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고향의 氣와 나

雲靜, 仰天 2023. 5. 15. 23:12

고향의 氣와 나


氣란 보통 자전적 의미로는 “활동하는 힘”, “숨 쉴 때 나오는 기운”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기의 개념은 약간 다르다. 16세기 말부터 전래된 서양의 종교와 과학의 영향으로 큰 변화를 겪었지만, 기는 보이는 물질세계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작용과도 관련돼 있다. 동양철학에서는 보통 원리, 근원, 본질로 인식되는 理에 반해 그것이 드러나는 현상, 작용, 물질 등으로 정의된다.

기라는 건 서양인들에게는 없던 개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기”라는 단어도, 관련된 말도 없었다. 그들에겐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쓰고 있는 “기를 받는다”, “기가 막히다”라거나 “기가 약하다” 따위의 표현들을 서양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번역을 해줘도 바로 인식되지 않는 이유다. 서양사회엔 중국의 유학이 널리 소개되면서부터 氣의 한자음을 중국어의 “Qi”로나 한국어 발음대로 “Gi”로 적어서 사용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나에게도 기의 ‘정신작용’이나 ‘활동하는 힘’, ‘근원’적 토대가 바탕이 돼 다양한 양태로 발현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반평생 이상 살면서 내 몸속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기들이 각각 존재하거나 같이 섞여 혼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자기 혼자만 잘 살겠다고 남을 무시하고 부리는 온갖 악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주치면 사생결단을 내는 노도 같은 기가 있는가 하면, 리어카나 수레를 끌고 골판지나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허리 굽은 노인네들을 보면 바로 가슴이 짠해지면서 눈물이 나는 솜털 같은 여린 기도 있다. 또 옳은 말이나 바른 말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기도 있지만, 파렴치한 행위나 삿된 말은 누가 하든 가만있지 않는 정의로운 기도 있다.

나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나는 타인과 사물에 대한 대응에서 이성과 감성이 거의 반반씩 섞여 있음을 경험적으로 많이 느끼면서 살고 있다. 실제로 ‘이성‧감성 수치테스트’ 같은 걸 해봐도 결과는 그렇게 나온다. 그것이 때로는 학자적 기질로, 때로는 무인적 기질로, 때로는 예술가적 기질로, 때로는 유랑적 노마드 기질로, 때로는 정치가적 기질로 나타난다. 이러한 기의 하부에는 무수히 많은 성향이나 경향(trend)들이 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런 성향 혹은 경향이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을까? 영향을 받았다면 어디서 받았을까? 답은 부모님의 유전형질에다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이 그런 기의 원형질을 강화시킨 게 아닐까 싶다.

고향이 없는 이가 있을까? 아마 드물 것이다. 단지 고향을 떠나 살거나 고향을 잊고 사는 이들이 많을 뿐이다. 혹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태어난 곳에서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나고 자란 고향의 기를 받으면서 살게 마련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기운이 평생을 가고, 어떤 이에게는 점차 옅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중도에 사라지고 만다. 나에게는 대지와 바다의 기가 만나는 내 고향 포항의 기를 듬뿍 받아 평생 동안 가는 듯하다. 그것은 선천적인 유전형질에다 부모님이 보여주신 삶에서 훈습된 것 외에도 고향에서 나고 자라면서 보낸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형성된 부분이 적지 않은 듯하다.

내가 사물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발달한 것은 어릴 적 포항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행한 체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한다. 이런 생각과 느낌은 얼마 전 우연히 한 친구가 보내준 1960년대와 70년대 포항시내 곳곳의 옛 모습이 담긴 빛바랜 수십 컷의 사진들에서 촉발됐다. 그 사진들을 통해 지난날 고향의 수많은 장면을 보니 이러구러 장구한 반백 년이 넘는 세월이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갔음을 실감하지만, 내겐 포항시내 전역이 기억의 보고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포항시내 곳곳에 내 기억이 서려 있는 곳이 없는 데가 없을 정도다. 특히 내가 나고 자란 학산동, 내가 다닌 항도초등학교 주변, 모교 포항중학교, 나루끝 일대, 수도산, 항구동, 북부시장을 중심으로 한 대신동과 동빈동 지역들, 내가 졸업한 중앙초등학교와 육거리 일대 그리고 오거리, 공설운동장, 송도 등지를 지나가게 되면 그곳엔 그 시절 내가 보고 경험한 모두 광경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손에 잡힐 듯하다.

