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영덕기행① : 목은 이색선생 생가 터, 괴시리전통마을, 메타세콰이어길

雲靜, 仰天 2021. 7. 4. 19:11

영덕기행① : 목은 이색선생 생가 터, 괴시리전통마을, 메타세콰이어길

 
다시 영덕에 갔다. 올해 들어서만 두 번째다.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 먼저 목은 이색 선생(1328~1396)의 생가 터를 찾았다. 목은은 고려조의 마지막 세 충신을 상징하는 三隱(圃隱 정몽주, 冶隱 길재, 牧隱 이색)중의 한 사람이다. 이어서 목은 선생 생가 터 입구에 있는, 200년이나 된 전통가옥들이 모여 있는 괴시리 전통가옥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조림돼 있는 "메타세콰이어길"에도 가봤다. 
 
목은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고 쓰러져 간 고려조와 끝까지 함께 한 충신이다.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우중에 찾은 목은의 생가 터를 보고 느낀 감회를 간단하게 적는다.
 

목은 이색선생 기념관 안에 전시돼 있는 목은의 초상화
이색선생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

 
우선, 이곳의 터가 포근한 기를 느끼게 하는 명당이라는 느낌이 든다. 괴시리 마을입구에서 안쪽 길을 따라 들어가면 하나의 소로로 돼 있지만 끝까지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온다. 그 공간 안쪽 기념관이 서 있는 곳은 뒤로 병풍처럼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목은의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살았던 거류지이자 그 아들 목은이 태어난 곳은 여성 성기의 음핵처럼 안온하게 내핵을 감싸고 있는 지세다. 아쉽게도 현재 가정과 목은 부자가 살았던 거류지에는 존재를 알게 해주는 주춧돌 몇개와 유허비만 남아 있다.
 

가정과 목은 부자가 살았던 집터라는 걸 알게 해주는 유허비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로서 사상 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편찬에도 다대한 업적을 남긴 齋 李齊賢(1287~1367)에게 부친 가정 선생과 함께 부자가 사사한 목은 선생은 임금 우왕의 사부로서 여말선초 과거제도와 교육제도를 정비하면서 성리학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한 학자이자 문인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목은의 특징이 더 있다. 목은은 원이든 명이든 중국을 큰 나라로 섬긴 전통시대 사대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원나라가 명이 다해 대세가 명나라로 넘어간 것을 알고 명에게 사대하자는 주장을 폈으면서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에 신진 역성혁명자들에 대해선 반대했다. 그는 창(昌)을 왕으로 즉위시켜 이성계를 억제해보려고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의 귀족사회에서 귀족화되고 토지를 겸병한 승려들 때문에 폐단이 있긴 했어도 목은이 주도적으로 불교 자체를 탄압하고 성리학 일색으로 바꾼 것에 대해선 조선의 사상사에서 음과 양,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걸로 평가할 수 있겠다.
 
목은의 사상적 핵심은 그가 天人無間, 즉 하늘과 인간이 다른 게 아니라 본래 사이가 없이 연결된 하나라고 본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 나아가서 만물의 질서가 모두 같다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여기에다 목은은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의 출현 여부로 판단한 인간중심, 즉 성인이나 호걸 중심의 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목은은 서양 근대의 평등사상, 즉 사농공상이 모두 인간으로서 동일한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이나 사상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역사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14세기 말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간의 귀천을 초월한 근대 민주적 평등사상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조급한 희망이다.
 
무엇보다 후대인들에게 형성된 목은의 주된 이미지는 충절과 지조다. 고려가 명이 다하고 조선에 가 있음을 알아도 이성계가 내린 벼슬(한산백에 책봉)도 사절하고 몇번이나 유배를 당했다가 최후를 맞은 점은 선비의 不事二君이 생명처럼 받들어지던 유교문화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스승과 달리 자신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이 크게 두 부류로 갈렸던 점은 아이러니하다. 즉 제자들은 크게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왕조 창업에 공헌한 신진사대부들로 나뉘었다. 전자에 속한 인물로는 정몽주, 吉再, 李崇仁 등등의 제자들이었고, 후자에 속한 인물은 정도전, 河崙, 尹紹宗, 權近 등등의 제자들이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스승과 달리 절개를 버리고 새 왕조에 참여한 제자들은 제각기 이유와 명분이 없지 않아도 대부분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창업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권으로 왕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조선왕조의 국가기틀을 닦은 정도전 정도는 예외로 볼 수 있으려나?
 
정도전이 목은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게다가 이색, 정몽주, 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佔畢齋 金宗直, 卞季良은 조선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인물이었다. 권근이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다졌으며, 수년 뒤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타살한 정몽주를 다시 복권시키자고 주장해서 그렇게 한 것도 재능과 도덕은 별개라는 점을 또 한 번 말해주고 있다. 
 
