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서상문의 가출

雲靜, 仰天 2023. 5. 15. 22:55

가출 Ⅰ


소싯적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추억이 많고 적을 뿐이고, 기억이 옅고 강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또 어릴 적에 집을 나간 가출 추억도 있을 수 있다. 나에게도 유년시절 여러 차례 결행(?)한 가출 추억이 있다. 추억들 중에 잊어지지 않는다. 흔치 않은 사건들은 유달리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도 아니고 너댓 번이나 가출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약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가출들을 낡은 흑백사진처럼 선연히 기억하고 있다. 4~6살 사이에 3번을 가출했고, 나머지 한 번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첫 번째 가출은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다. 미필적 고의로 일어난 일이었다. 어떤 일로 부모님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나서 그 길로 가깝지 않은 포항 기차역으로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할배가 계시던 아버지의 고향 안강으로 가다가 미아가 된 경우다. 네 살 때였다. 그때는 포항역을 출발하면 안강까지는 효자, 부조, 양자동 등 세 정거장을 거쳐야 한다. 나는 영악스럽게도 아이를 등에 업은 어떤 아줌마의 뒤춤에 손을 살짝 얹어 엄마를 따라 가는 아들인 것처럼 표 없이 개찰구를 빠져 나가 기차를 탔다.

나를 실은 기차는 포항역을 출발한 뒤 효자역을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역인 부조역에서 멈춰 섰다. 철길이 단선이던 시절, 반대편 기차가 오는 걸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기차는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에 무슨 일인가 싶어 객차에서 내려 플랫폼에서 혼자 흙장난을 하고 놀았다. 그런데 그 사이 반대편 철길로 기차가 들어오자 내가 타고 온 기차는 나를 두고 떠났다. 성인 같으면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를 뛰어가서 잡아 탈 수도 있었겠지만 네 살 아이에게 그것은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움직이는 기차를 보고서도 잡아타지 못해 그만 미아가 돼 버렸다.

얼떨결에 기차를 놓치고 만 나는 플랫폼에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같은 기차에서 내린 어떤 아저씨가 우는 나를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모님은 어디 가셨고 집이 어디냐고 물으셨다. 나는 주소를 알고 있었지만 바른 대로 말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결국 나는 그 아저씨의 품에 안겨 그의 집으로 갔다. 부조역에서 산 아래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직선으로 눈에 들어오는 예배당 뒤 스레트집이었다. 지금도 집 전체와 마당 그리고 ‘정지’가 정갈했다는 인상이 남아 있다. 성인이 돼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20대 후반 쯤으로 보였던 그 아저씨는 부인이 없었던 것으로 봐서 미혼이었던 모양이고, 홀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대략 보름 쯤 지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코가 푹 꺼진 얼굴의 나와 달리 서너 살 때는 코가 오뚝 솟고 “똘방 똘방”한 잘 생긴 아이였다. 영화배우를 뺨칠 정도로 미남이셨던 아버지를 닮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적적하게 지내시던 두 모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매일매일 노는 게 너무 신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계시는 우리 집이 아니어서 간섭 받지 않는 자유가 편했던 모양이다. 매일 곱삶은 꽁보리밥에다 김치와 짱아지 그리고 수제비와 국수뿐이었던 내 집과 달리 당시 보통 가정에선 먹어 보기 힘든 쌀이 반 이상이나 섞인 ‘이밥’에다 멸치와 생선도 가끔씩 상에 올라왔다. 어린 게 맛있는 건 알아서, 반찬이 좋았던 것도 내가 그 집을 떠나기 싫은 이유 중에 하나였다.

