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죽음을 어떻게 소비하나?②: 백선엽은 “구국영웅”인가?
고 백선엽 장군(이하 직함 생략)은 과거 어떻게 해서 1945년 12월 말 아우 백인엽과 함께 월남해서 그 이듬해 군문에 들어간 1946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 단 4년 사이에 대령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었을까?
또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날 밤, 육군 장교구락부 낙성기념 회식에 참석해서 한국군 고위 지휘관 및 보직자들, 주한 미 군사고문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사실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몇몇 전사연구자와 언론인들이 백선엽에게 직접 물어봐도 그는 침묵만 지켰다. 이 같은 의문들은 이뿐만 아니지만 여기선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한국전쟁 시기 빠트릴 수 없는 전쟁 초기 38도선 방어전투와 다부동전투에 대해서만 “조금” 들여다보기로 한다.
과연 백선엽은 최초 북한군이 남침해온 전쟁 첫날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그는 1989년에 펴낸 자신의 국내 첫 회고록 『6·25한국전쟁 회고록 : 군과 나』(서울 : 재단법인 대륙연구소)에서나 실제 육성으로나 지금까지 한국전쟁 발발 전후에 일어난 미스터리한 과오들에 대해선 죽을 때까지 끝끝내 함구했다.
그러면서도 회고록에서는 지난 과거의 발자취를 “솔직히 전하여 스스로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고자 한다”고 썼다. 내가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자연스레 백선엽을 보게 된 바로는 그가 그런 고심을 한 것 같지 않아 보여서 이 말은 공염불이라고 보는 필자가 그의 발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여러 가지 근거들 가운데 한 가지다.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같은 시기 한국전쟁 발발 초기 임진강 방어전투에서 대령 계급으로 사단장을 맡았던 지휘관으로서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치들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인천에 주둔하던 예비 11연대를 옮겨 수색에 천막을 치고 주둔하게” 한 뒤 개성에 나가 있던 제12연대 주력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임진강철교 폭파마저 실패했고, 문산 돌출부의 아군 진지에 병력을 투입했지만 북한군의 저지에 실패한 뒤 전선에서 후퇴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본인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온종일 극도의 위기감 속에서 평정을 잃고 방황했던 것"(백선엽 회고록, 33쪽) 외에는 특별히 기록할 만한 역할이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자. 당시 백선엽 대령은 본인이 말한 대로 역습할 시기를 놓쳐서 전쟁 발발 이틀째인 6월 26일에 벌써 문산과 파주를 북한군에게 내주고 병력을 봉일천으로 후퇴시켜 서울방어전에 임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고, 그 다음 날 3일째 되는 날에야 겨우 적정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또 후퇴하지 말고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육군본부의 명령을 받고 계획했던 문산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을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이 각지로 흩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사단장 지프차는 물론, 군용차량 150여 대와 야포 및 중장비들을 죄다 버린 채 부하들 4~50명과 함께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넘어 도보로 김홍일 소장이 긴급히 창설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있던 시흥으로 후퇴한 것이 주요 역할 혹은 동선의 전부였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임진강의 서전에 대해 “원인과 과정은 어떻든 결과는 나의 패배로 끝났다”고 시인하면서 전체 전황에 용의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 즉시 적절한 때 후퇴하지 못한 점, 전후방 통합지휘를 기하지 못한 점 등 “반성할 점 또한 여러 가지”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백선엽은 후퇴명령을 내릴 때까지도 개성 방어를 맡은 휘하 제12연대의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또 이 연대가 개성 방어에 실패해 전쟁 첫날부터 북한군에게 개성을 내준 뒤 어떻게 임진강을 넘어 퇴각했으며, 자신의 부하였던 그 병력들의 사상자가 얼마였는지 이에 대해서도 일언반구가 없었다.
