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황희 정승 묘소에서 황희를 다시 본다!

雲靜, 仰天 2022. 1. 5. 09:43

황희 정승 묘소에서 황희를 다시 본다!

 

일요일 오후, 짧은 겨울 해가 서산으로 막 쓰러지기 시작할 때 나는 아내와 함께 파주시 소재 황희(1363~1452) 정승의 영정이 봉안돼 있는 방촌영당(厖村影堂)과 그 인근에 자리한 그의 묘역을 둘러봤다. 새해를 맞아서 가게 된 계획에 없던 바람 쐬기였다. 이참에 황희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개략적인 삶의 역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이나 시대적 과제가 뭔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터다.

 

조선 초 태종과 세종 양대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는 자신의 이름 壽老처럼 당시는 아주 보기 드물게 90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남성의 평균 수명이 쉰도 되지 않은 그 시대에 드물게 나이가 너무 많아서 관직에서 물러난 경우다. 고려말의 창왕과 공양왕을 거쳐 조선초의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때까지 총 일곱 명의 임금에 출사해서 무려 62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으니 기록에 남을 만하다. 그가 관직을 두루 거친 것은 그의 박학한 지적 능력과 明賢이 한 몫 했겠지만 그 외에 남들 보다 2배 가까이 오래 살면서 무병장수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1363년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 1328~1402)와 김우(金祐, 생몰연대 미상)의 딸 사이에서 얼자(孼子)로 태어난 황희는 원래 고려왕조에 출사해서 녹을 먹었다. 얼자란 천민 출신의 첩에게서 난 자식을 말한다. 첩의 신분이 양민인 경우엔 서자라고 불렀다.

1376년(우왕 2년) 음직으로 福安宮錄事(고려시대 각급 관아에서 기록 관련 일을 맡아보던 하급 실무직 벼슬이었는데 아마도 종. 정 8~9품 정도였을 것임)가 되었다가 1383년 進士試에 합격해서 1389년(창왕 1년) 문과에 급제해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음직이란 알다시피 음서제로 얻게 되는 관직으로서 과거를 거치지 조상의 공덕으로 맡게 되는 벼슬을 말하는데, 매관매직을 좋게 포장한 단어다. 한 마디로 양반층의 특권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겠다는 고려왕조의 유신들이 모여 산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고 한다. 이것은 장수 황씨 가문에 전승돼오고 있는 설화여서 현재로선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또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는 고려말 3隱(牧隱 이색, 冶隱 길재, 圃隱 정몽주)에 견줘 보면 왕씨 왕조에 대한 충절은 그다지 굳은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요청을 받아서 1394년(태조 3년)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고,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직도 겸임한 걸 보면 두문불출한 게 고작 2년 정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황희 정승 초상

태조 재임 초기 한 때를 제외하고는 황희의 관운은 대단히 좋은 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태조 시대엔 바른 말, 옳은 소리도 제법 했던 것 같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감에 점차 젊은 시절의 강직함과 단호함이 사라져 같던 거 같다.

황희는 성균관학관 겸 세자우정자직을 거쳐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에서 사헌감찰(司憲監察)과 우습유(右拾遺)로 전직(轉職)됐다. 태조 7년(1398년) 7월 5일 이성계의 조상 도조(度祖)의 비 순경왕후(順敬王后) 박씨의 능이 너무 사치스럽다 하여 여러 사람과 그것을 비판했다가 경원교수관(慶源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된 것이다. 습유라는 직책은 보궐이라는 직책과 함께 모두 임금에 대한 간언을 맡은 언관(言官)이었다.

