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자유의 여신상에서 '자유'를 사유하다!

雲靜, 仰天 2022. 1. 22. 05:49

자유의 여신상에서 ‘자유’를 사유하다!

 

뉴욕! 세계경제의 심장, 금융의 메카이자 세계를 움직이는 곳!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제사 이 도시를 찾았으니까 말이다. 생애 첫 방문이다.
 
이튿날 날이 밝자 나는 바로 뉴욕의 상징, 아니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부터 찾았다. 자유의 여신에게 고하고 싶은 일종의 신고식을 할 겸해서 '자유'를 추념하기 위해서다. 이 동상의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치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통상 ‘자유의 여신상’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 일찍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여신상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기회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을 오가는 페리 선착장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까지 여객들을 실어나르는 배다. 배 이름이 "미스 뉴욕"이라니 상당히 섹시하다.
뉴욕시와 뉴저지주를 가르는 행정상의 경계인 허드슨강
맨하탄을 뒤로 하고 자유의 여신상을 향한 페리호 선상에서
맨하탄의 스카이 라인. 미국 대륙이 유럽 식민지 개척국들에게 분할 될 초기 네덜란드 정부가 이곳의 인디언들에게 당시 돈으로 단돈 24달러로 매입한 맨하탄. 정말 거저였다!! 이곳의 빌딩 한 동 사서 임대업을 하면 좋을 거다. 구미가 당기는 분이 있으면 사진을 크게 키워서 건물 맵시를 자세히 봐도 좋다.

 
자유의 여신상은 대서양에서 미국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왼편이자 뉴욕과 뉴저지주를 가르는 허드슨(Hudson)강 입구 하안의 리버티섬(Liberty Island)에 세워져 있다. 횃불을 치켜든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은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도록 이민자들과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기념비적인 이 동상은 정치사상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근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오게 된 시민혁명을 먼저 이룩한 프랑스가 미국독립을 기념해서 만들어 미국에 선사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들어서기 전의 리버티 섬 전경

 
자유의 여신상이 프랑스가 직접 제작해 1886년에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에 선물한 것이라는 사실은 내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됐다. 그러나 그것을 톺아보기 전에 먼저 동상을 이 따위로 크게 만들어 사람의 기를 빼놓는 자가 누구란 걸 모르고선 도저히 이 자리를 떠날 수 없겠다는 오기가 발동된다.
 
미국은 뭐든지 크다. 땅도 크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도 크고, 동식물들도 죄다 크다. 심지어 내게는 스푼과 포크도 삽과 쇠스랑을 연상시킬 만큼 크다. 어릴 적 서넛살 무렵에 내가 나고 자란 포항시 학산동에 가끔씩 출몰한 미군 병사들이 쓰던 스푼이 왕방울만한 어미 소의 눈보다 큰 것을 보고선 신기해 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자유의 여신상도 미국답게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사진으로만 봐오다가 현장에 와서 실물을 대하니 그 규모가 실로 웅대하기 짝이 없다.
 
지상에서 동상의 맨 꼭대기 부분인 횃불까지는 자그만치 총 93.5m에 이른다. 지면에서 받침대인 대좌까지의 높이가 47.5m이고, 다시 대좌에서 횃불까지의 높이가 46m이니 그 크기와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아니 아직도 감이 퍼뜩 오지 않는 이가 있다면,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이 이 동상의 집게손가락 하나가 2.44m에 달한다는 점만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발은 손보다 더 크니 크기가 더욱 클 것이다. 동(銅)으로 만들어진 여신상의 무게가 무려 225ton이나 나간다니 그 육중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의 각종 제원

 
받침대 위에 서 있는 여신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을 입고 있고, 머리에는 지구촌 7개 대륙을 상징하는 7개의 뿔이 달린 왕관을 쓰고 있다. 오른손에는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빛’을 상징하는 횃불을,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다. 여신상의 왕관 부분에는 뉴욕을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박물관과 선물가게도 있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로 내부 출입이 금지돼 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어 퍽 아쉬웠다. 여신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한 조각상이지만 내부에 계단과 엘리베이트가 설치된 건축물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딜 가나 멀대 답게 어벙한 모습은 변함이 없다.