이 지역은 멀리 타향에서 생각만 해도 유소년과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내가 서너 살 때 도로정비 사업에 나선 ‘엄마’ 손에 이끌려 ‘중앙국민학교’ 건너편 붉은 벽돌의 일제식 포항시청 부근의 풍광들도 정겹다. 그곳엔 내 유년의 야윈 영혼이 그대로 누워 있는 듯하다. 외가가 있던 청하 같은 시골에서 소를 풀어놓고 풀을 뜯게 하고선 개구리, 두꺼비, 나비, 잠자리, 풍뎅이, 무당벌레, 붕어, 미꾸라지, 물방개 등등의 많은 종류의 생명체를 잡고 놀던 기억이 쌓인 것이리다. 어쩌다가 개구리를 잡아서 산 채로 항문에 밀짚 대를 꼽아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던 몹쓸 짓도 했다. 이것은 개구쟁이였다고 해서 합리화되는 일이 아니다. 나의 자연 친화적이고 모든 생명을 등가적으로 중시하는 가치관이 생겨난 건 소싯적의 이런 경험과 잔인한 행동에 대한 뉘우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혜의 아름다운 해변이었던 송도해수욕장과 북부해수욕장도 자연과 생태계와 환경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형성되게 된 심리적 배경이었다.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성향 그리고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지구 환경 및 생태계보호의식이 생겨난 것은 아무래도 포항의 두 해수욕장을 자주 드나들면서 바다를 경험한 것 그리고 훗날 30대 후반 때 포스코에서 받은 배신감에서 강화됐다는 느낌이 든다. 초등학교 4학년 봄날의 어느 일요일 ‘포항종합제철공장’ 기공식이 있다기에 혼자서 내가 살던 대신동 북부시장에서 오거리-포스코 간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흰 먼지를 덮어쓰면서 먼 길을 걸어서 지금의 제철공장 설비가 있는 모래사장에서 거행된 기공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행사장 현장은 인파가 인산인해로 북새통을 이뤘다. 어린 아이는 행사장 뒤편 먼발치에 서서 기공식장에서 축사하던 사람이 김종필 국무총리라고 한 어른들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 많은 포항시민들이 종합제철공장 설립을 환영했지만 당시엔 세월이 흐른 지금처럼 제철공장이 포항시민의 건강과 주거환경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치게 될 것이라곤 상상이나 했겠는가?

타고난 공간지각이 후천적으로 더 강화되고, 그 어떤 불한당을 맞닥뜨려도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나 ‘상무정신’이 고양된 것은 해발 100m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수도산 등지로 뛰어다니면서 왕성하게 놀았던 병정놀이, 그리고 그것이 중고등 시절 각종 운동으로 이어져서 체력과 자신감을 쌓게 된 게 밑바탕이 됐다. 포항에 있는 학산과 수도산은 내가 동네 북부시장 주변의 골목과 함께 병정놀이를 한 주된 공간 중 한 곳이었다. 나는 직접 졸대로 길이 약 7~80cm 정도의 나무칼을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고선 그들을 데리고 수도산에 가서 두 패로 나눠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칼싸움으로 공격과 수비를 하는 등 진지를 뺏고 빼앗기는 진지전을 벌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가 살던 북부시장터에서 골목대장을 지낸 나는 휘하의 ‘부하’들이 대략 20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에서 두 살까지 많은 고학년도 더러 있었다. 나이 많은 몇몇 친구들 중 일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소식을 모르지만, 나이가 나보다 적은 다른 옛 ‘전우’들은 몇 년 전 근 50년 만에 만나 몇 차례 자리를 같이하면서 그간의 회포를 푼 적이 있다. 소싯적의 옛 ‘전우’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일처럼 골목대장이었던 나에 대한 기억을 많이 하고 있었다. 내가 당시 자기들을 훈련시키느라 모래주머니를 장딴지에 매고 인근 수도산을 타게 한 것도 있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후배들은 내가 골목대장으로서 병정놀이를 지휘하던 모습, 그리고 도화지에다 12색 사인펜으로 건물과 기물은 물론, 등고선까지 그린 수도산 지도를 사용하던 것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형님, 어떻게 그때 그 나이에 그런 지도를 그릴 수 있었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정말 놀랍습니다.” 훗날 내가 해외유학을 마친 후 생애 두 번째 직장으로 국방부 산하 직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전쟁을 연구하게 된 것은 이처럼 어릴 적 학산동, 북부시장 장터와 수도산을 무대로 병정놀이를 한 게 잠재적 기로 작용됐던 게 아닐까?

