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습작시 57

시인

시인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다 똥도 누지 않고 사는 줄 알았다 삿기라곤 없는 사슴눈처럼 마음도 생각도 선한 줄 알았다 가식만큼은 없는 탈속초인이 아닌가? 시집엔 미사여구란 다 있다 윤리와 양심도 번지레하다 시집 한 권 팔기 위해 짓는 비굴한 웃음 세상일은 뒷전 자기일이 세상일 명욕에 취해 사는 잉여인간 시인마저 그러니 누가 누굴 믿겠는가? 이슬만 먹지 않고 풀도 뜯는 노루가 있듯 토끼를 못살게 구는 못된 토끼도 있듯이 시와 달리 언행은 개차반으로 살면서 뱀의 혀로 말로써 말만 먹고 산다. 시인 없는 시인 고갈 시대에 시인은 아직도 낯 두껍게 살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뱀장어처럼 2021. 8. 12. 07:18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환선굴 Ⅱ

환선굴 Ⅱ 누에가 뽕잎사귀 갉아 먹듯이 어둠이 빛을 먹어치우는 곳 시간이 자랄 엄두를 내지 못했을 때 침입자가 되려 신선이 됐다는 환선굴 신선은 없고 인간의 이기심만 박쥐처럼 붙어 있다. 빛속에 들려오는 칠흑의 신음 소리 조물주도 모르는 갈피 갈피에서 晦冥이 격한 고통을 쩌억 쩍 뱉어내고 있다. 2021. 8. 10. 17시경 삼척 환선굴 안에서 착상 8. 12. 08:23 북한산 淸勝齋에서 정리 雲靜

남녀차별

남녀차별 여자 공중화장실에 남자가 들어가면 비명이다 그곳을 청소하는 이가 남자라면? 여성들은 잘 나오지 않을 거다 아예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을 거다. 남자 공중화장실에 청소하는 이는 아줌마다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란 말인가? 남자들은 알고도 선뜻 들어가긴 하나 군소리 없이 잘 나올까? 세계 최고라는 '코리아'의 화장실 비명과 침묵의 공간 오늘도 고집스럽게 선남선녀를 차별한다. 2021. 6. 23. 08:49 도봉구 쌍문역 남자화장실에서 초고 6. 24. 06:05 자구 수정 雲靜

조문

조문 어제 못 간 조문 이른 새벽에 간다 오늘 출상인데 친구는 얼마나 가슴이 먹먹할까? 춘부장께서 건강하셨다는데 왠 변고인가! 얼굴은 뵌 적 없어도 생전에 인연이 없었을 리가 없다 인파 속에서 스쳐 지나갔거나 차안 옆자리에 앉았을 수도 있다 부채의식 없이 가는 문상 "한 세월 잘 사셨습니다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세요 천국에 가시면 제 선친께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이젠 신이 되셨으니 제 이름도 아실 거잖아요." 가신 이는 여한이 없다 해도 자식은 한이 되듯 한껏 죄스럽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남은 이들끼리의 위안 잘 살라는 게 가시는 어른의 뜻일세 다음은 우리 차례라네 영안실 나서자 눈앞에 어른거리는 환영들 출근길 사람들 걸음이 분주하다 아버지가 잘 드셨던 막걸리가 몹시도 땡기는 어지러운 아침 2021...

성공

성공 있잖아 고등학교 시절 싸움질도 적잖게 했고 정학도 서너 번이나 먹었으며, 잘리기 직전 학교를 옮긴 것도 사실이야 설령 "문제아"였다 해도 길어봤자 그때 3년 긴 인생길에서 한 점에 불과하다네 세월이 흘러 짧지만 기자 생활도 해보고, 유학 가서 박사학위도 따고, 공무원 고위직 연구원도 되고 보니 잘 됐다고 다시 봐주는 이도 있지만 여전히 그 시절 눈으로 보는 이도 있었어 애초부터 타고나기를 정도 많고, 배려심도 없지 않고, 정의롭게 사는 게 천성이어서 이미 그 시절 그 자체로 잘 돼 있었는 걸 남들이 말하는 "성공"은 성공이 아닐세 타고난 덕성 변치 않고 살아 온 게 성공이지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다르다네 문제가 있다면 누구에게 있겠나? 내겐 늘 하늘 올려다보는 일밖에 없어 그때나 지금이나 2021..

李君아 미안하다

李君아 미안하다 중학교도 알바로 힘들게 마쳤고 지금도 알바 아니면 졸업을 못 한단다 부모님이 계신다지만 각기 밤낮으로 일 다니느라 얼굴도 못 본단다 여기까지 들었을 땐 "그런 가정이 어디 한 두 집이냐" 싶었다. 그런데 "선생님, 뭐 먹을 거 없어요?" 가끔씩 몰래 집사람 찾아와서 묻는단다 택배 상하차든 뭐든 닥치는 대로 새벽까지 일하니 학교에 가서도 허기가 지는 모양이다 한 번도 본 바 없는 이군* 얼굴이 어른거린다 편의점에서도 알바한 지 수년이 되다보니 물건 살지 안 살지 손님을 척 보면 안단다 이 말에 가슴이 미어진다. 부동산투기 한 번으로 수억씩 챙기는 세상 자식 같은 아이들 노동력 착취하는 어른들 내가 어른이란 게 오지게도 부끄럽구나 나도 이 세상의 무능한 기득권이 돼버렸네 이군아 정말 미안하다..

생각 좀 해보게나

생각 좀 해보게나 도와주고 대접 받는 식사, 당연한 걸로 여기지 말게 일한 대가로 받는 급료, 당연한 걸로 여기지 말게 상속 받아 누리는 재산, 당연한 걸로 생각하지 말게 생각 좀 해보게나 따뜻한 밥 한 끼에 비바람 피할 집에다 호주머니 채울 거 있는 게 왜 가능한지 말이야 늘 마시는 물과 공기, 당연한 걸로 생각하지 말게 살아서 숨쉬고 있는 거, 당연한 걸로 생각하지 말게 생각 좀 해보게나 먹고 마시고 두 발로 걷고 있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어서 고맙고도 고마운 일이 아닌가? 눈물이 피잉 도는 2021. 6. 9. 16:08 합정역발 연신내행 전철 안에서 雲靜

자루

자루 차지 않으면 스스론 못 서는 자루 아득바득 다 채우려고도 않고 차도 서 있을 만큼만 일으킨다 가득 차면 딴 이를 채우게도 한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 못하는 탐욕들 속 빈 자루만도 못한 群像들 넣었다가 종국엔 내놓는 자루 차도 그만, 비어 있어도 그만 머리도 없이 손발도 없이 풀썩 주저앉은 妙有의 空 2021. 6. 1. 16:22 6호선 전철 안에서 雲靜 https://m1.daumcdn.net/cfile300/image/99B256355B98D9193690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