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貞陵)과 태조 이성계
어제는 정릉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보기로 한 선배와 약속한 곳이 마침 그의 사무실이 있는 정릉이었다. 울적한 기분도 달랠 겸, 또 운동도 할 겸 해서 먼 길이지만 버스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내려 걸어서 갔다.
정릉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神德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 능은 서울 경기 일원에 남아 있는 조선왕릉 40기 중의 하나로서 북한에 있는 2기의 조선왕릉과 함께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는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북한 땅에 있는 2개의 능은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의 능인 齊陵과 제2대 임금 정종 및 정안 왕비가 함께 묻힌 합장릉인 厚陵이다.
지금까지 여러 번 정릉을 오가면서도 왕릉이 다 그런 거려니 하고 지나쳤던 貞陵에 막상 당도해보니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입구 홍살문에서부터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香御路가 ‘ㄱ’자로 꺾여 있어 여타 왕릉들의 조성과 많이 달라 보인다. 양식은 왕후만 모셔져 있는 單陵이다. 능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陵寢(陵上이라고도 함)은 서쪽 봉우리에서 동북쪽으로 흘러내리는 야트막한 기슭에 조영돼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능에 올라가는 건 금지돼 있다고 해서 가까이 가보지 못하고 멀리서 따스한 봄볕 속의 능을 올려다보고만 왔다.
정릉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태종의 이장 어명이 있은 지 260여 년이 흐른 1669년(현종 10년) 신덕왕후의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왕후로 인정받아서 능이 다시 조성되고 나서부터였다고 한다. 신덕 왕후에서 신덕고황후로 추존된 것은 1899년(광무 3년)에 고종이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면서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였다.
정릉의 주인 신덕왕후가 자기 배로 난 자식이 세자로 책봉까지 됐다가 권력투쟁으로 이복형에게 척살당한 골육상쟁의 원인 제공자였다고 볼 수 있는 점, 그 연장선에서 자기를 아껴준 태조 이성계 마저 한을 품은 채 죽게 만든 계기가 된 왕비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권력의 비정함과 허무감이 허공을 가르듯이 엄습해왔다. 평소 정말 많이 실감하고 살지만 또 한 번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과욕의 화신을 떠올리게 하는 현장에서 정릉의 주인 신덕왕후와 이성계에 얽힌 얘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계는 젊은 시절에 韓씨 성을 가진 여자와 혼인을 맺었다. 첫째 부인이었다. 그 뒤 사냥에 나선 이성계가 황해도 곡산 땅에 들렀다가 이 지방의 최고 부자로 이름난 象山府院君 康允成의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면서 주인의 딸 강씨와 인연이 돼 그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한씨는 鄕妻였고, 강씨는 京妻였다. 그 당시 고려시대에는 지방 관리들이 고향이나 근무지에는 향처를 두고 살다가 중앙으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되면 그곳 수도에도 부인을 두기도 했다. 이를 서울에 둔 부인이라는 뜻으로 경처라고 했다. 이성계도 당시의 습속대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성계는 일생 동안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 성비 원씨, 정경궁주(조선 전기에는 임금의 후궁은 宮主, 翁主라고도 불렸음) 유씨, 화의옹주 김씨, 찬덕 주씨 등 부인이 6명 “뿐”이었다. 후사는 총 9명을 봤다. 여담이지만, 왕이 된 자가 부인으로 6명을 뒀다면 조선조와 대한제국을 포함한 총 27명의 왕들 가운데는 조금 많은 편이었다. 부인 많기로 이성계는 제16대 인조, 제21대 영조와 함께 6명으로 공동 ‘베스트 9’위였다.
참고로 후궁까지 포함해 6명 보다 더 많은 부인을 뒀던 8명의 왕은 제2대 정종(12명), 제3대 태종(20명), 제4대 세종(10명), 제5대 문종(10명), 제9대 성종(17명), 제11대 중종(12명), 제14대 선조(10명), 제19대 숙종(9명), 제26대(제1대 대한제국 황제) 고종(10명)이다. 고대 사회에는 서양이든 동양이든 예외 없이 이게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원인이었으니 왕권의 승계가 공정하게 제도화 되지 못한 탓이다.