약 열흘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처마 밑 툇마루 기둥에 달린 엠프에서 검정 고무신에 까까머리를 하고 얼굴엔 마른버짐이 있는 아이를 찾는다는 포항 KBS라디오 방송국의 뉴스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뉴스는 그 뒤로도 사나흘 계속 됐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나를 찾는다는 방송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웬걸? 나는 서너 살짜리 아이치곤 너무나 이물스럽게도 미아가 아닌 듯이 짐짓 모른 체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해오던 대로 두 모자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이밥과 생선반찬 맛에 취해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않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엄마 아버지는 크게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가면 또 맞을 게 뻔한데 그게 싫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정말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 전개됐다. 아주머니와 그 아드님께서 미아를 찾는 방송이 계속되자 그걸 듣고선 아무래도 눈치를 채신 것 같았다. 내가 그 미아임을 아신 두 분이 어린 나를 꼬드기려고 참외 하나에다 수박 한 조각을 주시면서 “니 집이 어디고?”라고 물으셨다. 몇 차례나 물어도 나는 대꾸 한 마디 하지 않고 단호하게 도리질을 쳤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더 지났다.

그런데 두 모자께서 웃으시면서 붉은 돈 일원짜리 지폐를 안기는 통에 나는 그만 마음이 약해져 집주소를 이실직고 해버렸다. 당시 네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부터 돈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으로 맛있는 “아이스케키”나 삼각형 비닐 속에 들어 있는 노랑, 빨강, 초록색의 단물도 사먹어 봤으니까! 또 죽도시장 다리 위에서 팔던 국화빵은 1원에 20개나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에게 배워서 한글도 깨쳤으며, 부모님 성함이고 집주소간에 웬만한 것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등병에서 대장까지의 군대 계급순도 줄줄 외우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는 보기 드물게 영어 알파벳까지 쓰고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동네에선 영특한 아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것도 물론 아버지에게 배운 덕분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잠시 포항 학산동 산마루에 있던 전수학교 협성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다. 부모님은 자주 동네 사람들로부터 “저 놈은 나중에 크면 역적 아니면 임금이 될 놈이다”라는 수군거림까지 들었다.

결국 나는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모친의 손에 이끌려 누런 먼지가 풀풀 날리던 부조 마을 앞의 신작로에 서게 됐다. 서쪽에서 대구 발 영천, 안강을 거쳐 포항으로 가는 버스나, 북서쪽 기계에서 안강을 거쳐 포항으로 가는 버스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당시는 차 앞부분 범퍼 아래의 구멍에다 ‘ㄹ’자 형의 쇠막대기를 넣고선 돌리면서 시동을 걸어야 걸리는 버스였다. 이윽고 7월의 여름 땡볕 속에 먼지를 날리면서 덜컹덜컹 버스가 왔다.

버스를 탄 우리는 포항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내린 뒤 내가 앞장서서 학산동 부모님 집을 찾아갔다. 오후 서너 시 경, 우리가 도착하니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주인 집 개가 연신 짖어대고 주인집 아이들만 나를 반겼다. 부모님은 백방으로 아이를 찾으러 아침부터 집을 나가시고 없었다. 두 분은 사방 천지를 돌아다니시다가 나를 찾지 못해 상심하시면서 저녁 해거름에야 파김치가 되다시피 해서 돌아오셨다. 나는 부모님에게 회초리로 종아리가 멍이 들었을 만큼 늘씬하게 맞았다.

맞은 건 맞은 것이고,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다. 그 뒤 나는 자라면서 가끔씩 포항에서 기차를 타고 부조를 지날 때면 늘 버릇처럼 차창으로 예배당 뒤의 그 집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 나는 30대 중반에 어머니와 함께 부조의 그 집을 찾아가서 할머니가 된 그 옛날의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그 때는 아저씨가 장가를 가셨는지 집에 계시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도 나는 미아가 된 나를 거둬 주시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신 두 모자의 사랑을 잊지 않고 있다. 지금은 그 모친은 고인이 되셨을 가능성이 크고, 아드님은 살아 계시면 줄잡아 80세가 넘었을 연세다. 만일 그때 부조역 플랫폼에서 그 아저씨 분이 나를 데려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다시 한 번 두 모자분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되새겨본다.


