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부부의 동상이몽 도선사 방문

雲靜, 仰天 2021. 10. 31. 00:06

부부의 동상이몽 도선사 방문

 

기도도량으로 이름난 삼각산 도선사를 다녀왔다. 완성해서 넘겨줘야 할 원고가 밀려 있어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가을 단풍을 지금 못 보면 어쩌냐며 아내가 하도 졸라서 같이 갔었다. 말은 맞았다. 정말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이긴 했다.

그런데 막상 도선사에 가서보니 아내의 목적이 따로 있었다. 이걸 안 것은 절 경내에 들어간 뒤였다. 도선사는 빌거나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사찰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나는 처음 와본 절이어서 그렇다는 걸 몰랐다. 아내도 흰 무 같은 크기의 큰 초를 두 자루 사서 각기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적고 소원 내용을 써주는 보살에게 내밀어서 뭔가를 썼다. 
 
양초에다 붙일 종이에 글을 써주는 그 보살이 나에게 “뭐라고 써줄까요?”라고 묻기에 나는 조금도 주저없이 “세계평화, 인류화합”이라는 여덟 자만 쓰라고 했다. 그 보살이 약간 어이 없다는 듯이 실실 웃는다. 
 
아내는 초를 불전에 올리고선 뭔가 열심히 빌었다. 알고보니 단풍구경은 그 다음 목적이었다. 뭘 빌었을까? 최근에 경미한 자동차 추돌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운전을 한 집사람이 보험사와 상대편 운전자에게 잘못 얘기를 해서 사건이 조금 커져 버렸다. 그래서 그걸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초에다 관재구설수를 없애 달라고 쓴 걸 보니 무엇을 빌었는지 감이 잡혔다. 
 
대웅전을 보고 그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서 “참회도량”이라고 씌여진 곳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내처럼 이런저런 사정들을 가지고 빌러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거의 대부분은 60대 이상의 여성들이다. 모두 엎드려 절을 하거나 맨앞 설법 자리에 앉은 스님의 독경과 목탁소리에 따라서 독경을 하고 있었다.
 
아내도 초에 불을 붙여 향을 사른 뒤 절을 하면서 빌었다. 이 광경을 보니 퍼뜩 중국의 소설 수호지와 문호 鲁迅의 어록(華盖集續篇·雜論管閑事·做學問·灰色等)에서 유래된 “平時不燒香 臨時抱佛脚”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평소엔 향을 사르지 않다(마음을 정화하지 않다)가 문제가 생기면 부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진다는 얘기다. 문제가 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런 것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우선이지 여기에 와서 그렇게 빌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담? 이건 내 마음속으로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부처님 말씀이자 가르침이다. 모든 자연계와 인간계에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는 연기적 세계를 설한 석가모니께서는 무턱대고 빌기보다 근본 원인을 생각해서 화근이 되는 無明(무지와 어리석음)을 없애고 그런 習을 떨쳐 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기복적인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요 철학이다. 불교가 과학이라는 점에 대해선 이미 지난 세기 아인슈타인, 닐스보어와 쉬뢰딩거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언급한 바 있다.
 
아내가 정성껏 뭔가를 빌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내가 당한 그 자동차 추돌사고도 절에 다니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내가 남편이랍시고 나서서 상대편 운전자를 설득시켜 해결했지 집에서도 저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 아내가 해결한 게 아니지 않는가? 불교 본연의 가르침에서 동떨어진 비불교적 기복 행위가 도량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평소처럼 아내가 절하고 빌겠다는 걸 막지는 않았다. 간절히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굳이 억지로 막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또 다른 문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내가 법당 안에서 열심히 뭔가를 빌고 있는 사이 나는 다른 곳에 흥미를 느끼곤 어슬렁거리면서 경내를 돌아 다녀 보았다. 절이 제법 운치가 있다. 사찰 뒷쪽의 산세도 좋다는 느낌이다. 한국 사찰의 특징이 그렇듯이 이 절의 가람배치도 자연의 지형을 잘 살려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국을 유람하던 중에 이 터를 보고 여기에다 사찰을 지으려고 마음을 낸 道詵(827~898) 국사의 눈에도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그게 862년 신라 경문왕 때의 일이었으니 약 1,200년 전의 일이다. 절의 법연이 천년이 훨씬 넘는 고찰이다.

