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노을 속을 달리는 7번국도 북상 드라이브

雲靜, 仰天 2021. 8. 9. 22:19

노을 속을 달리는 7번국도 북상 드라이브

 
갑자기 웬 동해안 북상? 동해안엔 태풍도 온다는데...그럴만한 사정이 생겼다. 서울에 긴급한 일이 생겨서 고향에 오자마자 일정을 당겨 내일 저녁까지는 서울에 당도해야 할 판이다. 고향의 친한 형이 하룻밤만 더 머물다 가라고 간곡하게 당부해도 어쩔 수 없이 간청도 뿌리치고 야속하게도 짐을 꾸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보다 기왕에 온 휴가 여행인데 하루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돌아가자니 조금 아깝다 싶다. 그래서 미리 오늘 오후에 출발해서 적당한 곳에 가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그 곳에서 한두 곳 정도는 보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 가지 않고 동해안의 7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기로 했다. 북상의 종착지는 어둠에 비례해서 가볼 때까지 가보기로 했다.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의 도로원표를 깃점으로 시작되는 7번 국도는 동해안을 따라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강원도를 거쳐 휴전선에 이르는 장장 513.4km나 되는 해안도로다. 만약 휴전선을 넘을 수만 있다면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까지 이을 경우 길이는 배 이상으로 늘어나 1192 km나 된다. 남북통일이 되고 이 도로가 두만강을 건너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연결되면 그야말로 또 다른 환상의 아시안 하이웨이가 온전하게 개통되는 것이다.
 
길은 길에 연하여 있지만 우리는 오늘밤 과연 이 구간의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까? 목적지가 어디든 간에 눈으로는 백두대간의 등뼈로 넘어가는 석양을 훔치고 귀로는 동해의 파도소릴 들으면서 이 길을 드라이브 한다는 것은 꿈의 로망이 아닌가? 무슨 사찰이니, 무슨 산이니, 무슨 해수욕장이니 하는 명승지에 내려서 일일이 살펴보지 않아도 또 다른 만족도가 보장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주로 내가 지나온 나를 회상하고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 여행기 아닌 여행기다.
 
자주 그렇듯이 이번 동해안 북상도 집사람이 길동무다. 도반이자 안전을 책임지는 운전기사이기도 하다. 운전면허증도 취득한 바 없고 운전을 못하는 나 때문에 장거리 자동차 여행시엔 고역을 도맡아 한다. 그래서 내게는 늘 고맙고 기꺼운 동지다.
 
포항시가지를 벗어나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우리는 속도를 내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달전이라는 곳을 지난다. 너댓 살 때 포항 인근 지역들의 5일 장에 장사를 떠난 엄마를 찾아가기로 작정하고 걸어서 구불구불한 산길의 소티재를 넘어서 이곳에 이르러 해가 지게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한시적 미아가 되어서 며칠을 남의 집에서 지낸 적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엔 큰 길 "신작로"엔 해병대 검문소가 있었고, 그 검문소 가기 전 왼쪽 편에 작은 개울 옆으로 정미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미소 뒤편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던 날은 마침 동네 어구에 해당되는 정미소 주변 어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그 집에서 음식도 얻어먹고 며칠을 지내면서 그 동네의 나이또래들과 재밌게 놀았다. 그러던 중 나는 아들을 찾으러 백방으로 다니시다 검문 차례를 기다리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차창 밖을 내다보시던 부모님께 발견돼 고아가 될 뻔 한 걸 가까스로 면한 적이 있다. 총 4번의 가출 중 첫 번째 가출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유년의 기억을 뒤로 하고, 조선시대 한 때는 "양전(良田)이 가득한 데다 산과 바다(山海)에서 나오는 이익도 많았다"는 흥해(興海)를 지나간다. 흥해도 내가 초등 4학년 때 우연히 담배밭일 중에 신혼의 외숙부 내외의 애정표현을 봤다고 혼을 내시던 꾸중에 반발해서 외가인 청하를 떠나 포항집으로 가다가, 흥해장을 보시고 귀가하려고 출발시각을 기다리던 버스 안에서 생각지도 않게 외손자를 보신 외조부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마지막이 된 통산 4번째 가출이었다. 흥해를 벗어나는 도중에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이정표가 보였지만 예전에 내가 그곳에 직접 가서 기념관을 보다가 미담은커녕 사곡스런 일로 기사까지 써서 잘못에 대한 지적 보도를 한 바 있어 지나면서도 그렇게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흥해 다음은 흥환리와 고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칠포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흥환리는 작은 마을이어서 그런지 과문한 내겐 딱히 옛날 얽혀 있는 얘기가 떠오르는 게 없다. 단지 격하게 친한 선배 한 사람과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지 오래됐지만 내가 처음 입학한 강원대학 동기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높은 고개"라는 뜻인 高峴은 우리나라 지명 중에 가장 많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고현이라는 지명은 어릴 적 외갓살이 할 때 외가의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여러 번 들어서 잊지 않고 있는 곳이다. 외가의 친척들 중에 몇 분이 이곳에 사셨기 때문이다.
 
