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습작시 57

보살심

보살심 대만의 오랜 친구 왕 부인 "내 딸!", "내 딸!" 사랑스럽다며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한다. 손에 물이 묻을세라 발이 땅에 닿을세라 세면 목욕도 손수 시켜주고 매끼 마다 분유까지 떠먹여준다. 40여년 세월 엊그제 같은데 여전히 강보에 누운 채 딸은 말을 못해서 답답한지 움직일 수 없어 갑갑한지 평생 아기여도 재롱 못 떨어 미안한지 때로 눈가가 촉촉해지다가도 젖병 물리면 이내 쌔근쌔근 잠든다. 노처녀 시집 못가서 죄송한지 옹알옹알 옹알이 하다가 엄마가 안아주면 금새 꺄르르 웃는다. 친구는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도는데 전생 과보로 달관한 내친구는 늘 웃는다. 아 숭고한 업보여! 아 거룩한 모정이여! 다음 생은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2021. 10. 2. 18:46 종..

소 팔고 돌아오는 길

소 팔고 돌아오는 길 암소 팔고 받은 돈 20만원 허리춤에 동여매고 돌아서는데 이별인가 싶어 말없이 우는 누렁이 애처로운 눈망울이 떠올라 흥건히 젖는 가슴 취중에도 따가워 비척비척 혼자 돌아가는 월포리 신작로 까악까악 까마귀 울음소리 애달픈 황톳길 핏빛 노을마저 숨 죽여 우는데 지게뿔에 매단 코뚜레만 달랑달랑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태가 넘도록 아침 마다 여물 주고 쇠죽 끊여 등 긁어주며 먹여 키운 피붙이인데······. 적막한 이른 새벽 누렁이가 남긴 텅 빈 외양간에서 소리 죽여 꺽꺽 오열하는 울음 달구똥처럼 떨어지는 눈물 아득한 옛날 옛적 4~50년 전 내 외할배는 소중개사였다 참으로 인정 많고 눈물 많은······. 2021. 10. 1. 10:39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위 졸시는『PEN문학』,..

친구의 경주남산 산행 : 암벽 소나무와 김시습의 시

친구의 경주남산 산행 : 암벽 소나무와 김시습의 시 경주남산 소나무 암벽 틈새로 뻗은 한 떨기 소나무 風雨雪霜에 바툰 자태가 신라 천년의 기상을 품었네. 묵언의 간구로 틀어 앉은 가부좌 碧空에 자지러지는 동자승 미소 霜風高節이 저만치 홀로 높구나. 2021. 9. 23. 13:5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위 졸시는 멀대가 친구 東浪이 경주 남산을 산행하면서 찍어 보내준 아래 사진을 보고 즉흥적으로 읊은 것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내게는 자태 곱게 앉아 있는 '한 떨기' 작약 같기도 하고, 좌선에 들어 삼매에 든 화랑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또한 보내온 사진들 중에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시 한 편이 적혀 있는 안내판도 있다. 덕분에 매월당의 시를 재미있게 감상했다. 아래에 본격적인 해..

테스야

테스야 겁탈 당한 테스가 말한다. "한번 당하면 영원히 당하죠. 그게 세상이에요!" 변함없이 위선과 탐욕이 날뛰지만 지금은 누구든 당하는 세상이야 남의 부인이 된 테스가 자길 찾아온 옛연인에게 말한다. "오늘 밤엔 별도 없네요. 우리 영원히 함께 날아가면 좋겠어요!" 이 땅엔 해와 달이 다 죽고 밑둥 빠진 하늘에 같이 목 맬 동반자는 없어 테스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난 준비됐어요!" 나도 준비 됐어! 독주를 연거푸 털어 넣는다 사랑을 위해 情夫를 죽이고 죽음을 택한다고? 테스야 정신 차려! "Know yourself!" 내키는대로 산 가수까지 테스형을 들먹이고 철학마저 값싸게 농하는 세상에 사랑이라니! 2021. 8. 21. 05:0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매미

매미 수년 간 인고의 탈태 끝에 많이 살아야 달포뿐인 생에서 여름 막바지에 부르는 애절한 구애의 노래 숫컷만 우는 처절한 간구 짝짓기 못하고 갈까봐 몸을 떠는 노총각의 울림 생태계 지속에 제몫은 하려는 숭고한 몸짓 이승에서의 마지막 외침인듯 찌르르르르 매앰 맴메에에에~ 소리 큰 놈에게 혹하는 암컷의 간택 황홀한 분비에 8월이 흥건히 젖는다. 2021. 8. 13. 09:4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거미

거미 망을 치지 않으면 자신이 굶는다 등산길 빈 거미줄엔 이슬만 맺혀 있다. 투명해서 미물들이 걸려든다 어쩌다 나비도 잠자리도 잡히지만 죄다 걸리는 건 아니어서 애먼 날파리 하루살이들만 걸려든다 눈 밝은 벌레는 피해가고 촉수가 발달한 곤충도 비켜간다 몸집 큰 들쥐는 거미줄을 앗아간다. 인간세상이라고 다를 게 없다 힘없는 무지렁이들만 걸려들고 邪曲한 자들은 이리 튀고 저리 빠져나간다 망을 치는 자 누구며 아예 뭉개버리는 자 누군가? 곤궁한 이들만 산 입에 거미줄 친다 빈 거미줄에 맺힌 이슬은 누구의 눈물인가? 2021. 8. 12. 10:57 아침등산 중 북한산 자락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