가출 Ⅱ

나의 두 번째 가출은 의도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결과적으로는 가출이 된 것이다. 어딘지는 몰라도 포항 인근 장으로 장사 가신 엄마를 찾아가기 위해 무턱대고 엄마가 간 길을 가다가 미아가 된 것이다. 당시 영일만 일대에는 포항시를 제외하고 인근 작은 읍면 지역은 모두 각기 5일 마다 시장이 섰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수년 동안 세 살 아래인 나의 여동생을 업고 생선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포항 인근의 바다가 없는 시골장으로 장사를 다니셨다.

네 살 때 늦은 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신광장이었는지, 청하장이었는지 기억이 분명하진 않지만, 가까운 시골장터로 생선을 팔러 집을 나선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엄마!”, “엄마!” 부르면서 뒤따라갔다. 엄마는 몇 걸음도 못가서 한 번씩 뒤돌아보시면서 아들에게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며 손짓하고는 타야 할 버스를 놓칠 새라 잰 걸음으로 가시던 길을 재촉하셨다.

어른 걸음을 쫓아가지 못한 나는 얼마 가지 못해 결국 엄마와 등에 업힌 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일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라 여러 번 있었다. 저녁에는 엄마가 돌아오신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닌 데도 뭐가 그리 슬펐는지 계속 울곤 했다. 나는 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했다. 나중엔 울다가 지쳐서 혼자서 철길에서 놀았다. 그리곤 배가 고프거나 해가 질 무렵이면 집에 들어가곤 했다. 점심은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지 않아서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때마다 끼니 걱정을 하면서 굶기도 많이 했고 검정 보리밥이라도 먹으면 그나마 괜찮은 형편이었다. 우리 집은 죽과 수제비를 자주 먹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나 혼자 점심을 찾아 먹기는 어려웠다.  아버지는 어디를 쏘다니셨는지 낮에는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각오를 단단히 한 셈이다. 이번에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엄마가 간 길을 따라가 보겠다고 말이다. 너 댓살 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가 혼자서 학산동 집 앞으로 길게 난 철길을 지나 우현동 ‘나룻끝’을 거쳐 가파른 산길의 ‘소티재’를 넘어 갔다.  이 재는 지금도 비포장도로였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에서 포항을 거쳐 강릉, 속초로 가는 국도의 구불구불한 산길이어서 어린아이 혼자는 넘기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산 능선을 넘으니 멀리 재 아래 달전이라는 마을이 보이면서 내리막길이 펼쳐졌다. 서쪽으로 지금의 포항 케이티엑스 역사가 있는 곳이다. 긴 내리막길을 내려가서 동네에 다다랐다. 신작로 옆 정미소 방앗간이 있던 마을이었다. 당시 부모님이 사셨던 포항 학산동에서 달전까지의 이수는 10리 길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달전이 포항시로 돼 있지만 그때는 영일군 흥해읍에 속해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내가 어린 꼬마 걸음으로 비포장 산길을 걷고 걸어서 달전에 도착했을 때는 대략 5월 경 늦은 봄날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거름 무렵이었다. 때마침 정미소 앞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지만, 잔치 집 마당에 둘러쳐진 흰 광목으로 된 천막 사이로 분주하게 오가던 사람들에 섞여 나도 한 상을 받았다. 나는 그때 처음 먹어본 음식과 부산했던 그 광경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특히, 붉은 칠이 입혀진 둥근 나무상 위에 놓인 하얀 호리병은 모양과 색깔까지도 망막 속에 각인돼 있다. 병 표면에 파란 색 돛단배가 그려진 그 병 안에는 단술이 들어있었다. 당시 포항에선 “식혜”라고 불린 감주였다. 난생 처음 먹는 달짝지근한 감주라서 맛있게 잘 먹었다.