고현을 지나면 이번엔 淸河가 나온다. 지명 그대로 山紫水明한 청하는 조선시대 때엔 경상도 동남해안 일대의 여섯 현(淸河, 迎日, 長鬐, 機長, 東萊, 彦陽) 중의 한곳이었다. 청하는 나의 외가다. 외갓집이 있던 필화리, 동구 입새에 있던 키 큰 소나무 숲에서 소쩍새가 울던 솔밭, 용산, 장터, "갱빈"(강변의 사투리), 유계리,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이름의 월포리, 못 살던 시절인 1960년대에 이모님 내외가 화전민으로 살고 계셨던 "산중" 등등 나의 많은 유년의 추억들이 곳곳에 누워있는 곳이다. 3세의 유아기 시절, 측간의 정랑에 미끄러져서 똥통용 독 안에 몸채로 빠진 적이 있어 "똥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소년기에는 소도 먹이고 소꼴도 베고, 담배잎 건조일 거들기, 새참 심부름, 모내기 못줄 들기 등 농사 일손도 거들었던 경험이 있어 제한적이지만 농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아름다운 곳이다. 
 
청하를 지나자 신라의 천년 고찰 보경사(寶鏡寺) 입구에 해당되는 송라면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보경사는 경북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내영산(內迎山, 內延山이라고도 함)입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 진평왕 25년, 즉 602년에 지어진 고찰이다. 내게는 중학생 때 수영선수로 보경사 내연산 풀장에서 열린 영포지구 수영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는 추억 어린 곳이고,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집사람과 같이 아버지를 모시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나들이를 한 곳이기도 하다. 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내게 사랑을 듬뿍 주셨던 박경석 전 의원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름에 걸맞게 보경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조선 중기 1703년 조경(趙絅)이라는 문인이龍洲遺稿(龍洲先生遺稿卷之一)에서 보경사를 읊은 다음과 같은 五言律詩가 있다. 
 
寶鏡知名寺
三韓棟宇存
殘僧無法語
古柏護孤園
 
禽鳥巖巒窄
藤蘿日月昏
蒲團坐遙夜
山雨小溪喧
 
보경사는 이름난 절이라 
삼한의 건물이 남아 있다네 
늙은 승려는 법어 한 마디 없는데 
오래된 잣나무가 외로운 절을 지키네 

새들 때문에 솟아 오른 바위가 비좁고 
등라로 인해 햇빛과 달빛도 흐리구나
부들로 엮은 자리에 밤새 앉아 있노라니 
산 비에 작은 계곡이 시끄럽구나. 
 
송라를 지나 이윽고 지경리에 당도했다. 지경리라!? 한자가 쓰여져 있지 않아 단정은 금물이지만, 짐작컨대 한 지역과 다른 한 지역을 가르는 경계마을이라는 뜻이렷다! 이곳을 지나는 7번 국도에 남북으로 놓인 다리만 건너면 행정상으로 포항시를 벗어나 영덕군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다리를 넘기 직전 바다로 눈을 돌렸더니 집채만한 파도들이 갈마들며 해안으로 밀려와서 방파제를 후려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격랑의 포말을 볼 겸, 저녁식사도 할 겸해서 이곳 영덕으로 넘어가는 다리 오른쪽 바닷가 쪽에 있는 '지경횟집'에 들르기로 했다. 어차피 곧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다 바다를 보니 거대한 파도들이 연신 방파제를 강타하는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특히 집사람은 이렇게 큰 파도를 본 적이 없다면서 아이처럼 파도치는 광경을 꼭 봐야겠단다.
 