 
조형적으로도 미감이 뛰어나 보이는 이 자유의 여신상을 만든 제작자는 프랑스인 조각가 프레데릭-오귀스트 바르톨디(Frederic-Auguste Bartholdi, 1834~1904)라고 소개돼 있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이 여신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동상 내부의 철골구조물은 에펠탑의 설계자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이 만든 것이다. 구스타브 에펠은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으로 운반해오기 위해 동상의 분해와 조립까지 맡았다고 한다. 여신상의 받침대는 건축가 리차드 헌트(Richard Morris Hunt, 1827~1895)가 디자인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정부의 주도하에 위 세 사람이 주축이 돼 1875년 제작에 착수해서 1884년에 완성한 뒤 잠시 프랑스 파리에 세워뒀다가 그 이듬해 1885년에 배로 미국에 옮겨서 1886년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제작기간만 장장 9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된 것이라니 놀랍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왜 이 동상을 직접 만들어서 미국 정부에 선물했을까? 당시 미국이 처한 대유럽관계를 보면 대충 짐작은 되지만, 내 짐작이 사실인지 확인도 해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순 없다. 이 또한 근대 서구 사상사의 흐름과 윤곽을 알고 있는 나로선 감이 잡히지만 그래도 나만 알고 넘어갈 순 없지 않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프랑스가 당시 견원지간인 미국의 식민지 본국 영국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혁명으로 이룩한 미국독립의 정신적 모토랄 수 있는 자유주의의 쟁취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미국혁명이란 한 마디로 18세기 후반 영국의 귀족계급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지들이 영국을 떠나 이곳 미 동부 지역으로 건너와서 터를 잡은 영국령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 정부들이 모두 본국 영국의 지배에서 떨어져 나가서 아메리카합중국으로 독립한 정치적 변혁을 말한다.
 
식민지 본국이었던 대영제국의 중상주의적 경제정책에 따른 통제에 불만을 품은 미국 동부지역의 식민지들은 식민지 모국 영국과 7년이나 싸웠다. 이 ‘7년전쟁’ 뒤 ‘인지조례’ 등 영국정부의 가혹한 과세정책에 반발해서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을 일으켜 영국에 저항했고, 그 뒤 ‘대륙회의’에서 13개 주가 서로 결속했다. 1775년 보스턴 근교에서 영국군과 식민지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그 결과 13개 주의 식민지들이 1776년 7월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초기에는 상황이 식민지 진영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그 뒤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전세가 유리하게 바뀌었고, 결국 1781년 요크타운(York town) 전투에서 대세가 식민지 측으로 기울어졌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을 맨 처음 승인한 국가도 1783년 파리조약으로 독립을 승인해준 프랑스였다. 신흥국 미국은 1787년에 미 합중국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군주, 귀족의 신분과 봉건적 토지제도의 잔재가 일소되고, 삼권분립을 토대로 의회의 양원제와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새로운 연방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웅장한 외관에 압도되면, 자칫 그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정치적 함의 혹은 문명사적 의의를 놓칠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 배면에 있는 정치적 함의를 파악하려면 미국 현대사, 아니 미국을 포함한 현대 서양 정신사의 한 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자유주의를 축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자유주의는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타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마음대로 범할 수 없다는 신념이 응축된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모토이자 원형이다. 즉 모든 인간은 사회적으로 평등하며, 개인은 누구나 아무에게도 침범당할 수 없는 존엄성과 자유라는 기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 있는 사상이자 가치이자 이념이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법치주의는 자유주의의 실현에 필요한 선결적인 사회질서다. 이것들이 제대로 작동돼야 자유주의원칙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과 기본권이라는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는 비판의 자유와 관용의 발전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 생각은 시대와 국가를 넘어 모든 인간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자유라는 이념은 민주, 평등과 함께 인간이 고안해낸 여러 가지 가치들 중에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개념이자 인류공동의 유산이다. 자유는 민주보다도, 평등보다도 앞서야 하는 근원적 가치다. 근대 200여 년간의 서양사는 단적으로 자유의 쟁취가 축이 된 자유의 신장사, 자유주의의 발전사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주의의 개념 정립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그 실현을 위한 투쟁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고대 노예들의 항거는 모두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중세와 근대의 수많은 각종 전쟁들이 모두 물질과 노동력의 쟁취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면, 권력자에 대한 하층민들의 저항은 자유의 쟁취에 있었다.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전쟁도 모두 새로운 중산층이 된 부르주아지들이 왕공 귀족, 사제계급 등의 소수만 누려오던 자유를 얻기 위한 항거였다. 일찍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갈파하지 않았던가? 인류사는 한 사람(왕)만의 자유에서 소수(성직자와 귀족)의 자유로, 소수의 자유에서 다수(민중)의 자유로 발전된 자유의 확장사였다고!
 
