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죽음을 어떻게 소비하나?③ : 문제점들과 대안
앞선 두 편의 졸고에서 박원순 시장(이하 직함 생략)과 백선엽 장군(이하 직함 생략) 두 고인의 행적을 개략적으로 고찰해봤다. 특히 두 사람 중 백선엽은 상대적으로 관련 자료에 먼지가 가라 앉아 있는 고로 그에 대해서는 과연 그가 본인 혼자서만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이 맞는지 일차적으로 검토해봤다.
그 결과 박원순이든, 백선엽이든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에 대한 사실과 역사가 많은 부분이 실상과 거리가 먼 것들일 수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됐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뭔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내용과는 다르다는 느낌만 있어도 이 글의 목적은 달성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이른바 사회적 명사나 역사적 인물들의 과거사라는 게 당사자와 기록자 사이 식사 한 끼, 얼마 안 되는 서 푼어치의 촌지에 쉽게 한 편이 되어버리는 뒷거래로 인위적으로 과는 감추거나 축소되고 공은 조작되거나 부풀린 허구, 가공된 껍데기 역사였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정치가 투명하지 않는 나라일수록 그런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과의 의도적 누락과 공의 고의적 확대 등의 침소봉대, 사실과 맥락의 조작 및 왜곡, 없던 사실을 만들어내는 날조, 호평의 과잉부각, 악평의 축소 등 권력과 결탁된 정치공학적인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결론을 짓기 전에 한 가지 강조하자면, 먼저 박원순의 경우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 타살이 아닌 그의 의지로 죽은 자살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잘 죽은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 더 이상 그런 자의 죽음을 미화해서도, 영웅시해서도 안 된다.
차제에 백선엽이 생전에 기억하고 말한 것을 토대로 엮어진 한국전쟁의 역사는 지금까지 진지하게 종합적으로 검토된 적이 없다는 점도 말해두고자 한다. 백선엽이 지휘해서 승리한, 그래서 그 자신이 자랑스러워 한 몇몇 전투들의 이면에 실종된 사각화한 이야기를 길어 올리면서 역사의 제 모습, 참모습을 재조명해서 진상과 진실을 밝혀야 한다.
기록에 입각한 듯이 객관적인 듯해 보이는 그의 증언, 회고,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다. 자기관리적 차원에서 구술되고 기록된 그의 발언과 평가는 전부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해보는 것이 좋다. 그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가려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3편에 걸쳐 길게 논해본 이 글의 대단원에 와 있다. 본격적인 연구를 거치지 않고 쓴 글이어서 한시적으로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새로운 자료와 증언들이 나오면 내용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처럼 박원순과 백선엽 두 고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나타난 상극적 반응과 평가를 보면 현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를 종합하면 대략 아래의 몇 가지로 귀납된다.
첫째, 합리성 부족의 만성적 문제, 개개인의 인간주체성 결여 그리고 일부 곡학아세, 출세와 보신주의에 눈이 먼 지식인들에 의한 역사학의 표류가 재확인됐다. 비단 이 두 사람뿐만이 아니지만 박원순과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여타 정치인이나 정치적인 인물들의 죽음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이아 그램이 만들어지지 않고 극과 극이다.
이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가 합리성이 결여된 사회임을 말해준다. 양 극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설과 독설들이 주체성 없는 인간들의 뇌를 사정없이 침투해버린다. 그 결과는 홍위병들이 자신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싸우는 패거리 싸움으로 나타났다. 정치도구로 전락한 홍위병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칭, 타칭 영웅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가공물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읽어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남들에게 자기 일인 듯이 옮겨댄다. 그들은 민주주의체제에서 국민은 국가의 주인임에도 스스로 자원해서 국가구성의 내적 본질이 아니라 파레르곤(parergon)처럼 없어도 생존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잉여물, 부가물, 장식품,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살아간다.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는 많은 역사학자들과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다. 역사학이 문제의 주범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보수진영의 무지와 정쟁의 도구화, 동시에 진보진영의 보수를 뺨친 보수화와 현행법을 무시한 이율배반적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는 것은 역사학의 실종이자 위기임을 웅변해준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학 고유의 자리를 그들에게 내주고 밀려나 있는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합리성 추구, 이성적 판단과 평가,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는 균형감각, 감정과 선입견을 배제한 사료의 검증을 통해야만 진실에 부합하는 역사지식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합리성과 이성에 토대를 둔 역사학의 기본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이번 박원순과 백선엽 같이 인간의 죽음을 두고 극과 극의 평가와 진영대립이 이처럼 살벌하지는 않게 됐을 것이다. 역사학을 이렇게 만든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둘째, 인간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늘 정치투쟁의 관점에서 봐오던 것이 또다시 재현됐다. 물론 박원순과 백선엽의 죽음을 두고 벌어진 정치적 대립은 본인들이 스스로 초래한 면이 작지 않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이를 이용하고자 한 진영 사람들의 탐욕에 눈이 가린 도덕불감증이 크게 한몫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재연되는 것이 탐진치(貪瞋癡)의 극한적인 진영싸움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貪瞋癡의 진영대립에 부화뇌동하는 무지와 이성의 실종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은 정치권이 보수와 진보로 편을 갈라 싸우게 만든 진영의 덫에 갇혀 부화뇌동하면서 서로 쌈박질을 해댄다. 사실과 진실은 온데간데없고 거짓, 왜곡, 날조, 우상, 환상과 증오만 넘쳐난다.