현재 시각, 지금 우리 앞에 목도되고 있는 일종의 작은 해일은 울릉도-독도 근해에 내려진 폭풍, 해일 주의보의 여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번에 나는 집사람과 함께 포항을 출발하는 2박 3일간의 울릉도여행을 떠났어야 했었다. 일요일인 어제 출발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여행사가 여행경비를 잘못 계산한 것도 있고 해서 참여하기가 깨름칙했다. 더군다나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고 해서 되도록이면 단체여행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서 취소해버렸다.
 
눈앞에 펼쳐지는 저 거대한 파도와 치솟았다가 떨어지면서 부서지는 하얀 포말은 보기엔 아름답고 흥미로울진 몰라도 사실은 바다를 청소하거나 정화시키는 자연의 순환과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구가 병들어 내는 신음소리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물론 기압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예측불가의 형태로 수시로 빈발하는 게 오늘날 인간들이 당면한 공전의 문제라는 소리다. 후자와 관련해선 지금 인류는 지난 20세기 100년간 인간들의 무분별한 산림 및 자원 남용의 과보를 톡톡히 받고 있는 것이다. 기상이변으로 북극의 거대한 빙하가 녹아내리고 지구 생태계가 파괴돼 날이 갈수록 회복이 어려울 지경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미국, 중국 등등 지구생태계 회복에 가장 책임이 큰 선진국 혹은 대국들이 나몰라라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주차하는 중에도 터키에서는 최근 10일간 남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산불이 번져 최소 8명이 사망했으며, 이 화재로 말미암아 주민 수만명이 대피했을 뿐만 아니라 소나무 숲과 농장들도 황폐해졌다는 우울한 뉴스가 들린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저 파도는 단층집만한 높이다.
플랑크톤을 잡아먹고 사는 따개비들이 마치 출렁이는 물결처럼 인기척을 피하느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게 마치 음악 같이 들린다.
사물을 볼 때 그때그때 다르지만, 자연과 마주할 땐 자연스레 환경과 생태계 문제가 머리에 떠오르면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다 부질 없는 혼자만의 걱정이지만...

지경횟집은 이번이 세 번째다. 몇년 전에 청하 기청산의 이삼우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와서 함께 점심을 먹은 게 계기가 돼 그 뒤 집사람과도 울진 가는 길에 같이 한 번 왔었다. 주문 후 오래지 않아 나온 자연산 물회 맛은 예전과 조금 달리 느껴진다. 내 기억에 그땐 횟감의 육질이 약간 질겼었다. 매운탕은 맛이 좋다고 집사람은 국물만 남기고 건데기는 거의 다 먹었다. 밑반찬들은 예전처럼 깔끔했다.
 

 
식당에서 나오면 맞은편의 아담한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이곳 청하 토박이이신 수필가 이삼우 선생이 저 산을 가리키면서 신라 향가 중의 헌화가가 만들어진 실제 현장일 것이라고 추정하신 걸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다시 사진을 찍어 아래에 올려놓는다.
 

전방 두 번째 산봉우리 정상의 6~7부 능선쯤에 보이는 바위 터가 수로부인 헌화 설화가 탄생한 곳이라는 것이다.
석양에 젖어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는 해를 보니 순간적이지만 또 감성에 젖는다. 첫 번째 인도 여행시에 인도철학과 석가모니라는 성인을 떠오르도록 나의 머리속에 그려진 웅혼한 모습의 석양만큼은 아니지만 지는 해는 늘 내게 겸손과 경건함과 선한 의지 그리고 우주의 종말을 생각하게 만든다.

