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습작시 57

습작의 현장 : 하이쿠에서 한글시로

습작의 현장 : 하이쿠에서 한글시로 구텐모르겐! 2016년 9월의 초가을, 베트남 하노이 대학 주최 한베 학술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한 뒤 같이 간 일행들과 함께 하노이 인근의 攀龍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다. 가는 곳마다 경승지도 멋졌지만, 일행들과의 담소와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그 중 에피소드 한 토막! 얘기를 나누던 중 어떤 나이 지긋이 드신 분이 과거 자신의 인생역정을 얘기하면서 빵 터지는 폭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자신은 뭐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그런 경험을 영화로 찍겠다고 하면서 제목은 “이것도 인생이야”라고 짓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젊은 시절 건달 생활을 했다는 그 분이 말씀하신 앞뒤 맥락을 생략해버려서 퍼뜩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암튼 이 표현이 재미가 있어 즉석에서 이를 주제로 ..

할슈타트 호수

할슈타트 호수 속이 훤히 비치는 비단옷 차림의 할슈타트 호수 인형처럼 앙증맞은 호반의 집들 동화 속 나라가 여기가 아닐까? 전체 풍광은 달라 보여도 부분 부분은 한국에도 있는 것들이다. 바닥 보이는 맑은 호숫물은 백두산 천지에도 있고, 떼 지어 노니는 백조들은 주남저수지에도 있고, 쫄쫄 녹아내리는 얼음물은 설악동에도 있고, 맑고 푸른 쪽빛 하늘은 독도에도 있고, 물가 미니어처 같은 집들은 제주도에도 있다. 그런데 그런데 할슈타트 호수가 이리도 아름다운 까닭은 호수가 자신인양 자기운명과 동일시하는 사람, 자기 집처럼 가꾸며 사는 그 사람들 때문이리라. 2020. 1. 15. 09:17 오스트리아 할슈타트(Hallstatt) 호반에서 雲靜

구룡포 사람들

구룡포 사람들 구룡포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산다 하나 같이 묘하디 묘한 바다다. 겉만 보면 데퉁바리들 같아도 진망궂지는 않지라 때로 집채만 한 파도가 되다가도 이내 살랑살랑 노을이 되고 어쩌다 거친 말들이 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껄껄댄다. 내가 아는 구룡포 사람들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바다다 늘 봐도 물리지 않는 바다다. 2019. 12. 6. 09:33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내가 사는 건

내가 사는 건 내가 사는 건 구룡포 아침바다 때문이다 평생 고래처럼 씹지 않고 술을 마셔도 쉬이 늙지 않고 되려 정신이 이는 건 전적으로 그곳 아침바다 덕분이다. 그곳 아침바다는 천둥치는 정적 속 묵비의 성찰이라 가식과 아귀 같은 탐욕들에 숨이 막혀 도저히 맨정신으론 몸 가누지 못할 때 우주요, 저녁밥이요, 해장술이다. 나는 구룡포 아침바다 때문에 산다 다 사는 이유가 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2019. 12. 6. 09:21 북한산 淸勝齋 雲靜 2021. 1. 17. 11:46 수정 북한산 淸勝齋 雲靜

이문재 시인의 시 '농담'에 거는 농담

오늘 아침 경향신문사 사우회 단톡방에 어느 분이 이문재 시인의 시를 올렸기에 그에 대해 화답글을 올렸다. 농담/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멀대 이문재 시인에게 하는 농담/멀대 서상문 가끔씩 구성진 술을 혼자서 마실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멀대 얼굴이 떠오른다 멀대는 술이 당기게 한다. 혀가 뱀처럼 감기는 술 잔을 받아 들면 자주 멀대가 생각나니 멀대는 멀대를 사랑하는가 보다. 천지 봄꽃에 취하거나 화사한 가을단..

詩와 散文 사이 : 박복한 삶, 그래도 고맙다!

詩와 散文 사이 : 박복한 삶, 그래도 고맙다! 세상 어디를 다녀 봐도, 누구를 만나 봐도 나만큼 때 묻지 않은 사람 흔치 않고, 나만큼 마음 비우고 사는 사람 보지 못했다네. 출세하려고 이 눈치 저 눈치 본 바 없고 이익을 쫓거나 기회를 잡으려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 적 없었네. 감투 쓰는 거 좋아하지 않아 쓰라는 감투 마다 한 게 여러 자리였고, 자리에 연연해하지도 않았으며, 부러질지언정 의롭지 않는 일에 낭창낭창 휘감긴 적도 없었네. 나만큼 세상 욕심 내지 않고, 나만큼 보이지 않게 상대를 배려하며 사는 사람도 드물더라. 무슨 상 하나 받으려고 꼼수 부릴 생각은 애시 당초 없었다네. 남들이 출세하고 힘 있고 돈 자랑하는 친구 쫓아다닐 때 나는 못 배우고 힘없고 못 사는 친구 찾아가 같이 술..

가을 客談

가을 客談 칸트와 헤겔은 어렵다 말로써 말을 짓는다 내가 볼 게 아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쉽다 공자와 맹자는 더 쉽다 말로써 말을 죽인다 아주 아주 쉽다 반년이면 절로 깨쳐진다. 노을 지고 낙엽 지는 뜻을 알기란 칸트와 헤겔 이상이다 깨치는데 반평생 걸렸다 노을이 되고 낙엽이 되기란 관념과 말을 넘은 경계 노을은 노을이다 낙엽은 낙엽이다 내가 노을이고 노을이 나다 낙엽이 나고 내가 낙엽이다 나는 나다. 2016. 11. 15. 09:27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