당시 유교사회의 불문률인 불사이군의 덕목을 버리고 입신과 출세를 위해 역성혁명에 가담한 문인, 학자들이 수두룩했지만,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도 하자가 많지만 유력한 대권주자들을 찾아나서는 지식인들이 넘쳐난다. 당을 바꾼다거나 혹은 당은 바꾸지 않더라도 기존 주군을 버리고 새 주자를 찾아가는 그들의 이유와 명분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처신하게 될까?
 
목은은 살아생전에 평생 동안 6000수가 넘는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정신적 유산이다. 나는 詩만 이제 겨우 100여수가 넘는다. 학술저서 및 논문과 잡문을 모두 합쳐도 1300여 건 정도 될 뿐이다. 내용도 비교가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평생 동안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아도 이룰까말까한 대업적이라는 점에서 문인이나 학인들에게 본받을 만한 일이다. 짧은 여행이지만 이래저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목은 선생이 남긴 시들을 새긴 시비들이 가랑비에 젖어 있다.

가정과 목은 부자의 거류지이자 목은의 생가 터를 나서면서 떠오르는 감회를 졸시로 적어봤다. 
 
於牧隱之鄕
 
事二君不忠
獨謝如晩陽
偕終之志操
開在鄕一輪
 
士何能守節
生於盈德地
不拼命不能
雨中苾千載
 
목은 이색의 고향에서
 
두 임금을 섬기는 게 불충이라
석양에 지듯 홀로 졌구나
쓰러져간 왕조와 함께 한 지조는
고향에서 한 떨기 꽃으로 피었네.
 
선비라고 해서 다 절개를 지킬 수 있겠는가?
영덕이라 덕을 품은 이곳에서 태어났어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못하는 것이거늘
천년의 향기 우중에도 발하구나.
 
2021. 7. 3. 오후
목은 이색 선생의 생가 터에서 착상
7. 4. 17:53
서울행 KTX열차 안에서
雲靜 초고
 
목은 선생 생가터를 뒤로 하고 내려와서 우리는 보슬비를 맞아가면서 槐市 전통마을을 둘러 봤다. 얼핏 돌아봐도 한옥집이 상당히 많아 보이고 마을 전체 면적의 규모도 작지 않아 보인다. 입지도 좋고 시야도 탁 트이는 곳이다. 남동쪽의 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가 이 마을을 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동해안의 3대 평야 중의 하나인 영해 평야가 더 넓게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부터 영양 남씨가 집성촌을 이뤘다는 이 괴시마을도 목은선생과 관계가 없는 게 아니다. 목은의 외가(외조모는 영양 남씨)인 함창 김씨가 고려 말에 처음으로 입주했기 때문에 목은은 이 마을의 최초 거주인의 외손인 것이다. 격년제로 "목은문화재"가 이 마을에서 열리는 역사적 배경으로 충분하다.
 
그 뒤 괴시마을은 조선 명종(1545~1567) 때에 수안 김씨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 8년 1630년부터는 영양남씨들이 처음 정착하였다. 그 후 타성씨들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해가고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들이 주가 된 집성촌으로서 문벌을 형성하였다 한다.
 

목은 선생기념관을 보고나서 본 목은선생기념관 입새에 조성돼 있는 괴시리 전통마을 전경
동행한 친구들과 함께 우중에 녹차 한 잔. 좌측에서부터 멀대, 우영달, 양기모. 두 친구는 모두 이곳 영덕에서 태어나고 자란 영덕 토박이들이다. 국내외 곳곳에 친구들이 많다는 건 큰 복이다. 여행도 하고 친구들과 회포도 풀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우중의 녹차 한 잔 후 우리는 마지막 코스인 벌영리의 메타세콰이어길로 차를 몰았다. 이수는 멀지 않았다. 전통마을에서 10분 정도! 멀리서 봐도 벌써 여름의 전령답게 초록의 향연이 20만 평의 임야에 넓게 펼쳐져 있다. 수종이 다양한 나무들이 모두 가늘게 하늘로 뻗어 있는데 식목된지 얼마 되지 않는 듯 수령이 길어보이지 않는다. 보슬비 속 연록색 길을 걸으면 청정한 공기를 한 껏 들이켰다. 살면서 이런 저런 잡사로 찌든 머리속이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가슴도 연록색으로 물들어지면 좋겠다.

초록색과 보색대비색인 빨강색 우산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친구의 포즈를 보면 연출에 익숙한 모델인듯!
멀대는 숙제가 많은 인간이다. 산처럼 솟아 오른 배를 내려 앉히는 것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