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인연 Ⅳ

雲靜, 仰天 2022. 4. 18. 05:32

인연 Ⅳ

 

인연이란 마음에 새겨진 마음의 도장인 모양이다. 마음속에 인주로 선명하게 찍혀 있기 때문일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인연이 있다. 당사자들이 원하는 바대로 이뤄지는 것만 인연이라고 할 순 없다. 특히 이성 간의 인연은 만남의 지속이나 결혼의 성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에서 몸은 서로 떨어져도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면 그 또한 인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인연의 대상이란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강도나 진폭이 다른 주관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나에겐 인연이 있다거나, 인연이 없다거나 할 때 그것은 성사에 초점이 맞춰진 건 아니다. 인과 연 그 자체를 말할 뿐이다.

 

지금까지 나를 거쳤거나, 아니면 스쳐 지나갔거나 한 수많은 인연들 중에 나는 한 인연을 잊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얼추 40년 전, 내가 스물 여섯 살의 꿈 많았던 청년 시절 우리에게 일본어를 가쳐주신 일본인 여선생님이다. 사노 끼야(佐野きや)라는 분이다. 이 분이 내 마음에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이 각인돼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초봄의 어느 날이었다. 사노 선생은 우리를 가르쳐 온 첫 일본인 교사가 중간에 사정이 있어 그만 두고 그분 후임으로 나오신 분이셨다.

 

첫 시간 때 인상을 보니 너무나 단아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다. 사노끼야 선생은 내 눈엔 미인으로 비쳤다. 미인은 시대마다 대체적인 객관적 잣대는 있어도 그것이 절대적인 게 아님은 물론이다.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얼굴이 대단히 예뻐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행동거지와 마음 씀씀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여성 특유의 온유함이 미인의 결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자태도 단아했다. 말씀하시는 것도 차분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느끼게 해주신 분이셨다. 대다수 일본여성들이 호들갑스럽게 말끝마다 "하이", "하이"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경망스러움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사노끼야 선생을 생각하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여성상 관련 글귀가 떠오른다.

 

"立てば芍薬、座れば牡丹、歩く姿は百合の花"

 

우리말로 옮기면 "서면 작약, 앉으면 목단, 걷는 모습은 백합꽃"이라는 뜻이다. 일본인들의 여성상을 알 수 있는 표현이다. 여성의 바람직한 자태를 작약, 목단, 백합의 자태에 비유해서 인식하고, 그것을 미인의 조건이나 혹은 본질로 생각하는 게 보통의 일본인이다. 사무라이가 칼로 통치한 문화적 코드에 걸맞게 철저하게 남성 본위의 일본적 발상이다.

 

 

1985년 5월 대학축제 때 사노 선생을 학교에 초청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뒷 건물은 교내 사찰 정각원이다.

 

일본어 수업은 그 전 해 말부터 나를 포함한 네 명이 매주 월, 수, 금 3회에 매회 2시간씩 해오던 것이었다. 수업은 내가 다니던 대학교 후문의 넓고 조용한 찻집에서 했다. 수업은 분위기가 좋았다. 수업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선생과 학생들 사이에, 또 학생들 간에도 차츰 친밀감이 생겨났다. 수업 중에 자연스레 드러났지만, 사노 끼야 선생은 첫인상 대로 정말 성정이 차분하고 순하고 어진 듯이 느껴졌다. 가르치실 때 말에, 손짓에, 얼굴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종교 얘기가 나왔을 때 자연스레 자신은 통일교를 믿는다고 소개했다.

 