이처럼 황희는 젊은 나이에 여러 관직을 거쳐 경기도 도사(京畿道 都使)도 역임했다. 1400년(정종 2년) 이후 황희는 형조·예조·이조·병조 등의 정랑(正郞,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의 정5품 관직)을 지내다가 1401년(태종 1년)경 知申事(훗날 도승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 朴錫命(1370~1406)이 병으로 사직하기 전 태종에게 천거해서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된 것도 이를 말해준다. 그 사이 1402년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한 것을 빼고는 황희의 관직은 지속됐다. 3년상도 다 채우지 않았던 것일까? 그가 박석명의 천거를 받고 태종의 신임을 받게 되는 과정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우선, 박석명은 태조 때는 줄곧 은거했는데 공양왕의 동생 왕우(王瑀)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태종 재임 초 태종 이방원과 죽마고우였던 사실 때문이었는지 승정원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知申事로 기용돼 왕의 기밀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면서 왕의 신임이 도타웠다. 그런 박석명이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자 사직을 만류하던 태종이 마지막엔 “경과 같은 사람을 천거해야만 마침내 그대 자리를 바꿔줄 것”이라는 말에 황희가 천거된 것이다. 박석명은 사람 보는 안목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를 만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황희가 박석명의 천거를 받아 그의 후임으로 지신사에 오른 것은 1404년(태종 4년)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이듬해인 1405년 12월 그의 나이 불혹을 갓넘긴 42세 때였다. 지신사는 代言司의 으뜸인 정3품의 벼슬이었으니 당상관에 오른 것이다. 지신사가 된 황희는 역성혁명에 성공한 공을 인정받아 비대해진 신권에 대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태종의 의중에 맞게 조정내 훈구대신들 및 왕의 외척들에 맞서면서 신뢰를 얻어 태종으로부터 박석명 못지않은 신임을 받았다.

 
1408년 여흥부원군 제()의 아들이자 태종의 비 元敬王后)의 동생, 즉 왕의 처남들이었던 민무휼(閔無恤, ?~1416)과 민무구(閔無咎, 1369~1410) 등의 횡포를 제거한 황희는 태종의 총애가 더해져 1409년 이후엔 형조판서와 대사헌, 병조(1411년), 예조(1413년), 이조판서(1415년)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는 송사문제로 잠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호조판서로 복귀하였고, 1416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失行을 비호하고 옹호하다가 파직된 뒤에 또 다시 공조판서로 전임 복귀되었다. 이어서 그는 평양 판윤(오늘날의 시장 직위)을 거쳐, 1418년에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요컨대 그는 중앙과 지방의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친 셈이다. 
 
1418년 그해 황희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충녕대군 세자 책봉)을 극력 반대(極諫)했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이곳 인근의 파주 交河로 유배된 뒤 얼마 후 본관인 장수와 가까운 전라도 南原으로 移配되었다. 4년 뒤인 1422년(세종 4년)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황희는 다시 의정부 좌참찬(조선 시대 의정부에 속한 정2품 문관 벼슬인데 3정승을 보좌하면서 국정에 참여한 고위직)에 기용되었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기근이 만연된 당시 강원도의 구휼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조선 초기, 吏曹의 으뜸 벼슬)가 되었고, 그 해 모친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또 다시 기복되어 좌의정이 되었다.
 
좌의정 시절 황희는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관아 미관말직의 무고한 아전을 때려서 죽인 사위 서달을 위해 대사헌 맹사성(孟思誠, 1360~1438)에게 청탁해서 방면하게 한 죄로 파면되었다가 한달 뒤 복귀하였다. 황희와 친한 친구였던 맹사성이 요즘의 검찰총장직에 있었으니 사건 무마를 부탁한 황희의 청탁이 쉽게 성사된 것이다. 이 사건 역시 청백리의 명재상이었다는 황희 정승의 명성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그를 다시 보게 만드는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물론, 구설수와 각종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428년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참수당한 박포(朴苞)의 아내와 간통한 혐의까지 받아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박포가 죽자 그의 처는 피신해서 황희의 집 뒤쪽에다 토굴을 파고 그속에서 여러 해를 숨어 지내던 중에 황희가 간통했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지의 기록에 박포의 아내는 죽산현(竹山縣)에 살 때 자기의 종과도 간통한 바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사대부의 아내로서 정숙한 여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박포의 아내는 성격도 표독했던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녀가 죽산현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한 것이 우두머리 종에게 발각되자 그녀는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사체를 연못 속에 집어 넣었다. 그뒤 여러 날이 지나서 시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는데 얼굴이 썩어 문들어져서 누구인지 형체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지역 현관(縣官)이 종의 변사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자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박포의 아내는 도망쳐서 한양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이 시기 황희가 그녀와 간통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제40권, 세종 10년 1428년 6월 25일.)

