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87

인연 Ⅳ

인연 Ⅳ 인연이란 마음에 새겨진 마음의 도장인 모양이다. 마음속에 인주로 선명하게 찍혀 있기 때문일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인연이 있다. 당사자들이 원하는 바대로 이뤄지는 것만 인연이라고 할 순 없다. 특히 이성 간의 인연은 만남의 지속이나 결혼의 성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에서 몸은 서로 떨어져도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면 그 또한 인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인연의 대상이란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강도나 진폭이 다른 주관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나에겐 인연이 있다거나, 인연이 없다거나 할 때 그것은 성사에 초점이 맞춰진 건 아니다. 인과 연 그 자체를 말할 뿐이다. 지금까지 나를 거쳤거나, 아니면 스쳐 지나갔거나 한 수많은 인연들 중에 나는 한 인연을 잊을 수 없다. 지금으로부..

자유의 여신상에서 '자유'를 사유하다!

자유의 여신상에서 ‘자유’를 사유하다! 뉴욕! 세계경제의 심장, 금융의 메카이자 세계를 움직이는 곳!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제사 이 도시를 찾았으니까 말이다. 생애 첫 방문이다. 이튿날 날이 밝자 나는 바로 뉴욕의 상징, 아니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부터 찾았다. 자유의 여신에게 고하고 싶은 일종의 신고식을 할 겸해서 '자유'를 추념하기 위해서다. 이 동상의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치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통상 ‘자유의 여신상’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 일찍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여신상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기회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유의 여신상은 대서양에서 미국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왼편이자 뉴욕과..

황희 정승 묘소에서 황희를 다시 본다!

황희 정승 묘소에서 황희를 다시 본다! 일요일 오후, 짧은 겨울 해가 서산으로 막 쓰러지기 시작할 때 나는 아내와 함께 파주시 소재 황희(1363~1452) 정승의 영정이 봉안돼 있는 방촌영당(厖村影堂)과 그 인근에 자리한 그의 묘역을 둘러봤다. 새해를 맞아서 가게 된 계획에 없던 바람 쐬기였다. 이참에 황희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개략적인 삶의 역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이나 시대적 과제가 뭔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터다. 조선 초 태종과 세종 양대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는 자신의 이름 壽老처럼 당시는 아주 보기 드물게 90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남성의 평균 수명이 쉰도 되지 않은 그 시대에 드물게 나이가 너무 많아서 관직에서 물러..

부부의 동상이몽 도선사 방문

부부의 동상이몽 도선사 방문 기도도량으로 이름난 삼각산 도선사를 다녀왔다. 완성해서 넘겨줘야 할 원고가 밀려 있어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가을 단풍을 지금 못 보면 어쩌냐며 아내가 하도 졸라서 같이 갔었다. 말은 맞았다. 정말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이긴 했다. 그런데 막상 도선사에 가서보니 아내의 목적이 따로 있었다. 이걸 안 것은 절 경내에 들어간 뒤였다. 도선사는 빌거나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사찰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나는 처음 와본 절이어서 그렇다는 걸 몰랐다. 아내도 흰 무 같은 크기의 큰 초를 두 자루 사서 각기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적고 소원 내용을 써주는 보살에게 내밀어서 뭔가를 썼다. 양초에다 붙일 종이에 글을 써주는 그 보살이 나에게 “뭐라고 써줄까요?..

노을 속을 달리는 7번국도 북상 드라이브

노을 속을 달리는 7번국도 북상 드라이브 갑자기 웬 동해안 북상? 동해안엔 태풍도 온다는데...그럴만한 사정이 생겼다. 서울에 긴급한 일이 생겨서 고향에 오자마자 일정을 당겨 내일 저녁까지는 서울에 당도해야 할 판이다. 고향의 친한 형이 하룻밤만 더 머물다 가라고 간곡하게 당부해도 어쩔 수 없이 간청도 뿌리치고 야속하게도 짐을 꾸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보다 기왕에 온 휴가 여행인데 하루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돌아가자니 조금 아깝다 싶다. 그래서 미리 오늘 오후에 출발해서 적당한 곳에 가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그 곳에서 한두 곳 정도는 보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 가지 않고 동해안의 7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기로 했다. 북상의 종착지는 어둠에 비례해서 가볼..

해운대 엘시티에서 또 한 번 부산과 현해탄을 품다!

