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하루(One day of Mongolia)
오늘 토요일 오전, 평소 거의 안 보던 TV를 보게 됐다. '걸어서 세계속으로' 프로에서 몽골편이 방영되고 있었다. 다양한 모습들이 나오는 걸 보니 문득 27년 전 내가 여행한 몽골의 이런저런 광경들이 떠올랐다. 세월이 너무 흘러 지금 당장 여행기를 쓰기에는 기억이 퇴색돼 적절하지 않고 해서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 별도로 언급하기로 한다.
오늘 이 공간에선 당시 내가 특별히 찾아 가서 아주 재미있게 감상한, 울란바타르 시내에 위치한 '자나바자르 미술관'(Zanabazar Museum of Fine Art)의 소장품 가운데 인상 깊었던 그림 한 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작품은 몽골어로 '몽골링 내그 우두르'(Монголын нэг өдөр)라고 불리는데 "몽골의 하루"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주로 'One day of Mongolia'이거나 'One day in Mongolia'로 소개돼 있다.
천에다 광물질이 함유된 안료(mineral paints)를 주된 재료로 사용해서 완성한 이 작품은 샤라브(B. Sharav, 1869~1939)라는 몽골 화가가 1911년에 착수해 장장 8년이라는 긴 작업시간을 거쳐서 1919년에 완성한 것이다.
그림의 크기도 수 년에 걸쳐 그린 노작답게 제법 크다. 길다랗게 옆으로 펼쳐져 있는 이 작품은 최소 1m가 훨씬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확한 크기를 찾아 보니 길이와 폭이 169cm×136cm다.
그림의 주제는 몽골에서 볼 수 있는 것들, 몽골인들이 살아 가는 생활 속의 모든 것들이다. 겉으로 드러난 장면들에다 내밀한 사생활까지도 거의 빠짐 없이 다 그려져 있다고 보면 된다. 산, 들, 호수, 강 등의 자연은 물론,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몽골인들과 가옥(기르), 시장, 악단, 장사하는 이들, 군인, 승려, 벼슬아치("치"는 원래 양아치, 장사아치, 자갈치 등등과 같이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에서 온 것임)들, 몽골인들이 기르는 말, 야크, 낙타 등의 여러 가지 동물들이 다양한 상황의 여러 가지 형태로 그려져 있다. 결혼식, 축제, 농사일, 화재, 전투, 유목, 말사육(horse breeding), 죽은 사람의 장사 지내기나 상여(funerals), 모직업이나 베짜기(felt making), 벌목업(lumbering)이나, 출산업(birth work) 종사자들의 일하는 모습 등등도 볼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그림에는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 그리고 아이를 받아내는 산파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고, 심지어 남녀가 성교(sexual intercourse)를 나누는 장면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탐욕이 빚어내는 결과나 악영향(expression and effect of greed), 소심한 사람(shyness), 사랑, 유머 등의 추상적인 것까지도 표현돼 있다. 시기적으로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몽골인들의 모든 생활상이 집대성 돼 있는, 말하자면 그림으로 그려진 "박물지"라고 보면 된다.
인간의 삶이 다양한 색을 띄고 전개되고 있듯이 색채도 무채색에서 유채색에 이르는 모든 색이 망라돼 있다. 이곳 몽골의 라마교 이미지를 연상시키듯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원색이 강렬하고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무채색에 가깝게 흑백의 모노톤으로 처리된 부분도 있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서사성이 뛰어난 작품들도 좋다. 당시 나는 이 '몽골의 하루'를 보고 매우 흡족한 기분에 젖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눈에 이해할 수도 있게 됐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그림은 예술작품이 지닌 미적 만족이나 심미적인 감상과 함께 몽골인들의 습속과 문화와 역사를 알게 해주는 대단히 유용한 시청각 교재이자 역사자료로도 기능한 셈이다.
중국에 '淸明河上圖'가 있다면, 몽골에는 '몽골의 하루'가 있다. 청명하상도는 北宋 화가 張擇端이 북송의 수도 汴梁(현 河南省 開封市), 汴河 양쪽의 번화한 저자거리 및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그린 작품인데, 길이가 5m가 넘고(528.7cm), 높이가 24.8cm의 길다란 대작인데, 현재 북경의 故宮博物院에 소장돼 있는 뛰어난 명작이다. 우리에게도 이 보다는 크진 않지만 두루마리 형식의 민속화 명작도 있다.
'몽골의 하루'는 청명하상도 보다 제작시기도 늦고 크기도 훨씬 작으며, 묘사도 따라 갈 순 없지만 사막과 초원이라는 궁벽진 곳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 냈다는 점에서 작품 의의로는 청명하상도에 버금가는 걸작이다. 과연 이 작품을 가격으로 매기면 얼마나 될까? 1990년대 중반 한 때 값이 1억 투그릭(tögrög=몽골화폐 단위로서 통상 MNT로 표기됨)에 평가 된 바 있다고 하는데 달러로 환산하면 (1USD=2777MNT) 대략 36만 달러 정도였다. 미화 36만 달러는 한화로 4,00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다. 그 정도 가격이라면 판매가 된다면 살 사람이 넘쳐날 것이다. 나 역시 저녁밥을 한 15년 굶더라도 밥값인 셈 치고 바로 사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몽골 측에서 감정된 위 평가액은 그림의 크기 및 제작시기 그리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 안료로 채색돼 있는 데다, 그림 자체의 작품성 등등을 봤을 때 상당히 낮게 평가된 거 같다. 지금은 가치가 이 보다 훨씬 더 높게 매겨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볼 때 이 작품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도 결코 손색이 없다.
우리 화단에서도 '몽골의 하루'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면면들을 사실적으로 담아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는 거대한 모뉴멘트적인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몽골의 하루'와 처음 만나서 기분 좋았던 당시의 느낌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나는 휴일 오후다.
2021. 6. 5. 16:3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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