과연 한국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보수와 진보란 존재하는가? 나는 잘라 말한다. 없다고! 권력을 잡아 한탕 해보려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두 진영이 겉으로는 서로 싸우면서도 뒤에서는 서로 도와 기득권을 유지하고 먹이의 파이를 더 키우는 것뿐이라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이념과잉과 패거리문화가 춤을 추고 있다. 두 진영으로 나뉘어 질기고 질긴 싸움을 수십 년이나 계속 해오고 있다.
이런 식의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진영싸움은 부질없이 쓰지 않아도 될 사회적 비용과 에너지만 허비시키는 셈이다. 그것은 사회적 통합도를 떨어뜨리고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 가운데 하나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 전체의 맑기와 투명성을 저하시키는 共業의 축적에 불과하다.
셋째, 위 첫째와 둘째 현상의 원인이자 새로운 문제의 발단이 되는 무지다. 무지나 무식은 차이에 따른 증오보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가지려는 탐욕보다 더 무서운 일차적인 원인이다. 인간사에서 최대의 범죄들이란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항상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음을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를 분열시키고 사람들 간에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것도 본질적으로 무지와 사악한 신념이다.
이 둘은 서로의 간극을 더 넓히면서 때로는 서로를 도우며, 때로는 상대 역할을 자신이 하는 상보적 존재이거나 동체이면일 수도 있다. 무지는 확증편향에 근거한 신념과 결합되면 인간은 제어불능의 비이성적 존재가 되고, 사회에는 가공할 결과가 초래된다. 정치인 혹은 정치적인 인물이 죽으면 일반인들은 물론, 심지어 지식인이나 사회 지도층에서도 무지가 여지없이 드러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대중들이 얼마나 적은 정보로 문제의 인물을 인식하고 평가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제한된 정보, 편취된 사실, 조작된 사실, 뉴스로 가공된 사실만 부유물처럼 떠돌고 있을 뿐이다. 이른바 역사적 “영웅”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나 자서전 혹은 평전을 읽을 때 당사자가 말하는 언행과 공로를 의심 없이 믿고, 그러한 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출판하게 됐는지 배경도 모르고 기록자의 말을 비판의식과 의심 없이 무조건 믿고 보는 독서행태도 문제를 배태시키는 근원 중의 한 가지다.
일반인들은 더욱 더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건 일반인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전문가들도 똑 같이 그런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이제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관성화된 매너리즘, 오랜 습이 돼 있을 정도다.
심지어 평생을 명백한 근거에 토대를 둔 합리적 해석과 진실된 평가를 본업으로 다투는 학자들과 언론인들까지도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자신이 직접 사실관계를 따져보지도 않고 남들이나 언론에서 하는 말을 그냥 반복해댄다. 전 국민이 하나같이 확성기 역할을 충실히 해서 다 같이 무식과 무지의 나락으로 자원해서 빠져드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문제시 되는 인물의 여러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에 맞게 자기진영의 일부 언론에서 떠드는 말을 절대시해 “백선엽은 구국의 영웅”이란 걸 전제하고 반대진영의 주장을 비난하거나 백선엽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는 식의 주장을 해댄다. 그런 주장을 펴려면 먼저 백선엽이 “구국영웅”이라는 평가에 합당한 인물인지 진실을 확인해봐야 한다.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선 그런 주장은 유보하는 게 옳다.
