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정취가 사라진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우리 일행은 안강 옥산서원을 보고 난 뒤 바로 동쪽 포항 방면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양동마을로 갔다. 승용차로 10분 남짓한 거리여서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다. 우리 차가 지나는 도로 왼편으로 속칭 "창말"이라 불린 선친의 고향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조부모님이 생전에 사셨고, 아버지가 태어나셨고, 나도 어릴 적에 자주 다녀 많은 기억들이 묻혀 있는 곳, 달성 서씨 일가들이 모여 산 서씨 집성촌이다.
이제 곧 5분 후면 양동마을에 도착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10년 7월)된 양동마을은 조선시대의 전통문화와 자연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데는 아마도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중심이 된 씨족 집성촌으로 무려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조선 전기 건물이 남아 있는 게 드문 상황에서 모두 16세기에 건조돼 보물로 지정된 가옥이 세 채(제411호 無恭堂, 제412호인 香壇, 제442호 觀稼亭)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사실을 소개하면, 양동마을에 경주 손씨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해서 5~6호의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때부터 "良佐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류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양동마을이 본격적으로 촌락다운 촌락이 된 것은 조선 전기 경주 손씨들이 들어온 뒤부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내게는 양동마을이라면 세 사람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양동마을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손소(孫昭, 1433~1484)와 그의 외손자 회재 이언적이라는 조선 초기의 두 역사 인물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손소의 후손으로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고 손동우 선배이다.
손소는 경주 손씨로서 문예시(文藝試)에 장원하여 자급(資級)으로 특진한 뒤 이시애(?~1467)의 난을 평정해서 일약 공신으로 인정받았고, 그 뒤 성주목사와 공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된 바 있는 인물이다. 양동마을이 촌락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가 풍덕 유씨 집안에 장가 들어, 신랑이 혼인하면 처가에 가서 살았던 조선조 전기의 풍습대로 처가가 있던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회재 이언적에 대해선 이미 옥산서원을 얘기했을 때 소개했으니 여기선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다.
경주 손씨 외에 또 하나의 주요 촌락 구성원들이 된 여주(여강) 이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이번(李蕃, 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빙부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처가인 이 마을에 와서 살면서부터였다.
손소의 2대 뿐만 아니라 그 전과 그 이후에도 양가 가문들이 주로 외손 쪽으로 계승돼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고려시대에는 吳太師에서 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柳復河에서 손소로, 다시 이번으로 계속 외손 쪽으로 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동마을이 과거 대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린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손동우는 손소의 몇대 손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달 전에 유명을 달리한 나의 포항중학교 1년 선배이자 경향신문 2기 선배이기도 한, 훌륭한 인품을 갖춘 능력 있는 중견 언론인이었다. 물론 중학교 땐 서로 몰랐었고 내가 입사해서 알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얼마 전 예순 중반대의 나이에 너무나 일찍 타계했는데 그게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아직까지도 손선배의 죽음이 잘 실감 나지 않는다. 지금도 전화를 하면 평소처럼 그가 바로 받아 "서박사~"라며 반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 가끔씩 만나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고향 얘기가 나오면 양동마을과 손씨 문중에 얽힌 얘기 그리고 회재의 여강 이씨 후손들의 직손과 서출 집안 간의 갈등에 대해 얘길 나누기도 했었다.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연과는 전혀 관계없이 양동마을은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몇번 그림을 그리러 간 적이 있는 곳이다. 당시엔 포항에서 기차로 효자역, 부조역을 지나면 나오는 세 번째 역이었는데 약 20여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는 지명이 "양좌동"이라고 불렸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5년 전 일이다. 그리고 무상한 세월이 양좌동 마을 바깥의 남쪽을 흐르는 형산강(兄山江)물처럼 흘렀다. 나는 이 마을의 옛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는 사이 차가 벌써 양동마을 입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가 오면서 차안에서 혼자 마음속으로 양동마을에 대해 거의 변하지 않고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부질없는 욕심이란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정말 꿈에 불과했다. 양동마을 역시 예외 없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새마을운동이니, 농촌개량이니, 도시화니 하는 시대의 조류에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관광지 개발이 붐처럼 일어나 급격하게 변화를 몰고 온 세월 동안 강산이 네 번 이상이나 바뀌었으니 양자동인들 변하지 않고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우선 마을 어귀에 있던 양좌동 기차역이 자취를 감추고 없어졌다. 옛날 포항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이곳으로 기차가 다니질 않으니 철길 자체가 소용없게 됐다. 그래서 그 대신 이 일대의 뒷편, 즉 양동마을의 동구가 되는 곳에 넓은 주차장이 조성돼 있다.
우리는 입장표를 꾾고 들어가서 먼저 마을 안쪽의 주요 도로를 따라 산 뒷편으로 올라가봤다. 9순이 다 된 장인어른 덕분에 관리사무소 측에서 승용차에서 내리지 않고 탄 채로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그리고 다시 마을 가운데로 돌아와 서쪽 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 봤다.
