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蘭皐先生 김삿갓을 찾아서

雲靜, 仰天 2020. 10. 11. 00:59

蘭皐先生 김삿갓을 찾아서

 

방랑시인 김삿갓! 김씨 성에 본명이 炳淵(1807~ 1863)이란 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호가 蘭皐란 걸 아는 이는 드문데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오. 아무튼 내가 김삿갓이란 이름을 안지는 반세기 이상이나 흘렀구랴. 그런데 오늘에야 일부라도 직접 그 족적을 보게 되니 만시지탄감이 일지만 그렇다고 감흥이 돋지 않는 건 아니외다.

 

천하가 아는 雲水歌人 김삿갓이 아니오.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김삿갓!", "김삿갓!" 하지는 않겠죠. 풍류와 해학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하니 그 곡절과 정신이 뭔가 해서 한미한 이 소생이 먼 곳에서 蘭皐선생의 芳香에 끌려 선생을 찾아왔소이다. 山紫水明한 영월 땅에 秋色이 돌기 시작한 풍광부터 예사롭지가 않구나! 절세의 풍류객 蘭皐선생을 찬미한 여러 詩碑들이 입새부터 늘어서 있어 선생의 文名과 명성을 말해주는구려!

 


초입의 길목으로 꺾어 들어서니 저 멀리 초가집 한 채가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멀리서 보니 집의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걸 보니 누가 살고 있단 말인가? 들릴 듯 말듯 졸졸거리는 계곡물, 병풍처럼 숲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겸손한 자태로 서 있는 초가 한 채... 인걸은 간데없고 산천만 依舊하다? 김삿갓 방랑의 시작이자 종착지로서 선생이 잠들어 있는 이곳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와서 보니 고거랍시고 지어 놓은 초가의 주소는 ‘마대산길 160-15’
  

 
이윽고 가까이 가보니 땔감으로 쌓인 장작더미며, 방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삿갓 쓰고 지팡이를 짚고 수염을 가득 기른 사람이 정말 김삿갓처럼 보이는 이의 사진이 보이네요. 그런데 그게 칼라사진이다!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로 부엌문을 열어보니 취사도구와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하다. 부엌 옆엔 내게는 추억 어린 디딜방아도 하나 갖다 놨구나. 그 때서야 사람이 “살고 있으니 청결 부탁”한다는, 집주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글귀가 붙어 있는 게 눈에 띄는구랴. 필시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인데, 주인은 한가위 명절이라 어딘가로 출타한 모양이네요.
 

사진 속의 삿갓 쓰고 대금을 불고 있는 이나 두건차림의 인물은 모두 실제의 김삿갓이 아니라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분이거나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蘭皐堂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작은 초막 안에 김삿갓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고, 앞에는 계곡이 흐르고 계곡 건너편과 집 뒤편으로는 바로 숲이구나! 다람쥐, 노루, 날짐승들이 무시로 보일 듯한 곳이네요. 퍼뜩 전체적으로 보면 이 초가는 김삿갓 같은 逸士(초야에 은거한 덕망 있는 선비)가 기거한 곳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 가족과 같이 이곳에 온 60대로 보이는 어떤 이가 3~40년 전에 이곳에 와봤었는데 지금 현재의 이 집은 김삿갓이 살았다는 곳이 아니라는군요. 이 집 오기 100미터 전쯤에 있었다고 해서 하산 길에 실제로 보니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액자 속의 갓을 쓴 인물이 김삿갓이라고 한다.
집 뒤편과 맞은편이 모두 깊은 숲속이어서 들짐승과 날짐승이 많이 보인다. 폭 3~4m 정도의 작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데 그기에 걸쳐 놓여 있는 작은 다리 하나 건너면 바로 산중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김삿갓이 기거한 집터라는데, 과거 집터였음을 말해주는 흔적이 눈에 띈다.

