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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해군 참전 사실 처음으로 확인(신문 보도)

2011년 9월 중순, 6.25전쟁 때 중국 해군이 극비리에 북한의 서해안으로 넘어와 기뢰 설치 작업을 한 사실을 국방일보에 자세하게 그 과정을 실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향신문에도 동일한 내용이 재보도 됐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해군 참전 사실 처음으로 확인」,『경향신문』, 2011년 9월 19일, 기사. 경향신문에 보도된 것은 국방일보에 난 기사를 본 박성진 경향신문 국방부 출입기자가 이를 재 기사화해도 되겠느냐는 문의를 허락해준 뒤에 실은 것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1109190306385 중국 해군도 6·25 때 참전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은 지상군뿐 아니라 해군도 참전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금까지 중국군은 6·2..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은 한국전쟁 발발의 진실을 바로 말해야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은 한국전쟁 발발의 진실을 바로 말해야 한다 서상문(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5월 15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자신을 찾아와 한반도적화를 위한 남침전쟁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한 김일성과 전쟁을 도발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회의 후 마오-김 회담에 배석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박헌영은 각기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 로신을 통해 스탈린에게 마오-김 쌍방의 의견이 일치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통보했다. 중국은 “타이완(臺灣)을 해방한 후에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적화 통일문제에 동의한 이상 준비 중인 타이완해방 작전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무력통일을 제1순위로 두기로 했고, 마오쩌둥은 김일..

중국 국가부주석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과 국내정치권의 저자세

중국 국가부주석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과 국내정치권의 저자세 서상문(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지난 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과 중국정부가 한국전쟁을 주객전도 식으로 사실을 왜곡했다. 한국전쟁 참전 중국군 노병들에게 “위대한 抗美援朝戰爭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으로서 “제국주의가 중국인민에게 강요한 것이었다”고 발언했던 것이다. 중국외교부도 이 발언이 그의 개인적 사견이 아니라 중국정부의 정론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데도 국내 정치권은 한껏 몸을 낮추고 있다. 미국이 전후 한반도에서 중국과 일본세력을 대신한 이래 사라진 듯 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잔영을 본다. 중국외교부가 강조했듯이 시 부주석의 발언내용은 중국정부의 정론이다. 이 점은 국내외 전문가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

독도의 과거, 현재, 미래 : 일본은 왜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가?

독도의 과거, 현재, 미래 : 일본은 왜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가?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현재의 자신은 과거 자신이 살아온 결과이며, 자신의 미래상을 보려면 오늘 자기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공동 집합체인 국가나 영토에도 적용 가능하다. 독도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독도가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독도영유권을 확고하게 행사하지 못하면 독도를 계속 영유할 수 있을지 앞날을 장담하지 못한다. 현재의 독도위상을 점검하고 독도위기의 근원을 살펴본 뒤 독도에 대한 일본의 행보가 어떠할지 전망해보자. 그리고 이를 토대로 우리의 대응자세와 대비책은..

중공군의 4~6차 공세와 서울 재수복

중공군의 제4차~6차 공세와 서울 재수복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4’후퇴로 37도선의 평택-안성선까지 물러난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력을 회복한 후 1951년 1월 24일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하에 강력한 화력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총반격을 개시했다. 23만 명의 대병력이 동원된 서울재탈환 작전이었다. 이에 대해 다음날 중공군이 즉각 방어에 나섬으로써 중공군의 제4차 전역이 시작됐다. 아군은 미 제1군단이 서울방어를 위해 한강 이남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중공군 제38군단 제112사단과 제50군단을 상대로 20여일 동안 격렬한 공방전을 치른 끝에 인천을 재차 점령했고, 중공군은 2월 18일 한수 이북으로 철수했다. 아군은 2월 19일부터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재개한..

중공군의 3차 공세와 1․4후퇴

중공군의 제3차 공세와 아군의 1․4후퇴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12월 5일, 경무대가 떠들썩했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커든 돌아 가시요!” “우리는 당신네들 보고 남아 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우리는 여기 남아서 싸우겠소, 죽기 밖에 더 하리요!” 자신을 예방해, 중공군의 공격으로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면서 피난을 권유한 미 제8군 사령관 워크 장군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소리친 것이다. 이로부터 꼭 한 달 뒤 정부는 또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된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한미군의 북상이 저지되고, 김일성정권이 기사회생된 것에 흥분한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축전을 보내 “쇠뿔은 단 김에 빼야 한다”면서 미군을 계속 추격하도록..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 상의 절해의 고도 웨이크 섬. 오전 7시 36분부터 시작된 회담에서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는 주저 없이 첫 마디에 “아주 적다”(Very little)고 잘라 말했다. 또 만일 중공군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올 경우 “전례 없는 대학살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라고 역설했다. 중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자신 있게 부정하고, 미국을 움직이는 정치, 군사, 외교의 실력자들이 모두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10월 11일 밤부터 도강을 개시한 중공군 선발대가 맥아더의 호언장담을 비웃듯 압록강 건너 북한의 집결지에서 위장을 끝내고 있었다. 선발대에 이어 19일부터..

‘不殺生戒’와 전쟁의 끝없는 이율배반 : 불교의 전쟁관과 국방관

‘不殺生戒’와 전쟁의 영원한 이율배반 : 불교의 전쟁관과 국방관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무릇 사랑과 자비와 평화를 종지로 내세우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천도교 등의 보편종교는 적개심, 파괴, 살상이 수반되는 전쟁과는 이율배반적 관계에 있다. 보편종교가 살아 평화를 지향하고, 죽어 “영생”(eternal life)이나 “열반”(Nirvana)을 희구하면서 살생을 부정하고 상생을 추구하는 것임에 반해 전쟁은 오직 상대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게 되는 상극적 관계 속에서 살생이 용인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영생”과 불교의 “열반”은 모두 인간이 사후에 도달할 구극적 가치와 목적을 표상한다. 그렇다고 두 종교가 이 세상을 부정하거나 인간의 현재 삶을 의미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