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내 물고기야!" 다시 찾은 오어사(吾魚寺)

雲靜, 仰天 2021. 5. 7. 06:14

"내 물고기야!" 다시 찾은 오어사(吾魚寺)

 
처음 간 게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었으니 벌써 44년 전의 일이다. 석양을 뒤로 한 억새풀이 고개를 떨구고 늦가을 호수에 물비늘이 반짝거릴 때였다. 그 때 같이 간 친구는 배용식이라는 같은 반 동기였다. 이 친구는 지금 오어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가까운 곳에서 사업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
 
그 후 드문드문 들렀던 포항 오천의 오어사를 이번에 다시 찾았다. 2018년 8월, 내가 10년 가까이 운영해오고 있는 환동해미래연구원이 구룡포에서 연 국제학술 세미나에 참여한 일본인 학자 일행들을 데리고 온 뒤 처음으로 찾았으니 약 3년 만이다.
 
雲梯山 맞은 편에 있는 오어사 경내로 들어서자 낯익은 법당과 전각들이 말 없이 우리를 반긴다. 신록이 푸른 빛을 더해가고 물빛이 익어가는 것만 다른 모습이다. 예전에 내가 왔을 때는 주로 가을과 한 여름이었으니 말이다.
 

운제산에서 내려다 본 오어사 전경. 사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역사가 긴 고찰로는 국내 유수의 절이다.
운제산에서 바라본 오어사 전경. 사진 왼쪽 맨 위쪽의 산 정상에 원효가 수행을 했다는 원효암이 보인다.

오어사는 신라 천년 고찰로 원효(617~686) 대사가 수도 정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창건된 1500년이나 되는 고찰인데, 오어사라고 불리기 전에는 본래 恒沙寺라고 불렸다. 원효가 기거했거나 수행을 한 절은 전국 각지에 제법 많다. 원효는 아마도 나와 비슷하게 역마살이 크게 낀 스님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길게든 짧게든 그가 거처하지 않은 곳이 오히려 거처한 곳 보다 적을 지경이다.
 
오어사는 이 절에서 수도 중에 있던 두 스님이 누가 도력이 더 센지 겨뤄보자며 각기 이곳 사찰 앞 오어지에 살아 있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먹고 똥을 싸니 살아서 움직여가는 물고기를 두고 서로가 "내 물고기!"라고 외치면서 싱갱이를 벌였다는 설화로 유명하다. 오어사라는 명칭의 유래로서 오랫동안 트레이드 설화가 돼 있을 정도다.
 

원효와 혜공 스님 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물고기 설화를 설명해놓은 안내문

유치하기도 하고, 조금 쓸데없어 보이는 이런 시합을 벌인 이는 원효와 惠公(?~?) 스님이었다. 두 사람은 산 물고기를 먹고 변을 봤을 때 물고기가 죽지 않고 똥으로 살아 나오는 사람이 도력이 높은 걸로 내기를 걸었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통하는 이야기다. 이 내용이 사실일까? 아니면 누가 지어낸 말일까? 지은 이야기라면 왜 지어냈을까? 이 설화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살아 있는 생명체를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계율을 지켜야 할 스님들이 물속에서 살아 퍼득거리는 물고긴 왜 잡아먹나? 아마도 짐작컨대 모든 음식들이 식물이나 동물 등 모두 이미 죽은 것을 먹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도력을 평가 할 수 없기 때문에 물고기를 내기의 증거로 택한 것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는 어쩌면 스님들도 물고기나 육류를 먹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대승불교(Mahayana) 쪽에서는 승려들이 육식을 금하고 있지만 부처님 재세시 부처님도 육식을 했고, 소승불교권인 티베트,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지에서는 지금도 육식을 하고 있다. 그런 나라들에서는 식물이 많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육식을 하지 않으면 승려들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에서도 불교 전래 초기에는 그런 소승불교(Hinayana)적 전통도 묻어서 들어오지 않았을까라고 막연히 상상을 해본다.

그 여부와 별개로 한국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는 372년(소수림왕 2년) 보다 몇 년 더 일찍 이미 고구려 땅에 들어와 있었다.(지순도림 관련설) 이보다 조금 늦은 384년에 백제에도 동진의 마라난타를 통해 전래됐다. 그 뒤 신라에도 521년 중국 南朝의 나라 武帝가 보낸 승려 元表를 통해서 왕실에 불교가 알려졌다. 즉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들어온 계통은 조금 달랐다는 소리다.
 
이와 관련해서 백제에 불교를 전해 준 부견, 마라난타, 묵호자(墨胡子) 등등은 중동의 아랍인이었거나 인도 및 미얀마, 베트남 등지에서 건너온 소승불교 계열의 스님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를 말이 안 된다고 그냥 일축해버려선 안 된다. 사학계에선 아랍인, 인도인, 유태인, 동남아인들도 한반도에 들어왔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제시되고 거론된 바 있기 때문이다.
 