나는 수업 시간 외에도 사노 선생에게 자주 연락했다. 일어를 공부하다가 의문이 드는 문제가 있을 때 형편을 보아서 전화로 물어보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사노 선생은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주셨다. 나는 고마워서 대학축제 때 사노 선생을 학교에 초청해서 한국의 대학 축제는 어떤 광경인지 보여드렸다. 1985년 5월 초순이었다. 교정과 남산에 온통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사한 봄날에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한일관계, 종교 등등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초가을 어느날, 우리 수강생들은 사노 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하고 미리 약속한 날짜에 오라던 곳으로 선물꾸러미를 들고 찾아갔다. 가서 보니 댁이 영등포 대림동 대림시장 안에 만두를 만들어 파는 작은 구멍가게였다. 인사 시켜주는 남편을 보니 사노 선생 보다 대략 10여 세는 많아 보였다. 팔을 걷어 부치고 손수 만두를 빚어 찜통에 넣고 하는 모습이 늙수그레 해보였다. 누가 봐도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외양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날은 나도 모르게 머리속에서 먼저 비교의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염집 귀한 딸이라면 으레 괜찮은 집안에 시집 가 있는 게 연상되어서 그런지 전혀 앙상블이 맞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사노 선생이 한국인 통일교신자에게 시집왔다는 걸 알았다. 맞선도 한 번 보지 않고 단지 통일교 측에서 추천해서 건네주는 사진만 보고 생면부지의 남성과 부부의 인연을 맺기로 결정했던 모양이다. 한국말도 한마디도 못하는데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에까지 시집 온 것은 무엇보다 종교적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1985년 여름 일본 배낭여행 중에 열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일본인 통일교 신자들과 얘길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통일교를 창시한 문선명 선생이 태어난 한국을 성지로 생각하고 성지인 한국땅을 밟는 게 꿈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사노 선생에게 결례가 될 수는 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선생이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린 데는 종교적 신념 이외에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숨 막히는 일본사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한 동기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만 해도 일본은 고루한 사회였다. 특히, 여성들에겐 숨 막히는 사회였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변해서 여성들이 남성위주의 사회분위기에 반발해서 나이 들어 황혼이혼도 불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3~40년 전만 해도 가부장적 분위기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듯한 시절이었다. 사노 선생이 사진만 보고선 잘 알지 못하는 남성과 혼인을 결정하고 한국으로 시집온 것은 어쩌면 그러한 보이지 않는 일본사회의 숨막힘에서 오는 중압감을 벗어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물론 이 추측이 나의 억측이길 바라지만...

 

일본어 수업은 우리가 선생 댁을 방문하고나서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아서 끝이 났다. 그 뒤 우리는 한 동안 연락이 뜸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가 어느 날 사노 선생이 도쿄의 일본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서 내게 편지가 날아 온 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치료를 위해 귀국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선생의 모습이 상상 됐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염려도 되고 해서 답장을 보낸 걸로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 더 이상의 답신은 받지 못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연락이 끊어진 상태에 있다. 당시 선생의 건강상태가 어떻게 됐는지 대단히 궁금했었다.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어느덧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 사이 약 10년 전, 소설을 쓰는 한 선배와 함께 답사 차 일본 서북부 도시 니가타(新潟)에 간 일이 있다.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고, 쌀과 물이 좋아서 이름난 정종 생산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 도시는 무엇보다 사노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선배와 같이 니가타에 며칠간 머물면서 시내 곳곳, 바닷가와 선창가를 많이 돌아다녔다. 도시 구조가 시내와 바다 해수욕장 사이에 항구가 형성돼 있어 흡사 내 고향 포항과 너무나 닮아서 정감이 많이 갔다.

 

게다가 이곳은 사노 선생의 고향이라는 생각에 더욱 정감이 갔고, 선생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다. 니가타를 떠날 때까지 3일 동안 나의 머리속에는 온통 사노 끼야 선생의 얼굴과 자태가 떠날 줄 몰랐고 동시에 안부도 몹시 궁금했다. 건강은 회복됐을까? 가정은 어떻게 됐을까? 아직도 통일교를 믿고 계실까?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계실까? 심지어는 그 옛날 선생이 내게 보여준 사진 속 광경도 떠올랐다. 그 사진을 통해서 니가타의 친정집이 아주 잘 살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집에 빨간 승용차가 두 대나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기억이 났다.

 

그 동안 사노 끼야 선생에 대한 기억은 마음 깊은 곳의 갈피 갈피에 갈무리 돼 있었을 뿐, 학업과 사는 데 쫓겨서 다시금 꺼내오진 않았다. 젊은 시절 한 때 고이 간직하고픈 소중한 추억이다. 사노 선생이 살아 계시면 지금은 대략 예순 후반의 나이 쯤 됐을 것이다. 꿈 같은 해후가 가능할진 모르지만, 선생이 일본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그 이후 어느 한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한 번쯤 뵙고 싶다. 그래서 이런 말로 인사하고 싶다. 先生、お身体の調子が良くなって誠にさいわいです。こんなに再びお目にかかりまして本当に嬉しゅうございます! (선생님, 몸 상태가 좋아져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돼서 정말로 기쁩니다!)

 

혹시라도 해후가 불가능하다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 인연은 지속될 것이다. 지나간 사노 선생과의 옛추억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은 채 젊은 날 아름다웠던 선생의 자태와 함께......

 

2022. 4. 18. 17:3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