옛적에는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현지에 와서 다시 보니 양동마을은 북쪽 뒷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설창산의 남쪽 자락과 동남쪽의 성주봉의 서쪽 자락의 골짜기 일대에 형성돼 있다. 마을 뒷산에서 서쪽을 보면 드넓은 안강평야가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형산강이 흐르고 있는 배산임수의 지세다.
역사 전적의 기록으로는 옛날엔 형산강이 강물의 수량도 많고 강바닥도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이 매일 이곳 양동마을 앞에까지 내왕하였기 때문에 해산물의 공급이 불편 없이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수량이 줄고 하상도 높아져서 어선의 내왕이 불가능해진 지는 오래 된 것 같은데 약 5~60년 전인 내가 어릴 적에도 내왕이 없었다.
그런데 옛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전체적으로 지형이 많이 변화된 모습이다. 당시는 양좌동 기차역에서 내리면 마을까지 약간 가파른 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간 곳에 마을이 시작됐었다. 또한 마을 전체가 작은 언덕길을 따라 골목길에 연해서 집들이 들어서 있어 올망졸망하고 고풍스런 고졸미가 한껏 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덕배기가 많이 깎여서 평지가 돼 있고, 도랑도 준설돼 있는 곳이 많다. 또 적지 않은 고택들도 개량 기와집으로 바뀌어져 있다. 옛날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본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 상상도 못할 탈바꿈이다. 가히 상전벽해다.
양동마을의 집들은 대체로 아직도 ㅁ자형이 기본형으로, 거꾸로 勿자형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이나 중허리 쪽에 배열되어 있다. 가옥들 대부분이 능선마다 우거진 숲 사이로 듬성 듬성 배치돼 있다. 1979년에 작성된 한 보고서에 의하면, 재미있는 사실이지만 대종가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그 아래 터에는 직계 또는 방계손들의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앞서 옥산서원에서 초든 바 있는 의문, 즉 회재 이언적의 학문 연원을 두고 그의 숙부 손중돈의 훈도를 입었다는 것이 가옥에 어떤 형태로 나타났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어서 찬찬히 살펴 볼 수가 없게 된 점이다.
눈에 띄는 건물만 변한 게 아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변화가 많다. 1819년『良佐洞草案』에 기록된 양동의 호수는 91호였으나 1973년에는 165호, 1979년에는 151호로 증가와 완만한 감소를 보여왔다. 손·이 양씨의 호구관계도 1973년에는 손씨 28호, 이씨 88호, 1979년에는 손씨 16호, 이씨 80호로 이씨들의 호수가 많았다. 그러나 인근의 강동면과 경주시 전체를 본다면 손씨 후손들이 더 많다고 하지만, 과거 끈끈하게 내려오던 친족간의 협동과 유대는 주민들의 도시 진출이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레 감소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개량도 필요할 때가 있다. 특히 현지에 사는 주민들의 불편은 우선적으로 해소시켜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변화가 불가피하고, 개발이나 개량을 하더라도 주민의 "니즈"를 최소한도로 만족시켜주는 범위 안에서 혼을 배태시키는 현지의 정수는 건드려선 안 된다. 개발하더라도 옛날 모습이 주는, 옛날 형태에서 생겨나는 정신과 혼은 살려지고 온존되는 선에서 바뀌어야 된다.
내가 느끼는 양동마을의 혼과 정수는 고색창연한 기와집과 옛날 전통사회 조선의 모습을 띤 마을 풍경이다.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 건 기와집 용마루나, 기왓장에 초록빛 이끼들이 피고 간혹 瓦松도 듬성듬성 나 있으며, 기와집 자태에 어울리는 기와 얹은 나무 대문이 있는 광경들이다.
그런 정취는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내가 어릴 적에 자주 갔던 청하 나의 외갓집에 있던 기와로 이은 솟을 대문은 이곳에선 옛날과 달리 거의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빛바랜 사진이나 희미한 기억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집들이 모두 경주시의 보조를 받아서 초가도 이엉을 정기적으로 바꾸는지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또 기와집도 대부분 올린지 얼마 돼 보이지 않는 새 기와들로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가옥들과 길을 대폭 바꾸고 정리하든가, 아니면 이곳 마을 주민들이 사는 게 조금 불편할지라도 옛 모습을 크게 바꾸지 않음으로써 고생창연함으로 관광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을지는 단정할 수 없다. 개량할 때 신중하고 사려 깊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뒷산으로, 마을 중앙에 난 큰 길로 다니는 중에도, 휴식을 취하면서도 뇌리에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45년 전의 정취가 듬뿍 담긴 옛 모습이 남아 있어 지금의 변화된 정경은 새로 들어서질 못하고 있다.
2021. 5. 6. 오후
경주시 양동마을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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