이는 같은 시기 병력, 무기 장비 면에서 다 같이 열악했던 비슷한 처지에서도 악조건을 딛고 춘천지역을 사수함으로써 춘천을 거쳐 서울 남방의 한국군 퇴로를 차단하고 서울을 포위하려던 김일성의 작전계획을 무산시킨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역할과 크게 비교된다. 또 그 뒤 신속히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만들어 38도선상의 진지들과 예비진지에서 모두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밀려 퇴각해온 각개의 병력들을 수습해 사단들을 재편성해서 한강 이남에서의 지연전을 펼친 김홍일 장군의 기민한 대응과도 대비된다.
다부동전투(1950. 8. 14~8. 30)를 지휘한 백선엽을 그 혼자서만 나라를 구한 것처럼 “구국영웅”이라고 모든 매스컴이 나서서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것도 지나친 공적의 확대다. 과연 그가 최대의 공적이라고 자랑스럽게 내놓은 다부동전투에서 그가 행한 역할의 실제는 어떠했는가? 나는 한국전쟁의 전문연구자로서 이에 관해 더 연구를 하지 않고도 바로 단언할 수 있는데, 미 공군과 육군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백선엽이 지휘한 육군 제1사단의 북한군 퇴치와 다부동 방어의 성공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근거는 이렇다.
다부동은 영천지역과 함께 임시 수도 대구(그 뒤 부산으로 이전)의 안전과 직결된 절체절명의 군사요충지로 떠오른,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격전지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여기에 투입된 미군과 한국군 등 총 8개 사단이 집단적으로 이뤄낸 공동의 성과였고, 다부동의 사수는 이와 별개로 그것 하나만 단독으로 평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백선엽 대령의 한국군 제1사단은 미군 제23연대와 제27연대, 한국군 제10연대 병력과 미군의 전격적인 공중지원뿐만 아니라 여타 사단들이 받지 못한 전차지원과 포병의 화력지원도 거의 독점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아래에는 지원과 그로 인한 영향에 관한 일부를 소개해 놨다.
먼저 공중 항공폭격 지원이다. 미 공군은 맥아더의 승인 하에 B-29전략폭격기 98대가 400~900kg의 폭탄 960톤을 한국군 제1사단 정면의 북한군 진지에 집중적으로 퍼부은 융단폭격으로 적의 포병 기능을 저하시키고 공병, 통신, 전차, 탄약, 보급품 등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때의 미 공군 항공폭격이 어느 정도 위력이 있었으며, 다부동전투의 승패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은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에게 포로가 된 북한군 제2군단 통신대 소속 김윤문 소좌가 미 공군의 융단폭격으로 북한군이 입은 피해의 정도를 밝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윤문은 이렇게 실토했다. “B-29기의 융단폭격으로 북한군의 손실은 매우 컸다. 약목 부근 낙동강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 제3사단 및 제15사단의 예비대, 지원 포병 그리고 공병, 전차, 탄약을 비롯한 각종 보급품이 파괴되고 유선이 모두 절단되어 대혼란이 빚어졌다.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을 비롯한 군단 간부들은 이때부터 동요되어 승리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고, 이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전차와 대포의 화력 지원이다. 미군은 제1사단에게 105mm곡사포 18문과 155mm곡사포 6문을 제공했으며, 전차 부분에서도 제1사단은 미군 연대의 지원으로 M46(일명 패튼전차), M26(퍼싱전차), M3A3(셔먼전차) 1개 중대를 앞세워 그동안 한국군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북한군 T34전차 부대를 능히 격퇴할 수 있었다.