해운대 엘시티에서 또 한 번 부산과 현해탄을 품다! 여행 3일째, 우리는 부산 해운대로 달렸다. 등장인물은 교체 없이 어제의 네 사람 그대로다. 역할도 바뀐 게 없다. 볼거리를 정하고 길과 먹거리를 안내하는 것은 기사가 아닌 조수 몫이다. 나는 해운대엔 과거 40여 전 고등학교 시절에 몇 번 가 본 뒤로 대략 십년 주기로 한 두 번씩 들른 바 있다. 갈 때 마다 변화가 너무 많아 극심한 상전벽해를 느끼는 곳이다. 이번에는 더 심했다. 마치 미국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이나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해변에 온 기분이 들 정도다. 최종 행선지는 멸치와 미역으로 유명한 기장! 우리는 송정을 거쳐 기장으로 가기 전에 해운대의 전체상을 내려다볼 생각으로 '부산 X the SKY' 전망대로 올라갔다. 이곳은 지상 100층..

바람결에 시가 된 남해의 풍광들

바람결에 시가 된 남해의 풍광들 과거 한 때, 나는 일본인들이 일본의 國師로 칭송한 시바 료타로우(司馬遼太郞, 1923~1996)가 일본의 남도여행에 이어 대만 전도를 순례하고 여행기를 낸 것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시바는 博覽强記형의 당대 일본의 최고 지식인이자 소설가로서 인기와 명예를 누린 인물이다. 그는 장장 25년에 걸쳐서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포르투갈, 미국, 몽골, 중국, 한국, 대만 등지도 순례하면서 기행문을 발표했다. 나는 그가 47세 때인 1971년『週刊朝日』에 연재한 기행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해 베스트셀러가 된『街道をゆく』(가도를 가다)를, 또 내가 대만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인 1994년에 펴낸『台湾紀行』을 내심 부러운 눈으로 곁눈질 한 바 있다. 대만 총통 李登輝도 자신의 팬..

남해 유배문학관에서 만난 자암과 서포

남해 유배문학관에서 만난 자암과 서포 남해도를 일주하는 마지막 코스로 우리는 남해읍 내에 위치해 있는 유배문학관을 찾았다. 일몰이 가까워지는 시각에 가까스로 도착하는 바람에 문을 닫기 직전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여유를 갖고 전시물들을 온전히 음미하면서 본다는 건 불가능했다. 수박겉핥기 식의 주마간산 격이었지만 겨우 유배문학관 내 전시장을 한 번 돌아 보기는 했다. 유배문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잘 정리돼 있었다. 전시물들 중엔 항양(桁楊, 죄인의 발목이나 목에 채우는 차꼬 등의 형구들을 일컫는 용어임)과 천극(荐棘, 귀양살이 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거처의 담이나 울타리를 가시나무로 둘러치는 일로서 加棘이라고도 함) 등등 유배와 관련된 거주지의 가택 모형과 도구들도 다양하게 전시돼..

남해 독일마을에서 떠올려본 파독 한인의 역사

남해 독일마을에서 떠올려본 파독 한인의 역사 올해 들어 가장 날씨가 덥다는 날이다. 아침나절인데도 벌써 바깥은 무려 수은주가 36도까지나 올랐다. 이열치열이라도 해야겠다. 해서, 나는 마산 보다 조금 더 남쪽에 위치한 남해로 떠나기로 했다. 오늘도 처갓집 어른들과 함께였고 처음 가는 곳이다. 우리는 마산에서 아침 식사 후 10시 경에 출발해서 약 2시간 후인 12시 경에 남해로 들어섰다. 뭍과 섬을 잇는 다리인 삼천포대교를 건너니 올망졸망 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한려수도의 수려한 경관이다. 다리 하나 차이로 人界와 仙界의 경계를 넘는 기분이다. 나는 다리를 건너면서 "글뢱 아우프!"(Glück auf)를 나지막이 되뇐다. "살아서 돌아오라!"라는 독..

영덕기행① : 목은 이색선생 생가 터, 괴시리전통마을, 메타세콰이어길

영덕기행① : 목은 이색선생 생가 터, 괴시리전통마을, 메타세콰이어길 다시 영덕에 갔다. 올해 들어서만 두 번째다.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 먼저 목은 이색 선생(1328~1396)의 생가 터를 찾았다. 목은은 고려조의 마지막 세 충신을 상징하는 三隱(圃隱 정몽주, 冶隱 길재, 牧隱 이색)중의 한 사람이다. 이어서 목은 선생 생가 터 입구에 있는, 200년이나 된 전통가옥들이 모여 있는 괴시리 전통가옥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조림돼 있는 "메타세콰이어길"에도 가봤다. 목은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고 쓰러져 간 고려조와 끝까지 함께 한 충신이다.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우중에 찾은 목은의 생가 터를 보고 느낀 감회를 간단하게 적는다. 우선, 이곳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