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의 유배시 '獨坐'에 답하다
獨坐
旅館蕭寥獨坐時
竹陰不動日遲遲
鄕愁欲起須仍壓
詩句將圓可遂推
乍去復來鶯有信
方言忽噤燕何思
只饒一事堪追悔
枉學東坡不學棋
裊娜煙絲寂歷中
春眠起後野濛濛
山雲遠出强如月
林葉自搖非有風
眼向綠陰芳草注
心將槁木死灰同
縱然放我還家去
只作如斯一老翁
홀로 앉아서
쓸쓸한 빈 여관에 홀로 앉아 있는데
대나무 그늘은 꼼짝 않고 해는 더디네
향수가 도지려는 걸 억지로 눌러놓고
지어놓은 싯구들을 다듬는다.
잠시 갔다 다시 오니 꾀꼬리는 소식이 있는데
제비는 무슨 생각인지 입을 다물어버리는구나
두고 두고 후회가 되는 한 가지는
소동파를 배우느라 바둑을 못 배운 거라네.
늘어진 버들가지는 적막 속에 있는데
봄잠에서 깨고보니 들빛이 어둑 어둑하고
먼 산에 구름이 걷혀서 달이 뜬 듯 환하구나
나뭇잎이 절로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이 아니지.
눈은 녹음방초를 향해 찾아가지만
마음은 이미 죽은 고목의 마른 재와 같구나
설령 나를 집으로 돌아가도록 놔준다 해도
이젠 단지 이처럼 한 늙은이일 뿐이라네.
茶山 丁若鏞(1762~1836)이 18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는 사실은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그는 말도 안 되는 이유("黃嗣永帛書事件" 참조)로 유배를 당했다. 성리학 이외엔 모든 학문이나 사상(심지어 사상적 계보로 같은 공자학설의 발전적 형태로 볼 수 있는 陽明學까지도!)이 사문난적으로 배격되던 그 시절에 유교를 버리고 서양 오랑캐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공격당하던 서학, 즉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였다.
아니, 실상을 말하면 다산이 나중에 천주교를 떠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정조의 총애를 받은 그를 제거해야만 남인 세력을 뿌리 뽑는 것이라고 믿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에게 정치 보복을 당한 것이었다. 당시 남인 계열의 양반 외에 대부분의 사대부들에게 천주교 신앙은 노론 세력이 주자학을 학문에서 종교적 수준까지 격상시켜 교조화 한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됐다.
이런 배경에서 다산은 이벽, 이승훈 등과 교류하면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요한이라는 세례명도 받았지만, 한 때 사학계에서는 다산이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다는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나중에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배격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배교로 돌아섰다. 그러나 다산이 비록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학으로서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부풀려져서 1791년부터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이다. 더 중요한 본질은 다산이 조정에서 널리 인재로 인정되었지만 그가 속한 남인이 당쟁에서 패한 게 문제였다는 사실이다. 남인이었기에 당시 최대 권력집단이던 노론에게 정치적으로 핍박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산이 가고 없는 지금 내가 다산의 원통함이나 노쇠함을 어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을 풀어주거나 상쇄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낙심한 듯한 다산의 심사가 손에 잡히는 위 시 한 수를 읽으니 그가 귀양살이 끝에 얻은 심신의 피폐함, 갉아 먹힌 세월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위로하거나 공감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뿐이다.