나에게 서민적 취향이 생겨난 것은 어릴 적 가난하게 산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도 내가 시장에서 자라고 컸던 환경적 요인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길거리에서건, 시장에서건, 어디에서건 나는 형편이 어려워 행색이 남루한 이를 보면 그들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친근감을 느낀다. 못살고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내 자신이 바로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상으로 보고 접한 게 전부 그런 모습들이었기 때문이다. 꿀물(사실은 설탕물!)이 줄줄 흐르던 육거리의 명물 호떡은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죽도다리 위 길거리 노점상에서 1원을 주면 무려 스무 개씩이나 준 작은 국화빵을 맛있게 사먹었던 경험도 가난한 시절의 잊히지 않는 표상이다. 초등 4~5학년 때 죽도동의 포항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주간지인 ‘주간경향’과 ‘선데이서울’을 그때 돈으로 40원을 주고 떼서 45원에 팔아 5원을 남기는 식으로 용돈을 벌어 본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내가 만약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쉬운 것 없이 자랐다면 지금의 서민적 정서는 형성이 됐을까? 국내에 있건, 해외에 나가건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 가면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친근감이 드는 것도 그런 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여전히 활력을 받고 사람 사는 맛을 흠씬 느끼고 돌아오게 만드는 곳이 바로 재래시장이다. 당시는 지금 같은 거대한 쇼핑몰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전국 어디든 재래시장뿐이었다. 어릴 적 체험으로부터 내장된 잠재된 기운이 작용된 탓일 터다. 성격이나 성정은 선천적인 것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가정 및 학교교육, 생활환경,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만들어지니까!

가끔씩 순간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나의 예술적 기질은 또 어디서 형성되었을까? 초중고 학생 시절 사생대회엔 거의 빠트리지 않고 참가한 바 있는 미술에 대한 취미와 재능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전적인 것이다. 성인이 돼 취미로 즐기는 영화감상도 예술적 기질의 발현에 일조한 요소다. 그런데 그것도 어릴 적부터 포항시내에 있던 대신극장, 시민극장, 아카데미, 포항극장, 국제극장 그리고 지금은 시민회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육거리에 위치한 시공관에서 자주 영화를 봤던 게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곳에서 10원 하던 입장표를 끊고 본 영화들의 장면들은 아직도 내 머리속에 잔상으로 남아 있다. 배우 김희갑이 주연한 것으로 기억되는 ‘왕마귀’, ‘저 하늘에도 슬픔이’, 홍콩 영화 ‘돌아온 외팔이’, ‘와일드 캐츠’가 그런 것들이다.

여담이지만,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선 우연히 돈 없이 시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됐다. 영화관 입구에서 검표하는 사람을 당시엔 일본말로 ‘기도’(木戶)라고 불렀다. 기도 아저씨에게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 한쪽을 맡겨놓고 한쪽 신만 신고선 영화를 다 본 후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빈 영화관 청소를 다 마치면 나머지 한쪽 고무신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영화를 봤다. 호주머니가 텅 빈 어린 나는 가끔씩 이 방법으로 영화를 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조금 치사했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를 좋아하기로는 오른 팔목 뼈를 부러뜨려 깁스를 한 채 왼손으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을 정도였다. 중고등학교 때 흥미진진하게 본 이소룡(李小龍) 주연의 당산대형(唐山大兄), 정무문(精武門), 용쟁호투(龍爭虎鬪)를 죄다 본 후 그에게 매료돼 이소룡의 발차기를 흉내 내다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평소에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도 좋아하지만 애환, 슬픔, 비통, 애통, 고독, 우수 같은 정서에도 마음이 자석처럼 끌린다. 아마도 이 같은 상황을 직접 접하고 나면 역설적으로 형언불가의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나의 생래적인 성격과 후천적인 소싯적 체험이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외향적 성격도 조부의 영향을 받은 타고난 유전인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후천적으로 유년 시절 내가 살았던 포항의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둘러싸여 생장했기 때문이다.

그립고 그리워도 지금은 되돌아 갈 수 없는 아득히 먼 내 고향의 산하가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다. 나의 기를 일부 형성시켰거나 강화시킨 아름다운 산과 바다처럼 모든 자연과 인위적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 이 졸고를 탈고하는 이 순간에도 노을 지는 석양을 뒤로한 채 울릉도행 여객선 청룡호가 뱃고동을 울리면서 서서히 동빈동 항구를 빠져 나가던 정경이 떠오른다. 아, 그리운 내고향 포항의 산하여!

2016. 9
고향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