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죽음을 어떻게 소비하나?①: 박원순과 백선엽의 죽음
죽은 자에 대한 추모행위는 인간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가장 인간다운 표상행위다. 거기엔 순기능과 역기능이 공존한다. 순기능은 인간성 회복이요, 역기능은 인간성 황폐화다. 추모가 비정치적일수록 망자가 살아나고, 정치적일수록 망자가 메말라버린다. 정치적인 비중이 높은 인물일수록 추모행위는 늘 현실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아니 그 자체로 정치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이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긴 해도 그런 인간들이 유달리 많은 한국사회엔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과하게 짙다.
지난 7월 9일과 10일 이틀 사이에 잇달아 사망한 고 박원순 시장(이하 직함 생략)과 고 백선엽 장군(이하 직함 생략)의 죽음도 정치적으로 활용됐다. 두 사람의 추모 모두 정치성이 자연성과 인간성을 압도했다. 과연 박원순은 “잘 죽었는가?” 또 백선엽이 정말 이름에 걸맞는 명실상부한 “구국영웅”인가? 한 분은 “자살”이라고 하고, 다른 한 분은 자연사였지만, 한 분은 사후 자신에 대한 평가를 의식해 정치적으로 움직이다가 죽었고, 다른 한 분은 아예 정치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자살이라고 매듭이 지어진 박원순의 경우는 “문제”라고 일컬어진 죄행을 저지르고서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식 없이 죽어버렸다. 아니면 설령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도 자신이 속해 있는 진영의 전체 이익을 위해 죽어버린 듯하다. 정치권에서 자주 보아온 정말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면 한 쪽에서는 영웅이 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비겁한 책임회피자가 된다. 양쪽 진영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란 없다. 탐욕과 권력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회적 누습은 늘 자살을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더 복잡하고 확대되도록 만들 뿐이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박원순은 과연 왜 죽었을까? 누구를 위한 “자살”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기획으로 그를 죽인 후 “타살”로 둔갑시켜 놓은 것일까? 일단 유서내용으로만 보면 자살동기가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갑자기 자살을 결행해야 할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죽으면서까지, 혹은 사람을 죽여서까지 지키려고 한 진영의 이익이 무엇이었기에 저토록 인간의 본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죽음의 방식을 택했을까? 타인을 해치거나 죽이도록 부추기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확신한 사람들이었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이것은 모두 역사를 더럽히는 정치적 행위들이다. “죽음은 선택의 문제”라고 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li)의 도발적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박원순처럼 책임의식 없이 죽어버리면 남아 있는 “피해자”의 삶은 어떡하란 말인가? 유언이 적힌 메모에서도 여비서에게 가한 일탈행위에 대해서는 사과 한 마디 없는 무책임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박원순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그 여비서는 과거 여러 번 직장 내부에서 전근요청 등으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본인의 문제제기는 문제가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따돌림만 당했다고 한다.
필자인 나도 경험해봐서 아는데, 현행 내부고발은 해도 유야무야되기 십상이다. 상급기관에 문제제기를 해도 결국 다시 원래의 기관에서 해결하라는 권고만 있을 뿐, 도돌이표 내부고발제도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이면에는 지독히도 개선되지 않고 있는 관성화된 관료주의가 깊이 가로 놓여 자살을 유혹하는 기제로 남아 있다. “박 시장이 자살했다”는 정보가 사전에 누설됐다는 의혹이 언론에서 먼저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진보진영에서는 박원순을 대선후보자급의 훌륭한 정치지도자라면서 극구 찬양하고 옹호, 두둔하면서 문상정국으로 끌고 가기 시작한 이른바 “운동권”의 기획과 광기도 잇달았다.
진보진영에서는 박원순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이 사건으로 검찰수사가 끈질기게 이뤄져 어쩌면 차기 대선정국에까지 이어질 것을 우려한 만큼,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화근을 없애버리는 게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겠다 싶다. 아마도 범죄혐의자가 죽으면 검찰에서 “공소권 없음”으로 해당 사건을 수사하지 않고 종결짓던 관행을 염두에 두고 자살하거나 죽이지 않았나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래서 진보진영 내에서는 그가 “잘 죽었다는 것”이다.
반면, 보수진영에서는 인권변호사랍시고 평소 온갖 깨끗한 척은 다하던 자가 사실은 뒤에서 저토록 구린 짓을 한 이중적 인간이라고 해서 “잘 죽었다는 것”이다. 양측 모두 인간의 생명에 대한 귀중함은 외면한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범죄든 인간의 목숨과 바꿀 순 없다.