하지만 식후가 문제였다. 해가 저물자 그만 갈 데가 없었다. 잠은 어느 집에서 잤는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동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잘 놀았다. 아들을 찾기 위해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사방 천지를 돌아다니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던 상황이었다. 미아가 돼 고아가 되거나 유괴되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던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미아가 되거나 유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여간 다행스런 게 아니다.

뜻하지 않은 행운(?)과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대략 사흘 쯤 지났을까? 어느 날 오전 무렵이었다. 그날도 나는 길가 방앗간 앞을 지나는 동해안 비포장 자갈길 국도 옆 공터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느닷없이 어떤 어른이 달려와선 나의 뺨을 냅다 갈기는 게 아닌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엄마와 아버지였다. 부모님은 당신들이 타신 버스가 검문을 위해 검문소에서 잠시 선 사이에 차창 밖을 내다보시다가 나를 발견하신 것이었다. 두 분은 사색이 된 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시다가 외가인 청하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시던 중이었다. 훗날 ‘어무이’는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장성한 나에게 “니를 본 순간 반갑기도 했고, 그동안 애간장을 태운 게 생각나서 화가 얼마나 나고 얄미웠던지 보자마자 때렸지 뭐고!”라고 말씀하셨다.

며칠씩이나 밤잠까지 설치면서 애를 태운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60년 가까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시 어머니의 심적 상태와 마음을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돌이켜 보면 정말 순간이 나의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 때 극적으로 부모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며칠 더 있다가 어른들 손에 잡혀서 집을 찾아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고아가 됐을 수도 있고,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야 다들 고인이 되셨을 터이지만, 나를 고아나 유괴가 되지 않도록 거둬주신 달전 정미소 마을 사람들과 부모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함께 놀아줬던 같은 또래 아이들은 한 명도 기억에 남는 이가 없지만, 그 친구들에게도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들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소풍처럼 잠시 와 있는 이승에서 무수히 스쳐간 인연들이지만 나에겐 너무나 중대한 기로에서 운명을 결정지어줬던 분들이었다.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가출 Ⅲ

세 번째 가출은 그 전 두 번의 가출과 달리 완전히 작정하고 결행한 것이었다. 이번엔 가출이라기보다는 포항의 부모님 집으로 가고 싶어 할배집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가출인지 실종인지 계속된 “사고”에 혼 줄이 나신 부모님은 대책을 세우셨다. 매일 엄마를 따라 나서는 아들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생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안강의 창말이라는 서씨 집성촌 마을에 사시던 할배댁에 보낸 것이다.

부모님의 부탁을 받으신 할배와 할매는 말썽 많은 문제아(?)인 손자가 다시는 가출미아가 되는 일이 없도록 나에게 한시도 삼엄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셨다. 불같은 성격의 무서운 할배는 방안에 계실 때도 수시로 방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으로 작지 않은 마당을 살피셨다. 할매와 숙부까지 나서서 이제 겨우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다시는 집밖을 나다니지 말라고 심리공작(?)도 폈다. 안강, 기계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형산강 모래사장에서 어린 아이의 간과 눈을 빼먹기 위해 칼과 낫을 숫돌에 가는 문둥이들을 많이 봤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려주셨다. 물론 겁을 줘서 더 이상 집을 나가지 못하도록 겁을 먹게 하려고 사실이 아닌 지어낸 얘기였겠지만 당시는 문둥이들이 몇 명의 어린아이 간을 끄집어내서 먹으면 문둥병을 고쳐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들이 나돌던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어린 꼬마들에겐 무시무시하게 들렸겠지만 나는 숙부와 할매의 이 말씀을 듣고도 그다지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거의 ‘유폐’ 당하다시피 했다. 할배께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시니 같은 또래 친구들과도 놀 수 없었다. 갑갑한 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속으로 할배와 할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포항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범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 뒤 여러 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날이 어둑해지면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는 기억이 나니 늦가을쯤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키가 190cm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 나의 조부님은 쉰을 갓 넘기신 연세였지만 평소 두주불사의 오랜 과음 탓에 위궤양이 심했다. 그래서 의사가 의사가운을 입은 채 청진기, 주사기 등 의료기기를 넣은 붉은색 가죽 가방을 들고 안강읍 소재지에서 2㎞ 가량 떨어진 조부님 댁으로 왕진을 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배는 안방에 누워서 링거주사를 맞으셨다. 그러면 여느 때처럼 마당을 내다보실 수가 없게 된다. 이걸 알게 된 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몸집도 작겠다. 나는 바로 담벼락에 붙어 최대한 몸을 낮추고 기다시피 해서 마침내 대문을 빠져 나갔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때의 해방감이란!