이들은 史實도 아니고, 事實도 아닌, 진실을 알려는 진지한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예컨대 얼마 전 각종 방송이나 유튜브상에 나와 확신에 찬 어조로 백선엽을 찬양 일변도로만 선전한 안철수, 정규재, 김동길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이들 외에도 한두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지하다. 내가 그들의 주장을 들어 본 바로는 소크라테스의 금언처럼 자신들이 백선엽의 공과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에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사회 전체적으로 자살을 부추기는 요인들 중 한 가지를 이루고 있는 인명경시와 자살을 미화하는 풍조는 일종의 사회구성원의 집단적 질환이다. 그렇지 않아도 매년 자살자가 1만 명 이상이나 생겨나는 이 사회에, 특히 정치권에서 죽음으로 문제해결이나 정치적 불리함을 극복해보려는 생각이 존재한다는 건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문제를 안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리는 자살자를 영웅시하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질환이다. 노무현, 노회찬, 정두언 등 유력정치인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아야 한다.
대안이나 개선책 없이 이처럼 비판만 하면 글쓴이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필자가 평소 가끔씩 기회 있을 때마다 해오는 주장이지만 실천과 반영의 정도가 문제이지 대안이 없지는 않다. 실천은 실상이 뭔지를 알고 난 뒤에 따르는 과제라고 봐도 용인이 되기에 우선 아래에 여러 가지 대안들을 열거해본다.
여야든, 좌우든, 보수와 진보든, 정치인과 학자들 그리고 일반인들까지도 모두 우선 특정 사안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사실관계부터 따져보고 얘길 하든가 자기주장을 펴야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은 문제의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나는 과연 사실을 정확히 알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먼저 무엇이 사실인지 사실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해석과 평가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남이 하는 말 아무 주견 없이 무조건 따라 하는 앵무새가 되지 말고! 그래서 불필요한 정쟁의 도구가 되지 말고, 세상을 이토록 혼탁하게 하는 데 그 잘난 입을 보태지 말아야 한다.
본고 앞부분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나온 얘기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어떤 논란이 되거나 유명세를 타는 사람에 대해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일일이 조사해볼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더 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크게는 돈벌이에 급급하고, 작게는 직장생활, 자식양육, 건강관리, 부모봉양, 인간관계 유지만 해도 제대로 해내기가 벅차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범죄나 부도덕한 행위들이 진행되고 있듯이 우리는 살아가느라고 허겁지겁 허둥대는 사이에 역사가 결정되고, 어떤 정책이 결정되고, 반민족 매국노가 국민적 영웅이 되고, 국민의 영웅이 반민족 매국노로 뒤바뀌어도 그 결과로 인한 불이익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만능의 합목적적 신화가 허물어져 한다. 정치가 만능으로 인식되고 정치권에 수많은 사람들이 왜 모여드는가? 그 이면에 권력을 쥐면 명예는 물론 과도한 권익과 특혜들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미분화된 사회(fused society)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정치가 민의 보편적 이익을 위한 수단과 도구가 아니라 특정 개인이나 진영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작동돼오고 있는 오랜 매너리즘 그리고 그 속에 안주해오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성곽 허물기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공멸뿐인 진영투쟁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와 대안세력을 모색하고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진영을 해체하면 지금까지의 구태와 낡은 밥그릇 싸움의 원인이 대부분 해소될 것이다. 해체된 두 진영의 그 자리에는 합리성과 이성이 들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로선 머나먼 이상향이다.
언론에 크게 보도된 박원순과 백선엽 두 고인의 죽음을 계기로 낡은 구습과 악습, 탐욕에 찌든 진영논리, 실사구시를 외면하고 자신도 모르게 기계적인 편 가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한 진영만의 이익을 위한 홍위병이 돼 진영싸움의 도구가 돼주는 일반인들의 각성과 깨어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에 휩싸여 생각하는 습관이 붙어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으로 사고력을 증장시켜야 한다.
인식과 틀의 전환도 뒤따라야 한다. 무지한 보수와 오만한 진보의 탐욕적 이전투구를 넘어서야 한다. ‘기성 정치권력’ vs ‘기성 정치권력’의 구도에서 ‘기성 정치권력’ vs ‘시민이 주체가 되는 아고라 민주주의의 회복’의 구도로 나아가야 한다. 기성 정치권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시민들의 상실된, 혹은 잊고 있는 국민으로서의 주체성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것을 제도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관련 법령과 제도개선을 마련해야 한다.