게다가 황희는 자기 아들 황치산이 빼앗긴 과전을 돌려달라고 청원을 하기도 하고, 첩과의 사이에 낳은 서얼 황중생이 죽을 죄를 범하자 성을 바꿔서 조씨로 변성케 하여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발뺌까지 했다. 요즘 대권 주자 중 아들의 성매매 의혹이 일자 아들을 남이라고 한 자와 닮은꼴이다.

또한 황희는 1430년 좌의정의 정승 신분이었음에도 말(國馬) 1000마리를 죽게 하여 사헌부에 투옥된 제주 감목관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다. 일국의 대신이 사헌부의 고유한 영역인 범죄인에 대한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 파직 당한 황희가 한 동안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한 게 이 시기였다.

그러나 황희의 파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바로 그 이듬해 1431년에 복직되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등극했다. 영의정부사란 1466년(세조 12년) 1월 관제개정 때 '영의정'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의 직함이었는데, 1401년(태종 1년) 7월 의정부가 설치될 때 최고의 직위를 영의정부사라고 했으니 사실상 영의정과 같은 직위였다. 
 
영의정부사에 오른 황희는 87세 때인 1449년(세종 31년)에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로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국정을 통리하면서 대소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의정 부사로 재기용되기 이전의 벼슬기간을 합치면 황희는 정승직만 23년(64세인 1426년 우의정, 1427년 좌의정, 1431년~1531년 영의정)을 지냈다. 그에게 “황희 정승”이라는 말이 붙은 까닭이다.

이처럼 황희는 승승장구하는 도중에 굴곡도 있었지만 결국은 정승반열에까지 올랐으니 관운이 보통 좋은 게 아니었다. 황희의 벼슬은 이호예병형공의 6조와 3정승을 두루 돌았던 셈인데, 법률, 정치, 행정, 검찰, 상공업, 군무 등등 거의 모든 관직을 모두 섭렵한 특이한 이력이었다. 외교만 경험이 많지 않아 보일 뿐이다. 관운이 좋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도 인정받았다는 것이겠다. 역사서에 그에 대한 인물평가로 그는  “寬厚하고 沈重하여 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正大하여 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썼다”(『문종실록』제12권, 문종 2년 1452년 2월 8일의 '영의정부사 황희의 卒記')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文才가 있었던 만큼 터진 문리가 바탕이 돼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는 소리다. 요즘 말로 멀티 플레이어였던 셈이다.

아무튼 황희는 관직에 있을 동안 농사개량, 예법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에 대한 방어책), 4군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 및 진흥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혼란스런 국가의 법을 수정 보완하여經濟六典까지 간행하였다. 
 
황희는 치사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에도 중대사가 있을 때는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태종과 세종 양대에 걸쳐 18년간이나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황희는 학문에 힘써 높은 학식을 쌓았으므로 태종도 두텁게 그를 신임했다. 태종은 그에게 “(역성혁명)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후세엔 어찌된 영문인지 황희는 내외 여러 관직들을 두루 거쳐서 축재를 하려고 했으면 많은 부를 긁어모을 수 있었지만 부패하지 않았고 청렴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청렴하여 백성들로부터 크게 존경도 받았다고 한다. 왜 이렇게 사실과 다른 “청백리”, “명재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닐까?