헌화가의 탄생지로 비정되는 동해안 지역의 몇 군데 중에는 삼척에서 장호로 향하는 7번 국도 길목이 가장 유력하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삼척시에서는 헌화가의 배경지로 원덕읍 임원리 남화산이라고 보고 여기에 수로부인 헌화공원과 대형 조각상을 조성해놓고 있다. 오늘날도 삼척의 해안절벽에는 신라시대 경국지색의 용모로 동해 용왕의 애간장을 태웠다는 수로부인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수로부인은 자태와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깊은 산과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잡혀 갔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미인은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용왕도 미인을 좋아했다는 뜻인가? 동물이나 그것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나 미색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모든 설화와 신화는 고대에만 있고 현대에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가? 옥황상제나 용왕은 왜 옛날에만 있었고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의 뭇생명체들이나 공룡처럼 지금은 다 죽어 없어지고 존재하지 않고 있는가? 여기엔 단순히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신화시대나 설화시대가 빚은 인간의 未明이나 무지의 결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문명화가 걷어내고 벗겨낸 지금이야 신비감이나 교훈적 예시들이 대폭 옅어졌지만 설화적, 신화적 구전의 로망과 낭만이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키고 꿈을 잉태시키는 순기능을 도외시해선 안 될 일이다. 
 
삼척시의 소개에 따르면, 수로부인은 부군 순정공이 강릉태수가 돼 현 7번국도를 따라 부임지로 향했다. 부부는 도중에 삼척 어디쯤의 해안가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그 주위에는 높이 천 길이나 되는 돌산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바다에 닿아 있었다는데, 그 위에 철쭉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고 한다. 수로부인이 천길 낭떠러지에 핀 철쭉꽃을 보며 좌우의 종복들에게 "저 꽃을 꺾어 바칠 자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답하였다 한다.
 
그런데 마침 그 곁으로 암소를 끌고 가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수염이 허연 노옹이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 선뜻 그 꽃을 꺾어서 가사(歌詞)까지 지어 바쳤다고 하는데, 그 노옹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노인은 짓궂다 못해 위험천만한 수로부인의 청에 직접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꽃을 따서 바치면서 헌화가를 불렀다는 것이다.
 
남편이 있는 지체높은 사대부의 마나님이 이 무슨 해괴하고 망측한 언사인가? 남편의 사랑을 확인 받기 위해서? 아니면 남편에 대해 불만이 있어서? 설마 길 가다 나타난 나이든 노인네에게 연정을 느낀 건 아니었겠지! 귀족의 부인이었으니까 공주병은 있었을 순 있겠지만. 그런데 남편은 왜 가만 있고 나이 든 노인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꽃을 따서 바쳤던 것일까? 이 설화엔 노인의 심중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과연 이 설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얼까?
 
헌화가 탄생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유력한 정설은 삼척의 임원리 남화산인데, 과연 지경과 영덕 초입의 저 산이 실제 현장일지는 엄밀하게 답사를 통한 학술적 고증을 해봐야 그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 지경리에서 바라본 영덕 초입의 그 산은 여러 명이 두 부류로 나뉘어 앉아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넓은 터가 없어 보인다. 또한 내가 오늘 임원의 남화산에 직접 올라가서 주변 지세를 살펴 본 바로는 남화산엔 설화에 등장하는 가파른 절벽이 있을 만한 지세가 아니었다. 적어도 현재 조성돼 있는 수로부인 조각상 뒷쪽의 해안은 아니다. 왠고 하니 그곳은 절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벽이 비정의 일차적 요건이라면 아래의 사진처럼 오히려 지상에서 헌화공원으로 올라가는 대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는 곳이 설화가 생성된 현장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수로부인 헌화지 터라는 헌화공원의 지세를 답사하고 나서 수로부인 조형물을 배경으로 한 컷!
수로부인 헌화공원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인데, 이 일대엔 가파른 낭떠러지라곤 여기 밖에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암소를 몰고 길을 가기엔 너무 가파르다. 봄이면 철쭉꽃도 피는 곳일까?

오늘 이 짧은 여행과 이 글은 헌화가 설화의 현장을 고증하는 게 목적이 아닌 만큼 공허한 수다는 이쯤에서 마치고, 여기서는 예의 그 헌화가를 한 수 읊고 넘어가기로 하자.

짙붉은 바위 옆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다.
 