왜곡과 침소봉대와 斷章取義를 넘어선 숨겨진 전체의 상을 보고 진실과 평가를 종합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산의 참 모습을 보려고 한다면 한 방향과 한 각도가 아니라 다양한 방향과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하듯이 소경의 코끼리 만지기가 돼선 안 된다.
일부밖에 만져 보지 못하고선 자기가 만져본 것만이 코끼리의 전체상이라고 우기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되는 것이다. 진실을 직시함으로써 역사인물에 대한 공과 과가 엄격히 분리되고 다시 그 토대 위에서 이성과 합리성이 결합하는 식의 변증법적 평가가 이뤄지면서 역사가 기록돼야 한다.
모든 사물과 인간에겐 공히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부정적인 게 있으면 긍정적인 게 있고, 공이 있으면 과가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존재란 단 하나도 없다. 자연과학에서도 이것은 진리다. 하물며 보는 눈이 단선적이고 인지능력도 고만 고만한 인간들이 모여서 서로 부대끼고 사는 인간사의 역사문제에서는 더 일러 무엇 하랴!
당연히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한 존재는 없다. 인간은 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신도 인간사회에 발붙이게 해선 안 된다. 그건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특정 종교의 영역 내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과는 숨기거나 밝히지 않고 공만 부풀리는 건 신이 되겠다는 오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밝히고 참회하지 않으려면 이룬 공도 얘기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공만 늘어놓는 가벼움은 침묵보다 못하다.
이 점과 관련해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사회적 명인이나 명사들은 스스로 살아생전에 누린 조리된 호평과 대중적 인기라는 것은 거품이라는 사실을 증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개인의 공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부정일변도로 보거나 삶의 허무감을 키워서도 안 된다. 역사란 인간에게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국민들의 평균적인 역사의식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사마천의 史魂을 상기시키고 역사의식과 그 힘을 회복시키는 게 필요하다.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역사학은 단순히 과거사실을 밝히는 학문이라고. 또 제발 이제 그만 과거사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자고.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서 무지해서 그렇게 말한다.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역사문제는 과거문제가 아니라 현재문제임을 모른다. 그들은 논란이 되고 있거나 문제시되고 있는 역사문제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조부모나 부모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말한다.
만약 자기 조부모나 부모가 일제 때 일제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거나 혹은 한국전쟁 시에 한국군이나 미군에게 이유 없이 학살당했다면 그 과거사를 쉽게 잊고 미래만 얘기하자는 소릴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지나치게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역사가 과거의 일이라고만 알고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 지금 우리들의 일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무지의 소치다. 단적인 예로 한일 간의 늘 문제가 되고 있는 독도문제는 영토문제가 아니라 역사문제로서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의 문제이고, 일제 때 강제징용 당한 분을 조부나 부친으로 둔 후손은 현 일본정부의 강제징용배상 무화 정책을 반대하는 우리 정부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조모나 모친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면, 계속되는 위안부 시위 혹은 소녀상 건립논란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현재를 실사구시적으로 이해한 바탕 위에 제대로 된 미래로 나아가려면 과거사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제 문제들을 해결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추모를 생명중시의 가치로 환원시키는 일이다. 인간본연의 존엄성 회귀와 정의와 공정성의 확립이 시급한 현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법의 엄정한 집행이 전제돼야 하지만, 현 판검사들의 의도적 오류나 비리와 범죄에 대한 견제장치가 전혀 없는 사법계의 현실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나라 위해 목숨까지 초개같이 버린 자들은 말이 없다. 거짓이 생리에 맞지 않아서 양명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 그들의 숨은 귀감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음지에 묻혀서 잠자고 있다. 반대로 그 대척지점에서는 금권과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 비열하고 구차하게 산 자들의 아전인수, 견강부회, 깎아내고 부풀린 功大過少의 자화자찬, 셀프영웅담들만 부나방처럼 도처에서 어지럽게 춤추고 있다. 비정상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권력에 붙어서! 허구한 날 끼리끼리 패거리 지어서 골 터지는 쌈박질이나 해대면서 말이다.
2020. 11. 10. 15:58
北漢山 清勝齋에서 推敲
雲靜
위 글은 『형산수필』제36집(2020년 12월 20일)에 실려 있는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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