바꿔 얘기하면, 신라에는 백제를 거쳐 남방불교가 들어 왔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방 소승불교의 출가자들이 오늘날도 육식을 하듯이 이 영향을 받아서 당시 신라에선 스님들도 육식을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설사 신라에 소승불교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당시의 원효나 혜공이었다면 이렇게 제의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물고기를 먹을 게 아니라 죽은 물고기 음식을 먹고 변을 봤을 때 먹은 물고기가 살아 나오는 자가 도력이 센 걸로 하자고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콩나물 무침을 먹고 그것이 똥에선 살아서 꼿꼿이 서서 나오는 기적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 위 설화의 전거는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아마도 완전히 없던 얘길 지어낸 건 아니고 도력의 크기를 강조하느라 많이 부풀려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3권(1611년)에 기록된 바로는 "세상에 전하는 말로 신라 때, 중 元曉가 惠公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서 먹다가 물속에 똥을 누었더니 그 물고기가 문득 살아났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 고기’라고 말하고, 절을 지었는데 그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世傳新羅釋元曉與惠空, 捕魚而食, 遺矢水中, 魚輒活指之曰"吾魚"。構寺, 因名)고 한다.
 
退堂先生詩集』, 卷之四에도 서너 자 문구만 다를 뿐 뜻은 같은 의미로 나와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 신라 때, 중 元曉와 惠公이 함께 물고기를 잡아서 먹다가 물속에서 똥을 누었더니 그 물고기가 문득 살아났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 물고기’라고 말하고, 절을 짓고는 이름을 지었다.”(世傳新羅釋元曉與惠空。捕魚而食。遺矢水中。魚輒活。指之曰吾魚。構寺仍名。)

여기서 “내 물고기”는 한자로 옮기면 "吾魚"가 된다. 두 스님은 각기 “오어”라고 하지 않고 한국말로, 아니 신라말로 “내 물고기”라고 외쳤겠지만 한문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로는 “吾魚”로 기록됐을 것이고, 이를 따서 사찰명이 된 것으로 이해된다. 여담이지만 두 스님은 자연보호 관념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다! 더러운 똥을 왜 맑은 호수 물에다 싸냐 말이다. 물론, 까마득한 옛날인 그 시절엔 환경보호 관념은 꿈에서도 생겨날 수 없던 때였긴 하지만... 그래도 불가에서는 '일체 중생 실유불생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개념과 환경보호는 體와 用의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나 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설화나 신화는 왜 현대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현대사회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설화나 신화가 고대에만 발생한다는 건 모든 설화와 신화가 100% 허구이거나 많이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오어사의 造營을 보면 이곳 역시 배산임수의 지세에 맞춘 사찰이다. 즉 원효도 도참에 조예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절 앞에 보이는 오어지 맞은편에도 산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에서는 조금 비켜나 있는 셈이다. 가람배치는 정중앙에 위치한 본당인 대웅전이 남향으로 정문을 바라보고 있고, 그 양 옆으로 종무소, 기념관, 요사체 등의 여타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대칭 구도로 조성돼 있다. 측문으로 들어오면 측문 안쪽에 서있는 아름다운 범종도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지세 및 영조와 가람배치가 어떻든 우리가 늦게 도착한 바람에 오어사 경내 불교기념관에 상설 전시돼 있는 보물(보물 제1280호의 동종)들을 장인 장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한 게 아쉽다. 또 오르내리기엔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아서 원효 성사가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절 뒷산의 원효암에 올라가보지 못한 것도 아쉽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현액에 대웅전으로 돼 있어 오어사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절임을 알 수 있다. 大雄은 석가모니를 부르는 열 가지 호칭 중에 하나다. 따라서 대웅전은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시는 법당이다. 고정 불변은 아니지만 대체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면 양옆 협시보살은 보통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을 모셔 3존불로 받든다.
위 사진과 달리 단청을 입히기 전의 대웅전의 모습. 단청을 한 지 오래 돼서 기와 등 모든 게 고색 창연해 보인다.

오어사 범종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데 1995년 11월에 절 앞의 저수지인 오어지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종의 둘레 표면에는 보살 모양의 天衣 옷자락이 휘날리는 비천상을 비롯하여 섬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조형미가 뛰어나다. 이참에 범종에 관해 상식 한 마디 더하면, 범종은 중국, 일본, 대만, 태국, 미얀마 등 다른 나라에도 있지만 세계에서 한국 종이 독보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기능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범종은 종의 몸체에 양각돼 있는 조각도 아름답지만 특히 음통이 잘 설계돼 있어 다른 나라의 범종에 비해 타종 후 소리의 여운이 가장 길 뿐만 아니라 용뉴도 특이하기 때문이다.
 

 
해거름이 절 앞 吾魚池의 수면 위로 깔리기 시작했다. 오어지를 남북으로 잇는 구름다리에도 시나브로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물비늘만 저녁햇살에 반짝거릴 뿐 주위가 움직임을 멈춰 선듯 평화로운 광경이다. 오어사와 오어지를 뒤로 하면서 내려앉는 땅거미와 함께 이번에 우리 내외가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한 짧은 2박 3일 간의 여행도 막을 내렸다.
 
2021. 5. 6.
오천 오어사에서 草稿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