이제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어둠은 밝음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마술 같은 면도 있지만 어둠이 농도를 더해갈 때까지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더 북상할 수 있을까? 7번 국도에서 울진 이상의 북쪽으로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삼척까지 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왕복 4차선 국도는 너무나 깔끔하게 잘 닦여져 있다. 가드레일, 가로등, 졸음 예방용으로 만들어놓은 길어깨(노견), 표지판, 간간히 나오는 터널 등도 잘 조성돼 있다. 이렇게까지 훌륭한 도로를 건설하느라 수많은 인력들이 피땀을 흘리고 목숨까지 희생된 이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못 숙연해졌다. 일순 떠오르는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은 운전대를 잡은 집사람은 알 턱이 없다. 내 마음속에서만 왔다가는 실루엣이니...
 
그런데 승용차와 대형 트럭이 간간이 오갈 뿐 왕복 4차선 국도의 상하행선 양쪽 공히 차량은 드문드문 보인다. 예전처럼 배차간격이 평균 10분에 한 대 꼴로 잦았던 부산-강릉 간 장거리 버스가 오가는 것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개인 승용차의 증가에다 코로나사태가 겹쳐서 장거리버스 차편이 대폭 줄어들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버스 이외의 여타 화물차량도 드물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이런 도로를 우리만 전세 내어 사용하는 기분이다. 이런 곳을 여행하면 확실히 코로나 균들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 순간, 친구 東浪의 鄕舍가 있는 쟁암리 들어가는 입새의 長沙와 수려한 해상공원이 있는 삼사도 지났다. 정이 도타운 심성을 지닌 친구 東浪의 정겨운 얼굴이 시속의 속도임에도 한 동안 아른거린다. 뒤이어 오십천과 대게의 고장으로 이름난 영덕(盈德)을 지나면서부터는 윤구홍, 우영달 등 이곳이 고향인 친구들 그리고 고향은 아니지만 이곳이 근무지가 된 친구들과 선후배 등 대여섯 명의 건강한 모습들도 떠오른다. 
 
우리는 강구항으로 빠지는 다리를 지나 오십천을 따라 나 있는 길을 달린다. 문득 나도 모르게 강구항의 북쪽 편에 있던 옛날 내 친구가 운영하던 공장, 그에 얽힌 사람들과 일들이 떠오른다. 젊은 시절, 사업에 실패한 친구를 재기하게 하기 위해 이곳의 노후된 식품공장을 하나 인수해서 사업 경영을 도와 한 동안은 200억대 자산평가를 받은 기업체로 키웠었다. 하지만 결국 내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더니 결국 부도를 냄으로써 땅까지 팔아서 공장인수에 필요한 종잣돈을 쥐어준 친구인 나를 심한 배신감에 분노케 만들어놓고 사라진 한 때의 내 친구도 떠오른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은 길게 만지작 거릴 필요가 없다! 고개를 강구 반대편으로 돌려보니 노을의 붉은 기운을 머금은 강물빛이 무심하다. 이곳 오십천과 관련해선 머나 먼 태평양을 돌아 알을 낳고 생을 마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 온다는 연어의 곤고한 회유성이 떠오르니 생명의 경외감과 회귀본능에 또 한 번 숙연해진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제법 긴 드라이브! 서산에 걸터앉았다가 이내 사라지는 검붉은 해, 노을 지는 풍광과 함께 달리는 일몰의 질주다. 해안가로는 넘실대는 풍랑소리가 장엄한 교향악으로 울려 퍼지는 듯하다. 귤빛 석양과 노을이 눈을 잡아끌고, 바다내음이 후각을 자극하는 일몰 전후의 7번국도!
 

 
어느 사이 사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속을 소리 없이 달린다. 우리 차는 어느덧 울진을 지나고 있다. 30여년 전의 20대 후반,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어울렸던 맥스 가노(Max Gano)라는  미국인 친구와 박운제라는 나의 절친 셋이서 경주와 포항을 보고 성류굴과 백암온천 등지를 여행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우리가 밟았던 산천은 의구한데 그 인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울진을 지나자 바로 망양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바야흐로 조선조 가사문학의 일인자로 평가되는 송강 정철이 극찬한 망양정(望洋亭)이 있다는 바로 그 망양을 지나고 있다.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이렇게 읊었지!