이 평가는 사실이 아니라 세종이 황희의 비리를 눈 감아 주면서까지 높이 사서 중용한 황희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 때문에 그런 평가로 이어진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황희는 박포가 역적으로 죽임을 당한 뒤 남겨진 그의 부인과 사통했을 뿐만 아니라 뇌물도 사양 없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황희는 승려, 미관말직, 지방수령들에게서도 끝없이 금품을 받고 관직을 주는 매관매직 뿐만 아니라 약자의 처지에 처한 사람들에게 형옥(刑獄)을 파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오늘날의 검찰총장에 해당되는 대사헌직에 있었을 때 牛雪이라는 중으로부터 금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에도 이미 그에겐 “황금 대사헌”, “황금 재상”이라는 수치스런 별명까지 붙어 다녔다. 이로 인해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많지 않았지만 자기 당대엔 가산이 많이 불어났다. 
그가 뇌물을 받은 게세종실록에만 10여 차례나 기록돼 있을 정도다. 이외에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뇌물수수가 없었겠는가? 그런 것까지 더하면 뇌물 수수 따위의 비리는 엄청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뇌물수수에 맛 들여 놓은 자들은 모가지를 내놓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황희는 죽을 때까지 항상 자신을 경책하기 위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칼과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야인으로 지낸 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처럼 대쪽 같은 성품과는 거리가 멀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모가 나지 않고 원만하게 처신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뱀장어”라는 별명을 얻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같은 유형에 가까워 보인다. 세간에 어떤 분쟁의 중재에 임한 그가 두 당사자에게 제각기 “너말도 맞고, 네말도 맞다”는 식으로 발언했다는 말이 떠돌듯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성품이 지나치게 寬大하여 齊家에 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라고 평가돼 있다.(『문종실록』제12권, 문종 2년 1452년 2월) 이러한 무원칙주의자 같은 황희의 성격도 현명한 판단과 정치적 수완 외에 벼슬을 오래 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모질지 못한 성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장자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道樞”(제물론에 나오는 것인데, 도가 세상 모든 것의 중추가 된다는 것으로서 이것과 저것 사이에 상대적인 개념이 없다는 생각)를 실천하려고 해서 나온 행위였는지는 분별하기 쉽지 않다.

황희는
시문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시문과 저서는 많지 않다. 남겨진 문필 저서로는『방촌집(厖村集)』뿐이다. 황희의 문하에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와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를 지낸  청백리 이익박(李益朴, ?~?)이 나온 건 의외다. 그는 문장과 학행도 일세의 스승이라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우리는 방촌 영당과 기념관을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인근의 황희 묘소라도 가볼 참으로 차를 몰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거의 일몰 직전이었다. 도착하니 묘역 곳곳엔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었다. 그래도 묘소는 담장도 없고 여명이 남아 있어 다 둘러 볼 수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기념관 내의 유품은 볼 수 없었다. 단지 황희에게서 취해야 할 교훈만이 나를 이런저런 사념에 잠기게 만든다.
 
