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아버지의 삶과 아들

雲靜, 仰天 2023. 5. 15. 22:43

아버지의 삶과 아들


행동은 자신의 성격과 생각의 반영이다. 크게는 한 사회, 한 민족의 문화적 습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자기 운명을 결정한다. 나는 우유부단하고 패배적인 생각에 젖어 사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또 같은 소리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도 싫어한다. 어떤 일이든 신중하게 결정하지만, 일단 결정이 되면 강단 있게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한때 모험과 도전의식이 충만한 시절,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간 그 좋다는 언론사 기자직도 근무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30대 초반에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그리곤 단돈 50만 원만 달랑 들고 유학길에 나선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의 선친은 내가 싫어하는 성격 여러 개를 한 몸에 모아놓은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가 평생을 수동적, 우유부단, 패배적 삶을 사신 게 불만이었다. 물론 아버지에겐 아들이 싫어한 면만 있었던 게 아니고 장점도 많으셨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큰 키에다 큰 눈에 이목구비가 뚜렷해 용모가 수려하셨다. 어릴 적 나는 내 친구들로부터 아버지가 당대 미남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신영균 같다”는 소릴 자주 들었다. 또 아버지는 흘러간 옛날 노래도 구성지게 잘 부르셨다. 언변도 달변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논리적인 편이어서 조리가 분명했다.

20대 시절의 아버지(왼쪽). 내가 태어나기 전후였던 거 같다.
아버지의 아들


어디 그뿐인가? 필체는 정말 달필이었다. 학구열도 높아서 영어는 물론, 한문과 일본어도 잘 읽고, 잘 쓰셨다. 나중엔 나이가 드시면서 사주명리와 한방의학까지 공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무료로 사주를 봐주시거나 처방도 해주셨다. 아버지는 고졸 학력이셨지만 지식의 폭이 좁지는 않으셨던 셈이다. 합리적인 성품이었음에도 처자식과 가정을 위한 경제행위에 관심을 두시기보다 사회나 국가 수준의 문제들에 관심을 더 가지신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이러한 장점들 외에 아버지의 단점,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아들인 내가 못마땅해한 수동적, 우유부단, 패배적인 모습은 아버지의 타고난 성격이셨을까? 엄청나게 강한 기를 타고나셨던 데다 능동적, 적극적으로 사신 조부의 성격을 봤을 땐 아버지의 그러한 성향은 타고난 형질이었다기보다 일제 말기에 태어나 6.25전쟁이라는 역사의 전환기에 많은 풍파와 고초를 겪으시면서 자신도 모르게 생존본능에서 형성된 후천적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인생이 꼬이게 된 최초의 계기는 조부의 의지에 의해 군대에 가지 못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하나뿐이던 아우(나의 숙부)가 다른 집의 양자로 입적되고 명목상으로는 독자였기 때문이다. 6.25전쟁 초기 안강-기계전투로 유명한 안강에 사셨던 조부께서 그곳이 학도병으로 나간 청년들의 사지가 되는 걸 보시고 아들을 살리기 위한 임기응변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군 미필자로 기록됐다. 그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도 아버지는 취직을 못 하셨다. 조부는 아버지를 대학에 보내셔야 되었겠지만 목숨 부지하느라 바쁜 전쟁의 난리통에 그럴 여유는 전혀 없으셨다.

어릴 적 내 기억에 아버지는 헌병을 보면 쫓기듯이 피해 다니셨던 적이 있었다. ‘밥벌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전수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것이나 인쇄소에서 필경사로 일하셨던 게 직장으로선 거의 전부였다. 그것도 잠시였지 지속적으로 하시진 않으셨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으면서도 가장으로서는 무기력한 삶을 사셨던 것이다.

잠시 협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선친(앞줄 맨 오른쪽)


내가 해외유학을 마치고 들어와 국방부 직할 연구소 공채시험을 쳤을 때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힘을 내게 하기보다는 맥 빠지게 하는 소리를 하셨다. 나는 시험을 치고 난 뒤 아버지께는 마음을 쓰실까 봐 내가 응시한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안부전화를 드리던 중에 부모님께는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그만 취직시험을 봤다고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물으셨다. “그래 몇 명이 응시했더노?” “예 저를 포함해 총 세 명인데 나만 석사고 모두 박사 출신입디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야야~ 니 안 되겠다. 다른 시험 칠 데를 알아봐라”라고!

매사에 이런 식으로 아버지는 적극적이지 못하고 자신감이 결여된 삶을 사셨다. 도전의식과 패기는 아예 찾아 볼 수 없었다.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뒤로 평생 자신감을 잃은 채 소위 ‘무사안일’만 추구하는 그런 자세로 시간을 보내셨던 것이다. 나는 어려운 일을 기피하면서 생겨난 아버지의 보신적 자세와 패배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못마땅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성인이 되고 한참 뒤에야 생각하게 된 일이지만, 당신께서는 능력이 있으셨는데도 단지 군복무 미필자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진출이 막혔던 것에 대해 울분이 많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자주 술을 드시곤 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비관적인 처지를 잊으려고 시름을 달래기 위해 드신 것이었다. 부친의 내면에 비관적인 패배의식이 쌓이게 된 건 이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어머니는 살아생전 아버지의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없으셨다. 가장이라면 무슨 일이든 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셨다. 어머니는 책임감이 강하고 매사에 경위가 반듯한 분이셔서 가장답지 않은 아버지의 무기력함과 무책임함이 수긍되지 않았다. 꽃다운 스물네 살에 시집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무능력으로 인해 시장좌판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하신 게 평생 직업이 돼버렸다. 그게 어머니가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삶이 곤고하고 짜증을 많이 내신 이유였을 것이다. 내가 자랄 적에 두 분이 자주 다투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죽을 고생을 하시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자주 어머니 편을 들었다. 어머니도 싫어하셨지만 아들 역시 아버지의 그런 삶의 방식이 싫었던 의식이 반사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연세를 드시면서부터 그런 모습이 많이 약화됐다. 아마도 가장이라는 책임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 대신 찾아온 건 여러 가지 병마였다. 전립선암을 앓으셨고, 항암치료도 몇 년간 해오셨다. 그 뒤 폐암수술까지 받으셨다. 수술 뒤 허리가 조금 구부러져 거동이 불편했지만 의식은 멀쩡하셨다. 식사도 잘 드셨고 겉보기엔 판단력도 흐릿하지 않아 정신건강도 문제가 없었고 말도 정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선 안타깝게도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향년 79세로 애통한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선친의 삶과 고뇌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곤 했다. 내가 얻은 결론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평범한 진실이었다. 또 남들에게 장점이나 강점으로 인정받는 합리성과 이성 및 논리성 같은 나의 덕성과 탈렌트들이 실은 아버지에게서 일부 물려받았다는 점을 재인식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점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됨과 동시에 아버지에게 매우 죄송하고 고맙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나는 논문을 발표한다거나 강연을 할 때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호평을 받는다. 그와 상반되게 감성도 발달해서 시인으로 등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려서 화가로도 데뷔한 것은 모두 아버지의 유전형질을 물려받은 덕분이다. 게다가 개인문제보다 사회와 국가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성향도 어머니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더 많은 듯하다.

자고로 범의 자식은 범일 수밖에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다. 감나무엔 감이 열리고 배나무엔 배가 열린다는 건 진리다. 잘나나 못나나 나는 아버지의 자식일 수밖에 없고, 그 사실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버님, 천상에서는 이승에서 못 다하신 거 원 없이 이루셔서 가슴에 안고 가셨을 여한을 다 내려놓으시길 깊이 축원 드립니다.

2022. 11. 7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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