나는 박원순이 잘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죽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고 본다. 살아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했었다. 수사 결과 그에 대한 혐의가 정말 죄행으로 판명돼 범죄요건이 구성되면 형사상의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도의적인 책임도 졌어야 했다. 반대로 혐의가 사실 무근으로 드러나면 그에 대한 명예회복이 가능하다. 물론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정치적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까지 자유로울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박원순의 “자살”은 여러 가지로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이는 데다 현재로선 관련 자료들도 제한적이어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킬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진상에 근접하는 사실들이 드러나면 그때 가서 못다 한 얘길 해도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백선엽 관련 얘기는 그에 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와 있어 글이 길어질 것이다. 그래도 짧은 지면의 이 글에선 백선엽의 모든 행적을 일일이 다 확인하고 평단할 수 없어 차후 별도의 연구논저에서 논할 생각이다. 그러기 전에 우선 여기선 대강 몇 가지만이라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인식해야 할 게 있다.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서 언어문제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이다. 서양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된 언어분석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언어철학 이론을 빌리면, 언어의 형식은 실재의 형식과 같아야 한다.
만약 구조가 변형된다면 그 결과는 非意味(nonsense)한 것이 된다. 즉 非意味的(nonsensical)인 것은 결코 참(眞)이거나 거짓(僞)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사례이거나 혹은 사례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는 문장이다. 만약 요소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언급되고 있는 상태가 존재하고, 만약 명제가 거짓이라면 그 사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과 가치판단은 ‘명제’(proposition)로 표현된다. 명제라는 것은 어떤 사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명제는 논리적 형식을 가져야 하고,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려면 실재와 대응하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명제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알아볼 수 없다. 우리가 그 진술이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면 진위를 또한 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개념은 명제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개념과 명제는 모두 그 뜻을 정확히 지칭하고 있어야 한다. “사과는 식물이다”여야지 “사과는 동물이다”가 돼선 진리가 될 수가 없으며, 동시에 사과를 감이라고 할 수 없고, 배를 사과라고 해서도 안 된다. 이처럼 구체적인 물질명사도 언어적 약속이 제대로 지켜져야 하지만, 추상적인 용어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에는 윤리, 양심, 혁명, 전쟁, 功過, 위인, 영웅 등등의 많은 역사용어들을 두고 개념 혹은 정의가 일치하지 않아 불필요한 논쟁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흔히 사용되고 있는 ‘영웅’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너무나 알기 쉬운 단어라서 사람들은 이 단어에 대해 그다지 의미를 새겨보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백선엽 관련 연구자들이나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또 “백선엽은 구국영웅이다”와 “백선엽은 친일파이다”라는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한글국어대사전〔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서울 : 민중서림, 1982년), 2557쪽〕에는 ‘영웅’이란 “智力과 재능 또는 담력, 무용 등에 특히 뛰어나는 일, 또 그 사람”이라고 설명돼 있다. 또 인터넷 한글사전에는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고 설명돼 있다.
백선엽이 자기가 말한 대로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고자 회고록을 썼다고 했듯이 정말 역사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밝히고자 한 용기 있고 양심 있는 지도층 인물이었다면, 스스로 돌아보아 자신이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는지 깊이 사색하고 얘기를 했어야 했다.
여기서 나는 “해낸”이 아니라 “해내는”이라는 현재시제에 주목한다. 즉 과거에도 공을 세웠지만 지금 현재도 보통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지혜와 재능이 뛰어났었는지는 정확하게는 몰라도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 영웅이라는 의미에선 백선엽은 분명 “영웅”이 맞다. 그러나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인가라거나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즉 事後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는가라는 점에 대해선 좀 더 자세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백선엽도 공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 또한 과대로 기록돼야 한다. 공뿐이라거나 과밖에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 역시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한 존재였으니까! 혹자는 백선엽의 공으로 해방공간에서 한국군 내 암약하던 남로당 당원들을 색출해낸 숙군, 다부동 전투의 승리, 지리산 빨치산 토벌 등을 꼽는다.
이 가운데 다부동을 어떻게 해서 지킬 수 있었던가 하는 점에 대해선 곧 논의될 것이지만, 지리산 빨치산 토벌은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학살 등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어〔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과 백선엽야전사령부(간칭 ‘백야사’) 작전참모였던 공국진 장군의 증언록〕 잠정적으로 공에서 빼놓을 필요가 있다.