안동 김씨 시조 고려 개국공신 宣平의 후예로 1807년(순조 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檜泉面 檜巖里에서 부 安根과 모 함평 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면서요? 그리고 선생은 과거에 급제해서 가문을 일으키고자 열심히 글공부를 해서 영월 향시에 급제한 게 1812년(순조 12년)이었다지요? 그런데 20대 초반 피가 끊는 그 나이에 입신양명과 과거를 포기하고 영월을 떠나 방랑을 시작했다고요?

 

내 단도직입으로 묻겠소이다. 科擧 초시인 鄕試에 응시해서 策文(과거 시험과목 중의 한 가지로서 擧人의 학문적 깊이와 치세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논술형 문제를 내는 것을 策問이라고 하고, 책문에 답한 글이 策文인데 오늘날 고시 1차 시험이나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시험 수준의 주관식 문제에 대한 답안이라고 보면 됨)으로 역난을 일으킨 홍경래에게 투항한 당시 선천 부사 김익순을 비판한 답(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을 써내 급제한 게 아니었나요?
 
그런데 알고 보니 “가산 군수 鄭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우러러 논하고 하늘에까지 닿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한다”고 비판한 그 인물이 본인의 조부였더라! 아들을 출세시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이를 악다물고 뒷바라지 해준 모친으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선 충격과 번민 끝에 그길로 삿갓 쓰고 방랑길에 나섰다는군요. 이곳 기념비에는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해 22세 때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올랐다”고 기록돼 있다. 蘭皐선생이여! 평생을 기지, 골계, 풍자와 조롱으로 못된 양반들 질타하고 서민의 애환을 어루만져준 삶을 살았다고 하니 어디 맺힌 한이 풀어졌더이까? 그런 삶을 산 본인은 그 삶이 만족스러웠소이까?
 
그런데 선생이 비판한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란 걸 알기 전엔 득의만만하고 호기롭게 붓대를 겨누었는데 남이라고 했을 땐 거리낌이 없고 조상이란 걸 알게 되니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 생기던가요?
 
효를 국가 정치체제의 근간으로 삼아 고지식하기론 인류사 최고의 왕조, 300자리도 채 안 된 한양의 內職을 두고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 피비린내 난 당쟁이 주된 정치행위였던 왕조! 바깥 세계야 어떻게 변하든, 천하야 어찌 돌아가든 좁디좁은 이 반도 땅에 붙박혀서 탐관오리질만 대물림으로 게걸스러우리만치 해댄 유교국가 조선!
 
그런 사대부들만의 나라 조선에서 선생이 효를 부정했으니 그건 바로 임금에 대한 충을 부정한 것이 아니겠소! 충효를 통해 功名을 다투려던 자의 자기모순과 참담함에 세인에게 낯을 들 수 없던 그 시절, 그 심정 능히 짐작이 가오만 내 다시 하나만 더 묻겠나이다. 홍경래는 왜 난을 일으켰는지, 그를 역적으로 멸한 그 체제가 정당한 것이었는지 생각은 못해봤소이까? 생각을 못해봤다면 누대로 내려온 당시의 질기고 질긴 세도가들에게 빌붙어 입신출세 하겠다는 자신이 아니었나이까?

 

蘭皐선생이여!
하나의 반역행위가 누구라서 부정되고, 누구라서 비판돼선 안 되는 것이라면 그게 선생의 모순이 아니오? 그게 선생이 젊은 혈기로 문제시한 계층간 불평등, 비정의의 원천이 아니란 말인가요? 크든 작든 지은 죄는 죄이지 그게 남이라고 해서 비판해도 되고 자기일족이라고 해서 비판한 게 잘못됐다는 말인가요?
 
과연 죄에 대한 비판의 잣대가 단지 남이냐 일족이냐였소이까? 조부도 필경 지나간 두 세대 전의 역사인물로서 공인이었는데 비판함에 남과 일족이 달라지던가요? 설령 조부라도 잘못된 건 비판할 수 있어야 그게 정말 올곧은 선비이거늘 그게 그리 자책이 되던 거였소이까? 지난 세기 친일파들이 호사란 호사를 다 누리고 그 나라를 거덜 낸 대가로 거머쥔, 규모를 알면 누구든 억 하니 놀라자빠질 재물과 가산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대물림 된 한국사회에서, 이제는 이토록 끝없이 날뛰는 패거리 정치가 그런 기준과 생각에서 생겨나지 않았나 싶소만!