백선엽 사단은 미군의 화력 지원과 전차를 운용할 수 있었던 덕분에 8월 21일 밤 북한군이 보전 협공으로 다부동을 향해 공격해왔을 때 적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 등을 격파한 일명 “보링앨리 전투”(Bowling Alley)에서 북한군의 병력을 75%나 손실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미군의 공군 및 지상군의 지원이 백선엽이 지휘한 제1사단의 전력에 어느 정도로 도움이 됐는가 하는 점은 그가 당시를 회고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미군으로부터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전력”을 지원 받았고, 미 공군의 지원으로 “공중 지원도 걱정이 없었”으며, “비록 미군과의 협동작전이지만 사단 담당 정면에서 한 맺힌 전차까지 구사하게 됐다”며 크게 안도했으며, “전쟁 중 국군사단에 미군이 두 겹으로 중첩, 투입된 것은 다부동전투가 유일한 경우”였다고 시인했다. ( 『6·25한국전쟁 회고록 : 군과 나』, 66~68쪽)
이러한 백선엽의 회고는 미군의 항공폭격 지원과 지상의 병력 및 포병사격 지원과 전차 지원이 자신의 제1사단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승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이 됐음을 실증한다. “결정적”이라 함은 미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방어와 퇴치가 불가능했다는 의미다.
다부동전투이든, 여타 다른 지역의 전투이든 궁극적으로는 모두 임시수도 대구(얼마 뒤 이전한 부산)가 피탈되지 않도록 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서 치러진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한 사단이 아무리 북한군의 공격을 잘 막아 내고 있어도 인근 사단이 뚫리면 바로 뒷덜미로 포위가 될 수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1개 사단만 잘 싸운다고 해서 낙동강방어선 전체가 방어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1사단 바로 인근의 제6사단과 제8사단이 처절하게 싸워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한 영천-신녕 전투도 다부동전투 이상이나 중요했다. 만약 영천과 신녕이 뚫렸더라면 백 준장이 아무리 선전해도 다부동의 승전은 십중팔구로 보장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수도사단이 혈전으로 사투한 안강-기계가 뚫렸더라면 북한군은 부산으로 직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 역시 대단히 중요했다.
또 제3사단이 수행한 형산강 전투 그리고 진주, 마산으로 공격해온 방호산의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에 대해 미군 제25사단과 한국군 해병대가 사투를 벌여 막아낸 마산전투도 다부동전투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전투였다. 북한군 제6사단은 우회해서 신속히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특명을 받은 방호산이 지휘한 최정예사단이었다.
전체적으로 낙동강 방어전 속의 일부였던 다부동전투의 승리는 이처럼 8개 사단이 서로 연결돼 있던 유기적인 관계에서 이뤄진 성공이었다. 따라서 8분의 1에 불과한 공을 백선엽 혼자서만 이뤄낸 공이라고 하는 건 어폐가 없을 수 없다.
더군다나 백선엽이 밝혔듯이 이 전투에서 자신이 지휘한 제1사단은 “장교 56명을 포함해 2,300명의 전사자를 냈다.”(『6·25한국전쟁 회고록 : 군과 나』, 72쪽) 따라서 다부동 사수의 공은 먼저 전사한 부하 전우들에게 있고, 다음은 7월 26일 한국으로부터의 철수는 없다며 낙동강전선 사수를 명령하고 한국군 제1사단에게 공중포격과 전차와 병력 지원을 승낙해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 7월 29일 “사수하든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죽어라”(Stand or Die)라며 북한군에 대한 방어와 역습을 주문한 미 제8군 사령관 워크(Walton H. Walker) 중장 등 미 제8군 지휘부 그리고 이 작전을 수행한 미군에 있고, 그 다음으로 여타 한국군 사단과 낙동강 동안을 담당한 미군 사단들에게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평가이다.