할배 집에서 빠져 나온 나는 그길로 기계에서 안강으로 나오는 버스가 다니던 신작로(당시는 '치도'라고 불리기도 했던 거 같은데, 할배가 나에게 차가 다녀 위험하니 "치도로 나가면 안 된다"고 자주 일러주신 것이 기억남)로 나가서 삼통 안강읍내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안강은 읍내에 가야만 포항행 버스나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조부님 댁에서 읍내까지는 약 2~3㎞ 쯤 되는 이수였다. 멀리 전방에 시가지가 보였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비포장도로를 오가는 버스와 삼발이(삼륜차)들이 일으킨 먼지를 하얗게 덮어쓰면서 걸었다. 논과 개울들이 끝나고 읍내로 막 들어가는 지점에 이르러 주택들이 나오는 곳에선 리어카 양옆에 ‘삼신연탄’이라는 글이 쓰인 철판을 댄 리어카로 연탄을 배달하던 아저씨를 도와 밀어주기도 했다.  나는 당시 아버지에게 배워서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 붉은 노을이 지면서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는 안강 읍내에 도착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차도 다 끊어져서 포항까지는 갈 수 없게 됐다.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돈을 알아도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나는 또 다시 어두워진 길거리에서 미아로 신고가 돼 가까운 안강 지서로 보내졌다. 그때가 사방이 완전히 어둠이 내려 길거리에서 사람을 봐도 누군지 식별하기 어려웠으니 아마도 대략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이었을 것이다. 지서 실내에 난로가 있었던 것 같고, 커다란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야간 근무를 서던 순경 아저씨들이 내게 주소도 물어보고 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모른 체 했다. 밥 먹었느냐는 아저씨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지서 안 따뜻한 숙직실 방에 앉아 있으니 이밥과 ‘메레치’(멸치) 볶음반찬이 나왔다. 나는 정말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런데 맛있는 밥상을 차려준 순경아저씨들의 호의에 결국 나는 할배가 사시는 집 주소와 할배의 성함까지 다 말해버렸다. “안강읍 양월 1리 451번지, 서기술!” 그랬더니 약 1시간 남짓 지났을까? 대략 밤 9시 경 십여 명의 일가친척 어른들이 지서로 들이닥쳤다. 어두컴컴한 시골길을 걸어 온 그들의 손에는 호롱불이 쥐어져 있었다. 당시 전화기는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사용하던 시절이었으니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광경이었다.