 

김삿갓 蘭皐선생이여!
그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뿐이니 내 어찌 더 이상 길게 악구험담 하겠나이까? 그래도 그 잘난 양반“職”을 걷어차고선 양반권에 진입했기에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기득권적 입지까지 과감히 버릴 수 있었으니 그게 대장부가 아니면 어디 꿈이나 꿀 수 있었겠나이까?
 
하나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가지만, 선생의 시를 보면 영민한 그대가 글공부를 계속했다면 필경 ‘雷同’(중국의 과거시험에서 벼락치기 공부를 뜻하는 용어)은 아닐 것이어서 향시 다음의 覆試와 과거의 마지막 관문인 殿試(중국에선 明淸대에 황제 앞에서 시행됐음)도 급제할 수 있었을 것 같소이다. 흉중의 한에 못 이겨 가속을 버리고 항간으로 들어가지만 세상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다른 차원의 발심이 엿보이는 시문이 공명을 울려서 아래에 초들어 봤나이다.

 

入金剛山
 
書爲白髮劒斜陽
天地無窮一恨長
痛飮長安紅十斗
秋風蓑笠入金剛
 
금강산에 들어가다
 
책 읽느라 백발 되고 출세 찾다가 해가 기운다
천지는 다함이 없는데 한 번 품은 한은 길기도 하다
長安紅이란 독한 빼갈을 열 되나 들이키고
가을바람 불 때 도롱이 삿갓 쓰고 금강산에 들어간다네.
 
또 방랑길에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쓴 시문으로 보이는데, 세상인심이 야박하다는 걸 나타낸 이런 시도 지었구랴.
 
斜陽邱立兩柴扉
三被主人手却揮
杜宇亦知風俗薄
隔林啼送不如歸
 
해 뉘엿해서 산마루 두어 집 사립문을 두드렸지만
집주인에게 손사래로 내쫓긴 게 세 번이나 되오
두견새도 인심이 이다지 박한 줄을 알고 있는지
저쪽 숲속에서 돌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지저귀네
 
세상인심이 좋다는 건 치세가 좋아 경제가 잘 돌아가서 민생이 살만할 때 하는 얘기이고, 수백 년 이어져온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로 도탄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밑바닥 민초들의 인심도 기대할 게 못 되지요. 그러니 문전박대를 당한 그대는 누구를 탓했을까 궁금해지네요.
 
조선조 500년 동안 제대로 모범을 보인 양반이 얼마나 되었는지 소생도 의문입니다만, 어느 양반집의 환갑잔치에 갔던 모양인지 선생도 양반을 죄다 도둑인 듯이 도탄에 빠진 민초들이 보든 말든 평소 잘 처먹어 환갑 나이로 보이지 않는 양반을 신랄하게 풍자한 글도 보이네요.
 
還甲
 
披坐老人不似人
疑是天上降神仙
膝下七子皆爲盜
偸得天桃獻壽宴

 

저기 앉은 저 노인네 사람 같지 않구나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보이네
슬하의 일곱 자식이 모두 도둑놈인데
복숭아를 훔쳐 부친 환갑잔치에 바치는구나
 
통쾌! 상쾌! 나라도 貪財嗜酒色의 저런 놈들의 작자들을 보면 가만있지 않았을 터이오니 공감하는 바가 작지 않소이다. 아무튼, 큰 틀에선 한시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운측과 율을 따지는 형식과 주제는 그다지 얽매이지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호방한 시풍을 일궈냈군요. 조선문학사에서 가히 특이한, 사실은 진즉부터 그랬어야 할 것이지만, 양반문학이 아닌, 20세기에 들어와서 쓰이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문학’, ‘민중문학’에 해당되는 “서민문학”의 영역을 새로이 개척했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나이다.
 