이성계의 경우, 첫 번째 부인 한씨에게서 6남 2녀(진안대군=방우, 영안군=방과, 익안대군=방의, 회안대군=방간, 정안군=방원, 덕안대군=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가 태어났고, 강씨에게서는 2남 1녀(무안대군=방번, 宜安대군=방석, 경순공주), 그리고 화의옹주와 찬덕 주씨에게서 각기 옹주 1명씩(숙신옹주, 의령옹주)이 있었다. 그러나 한씨는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태조로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에 사망하고 神懿왕후로 추존됐다. 그래서 이성계는 강씨를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했다. 태조는 나중에 신덕왕후로 추존되는 강비를 살아생전에 극진이 아꼈던 모양이다. 이유는 크게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추론된다.
첫째는 이성계가 창업을 하는 과정에서 장인 강윤성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신덕왕후의 친정은 고려의 권문세가였는데, 친정아버지 강윤성이 재력을 이용해 이성계의 정치적,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해준 것이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도움이 컸다.
둘째, 든든한 후원자의 딸 강씨는 미모도 출중한데다 재간이 있어 중앙정계에도 발을 들여서 조선 건국에 일익을 담당했다. 첫째 부인이 사망하고 나서는 왕후로서의 역할은 자기 몫이었다. 그 역할을 원만하게 잘 수행하다 보니 나이가 많아 하루하루가 한창 때와 다른 이성계가 의존하는 정도가 커지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태어나면서부터 대단히 명석하고 콧마루가 높고 용의 상을 지녀 슬기와 용맹이 뛰어난 이성계도 나이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권력에 눈이 멀거나 욕심이 과하면 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성계가 새왕조를 창건하고 태조로 등극한 게 58세였으니 어좌에 앉자마자 세자 책봉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욕을 부린 신덕왕후가 태조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신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시키려고 태조에게 졸랐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살갑게 금슬이 좋았던 강비를 총애한 탓인지, 아니면 40대 중후반의 노년(당시는 노인으로 취급됐음)에 본 자식이 더 애착이 가서 그랬는지 태조도 전처 한비에게서 난 여섯 아들들을 놔두고 내심 강비 소생의 둘째 아들 방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조선건국에 대한 전처 신의왕후 소생들의 공도 무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적장자 계승이라는 법도까지 어기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한비 소생들은 이미 장성해서 왕위를 물려받아 나라를 경영해도 충분할 나이(1354년생인 장자 방우는 38세, 1367년생인 방원이 역부역강한 25세)였음에 반해 강비의 아들 방석은 겨우 11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목이 부담스러웠던지 태조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조정 신료들에게 공론에 부치려고 했다. 이 상황에서 중신들은 이미 이성계의 복심을 눈치 채고 있었고, 이성계의 신임을 받던 실권자 정도전도 자기 핏줄을 왕위에 오르게 할 마음을 품고 있던 강비와 은밀히 교감하고 있었다.
강비는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선 정도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정도전 역시 왕권을 견제하려면 소신이 있고 강한 성품이어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한비 소생의 왕자들 보다 나이도 많이 어리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막내 왕자 방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결과는 태조 즉위 다음달 8월 20일에 방석이 세자 책봉으로 나타났다. 이성계는 자신을 많이 닮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건국에 가장 공이 많았던 방원을 세자로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방원은 새왕조 창건의 가장 큰 걸림돌인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하고 정도전과 함께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공민왕비 안씨에게 압력을 넣어서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한 1등 개국공신이었다.
이러한 결정이 조선 초기 최대의 골육상쟁을 불러일으킨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가던 이성계의 판단미숙, 신덕왕후의 욕심, 왕권을 견제하고 재상 중심의 통치 구조를 가진 나라를 만들려고 한, 이른바 ‘왕도정치’의 꿈을 지닌 정도전의 이상이 서로 정치적으로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왕위에 오른 태종의 핍박을 받게 되는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된다.