망양정에서 동해를 봄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은산을 꺾어내어 천지 사방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동해바다를 우측에 두고 7번 국도를 달리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 망양정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망양정! 말 그대로 ‘바다를 바라다보는 정자’다. ‘한국의 몰디브’라 불리는 인근의 망양해수욕장은 또 어떤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고, 수평선과 백사장이 거의 일직선상에 있어 이곳에서 해맞이를 하면 마치 바로 눈앞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우리는 해맞이를 실물은 보지 못하고 머리속의 관념으로만 즐기고 갈 뿐이다.
 
이어서 우리를 실은 차는 바로 죽변으로 넘어간다. 죽변은 竹邊아라는 말 그대로 '대나무가 많은 해변' 또는 ‘대숲 끄트머리 마을’이라 하여 "죽빈"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죽변은 울릉도와 동일한 위도상의 직선거리에 있어 과거 1960~70년대 한 때는 포경선들이 줄을 섰던 곳이어서 어업 전진기지로 명성을 날렸으며, 동해안에서 포항, 구룡포와 함께 제법 규모가 큰 어항이었다. 지금은 어둠이 깔려서 죽변항을 볼 수 없는 게 유감이지만, 그 대신 죽변을 배경으로 한 노래 한 곡 들으면서 아쉬움을 달래자.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상실감, 비애, 이별의 고통 등등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진주 태생의 미성 가수,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남인수가 부른 대중가요 '포구의 인사'라는 곡이다.
 
1. 포구의 인사란 우는 게 인사러냐./ 죽변항 떠나가는 팔십 마일 물결에/ 비 젖는 뱃머리야 비 젖는 뱃머리야./ 어디로 가려느냐.
2. 학 없는 학포란 어이한 곡절이냐./ 그리운 그 사람을 학에다 빚었느냐./ 비 젖는 뱃머리야 비 젖는 뱃머리야./ 어디로 가려느냐.
3. 배 옆을 흘러가는 열사흘 달빛 속에/ 황소를 싣고 가는 울릉도 아득하다./ 비 젖는 뱃머리야 비 젖는 뱃머리야./ 어디로 가려느냐.
 
https://blog.naver.com/jack2110/221775845154
 
평해를 지나면서부터는 어느 사이에 교교한 달빛 아래 요염한 자태로 한 떨기 목단꽃처럼 서 있는 월송정의 밤풍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월송"이라는 말만 들어도 흡사 적당히 취한 혀가 은쟁반 위에 따놓은 포도알처럼 구르고, 말리고, 감기는 듯한 기분이다. 그런 기분에 정자에 올라섰다고 상상해 보라. 누구든 신선이 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월송정의 유래는 고려말인 1349년에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이 월송정의 유래를 언급한 게 가장 이른 게 아닐까 싶다. 
 
"평해군에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소나무 만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운데에 越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는데, 이는 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稼亭集제5권, 기(記), 동유기(東遊記).
 
기분 좋은 상상도 잠시! 이제 행정구역상 삼척 경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거리나 시간으로 봤을 때 오늘 밤은 더 이상 북상할 순 없다. 운전의 수고로움은 기사가 하지만 향도와 목적지는 지휘관(?)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삼척에서 1박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엔 이곳의 죽서루와 환선굴을 본 후 정선과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죽서루를 이제 내일이면 보게 된다. 삼척이라하니 벌써 이성계의 부친이 전주에서 그곳 수령의 핍박을 피해 가솔들을 이끌고 처음에 도망친 곳이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삼척의 밤이 깊어간다. 바다의 향연도 꿈을 꿀 시간이다. 달도 구름옷을 입고 자리에 들 시각이다. 우리도 내일의 여정을 위해 몸을 눕혀야 할 때이니 삼척입성의 기념주로 한 잔 하고 싶은 바람도 미련 없이 냉큼 접었다. 장거리 운전엔 무엇보다 운전자가 피곤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
 
2021. 8. 9. 22:30
삼척 시내 숙소에서 초고
8. 10. 15:35
삼척 임원리 남화산 수로부인 헌화공원에서 지세 답사 확인 후 수로부인 배경지 부분 가필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