공이란 단순히 국가 공무직에 근무한 것만을 말하진 않는다. 그가 대사, 장관, 국영기업 사장직을 역임했다고 해서 그것들이 다 공이라고 볼 순 없다. 만약 그런 식으로 본다면 동일한 보직을 맡았던 이들 중에 공을 세우지 못한 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뤘다고 하는 성과에 대해서 구체적인 연구 없이 공이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평가다.
통상, 공이 있다고 할 때는 남들이 할 수 없는 훌륭한 일을 해냈을 경우에 한한다. 그러나 다부동의 방어와 평양탈환은 공은 공이로되 공이 너무 많이 부풀려졌다는 게 문제다.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질은 좋아도 명품은 아닌 것을 최고의 명품이라고 속여 고가로 팔아먹는 장사치와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공적 부풀리기의 폐해는 결국 남아 있는 국민 전체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소모적인 정쟁 혹은 패싸움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에 끝나지 않고 ‘구국영웅’의 관리에 드는 비용도 죄다 국민세금으로 충당된다.
반대로 과연 어떤 것들이 백선엽의 과라고 할 수 있을까? 먼저 백선엽 공과를 두고 벌어진 논란은 크게 광복 전 일제 강점기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간도특설대의 참여 그리고 그로 인한 친일파 여부, 광복 후 한국전쟁에서 그가 수행한 역할이 과연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이었는가 하는 점으로 모아진다.
과거와 현재를 포괄하는 통시적 의미로서의 “구국영웅”은 어떤 사람을 두고 “구국영웅”이라고 해야 명과 실이 공히 그 명제에 부합할까? 국가안전과 국민생명의 수호에 혁혁한 공이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어쩌면 이보다 더 상위의 가치에 있는 덕목들, 예컨대 외침을 받은 국가위기 시에 민족을 배신하지 않고, 비인권적인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어 국민이 진실로 존경할 만한 타의 귀감이 되는 삶, 청렴, 정직, 양심의 유지 등이 체화된 분에게 붙여져야 한다. 이 주장은 가령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그 뒤 살면서 여러 가지 추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 있다면 국민들은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입증된다.
동일한 논리로,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없고 단지 국가공무원으로 재직한 것만으로 어떻게 해서 40대의 나이에 그 많은 재산을 형성했었는지 축재과정이 불투명하고, 2천억 원대가 되는 서울 강남의 건물을 아들 명의로 차명관리 했다는 등 갖가지 의혹이 보도돼 크게 논란이 된 이를 국민들이 존경할 만한 영웅이라고 부르기엔 성급하다. 실제로 백선엽은 친동생 백인엽 장군과 함께 정부의 조치로 101억 원과 재산일부를 환수된 뒤에도 거액의 재산을 차명으로 소유했던 사실이 드러나 부정축재 논란에 시달렸었다.
이른바 “친일파”란 각 분야별로 친일파 자손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군인의 경우엔 고급 장교로 인정되는 중령 이상의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자, 계급은 낮더라도 일본군으로 복무했을 때 전쟁 상황임을 빌미로 전쟁과 상관없는 양민의 구타, 재산 강탈, 살인, 부녀자 강간 및 겁탈 등의 전쟁범죄와 반인권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 무고한 동족을 살해하거나 고문, 폭행, 성폭행, 착취 등의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자는 “친일파”라고 불러도 좋다. 특히, 반민족 행위자는 그 죄의 가중치를 더 줘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또 한때는 친일파였다고 하더라도 과거 군 안팎에서 “참 군인”으로 칭송 받은 이종찬 장군처럼 광복 후 일정 기간 동안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하수인이 된 자신의 과오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과 참회하는 자숙기간을 거쳐야 하고, 그런 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 자로서 공적이 탁월하고 현저하다면 가히 “영웅”으로 칭할 만하다.
반대로 앞 시기엔 독립운동 지사였다고 할지라도 뒤에 가서 반인륜적 범죄나 반민족적 행위를 저지른 자는 영웅의 반열에 들게 해선 안 된다. 존숭 받지 못한 행위로 논란이 종식되지 않고 있지만 과거 한때 공이 있었다고 해서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국민 스스로 천박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과연 백선엽은 친일파였는가? 이 문제는 한 사람의 역사적 평가가 걸려 있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정말 신중하게 판단하고 평가를 내려야 할 과제다. 친일파라는 명제를 만족시키는 개념은 앞서 소략하게 제시한 몇 가지 행위들을 상기하면 되겠다. 백선엽이 그 중 한 가지라도 해당되면 “백선엽은 친일파이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그런데 백선엽은 만주군 장교로 입대해 일제를 찬양하고 천황에게 충성하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지속에 협력한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서조차 참회하기는커녕,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사과 한 번 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만주군 간도특설대 참여를 정당화했다.