백 장군을 “구국영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백선엽이 다부동전투시에 부하들에게 “나를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고 했다는 말에 열광한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그에 앞서 7월 27일 낙동강전선을 시찰하러 동경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가 워크 장군에게 “미 제8군이 현 진지를 고수해야 된다”며 “더 이상의 후퇴는 하지 말라”고 한 지시의 큰 틀에서 태동된 것이며, 워크 사령관이 모든 유엔군과 한국군에게 “사수하든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죽어라”라고 내린 명령의 복사판이다. 백선엽의 회고록(70쪽)에 의하면, 백선엽이 말한 것은 정확하게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당시 그가 부하들에게 한 말이었는지 의심이 간다. 백선엽 사단장 휘하에서 직접 지시나 작전명령을 받은 사단 참모장 및 참모들, 연대장들, 대대장들, 공병대장, 헌병대장과 중대급 부대의 부하들, 심지어 미군과의 통역을 맡은 통역장교 등등 수많은 부하들 중에 백 장군으로부터 직접 그 소릴 들었다고 증언한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증언한 이가 없다고 해서 백선엽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지로 먼저 들어가겠다면서 솔선수범을 보이는 지휘관으로부터 그런 감동적인 말을 들었다면 훗날 무용담으로도 여러 번 회자될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과문한지 모르겠지만 훗날 그의 부하들 중에 이 감동적인 얘기를 들었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초기 임진강 방어전투에서부터 다부동전투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백선엽과 함께 싸운 그의 부하들로는 석주암 대령, 최경록 대령, 전성호 대령, 김익렬 대령, 최영희 대령, 유해준 대령(사단 증원부대), 박경기 대령, 김점곤 중령, 김동빈 중령, 문형태 중령, 박경원 중령, 노재현 소령, 헌병대장 이규광 소령, 김덕준 소령, 장치은 소령, 동홍욱 대위, 부관 김판규 대위, 대대장 김재명 소령, 김영석 소령, 미군과의 통역을 전담한 남성인 중위 등등 많은 보직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백선엽의 그 발언에 대해 얘기한 바도 없고, 기록을 남긴 바도 없었다.
심지어 당시 제1사단 예하 제12연대장으로서 백선엽이 가장 아꼈던 부하라고 알려진 김점곤 장군도 훗날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고 했다는 말에 대해선 긍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현 국방대 모 교수가 필자에게 수년 전 경희대 교수로서 한국전쟁 전문연구자가 돼 있던 김점곤 장군을 만나 한국전쟁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김 장군이 백선엽이라는 이름 자체를 잊어버린 듯이 그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아서 대단히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고 전해준 바 있다.
이 일화 역시 무얼 의미하는지 곱씹어 볼 만하다. 따라서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말은 필히 자료검증을 거쳐 분별력 있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백선엽 혼자서 자칭한 발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근거다.
백선엽이 지휘해서 평양을 점령한 한국군 제1사단의 이른바 “평양 선봉입성”도 자신이 자랑하는 만큼 큰 공적은 아니었다. 이 사단이 평양방어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과의 전투를 통해 탈환한 것이 아니라 이미 북한군 주력이 모두 평양을 빠져 나가고 없던 상태에서 들어간 “무혈입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선엽의 회고록 『군과 나』에 소개돼 있는 그의 공적 그리고 과를 얘기하지 않은 점은 이 책이 1989년에 나온 뒤 많이 주목을 받지 못했고,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민주화의 정착이 국민적 화두가 된 그 시절은 그럴 시대적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선엽의 행적을 잘 알거나 그의 공적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던 한국전 참전 군 원로들이 상당히 많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백선엽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 공을 말한다거나 과를 감출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군 장성 출신들 중에는 강직하기로 소문났으며, 죽어서 장군 묘역에 묻히지 않고 부하들 묘에 묻어주라는 유언을 남긴 채명신 장군, “우리의 적은 부정부패”라는 소신을 실천하며 살아온 같은 북한(함남 신흥)출신으로 백선엽이 살아온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 박정인 장군, 마지막 주월 공사로서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 국익을 우선시한 나머지 월맹군의 공격을 받아 사이공이 함락되기 몇 시간 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재월 한국교민들을 구해주고 자신은 공산군의 포로가 돼 수년 후에 풀려난 이대용 장군 등 백선엽의 공이 과대하게 부풀려진 점을 잘 알고 있던 예비역 장군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많이 있지만 모두 사익보다 국익을 우선시하고 청렴하게 살면서 재산축적과 거리가 먼 점도 그중 하나였다. 