지금이야 죄를 지으면 국가가 국민세금으로 죄수를 거둬주지만 옛날에는 유배도 자기 돈으로 갔다. 돈 없으면 유배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이었다. 다산 역시 나라의 녹을 먹었다지만 여느 사대부처럼 재산을 긁어모으질 않아서 가산이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의 안위를 가장 먼저 신경 쓰고자 한 민본사상에 철저했던 다산이었기에 눈 먼 엽전과 재물엔 마음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의 목민관을 보면, 그가 입따로 몸따로 노는 "따로국밥"의 지식인이 아니었으니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요즘 한국 정치인들이 겸손하게 배우고 열심히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그래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다산은 제대로 입지도, 족하게 먹지도, 안온하게 거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추론이다. 또 궁핍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그래도 한양보다는 가까운 소흑산도에 유배 가 있던 둘째 형 약전의 안위를 생각하느라 마음도 편치 않아 속도 많이 끓였다. 위로 약현, 약전, 약종 세 형들 중 셋째 형 정약종만 끝까지 천주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아서 순교를 택했고, 이복형제로서 맏이였던 정약현은 천주교를 믿지 않아서 조정의 대대적인 천주교 신자 탄압시에 다행히 화를 면했다. 하지만 둘째 형 정약전은 다산이 강진에서 귀양살이 할 때 같은 시기 서해의 고도 소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나의 고향 포항사람들은 하나 기억해두면 괜스레 흡족해져서 마음이 조금 살찔 수 있는 게 있다. 다산을 아끼던 정조 붕어 후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다산은 셋째 형 약전과 함께 모진 국문 끝에 겨우 사형을 면해 각기 경상도 장기현(현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됐다. 장기현은 일찌기 1675년 3월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유배된 곳이었는데 다산은 이곳 송시열의 서원을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다. 100년이 더 지난 일이었지만 송시열이 허목, 윤후 등의 남인들과 벌인 예송논쟁의 감정적 앙금이 후손들 사이에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카 사위 황사영이 체포됨에 따라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돼 두 형제는 다시 유배지로 들이닥친 금리들에게 호송돼 모진 문초 끝에 다시 강진과 소흑산도로 유배지가 결정되고 함께 나주읍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진 栗亭店이라는 곳에서 각기 강진과 소흑산도로 가게 됐다. 목포와 강진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었던 율정점에서 두 형제가 눈물로 헤어져 형은 소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향했던 것이다. 1801년 11월 하순이었다.
다산은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과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마련하느라 충분치 않은 돈도 적잖이 썼을 것이다. 물론, 그나마 다산이 자기 외가가 있던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던 게 큰 다행이었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하고 커다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조건 중의 한 가지였다.
당시 다산의 외가 해남 윤씨네는 학문을 숭상한 집안이어서 그런지 대단한 장서가였다고 한다. 지금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다. 해남 윤씨 집안이 孤山 윤선도(1587~1671) 때부터 골수 남인 집안이었던 걸 보면 다산은 외가의 영향도 컸던 모양이다. 지금도 이 집안에선 손수 각종 서적들을 수집해서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윤선도와 고산의 증손 恭齋 윤두서(1675~1720)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1759~1791)은 다산의 외사촌이었다.
그런데 다산이 유배를 가서도 약 3년 정도는 보통 때보다 더 괴롭게 지내게 됐다. 그렇게 된 데는 딱한 곡절이 있었다. 하필 강진에 현감으로 부임하게 된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 이안묵(1756~1804)의 증오와 냉대 때문이었다. 이안묵이란 자는 강진 현감으로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라는 자와 꾸며서 대혼저지 기도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던 인물이다. 이런 자가 강진 재임시 동안 다산이 임금을 원망하고 있다고 무고하는 등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서 냉혹하게 대한 까닭은 보나마나 다산이 서학 추종자의 형제인데다 붕당까지 남인이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거나 괘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안묵이 강진현감으로 재임한 3년은 다산에게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고을 사람들 중 모두가 그를 피하고 해서 "문을 닫아걸고 죄수처럼 머리도 빚지 않고" 처절하게 혼자 학문의 세계에 깊이 빠져 시력도 나빠지고 왼쪽 어깨 마비증세까지 오고 있었다.
다산을 진짜로 괴롭힌 자는 이안묵 외에도 또 두 사람 더 있었다. 서학 문제로 다산과는 원수가 돼버린 이기경과 서용보였다. 특히 서용보는 다산이 관직이 끝날 때까지 괴롭혔다. 악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이 1794년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경기도 북부지역 고을의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 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킨 게 화근이었다. 파직된 서용보가 부활하여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르면서 죽을 때까지 다산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서씨야!