같은 시기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다는 사실에 대해 참회의 시간을 가진 이종찬은 왜 천황이 매달 내린 정기적인 하사금(선친의 것을 대를 이어서 상속할 수 있던 거금이었음)까지 포기하면서 참회했을까? 광복 후 일본 육사 동기였던 채병덕 총참모장이 여러 차례 능력발휘의 기회와 출세가 보장된 군으로 복귀하라고 권유해도 이종찬은 그 간청을 뿌리치고 재야에 묻혀 깊이 반성하고 참회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상반된 처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백선엽은 자신이 일제시대 때 창씨개명 한 것에 대해서도 반성이나 참회 혹은 사과하지 않았다. 그가 사용한 창씨명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였다. 다들 알다시피 시라카와 요시노리란 자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 천장절(천황 생일) 행사 때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에 중상을 입고 26일 뒤 죽은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백선엽이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 입시에서 당락이 결정되는 요인이었던 만주군관학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저명한 일본군 장군의 성명을 땄던 것일까?
일본에서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그가 윤봉길 의거를 몰랐을 리 없었고, 폭사한 시라카와 요시노리도 몰랐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만약 후자였다면 백선엽은 일본군이 철천지원수로 생각해오던 안중근과 윤봉길 의사에 대한 일본군의 적개심에 편승해서 윤봉길 의사에게 당한 시라카와의 이름을 취함으로써 자신이 그만큼 조선인에 대한 복수심, 적개심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조선인 토벌의 목적을 자신 있게 수행할 수 있음을 나타낸 의사표현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럴 경우 입학시험에서 면접을 보는 일본인 교관들은 틀림없이 자기를 주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백선엽은 바로 이러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창씨개명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백선엽과 대화를 많이 나눠본 일본인들이 그를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 같은 기회주의적 민첩성을 두고 한 말일 수 있다고 본다.
또 설령 동기가 그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추구해야 할 우리가 창씨개명 한 성과 이름을 가진 사람을 기필코 국립묘지에 안장해야만 할까? 가족묘지에 묻히면 되지 않는가? 대한민국 국립묘지가 언제부터 야스쿠니 신사가 됐나?
국내에서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참여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가 그 부대에서 조선인을 토벌하고 학살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점에 대해 긍정과 부정 두 주장이 대립하고 있어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선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백 장군이 1983년 일본에서 출간된 『對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白善燁著, 『対ゲリラ戦 : 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東京 : 原書房, 1993年)〕라는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발언을 소개하는 걸로 최종적인 결론은 유보하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다만, 사실여부의 확인과 별개로 일제 식민통치라는 특수한 시기에 자신이 직접 동포를 잡아서 처단하는 반민족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혼자만의 영달을 위해 동포를 잡아들이고 소탕하는 목적으로 창설된 군 조직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이 속죄하고 사죄를 빌어야 할 경우라고 본다.
백선엽의 발언은 이러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면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고, “우리들이 쫓아다닌 게릴라 가운데 조선인이 많이 섞여 있었다.” 이 말은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한 일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었음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백선엽은 필자가 다닌 국방부 직할 군사연구기관의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근무한 13년 동안 지근에서 자연스레 그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에게서 자신에 대한 사후 평가를 염두에 둔 게 아닌가 하는 언행들을 보고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이 연구기관 내에서 행한 2004년 봄의 한 강연에서 자신이 고당 조만식 선생의 정치비서를 지냈다고 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조만식 선생 본인 및 사무실 직원이나 혹은 그 후손이 아니면 검증할 길이 없다.
그런데 과연 비서라고 했지만 정치비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사무실 직원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일제라면 치를 떨었던 선비형 민족지도자인 조만식 선생이 과연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들을 체포해 처단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잔악한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던 청년을 자신의 비서로 기용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조만식이 청년 백선엽을 비서로 채용한 것이 사실이라면 백선엽이 조만식 선생에게는 자기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사실 자체를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20. 11. 10. 15:58
北漢山 清勝齋에서 推敲
雲靜
위 글은 『형산수필』제36집(2020년 12월 20일)에 실려 있는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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