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습작시 57

복어

복어 평시엔 그저 오동통한 것이 위협을 느끼면 배를 풍선처럼 부풀리고 화나면 가시도 핏발 세우듯 곧추 세운다 무시무시한 독은 비수처럼 늘 품고 산다. 위험에 처하거나 홧기를 내뿜을 때 비로소 복어는 복어가 되지만 제 명을 생각하면 복어 아니란 소릴 듣더라도 터질 듯한 풍선 배는 싫다 싫어 가시도 뾰쪽 뾰쪽 치뻗고 싶지가 않아 그게 아녀 제 몸 지키려 용쓸 때 배가 뽀르록 뽈록 포동포동 ‘즈~엉말’ 귀엽잖아!? 본능인 걸 어떡해! 그게 복어인걸 2021. 5. 1. 19:19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草稿

숫돌

숫돌 헛기침 한 번 없다 같이 있어도 있는 둥 없는 둥 다만 단단하고 조금 길고 묵직할 뿐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라!” 천고의 부나방 으뜸 처세들 속에 연옥색 살로 무뎌진 날만 세운다 창호지도 베일만큼 예리하게 날이 서야만 서는 세상 세워도 세워도 무뎌지기만 할 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봐주지 않는다고 불평도 없다. 살점이 뜯겨나가도 신음 한 마디 없고 육신이 닳도록 갈려도 결코 헷갑지 않는 숫돌 인간들 보다 낫다 멀대 보다 훨씬 낫다. 2021. 4. 29. 07:47 북한산 淸勝齋에서 숫돌에 칼을 갈던 중 초고 雲靜

봄앓이

봄앓이 해마다 봄이면 봄앓이를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천지에 흩날리면 눈물도 후두둑 떨어진다 지는 꽃잎이 서럽게 아프듯 가슴이 따가워 펑펑 운다. 아름다운 이 별을 떠날 걸 생각하니 가는 세월 못내 아쉬워서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어서 알아주는 이 없는 세상이 야속해서 꽃이 지니 내가 지고 만다 미련 없는 無化에 미련이 남아 달구똥 같은 눈물을 떨군다. 더러운 세상이 날 찾지 않는 게 아니다 시드럭시드럭 꽃이 져버리듯이 순정한 내가 더러운 세상을 버리는 거다 꽃으로 폈다가 눈물로 버리는 것이다. 2021. 4. 21. 10:5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반성

반성 나는 늘 깨끗하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평생 비리 없고 남을 속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속으로 으쓱했다 부정 한 번 저지르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하다. 허나, 나는 때가 엄청 많은 몸이다 평소 자주 씻지 않으니 어찌 더럽지 않겠는가? 깨끗해봐야 얼마나 깨끗하겠는가? 몸뚱이 자체가 썩어 없어질 오물 덩어리인데! 2021. 4. 5. 23:1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동대산의 봄

동대산의 봄 동대산자락 마디마디에 스며드는 봄 꽃을 피우려고 저토록 바쁘구나 님아 그렇게 허겁지겁 가지 말게 꽃인들 지고 싶어하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세월이 流水라네. 혼자서라도 느릿느릿 뒤로 걷는다 눈이 초롱초롱하던 시절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시절 어느덧 한 갑자도 더 돌았구나 뒤로 걸어도 닿지 않는 곳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왔다네. 꽃이여 지려거든 피지 마소 피려거든 느린 걸음으로 피소 세월아 가려거든 오지 마소 오려거든 소걸음으로 오소. 2021. 3. 23. 15:31 영덕 東大山 爭岩堂에서 雲靜 草稿

둥지

둥지 산중턱 높은 나무 위 둥근 집 한 채 쌔근쌔근 아기가 잠들어 있는 해먹마냥 실바람에도 드레드레 너울대는 전매 없고 전세도 없는 단독주택이다. 아파트 한 채가 싼 것도 수억 넘는 ‘셔플’땅 분양권 딱지 한 장 없이도 혼자서 한입 두입 꿈으로 쌓아올린 집 온 나라가 땅으로 돈 놓고 돈 먹는 야바위판에서 땡전 한 닢 안 들여 지은 보금자리 구파발 57-37번지 텃새네 둥지 내 오랜 이웃에는 친환경 목조 가옥 한 채가 감바리들 보란 듯 나볏이 서 있다 닮고 싶어도 이승엔 안 보이는 스승의 자태 의연히 살라는 말 없는 웅변이다. 2021. 2. 15. 16:32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어무이의 靈

어무이의 靈 쌀쌀한 이른 봄 토요일 귀가길 전철역 입구 시장어귀 좌판에 푸성귀 늘어놓은 여든 남짓한 할머니 백발이 한 올 두 올 바람에 일고 음달에서 족히 한나절은 떨었던지 앙상한 미라 손으로 눈물 훔친다. 값은 묻지도 않고 몽땅 다 샀다 "할머니 이제 떨이 했으니 빨리 들어가 쉬세요!" 숨이 반쯤 죽은 봄나물 가득 든 봉다릴 손에 들고 모처럼 어무이말씀 받든 양 새털 걸음 걷는다. 평생 시장에서 장사하시느라 듬성하게 쉰 머리카락 트고 갈라진 거친 손 가신지 10년이 넘은 울어무이가 시장 입새 한 데에서 떨고 앉아 있었다. 2018. 3. 17 초고 2021. 2. 22. 18:05 구파발역에서 부분 수정 雲靜

파도

파도 무엇이 되지 못해서 무엇이 원통해서 저리도 쉼 없이 암벽을 칠까? 스스로 사정없이 부딪쳐서 이차돈 순교하듯이 칠흑 암벽에 뿌리는 순백의 피 푸른 허공에 부숴지는 포말 새하얀 이 한껏 드러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도돌이로 세상사 모든 게 물거품이듯 대기에 밀린 부질없는 꿈들 유리알처럼 바스라진다. 2021. 2. 13. 16:09 국토의 막내 제주 마라도에서 雲靜

안카핸보

안카핸보 어딜 가든 안카핸 외출할 때도 안카핸 자릴 뜰 때도 안카핸 안카핸이 없으면 못 살어 아직은 안카핸만으로도 살지만 곧 안카핸만으론 힘들 때가 올거야 벌써 그런 나이가 돼 버렸어 머잖아 안카핸보가 될테지 더 지나면 안보카가 되겠지 조금 더 살게 되면 안보만 남겠지 종국엔 필요한 게 없어 분골이 뿌려질 동해바다면 돼 지금은 안카핸 라식수술 잘 되면 카핸이 되겠지만 보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어 아직은 안카핸이야 안경 카드 핸드폰 보청기 어디서든 눈 뜨면 안경부터 찾지 2021. 2. 10. 06:31 아내와 함께 고향 가는 날 구파발발 서울역행 택시 안에서 雲靜

中伏

中伏 중복 전후의 8월초 간이 축 늘어지듯 푹푹 쪄야 함에도 난데없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뙤약볕도 바람에 가려진다. 나야 시원해서 좋다만 일조시수 모자라서 벼나 실과들이 여물지 않은 어딘가 속 타는 농부들에겐 몹쓸 광풍일 터 죄스러워서 먹던 밥이 넘어 가지 않는다 지구별에게 죄스러워서 씹던 과일도 목구멍에 막히고 만다. 2018. 8. 14. 13:26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