豁然 각성 후부터 여생을 바른 언행으로 귀감을 보이고, 민초의 입장을 대변한 촌철살인의 시문으로써 그들의 고된 삶을 위무하는데 애쓴 것만으로도 선생의 행적이 세세에 傳世될 만하오이다! 게다가 가책과 각성이 그대를 그대답게 만든 것이니 또 어디 그런 아이러니가 있겠소이까? 한 가지 노파심에서 여쭙는 말씀인데 꼭 네 사람에게는 죄송함과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지고 있겠지요?
 
먼저 죄송스런 마음은 모친에게 가져야겠지요. 조부가 홍경래난을 막지 못하고 투항하는 바람에 집안이 몰락하자 큰 죄를 지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자손이라는 “廢族子”라는 멸시와 조롱을 벗어나 평안도에서 머나 먼 이곳 영월 땅까지 도망 와서 삼옥리에 정착한 뒤로 온갖 고생을 마다 않고 선생을 글공부 시킨 모친의 노고와 기대를 저버렸으니 말이요. 양반신분이라 하더라도 중죄인의 자손,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죄를 지은 결격사유가 있는 자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던 그 당시 아들을 출세시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가문의 내력을 숨겨가면서까지 이를 악다물고 모든 것을 감내한 모친이었잖소!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된 마음은 선생의 부인과 아들 익균에 대해 가지고 있겠지요. 아무리 개인의 영혼이 고갈되고 심사가 편치 않다고 하더라도 임신한 부인을 홀로 두고 집을 나가 전국을 방랑하는 사이 부인이 입었을 고생과 외로움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물론,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다가 타향(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초로의 나이인 57세에 객사한 그대의 무덤을 이곳에 이장해준 아들의 노고에 대해선 잊지 않고 계시겠지만요.
 
또 한 사람, 고마워해야 할 분은 이미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사오나 김삿갓 그대의 존재를 요즘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박영국이라는 분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박 선생은 이곳 영월 땅의 김삿갓 유적지를 처음으로 발견해서 현창 사업에 힘을 보탠 분이니까요.
 
雲水 속에 있는 기거처도 선생이 살았던 삶을 말해주는 듯하고, 남중하는 태양의 양기를 듬뿍 받고 있는 묫자리도 명당이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시대와 어긋나서 夜叉頭 처지로 지내는 내가 견줄 바가 아닌 듯하오. 淺學菲才의 필부로 지내는 소인이 지나는 길에 둔필로 한 소리 드렸소만 조금도 괘념치 마시고 살아생전 호탕한 그 기행과 필봉으로 만세를 누리소서!

 

 

할 말은 많지만 긴 글 읽는 걸 싫어하는 요즘 독자들에게는 이미 좋지도 않는 졸문이 충분히 길었으니 더 이상 인내를 시험하거나 하는 등의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이제 이쯤에서 소인도 물러가려고 합니다. 충분하진 않겠지만 덕담은 했으니 소생이 즉흥에 못 이겨서 지은 어줍잖은 한시 한 수로 마무리하렵니다. 소생도 선생처럼 운율과 측은 무시하고 씁니다.
 
於草笠居士蘭皐先生草幕
 
雲林茅屋無人煙
有湌水可友兎獐
離拜尘的蘭皐啊
君屋發香遠千歲
 
蘭皐선생 김삿갓 초가에서
 
운림 속 초가 한 채 주인은 없고 굴뚝에 연기만 나네
끼니 거르지 않을 양식과 벗 삼을 토끼 노루 있구려
구차하게 권세에 연연하지 않고 살다간 김삿갓이여
그대의 초막이 멀리 천세의 芳香을 내뿜는구나
 
2020. 10. 1. 14:41
영월 김삿갓의 집터와 묘소를 보면서 초고
10. 2. 04:56
평창 진보에서 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