청사에 빛날 행주산성이 瑞氣에 눈부시구나! 남아는 의로움을 쫓지 어찌 공명을 다투겠는가? 병사들 독려한 이 말이 공의 정신이거늘 예나 지금이나 충신은 드물고 간자가 득세하는데 공의 충정과 의기가 만고에 사표가 될지어다. 2023. 1. 17. 오후 행주산성에서 착상 1. 18. 05:32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작성 *위 졸시 중 제5행의 男追義何競功名은 행주대첩 당시인 1593년 2월 권율 장군(1537~159..

여운과 여백 있는 연말이 되길!

꾸루모닝구! 이제 내일이면 이 해가 넘어가는 마지막날이다. 해는 겨울 "망개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지듯이 떨어진다. 이런 저런 생각에 새벽녘이 돼도 잠이 오지 않아서 뭔가 눈앞에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로 끌적거리다 보니 하이꾸(俳句) 몇 수가 지어졌다. 일본의 하이꾸는 반드시 계절을 알리는 단어('季語'라고 함)를 넣어 3행의 총 17자(각 행은 5•7•5자)로만 써야 하는데 짧기가 세계 최고인 정형 단시다. 생각의 여운과 여백미가 생명인 하이꾸 졸시들을 감상하시면서 마지막 해가 넘어감에 여백이 남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올린다. 季語는 冬, 枯れ野原, 年の暮れ, 乙子月, 吹雪 등을 사용했다. 冬の夜 夜泣きする▶よなきする 宿無の猫▶やどなしのねこ 冬が眠る▶ふゆがねる 겨울 밤 밤울음 우는 집 없는 고양이 겨..

상어야 미안하다

상어야 미안하다 상어는 부레가 없어 지느러미로 쉼 없이 헤엄친다 그래야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 바다에 버려진 상어는 지느러미만 모두 떼이고 고통스럽게 흐느적대다 이내 죽고 만다 그렇게 죽어가서 지금 멸종위기다. 상어들이 비명도 없이 죽어갈 때 인간들은 값비싼 '샥스핀' 요리를 즐긴다 스프에 쳐진 양념 맛인 줄도 모르고 지느러미 맛이 아니란 걸 모른 채 상어멸종이 자기와 뭔 상관이란 듯이. 상어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한 때 모르고 나도 샥스핀을 맛있게 먹었어. 2022. 9. 8. 12:1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대단한 가문

대단한 가문 뉘집인진 모르겠다만 대단한 가문이다 후손들이 저리도 조상을 잘 모시니. 중시조인 듯 봉분묘가 맨 위에 자리하고 그 아래로 차례차례 후대 조상 비석들이 묘들과 함께 빼곡히 들어서 있다 땅속 파고들다 만 벙커버스터 미사일처럼 여러 기가 산자락 곳곳에 꼿혀 있다. 공명도 좋고 人死留名도 좋다지만 혈이 뚫린 땅이 아프지 않을까? 말 없는 신음 소린 듣지 못하는가? 세월 지나면 다른 후손 묘비들은 어쩌나? 산자락 아래 마을에까지 앉히려나?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누구나 남기고 가는 한 줌 가루 동해바다에 뿌린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따라 누울 자리도 그곳이다. 2022. 8. 27. 15시경 직관 8. 28. 04:02 옮겨씀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 위 졸시는『純粹文學』2023년 6월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