1848년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 파급되어 간 유럽혁명의 내용은 각각의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그 이념적 지향은 유럽의 민주화였다.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이유는 1847년의 경제공황과 각 나라가 안고 있던 문제가 공통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뉴스가 그날 안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망명자들이 수일 내에 귀국할 수 있었던 상황변화, 망명자들이 이웃 나라들로부터 급진적 사상을 본국으로 보내 본국 사람들과 밀접하게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에 의해 가능해졌다.
 
나폴레옹 체제 붕괴 후의 유럽은 빈체제에 의해 왕정이 부활해 보수화되었지만 나폴레옹이 가져다준 자유는 유럽 각지에 독립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부활한 왕정도 헌법이나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어렵게 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민주주의운동에 대해 당국은 탄압을 반복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웃 나라들, 예를 들면 프랑스나 스위스로 망명해감으로써 그 에너지를 온존시키고 있었다. 1830년 스위스에서 시작된 청년유럽운동은 청년 이탈리아, 청년 독일, 청년 폴란드 등의 형태로 각 지역의 혁명가들을 모아갔다. 그들은 스위스에서 탄압을 받은 후에도 프랑스, 영국, 미국으로 망명지를 옮겨가면서 혁명의 도래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789~1848년 사이에는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간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있었다. 1848년 혁명은 세계의 중심부에서 자유주의의 중도파가 승리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기간, 특히 19세기 전반은 앙샹레짐의 말기에 속해 권력과 부와 명예 등 모든 것을 가진 귀족과 대부르주아지 같은 명사들의 자유주의란 기존 체제를 유지시킬 법과 질서의 존중이었다. 그들은 행동의 자유와 소유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질서로 보았다. 기존에 누려온 기득권의 보호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사상이 대부르주아지 투쟁의 이론적 구심점이 된 노동자들의 파업도 고용주들의 자유와 다른 노동자들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이유에서 거부되었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년~1832)의 자유주의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이후의 자유방임주의에서 배태된 것이다. 정부가 효용원리에 따라 잘못된 법체계를 수정하거나 정비함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실현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성취하자는 취지였다. 벤담주의는 노동계급은 훈련과 교육을 통해, 식민지 국민들에게는 백인의 의무로서 문명화시키는 것을 내세운 온건한 개입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벤담주의는 1830년부터 70년까지 영국에서 투표권자를 50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늘려 중산층의 선거참여를 확대시킨 정치개혁, 구빈행정을 통일한 구빈법 수정, 아동노동, 여성노동, 환경개선을 위한 공장법개정, 사교육시대에서 공교육을 도입한 교육법개정 등을 추진하게 된 동력이 되었다.
 
이 시대의 개혁은 지주계급의 약화와 자본가, 중산층, 노동계급의 급속한 팽창으로 노동자들의 선거권 쟁취를 위한 정치운동인 차티즘(Chartism)과 같은 정치운동화 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왕성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인쇄술의 확장에 힘입은 언론, 팜플렛, 강연 등의 활동으로 전문가적 소양을 지닌 벤담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행정개혁과 법개혁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벤담의 효용 극대화는 효용총량의 극대화였기 때문에 귀족과 중산층 재산의 재분배 등은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평등에 대해서도 평등이 불평등보다 사회적으로 보다 큰 효용을 산출할 때에만 평등을 우선적으로 옹호한다는 문제점이 내포돼 있었다.
 