박정인 장군은 생전에 필자에게도 백선엽이 자신의 공을 지나치게 부풀리는 게 말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이명박 정권 때, 자신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원을 받아들인 백선엽을 따르던 몇몇 예비역 장군들의 추대 움직임이 있었지만 군 원로들의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철회 주장”에 부딪쳐 성사되지 못했다.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철회주장”은 한국전쟁 참전자이자 맹호사단 제1진 재구대대장(在求大隊長)으로 채명신 장군과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전쟁문학 작가 박경석 장군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이 주장이 성공한 이유는 직언을 서슴지 않은 채명신 장군을 중심으로 진실을 중시한 한국전 참전 장성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백선엽의 평양사범학교 후배로 군 시절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에 단호히 반대한 채명신 장군이 일갈한 내용은 지금도 새겨들을 만하다.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독립군 토벌 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남조선해방 명분과 논리가 일본군 출신들에게 장악돼 있는 군과 친일파 사회지도층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것이어서 채명신 장군의 이 주장은 현실성이 뒷받침 된 것이다. 채명신 장군의 위 지적은 일국의 장군까지 지낸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역사의식이 있는 평범한 말이다. 그렇지만 많은 장군들이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는 무게감 있는 질타였다.
이 질타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우리 독립군을 어떻게 했든 그것과 별개로 “명예원수”이든 “구국영웅”이든 그 성스런 칭호는 어떤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지 시금석이 되는 내용이다. 일본군 대장의 성명을 딴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하고 개명한 이름을 가진 인물을 신성한 국립묘지에 안장해선 안 되듯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이다.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전쟁 제6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하던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프로젝트가 바깥도 아니고 군내 고위 예비역 장군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된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예비역 장군들 사이에서는 백선엽이 명예원수가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고 그의 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반증이다.
백선엽이 대략 1960년대부터 주로 일본사회에 이름을 알리는 데 주력해오다가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한국전 참전 원로들이 많이 타계하고 난 뒤인 대략 2006년 전후부터였다는 사실도 무얼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백선엽의 “구국영웅” 이미지는 많은 부분 사후 자신에 대한 평가를 의식한 본인의 과욕, 정치군인들의 정치적 집단이기주의, 백선엽이 말하는 대로만 받아 쓴 영혼 없는 언론인들 그리고 軍史를 연구하는 국방부 직할 연구기관 소속 군사연구자들의 연구능력 부족 및 양심 상실에다 수십 년간 신을 모시듯이 백선엽을 떠받들어 온 국방부장관 등 고위 관료들의 책임 방기와 편파적 편의주의가 결합돼 만들어진 허상의 가공물이다.
국방부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백선엽 말고도 한국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운 그의 동료, 선후배 장군들이 적지 않았지만 백선엽 혼자서만 죽을 때까지 근 30년 동안이나 자문위원장을 지내게 했다. 사실, 본고에서 거명되고 있는 군사연구기관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축으로 전쟁사와 군사사를 주 임무로 설립된 국방부 직할 연구소다. 부단히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경험을 역사사료로 채록한다거나 이에 대한 사료검증 작업을 통해 한국전쟁 연구의 정확성과 연구수준의 심도를 높여 나가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백선엽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여타 참전자들도 자문위원장을 맡게 해서 전쟁경험 및 사료의 다양화를 모색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백선엽이 上壽(100세)로 고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들이 수십 년간 변화 없이 은밀하게 진행돼오던 것을 잘 알고 있는 내가 국방부의 “책임 방기와 편파적 편의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다.