그 뒤 이 절이 오늘날 마애불의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곡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내 책자엔 1903년 慧明 스님이 고종 임금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중수한 것을 기초로 해서 1962년 이 절에 주석했던 靑潭스님과 1984년 당시 주지였던 玄惺 스님의 원력 덕분인 것으로 소개돼 있다. 

 

하산하면서 집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 기도 덕분에 손자나 자식들이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나머지 기도를 못해서 떨어진 자식들은 어떻게 하냐고? 기도하면 걸리게 해주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떨어지게 한다면 부처님이 얼마나 옹졸한 존재로 인식되겠냐, 이게 스님들과 종교단체에서 할 짓이냐고 말이다. 뭔가 일이 꼬일 때만 절이나 교회에 가서 열심히 빌기보다 평소에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고 바로 통어하려고 힘쓰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불교 신앙행위의 正道다. 불교를 제대로 알거나 제대로 믿는 스님이나 신도들은 이런 식의 기도는 하지 않는다. 본질을 망각한 채 體와 用의 분별 없이 믿는 행위가 바로 미신인 것이다.
 
도선사는 어찌 된 판인지 사찰행사 안내판엔 불교교리 강좌라든가 참선 같은 프로그램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고 오로지 불사와 관계되는 시주를 권하는 행사와 기도 안내문들 밖에 없다. 옛날 해인사의 성철당이 질타한 바 있듯이 부처를 팔아 먹고사는 장사나 다름 없다. 청담당은 성철당의 권유로 불가에 귀의한 이래 성철당과는 허물없이 지낸 도반이었는데 한 소식 했다는 그런 청담 스님이 불교신자의 기도와 원력에 대해 어떻게 설했기에 도선사가 이런 지경이 됐을까? 전통 있는 사찰부터 이러니 비불교도들에게 불교가 잘못 알려지고 바르게 평가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도선사는 나 같이 육신과 정신이 공히 빈한한 사람은 다시 올 곳이 못 되는 거 같다. 가을단풍 감상을 위한 나들이가 아니라면 다음엔 집사람 혼자 가라고 해야겠다. 사찰을 빠져나오면서 보니 절 입구를 수놓고 있는 갈색, 홍색, 적색의 단풍잎들이 유달리 짙고 붉어 보인다. 가히 화엄의 세계가 펼쳐진 듯한데 그 속의 면면은 穢土의 사바세계 그 이하도 아니고 그 이상도 아니다.
 
2021. 10. 31. 20:23
북한산 靑勝齋에서
雲靜
 

 

도선사는 일주문이 보이지 않는다.
봄꽃이 부럽지 않은 가을 단풍들이 도선사 입구에 늘어서서 방문객들을 맞아준다.
방생하라고 만들어놓은 작은 수조. 방생의 의미를 알고, 어떻게 하는 게 올바른 방생인지 잘 알고 있을 사찰에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놓다니 너무 속이 보인다. 상업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한국종교의 최대 폐단인 세속화, 대형화, 상업화가 이 절에서도 느낄 수 있다. 용 위에 서 있는 수월관음상 보기가 부끄럽지 않는가?
벌써 얼음이 얼어 있다. 머지않아 닥칠 겨울을 예감케 한다.
방문객들이 수조 안에 던져 넣을 동전으로 바꿔주는 기계까지 준비해 놨다.
방생도량이라고 만들어 놓고 절에서 어류나 자라 등을 팔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예약을 받을 수도 있겠다. 방생을 하려면 왜 이런 좁은 곳에 제명대로 살 수도 없는 곳에다 하라는 건가?
대웅전에 안치된 3존불. 대웅전이니 중앙은 석가모니불이고, 좌우 협시불은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일 것이다.
정면 암벽에 새겨놓은 마애불에게 빌면 소원 한 가지씩은 들어준단다. 왜 하필 한 가지만 들어줄까? 한꺼번에 많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한 가지씩만 들어줘야 다음에 또 올테지. 미신적인 기복불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참회도량을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세운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는 9층 석탑이 맵시 있게 서 있다.
시주할 돈이 없어 합격기원 기도를 못 드리는 이들은 어떡하나? 어차피 제로섬 게임인 시험을 이런 식으로 돈벌이에 이용하다니 청담스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
전부 돈 내라는 시주와 관련된 행사들뿐이다.
더럽지도 않고 야위지도 않은 걸 보니 절에서 키우는 고양이인 모양이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3년이 됐는진 모르겠지만 이 고양이들도 독경소리는 많이 들으면서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