한편, 미국 합중국 건국시 주창된 헌법정신 역시 영국 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자유주의이념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음은 새삼스런 상식이 아니다. 국민에 의한 통치, 종교적 관용, 법의 지배 등의 결실을 보게 된 사상적 토대였다. 핵심은 국가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그 수단이 바로 자유를 통하여 공동체는 평화, 경제성장, 지적발전 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초기에 로크적 자유주의에 따라 재산권에 비중을 두었던 부르주아지계급의 자유주의 성격이 농후한 미국헌법은 연방법원이라는 충실한 파수꾼에 의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판결을 통해 지속적으로 현실화 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모든 인간은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법의 적정한 절차 없이 생명, 자유, 재산을 박탈하지 못한다”라고 수정해서 수용된 미국 헌법정신은 적법절차의 원칙을 가장 중시하였다. 여기에는 독점에서 자유로울 권리, 동의 없이 과세받지 아니할 권리 등도 포함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와 경제적 복지 및 국가의 책임도 강조되었다. 미국 헌정사를 되돌아보면 연방주의, 대의 민주주의론, 사법심사제 등이 지배적 이념으로 주도한 가운데 주권주의, 참여민주주의, 사법자제론이 대립 이데올로기로 함께 성장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서구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서구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을 위해 구체제(앙샹레짐)에 대항한 중소상공인, 즉 부르주아지계급의 사회사상인 자유방임적,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출발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다. 이어서 자유방임의 폐해를 극복하고 노동문제와 분배문제를 의회입법을 통해 해결한다는 19세기 후반의 영국 개량주의적 자유주의인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가 생겨났다.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독일의 질서자유주의가 태동했다. 또한 전후 복지국가를 지향하여 국가의 실패를 경험한 영미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 국가의 역할 축소와 시장의 기능 확대를 토대로 한 현대적 신자유주의까지 생겨나게 됐다.
 
자유주의의 본향에 서니 일순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이식된 자유주의는 어떤 결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동양에도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그 정신과 사상은 있었다. 서구처럼 자유의 희구가 지속적인 정치사조로는 되진 못해서 하나의 '주의'(ism)로 응집되지 못했을 뿐이다. 1910~20년대 자유주의이념이 여타 다양한 사상의 조류에 섞여서 먼저 중국과 일본에 이입됐을 때 한국은 자유가 박탈당한 식민지 상태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한국에서의 자유주의사상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사상이 주체적으로 이입된 것은 광복 후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군사독재와 함께 성장한 역설이 존재한다. 한국학계의 일각에는, 한국은 개발독재체체, 군사독재체제의 타도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창의성 배양 및 가치의 창조를 위해 자유주의적 개혁이 기본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개발독재체제, 군사독재체제의 청산이 역사적 과제요 시대정신이었을 때는 자유주의는 유효한 담론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늦었던 우리에게 자유주의는 민주화를 앞당긴 추동력이었다. 자유주의는 그것이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추구, 사유재산의 보호, 비판의 자유와 관용 등 현대화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학계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부족했다. 내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자유주의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노골화 된 신자유주의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구미의 서양사회와 달리 경제적 자유주의와 복지축소 등을 내걸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치적 자유주의와 다원주의의 확립이 미흡하고 복지제도도 확립되지 않은 단계에 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과제를 달성하고 개발독재체제와 군사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한 저력을 갖고 있다. 동시에 그 정치적 자유를 기회로 기존 친일파 후손들이나 군사독재 시절의 권력 향유자들과 같은 배를 타면서 부를 축적한 새로운 지배세력이 형성된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지금은 한국사회의 재벌 기업을 축으로 한 계층이 깊고 견고하게 똬리를 튼 상태다. 그것은 1980~90년대의 세례를 받은 신자유주의가 사상적 토대가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군부독재 후부터 국가의 비호와 조력하에 경제 파이를 키우는데 주력하다보니 평등개념이 등한히 되면서 자유 민주 일변도의 역사가 전개됐던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재고되고 상대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는 평등과 공정개념을 일으켜 세워야 할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태평양을 건너와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면서 영양가 없는 이 사변적 유희를 끝낼까 한다. 자유는 미국만을 상징하지 않지만 미국은 자유를 상징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고 외친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왜 그렇게 외쳤겠는가? 자유는 미국인의 전유물도 아니요, 프랑스인의 전유물로 아니요, 영국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미국은 영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자유의 가치는 인류에게 영원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한 사람의 자유에서 다수의 자유로, 다수의 자유에서 만인의 자유로 발전해왔듯이 말이다. 다만, 아직도 만인이 자기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지 못하고 있고 종착점에 다다른 상태는 아니라는 현실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방향을 향해 있는 것만은 분명하고, 그 궤도에 올라 와 있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Vive la liberté!
Long live the freedom!
자유여 영원하라!
 
2020.10. 26. 07:15
뉴욕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