나는 과거 동 연구기관에 근무하면서 그곳에서 간행된 책들 중에 여타 양질의 연구서를 제외하고 유독 한국전쟁 관련 저서들은 대부분 연구수준이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군 내외 학자들의 평을 많이 들었다. 또 군내 다른 연구자들 가운데는 그러한 저서들은 모두 “쓰레기”이니 갖다 버리라고 혹평하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국민의 세금으로 그 따위 형편없는 저서들을 찍어내는 연구소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비난한 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혹평을 듣고선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내가 봐도 그런 저서들은 내용은 차치하고 우선 문장부터가 술어가 빠지거나 문맥이 요상한 非文인 경우가 허다하고 중언부언 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니 그런 비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백선엽이 자신을 셀프 영웅화한 것은 이처럼 연구능력은 물론 역사의식도 없는 군사연구자들과 일부 보수언론이 사료검증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 적은 대로 “구국영웅” 이미지의 확대재생산 및 미필적 고의의 사실 왜곡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환경과 그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백선엽이 과거 현역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형에서 면하게 해준 정치적 은인이었던 사실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1949년 2월, 백선엽 대령은 육본 정보국장 시절 군 내부의 남로당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은 박정희 소령을 미군의 동의와 이응준 총참모장의 재가를 받아 형 집행정지로 풀어줬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로 인해 불명예제대를 당한 박정희를 문관으로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그것이 인연이 돼 백선엽은 5·16군사쿠데타 세력에게 군의 선배지만 구시대 인물이라는 껄끄러운 인물로 평가됐지만 박정희의 배려로 몇 나라의 대사와 장관을 지내게 됐다. 그 뒤 살아 있는 신화로서 백선엽의 탄탄대로의 지위와 권력이 형성됐고, 그것은 곧 국방부 직할 군사연구기관의 자문위원장직을 대략 1990년대 초부터 맡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종신 동안 지낼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공산주의국가에서도 드문 종신직이었던 이 보직은 그가 이 직위를 활용해 영혼 없는 군사연구자들과 언론인들을 불러들이고, 일본인, 미국인 추종자들이 찾아오게 만들어 자신을 구국영웅화 시키는 데 유용한 둔덕이 됐다.
백선엽 재세 시 특히 보수진영에선 역대 주한 미군사령관, 주한 미 대사들이 줄줄이 기회라고 생각될 때마다 그를 예방한 것을 두고 “이것 봐라, 미국도 그를 영웅으로 대하지 않는가?”라면서 감동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를 영웅시한 미군 측의 의도 역시 나이 든 노병을 존중하는 미국의 전통문화가 자연스레 발현되면서 한국 내 보수 진영과의 결속을 다지는 끈으로 삼는 한편, 미국보다 북한과 중국에게 더 접근하는 진보진영을 견제하고자 한 정치적인 동기가 주된 이유였을 뿐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 역시 백선엽을 자연인으로 죽도록 그냥 두지 않는데 일조했다.
동시에 백선엽 역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모든 국면을 호기로 삼아 자신을 “구국영웅”으로 칭송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 결과는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겠다는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없거나 회의하게 만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에 대한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셈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백선엽의 과거사와 관련해 감춰진 이면을 “조금” 들여다 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박원순의 죽음처럼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간의 격한 논란과 충돌을 불러일으킨 백선엽의 죽음은 상당 부분 본인이 자초한 면이 있다.
한마디로 생존 시에 그가 부린 부정직한 과욕이 문제를 불러일으킨 진앙지다. 한 쪽에선 “구국영웅”, 다른 한쪽에선 “친일파”! 백선엽에게 따라다니는 상반된 평가의 두 꼬리표가 이를 상징하고, 그의 삶과 그의 언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다.
백선엽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비트겐슈타인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한 바 있다. 필자에게 이 말은 인간의 삶에서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지만, 나는 이 말을 살짝 비틀어서 인간의 공과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백선엽도 자신의 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했어야 했다.
2020. 11. 10. 15:58
北漢山 清勝齋에서 推敲
雲靜
위 글은 『형산수필』제36집(2020년 12월 20일)에 실려 있는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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