추위가 더해지는 새해 초 덩그러니 놓인 무덤 앞에 서니 적막감이 더해진다. 지하에 잠들어 있는 황희를 소환할 특별한 계제는 없어도 묘소를 떠날 때까지 줄곧 그를 통해 우리 시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에 思路가 열린다. 아니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정계와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썩어 문드러진 현실이 황희를 불러내어 반면교사로 삼아라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긴요하게 높혀야 할 사회 전체의 맑기와 청렴도일 것 그리고 그에 부가해서 거짓말에 대한 단죄가 엄격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황희가 청렴한 공직자이기는커녕 평생 그 많은 관직들을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부정축재를 했을까 상상이 된다. 간통한 본인, 살인한 사위 그리고 법을 어겨서 구금될 위기에 처한 처남들을 위한 부정한 청탁과 사건덮기 등등 황희의 공직생활과 사생활은 비도덕이고 매우 문란했지만 세종의 비호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황희가 정승 자리에 오랫동안 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세종대왕의 비호와 신뢰 덕분이었다. 단지 정치적 능력이 있다 싶은 인물이 있으면 작은 과와 허물은 덮고 기용한 세종의 인재활용 스타일 때문이었다.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황희도 인재를 보는 눈이 있어 능력 있는 이를 잘 썼다고 한다. 국가 비전, 정책운용과 인재기용 스타일이 비슷하니 세종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세종은 심지어 황희가 범법을 저질러 사헌부의 탄핵 압력을 받아서 마지 못해 파직을 시켜도 오래 가도록 하지 않고 빠를 때엔 단 7일 만에 바로 복직시켜준 파격적 은전도 베풀었다. 이와 같은 세종의 강력한 비호와 절대적 신임 속에서 황희는 조정신료들 중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세종의 오른팔로 있다가 1452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를 내려오면서 우리사회엔 정말 청렴하면서도 능력을 겸비한 이가 없다는 소린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태종과 세종 같은 전통시대엔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과연 그럴까? 정파를 초월해서 탕평으로 인재를 찾으면 비교적 깨끗하고 능력 있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정파에 함몰돼 인재풀을 협소하게 쓰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 개인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러 관련자들까지 자살케 하면서도 능력이 조금 있다는 이유로 도덕적으로는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 자를 대통령으로 뽑으려는 국민들부터 제정신이 아니다. 거짓말, 말 바꾸기와 책임전가를 숨 쉬듯이 해도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시 하지 않는 게 관성이 된지 오래다.
 
고위 공직자 후보로 청문회에 나온 자들 중에 학위논문 표절, 위장전입과 다운계약서 작성은 누구나 훈장처럼 기본으로 전력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이유가 불분명한 군병력 미필, 부동산 투기자도 잠깐 사과 한 마디 하면 통과된다. 법이 이렇게 무르고 판검사들 자체가 비리를 일삼다가 자기 신상에 위험하다 싶으면 사표 쓰고 나가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않고도 끄덕 없이 변호사를 할 수 있는 사회다. 가히 법조인 천국이다. 이러니 이 나라에, 특히 정치계나 공직사회에 무슨 영이 서고 기강이 잡히겠는가! 이럴 바엔 차라리 법을 폐기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여야가 딱히 더 나을 것도 없고 더 못할 것도 없다. 우리는 거진 다 총체적인 도덕불감증에 빠져 있다고 봐도 된다. 작은 성과에 속아서 약간의 능력과 사탕발림에 눈이 먼 대가는 반드시 크게 치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위정자와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황희의 감춰진 비리와 부정부패 그리고 오도된 평가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정계와 공직사회, 특히 사법계의 부도덕한 부패 및 비윤리성을 철저하게 발본색원하고 배척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관료화된 이 거대한 괴물들을 누가 도려낼 것인가? 사법거래와 부정부패의 썩은 악취가 청량한 소슬바람이 이는 이곳 임진강변에까지 불어오는 듯하다. 동시에 나의 두 손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무력감과 좌절감도 엄습해온다.
 
2022. 1. 2 저녁

경기 파주시 반구정 인근 황희 정승 묘지에서 초고

2023. 10. 11. 16:56 가필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방촌영당의 입구. 방촌은 황희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오후 6시면 폐관이라 마감 시간에 임박해서 도착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그의 영정은 볼 수 없었다.
황희 정승 방촌영당 근처에서 바라본 석양 지는 임진강변 풍경
황희 정승의 묘소 입구에서 본 전경
야트막한 구릉에 조영돼 있는 묘지
석물이 사대부의 묘소임을 알려준다.
세종 치세시 황희의 치적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송덕비. 어느 집안이든 후손들은 조상들의 공만 기록하고 과는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비석도 그렇다. 역사적 인물의 평가를 후손들에게 맡겨둘 수 없는 이유다.
비석의 석문이 뚜렷하지 않아서 내용 파악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