결국 나의 세 번째 가출도 실패였다. 그날 밤 또 다시 할배집으로 연행(?)된 나는 노발대발 화를 내신 할배의 호령에 겁을 잔뜩 먹고 울면서 목침 위에 올라서서 회초리로 늘씬 맞았다. 그 다음부터는 나에 대한 할배와 할매의 감시의 눈빛이 더 반짝거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오로지 할배집의 방과 넓은 마당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또래 친구 없이 혼자서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하루가 여삼추 같다’는 말을 알 턱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시는 그 의미 그대로였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할매께서 혼자서 심심해하는 손자를 위로하신답시고 자주 나보고 말씀하셨다. “너거 애비 오는강 삽작거레 나가봐라!” 그리곤 5일 마다 섰던 안강장에 가끔씩 가셔서 손주 “주봉”(프랑스어지만 그땐 그대로 썼음)을 사와가지고선 나보고 입어보라고 하셨다. ‘주봉’을 입어보라는 할매 말씀 왈 “고시바리가 맞나?” 일을 시켜 심심함을 달래보게 하시고자 손자에게 준 당근인 셈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는 그 광경들이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돌아가고 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지도 벌써 30년이 돼 간다. 하지만 지금도 내 귀에는 할매께서 하신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소에게 쇠죽을 먹일 볏짚을 작두로 썰던 손주에게 여물 만드는 낫과 작두를 보시며 말씀하신다. “아이고 이노무 종내가! 손가락 비킨다. 조심해라! 다황은 가마솥 옆에 놓으면 안 된다. 떨어질라 야불떼기 꼰드라부까네 단디 지들카 놓고 여 오나라!”

가출이 성공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포항 부모님이 계신 집을 무사히 찾아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다른 엇길로 빠져 또 다른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개됐을까? 가보지 못한 운명의 길이이었다. 그러나 가출이 실패한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가출 Ⅳ

나의 네 번째 가출은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포항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작정하고 경북 청하의 외가를 ‘탈출’한 일이다. 물론 이번에도 거사는 실패했지만! 그해도 여름방학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해도 나는 거의 해마다 방학이면 가던 외가 필화리에 가서 소꼴도 베고 농사일을 거들었다. 1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큰 솔밭이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새둥지가 나무 마다 지어져 있고 어미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광경이 눈에 띄는 곳이었다.

외갓집에는 외숙부와 외숙모가 외조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지금 살아 계신 외숙부는 성품이 온화하신 분이다. 외숙부 내외분은 여름철이 되면 거의 매일 논과 담배 밭으로 농사일을 나가셨다. 다행이 논밭은 외갓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조금 나가면 약 1km 정도의 거리에 흐르던 강변 인근이었다.

여름철엔 담배나무는 큰 놈은 어른 키보다 더 크게 자란다. 그 밭고랑 안으로 들어가면 바깥에선 늘어지게 한껏 자란 담배잎 밖에는 보이는 게 없다. 두 분은 일 하시다가 담배 나무의 큰 잎사귀들로 가려진다. 담배밭 고랑 사이에서 애정을 표현할 때가 가끔씩 있었다. 당시는 외숙부께서 결혼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혼시절이었다. 주로 내가 같은 밭 다른 고랑에서 풀을 뽑는 등 일하느라 보이지 않거나 혹은 나를 외갓집에 새참 가지러 보내 놓은 사이에 그런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나도 무슨 광경인지 알아차릴 시기였다. 어쩌다가 본의 아니게 어린 생질이 그 광경을 보게 되면 외숙부는 무안한 표정으로 계면쩍게 웃으시면서 흰 이를 드러내셨다.

팔월 땡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외숙부 내외를 따라 담배밭에 일하러 나갔다. 그런데 외숙모가 시켜서 내가 외갓집에 가서 새참을 가지고 다시 밭으로 돌아오니 그만 같은 광경을 또 보게 됐다. 두 분의 애정표현이 황급히 중단됐다. 이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외숙부 내외로부터 까닭 모를 꾸중을 들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내가 볼라고 해서 봤나 뭐”라는 반발심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나는 온다간다 말도 않고 외갓집을 나와 버렸다. 그 길로 포항 집으로 가기 위해 청하읍내로 나갔다. 그리고 포항 방향을 향해 비포장 자갈길 차도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버스나 트럭이 지나가면 허연 먼지가 펄펄 나면서 바퀴에 어긋난 돌들이 튀기도 했다. 당시는 청하에서 비포장도로의 포항까지 가려면 줄잡아 5~60리는 족히 되는 거리였다.