더군다나 참으로 안타깝고 가관이었던 게 정약용 형제를 공격한 노론 벽파가 나중에 조정의 당쟁에서 몰락했음에도 당시 정국이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다산의 유배 사실을 잊어버리고 풀어주지 못한 것이다. 다산의 실력과 사람됨됨이를 보고 그를 끔직히도 아꼈던 정조가 살아 있었더라면(당연히 다산이 애초부터 귀양을 갈 일도 없었겠지만!), 아니면 정조의 증손자인 개혁 성향의 군주 헌종이라도 빨리 즉위했었더라면 다산은 조금 더 일찍 방면됐을 것이다. 정조는 젊은 시절부터 조정의 회식 술자리든 뭐든 개인적인 자리에까지 자주 다산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군신 간이었음에도 격의 없이 언어유희로 내기도 벌인, 요즘 말로 신의가 두터운 "소울 메이트"인 셈이었는데 바람막이가 돼준 정조가 죽는 바람에 다산이 핍박을 받은 것이다.
아뭏든 이런 우여곡절 때문에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순탄치 않았던 귀향살이로 몸도, 마음도 피폐되고 기가 고갈된 상태였다. 게다가 강진 유배 이듬해 겨울엔 네 살배기 넷째 아들 농장도 죽는 불운이 닥쳤다. 벌써 네 번째로 잃는 아들이었고 딸까지 합하면 다섯 번째 잃은 자식이었다.
그럼에도 다산은 조선사상사에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괄목할 전적들을 남겼다. 그것은 강진 유배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음을 다스리며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 시기 先秦시대, 즉 중국 한나라 이전의 원시 유학에 천착해서 기존 주희의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위 시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소동파를 배우느라 바둑도 못 배웠을 정도로 학문에 집중했다. 학문적 성과는 그런 데서 나온다. 이 대목이 내가 다산을 위대한 인물로 칭송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삶을 비감 어리게 보는 이유다. 물론, 요즘 현대 학문은 그 시대와 달리 방법론과 주제와 대상이 많이 다르다. 그래서 나 역시 외국사에 관한 한 상당한 평가를 받은 저서들도 있다. 그 중에 한 책은 한 사람이 2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써내기란 "100년이 가도 이런 책은 나올 수 없다"는 평가도 받았다.
권력, 이념(종교 기능도 포함), 경제적 부가 분화되지 않고 사대부 한 몸에 집중된 이른바 미분화된(fused society) 조선사회에서 과거로 등용된 학자가 정치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산도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래서 다산이 법과 형사재판 그리고 법의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건 크게 어필할 게 아니다. 오히려 눈여겨 볼만한 것은 그가 주자를 가장 높이 평가한 유학자였으면서도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받아들여 '論語古今註'라는 논어 주석본의 통합본을 펴내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주석을 다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의 선비들이 우습게 본, 일본이 자랑하는 근세 유학의 대표적 유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같은 일본 유학자들의 해석까지 참고한 것은 대단히 높이 살만하다. 다산은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거의 모두 주자의 해석을 따르기만 할 뿐 주자를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과감히 넘어서려고 했으니까! 게다가 조선 사대부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한 일본인 유학자의 학문성과까지 참고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학문하는 자세는 바로 그래야 된다! 근년에 들어와서 우리 유학계에서 다산의 유학관을 주자에서 다시 공자로 회귀한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문에 무슨 소중화나 오랑캐 같은 신분에 따라 深淺이나 결이 달라지겠는가 말이다.