여름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나는 외갓집에서 어림잡아 40리는 족히 되는 흥해읍에 다다랐다. 마침 그날은 흥해장이 선 날이어서 장터, 도로 할 것 없이 사람, 우마차, 리어카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더운 날씨 탓에 갈증도 났고 많이 지치기도 했다. 돈이 한 푼도 없어 버스를 타지 못해 걸어서 온, 사서 한 고생길이었다. 포항까지는 걸어서 가려면 아직도 20리 길이 더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날이 저물면 이번엔 흥해에서 미아가 될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난감해 하면서 길가에 풀썩 앉아서 쉬고 있는데 때 마침 절묘하게도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세상에나!” 누가 버스 차창으로 나를 부르시는 데 얼굴을 들어보니 흥해장에 가신 외조부님이 아닌가? 말 수가 많지 않고 인자하신 외할배는 소 전문중개인이셨다. 청하나 그 인근 지역의 장날 마다 나가셔서 일을 보시곤 귀가 시에 약주를 한 잔 하시면 불그스레한 얼굴로 기분 좋게 돌아오시곤 하셨다.

그날은 외할배께서 흥해 우시장에 가셨다가 장이 파할 즈음 귀갓길 버스 안에서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차창을 무심코 내다보셨겠지. 앗!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담배 밭에 있어야 할 어린 외손자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외할배는 외손자 이름을 부르면서 바로 차에서 내려 나를 덥석 잡으셨던 것이다. 정말 너무나 뜻밖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시는 외할배께 나는 억울한 심정으로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하나하나 일러바쳤다. “아재가 막 머라 캐서 포항 우리 집에 갈라고 왔니더”라고 했더니 엄청 놀라시면서 가뜩이나 구릿빛 얼굴이 더 어둡게 보였다.

원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 길로 외할배의 손에 이끌려 다시 외갓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시쳇말로 반항심과 오기로 감행한 외갓집 탈출이 헛수고가 되는 순간이었다. ‘말짱 도로묵’이란 이럴 때 하는 말이다. 외갓집에 당도하신 외할배는 외삼촌에게 어린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타박을 주셨다. 다행히 외숙부는 인자하신 분이어서 “뒷끝”은 없으셨다. 나중에 부모님은 이 일을 알지 못하셨는지 별 말씀이 없으셨다. 가출에서 잡혀 돌아왔지만 이번엔 매를 맞지 않고 지나가게 됐으니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세월이 쏜살 같이 흘러 어느덧 나도 진갑이 지난 나이가 됐다. 8순을 바라보시는 외숙부, 외숙모 두 분은 지금도 해로를 하고 계신다. 얼마 전에는 외숙부에게 문안 전화를 드렸다. 까마득한 그 옛날 이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계실까 하고 궁금해서 물어보려다가 외숙모께서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말씀에 물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포항은 고향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인생 초반부, 소싯적 살아 있는 인생학습장이었다. 유년시절 내가 한 번도 아닌 네 차례씩이나 가출을 했으니 미아가 돼 고아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다행히 나는 단 한 번도 미아나 고아가 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건재하다. 이는 전적으로 처음 보는 어린애를 자식처럼 거둬주시고 보살펴준 분들 덕분이다. ‘참말로 동띠게’ 고맙다. 부모님, 조부모님, 외조부모님은 물론이고, 달전의 이름 모를 그 어른들, 부조의 두 모자의 얼굴들이 희미하게나마 떠오른다.

이제 그분들은 모두 세상을 하직하고 계시지 않거나 살아 계셔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립고도 그립다. 집에 있기 보다는 밖으로 싸돌아다니길 좋아했던 그 옛날 소싯적 시절, 포항 지방 사투리로 “조막띠 만한” 소싯적 추억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뻑 하면’ 물 건너가는 나의 역마살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감이 잡힌다.

2017. 8. 23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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