다산은 건축학, 지리학에도 손을 댔을 뿐만 아니라 언어학자, 아동교육학자이었음은 물론, 심지어 종두법을 다룬 의학서 마과회통(1797년 완성)과 촌병혹치(1801년 유배지인 장기에서 집필)까지 펴낼 정도로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처럼 다산은 탁상공론을 지양하고 학문의 실용적 기능과 효용을 추구한 실학자였으니 이 어찌 보통의 평범한 학자라고 하겠는가? 스승 없이 홀로 공부한 다산이었지만 성호 이익 선생의 학통을 이어 받은 권철신을 통해 사변에서 벗어난 성호의 실천적 실학 사상을 접하고난 뒤부터는 그를 스승으로 받든 결과 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시서가 융섭, 회통된 문학작품들까지 적지 않게 빚어 냈으니 역량이 출중한 시인이자 저술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목해야 될 부분이 있다. 당시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한 조선의 양반들이 자신이 사는 집도 하나 못 짓는 주제에 하늘이 어떻고, 도가 어떻고 하는 추상적인 가치에 매몰돼 공상론에 빠져 있었는데 다산은 그들과 질적으로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다. 건축 분야만 해도 1792년 그가 홍문관의 수찬(修撰, 정6품 벼슬)으로 있으면서 정조대왕이 청나라에서 수입해온 기기도설을 토대로 거중기와 녹로(轆轤)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까지 참고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던 수원의 화성수축에도 기여한 건 잘 알려져 있다. 또 다산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설계한 정조의 화성 행차시에 건너가도록 한 배다리는 어떤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위 시에서 담담하게 표현돼 나와 있다. 다산 스스로도 이제 나라에서 자기를 방면해줘도 더 이상 기력이 없어 마음은 이미 죽은 고목의 마른 재와 같고, 안 그래도 160cm를 갓 넘은 작은 키에 몸이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인네라고 탄식하고 있다. 이를 보고 어떻게 평심하게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이 대목에서 나는 남의 일 같지 않게 찌릿찌릿 마음이 저려온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애오라지 다산에게 그의 넋이라도 위안 받을 수 있도록 시로 답하는 일 뿐이다. 다산은 우리가 쓰고 있는 현대 한글을 잘 모를 테니 결국 한시로 화답할 수밖에 없다. 난들 다산 시대의 글말과 어법을 제대로 알겠는가? 다산이시여! 운과 측을 무시하고 쓰는 날림 한시라고 탓하지는 마시라. 형식보다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게 본질이니!
答詩獨坐
流放後身心疲弊
此句允令人揪心
無處安放花盛開
今日想高呼唤君
被解放爲何無意
誰也都老去死去
留何物死才大矣
我愧於茶山留功
詩 獨坐에 답한다
유배 끝에 심신이 피폐해졌다니
이 대목이 참으로 가슴을 저미게 하네
마음 둘 데 없어도 꽃들은 만발한데
오늘은 그대를 큰 소리로 부르고 싶구나.
유배에서 풀리는 게 왜 의미가 없겠는가?
누구든 늙어서 죽어갈 터이지만
무얼 남기고 가는가가 중요하지
다산이 남긴 功績에 나는 부끄러울 뿐이라네.
그나마 그래도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엔 강원도 등지를 거쳐 끝에 가선 그리운 고향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오늘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본가에서 20년 가까이 살다가 눈을 감은 게 다행이다. 1836년(헌종 2년) 4월 7일, 향년 73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고희를 넘기기까지 했으니 장수가 드물었던 당시로선 그 또한 작은 위안거리다.
나도 지금 약동하는 봄기운에 밖으로 뛰어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눌러놓고선 다산처럼 혼자 앉아서 싯구를 다듬고 이 잡글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산이 산 귀양살이에 처한 건 아니지만 분답은 군중 속에서 유배와 진배 없는 심리적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2022. 4. 10. 13:1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왜 사는가? >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중 속의 고독 (0) | 2022.06.29 |
---|---|
덧없는 사죄 (0) | 2022.04.30 |
그리움이란 이런 건가요? (0) | 2022.03.13 |
꿈결의 신라 천년 (0) | 2022.02.01 |
습작 영시 No title (0) | 2022.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