태조와 한씨 사이에 장손으로 태어난 방우는 진안군으로 책봉됐지만 고려조를 멸한 부친 이성계의 새로운 창업이 못마땅해서 해주 수양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지내다가 일찌감치 1393년 40세에 세상을 뜨고 없었으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들은 유약하게 보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에 대해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 건국에 공이 가장 컸던 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그런데 1396년(태조 5년) 여름의 햇볕이 강한 8월 13일, 강비는 아들 방석이 왕위에 즉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병인 위장병이 심해져 사망했다. 총애한 왕비가 죽자 태조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정사에도 관심을 잃고 등한히 했다. 꼭 왕비 노국공주를 잃고 난 고려 공민왕처럼 슬퍼했다. 태조는 강비에게 ‘신덕왕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도성 안에 능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법을 무시한 채 경북궁에서 가까운 현 광화문 貞洞(정동이라는 동명도 貞陵이 있었던 데서 유래함)의 영국대사관 근처에다 능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다 興天寺라는 절까지 짓게 했다.
흥천사는 태조가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많은 정성을 들인 것으로 이름이 나 있는데, 규모도 170여 칸의 큰 願刹이었다. 태조는 이 절에다 승려들을 거처케 해 예불을 올리면서 능을 지키도록 했다. (절을 지어 왕능을 지키게 하는 이것이 관습처럼 됐는데, 여기서 유래한 이것을 ‘造泡寺’라고 불렀음.) 태조는 이 절의 종소리를 들어야 수저를 들었다고 했다. 태조는 그 정도로 죽은 둘째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강비의 3년상을 지내면서 강비의 두 아들들에게 의지했다. 또한 이 절은 피비린내 나는 형제간의 싸움으로 두 오라버니가 죽임을 당하는 걸 본 경순공주가 무상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출가해서 평생을 먼저 간 오라버니들의 왕생극락을 빌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태조는 강비의 3년상을 끝낸 뒤인 1398년(태조 7년) 8월 13일 상심이 컸던지 그만 병이 나서 자리에 눕고 말았다. 몸져누운 지 10여일이 지나도 태조는 일어날 줄 몰랐다. 세자가 태조의 침소에서 직접 병수발을 들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여러 君들과 왕의 족친들은 물론, 모든 신하들이 비상사태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정도전 일당이 한비 소생의 대군들을 깡그리 없애고 어린 세자의 후일을 안전하게 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이 정보를 입수한 방원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와 정도전 일당을 기습해 정도전은 물론, 심효생, 남은 등을 죽이고 이복동생들인 방번과 세자로 책봉된 방석까지 모조리 죽여 없애버린 소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병석에서 이 사실을 보고 받은 태조는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이미 군권과 모든 권력이 자기 손에서 떠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한비의 둘째 아들 영안군 방과를 세자로 책봉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태조는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러던 중 2년 뒤인 1401년 이번에는 넷째 아들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이라고도 함)을 일으켜 형제간에 권력찬탈을 위한 골육상쟁을 벌이자 화를 삭이지 못한 채 바로 고향 동북면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정도전, 남은 등 자신과 함께 한 창업공신들이 능멸됐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강비 소생의 두 아들도 모두 자신이 낳은 다른 아들의 손에 비명에 갔으니 그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세자 방과는 조선왕조의 제2대 임금 정종이 됐지만 재위 기간은 겨우 2년 남짓 뿐이었다. 결국 5남 정안군 방원이 형 정종에게서 왕위를 이양 받아 태종이 됐다. 형제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 상왕인 부친마저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백성과 신료들의 이목에다 부친의 노환도 우려가 됐다. 그래서 태종은 부친의 신임을 받던 창녕 부원군 성석린을 보내 이성계를 어렵사리 한양으로 모셔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분이 가시지 않았든지 1402년(태종 2년) 11월 밤 홀연히 대궐을 빠져 나와 잠시 의정부 소요산에 들어가 있다가 다시 함주(함흥)으로 가서 칩거했다. 태종은 이번에는 부친이 존경하던 무학대사를 보내 다시 가까스로 대궐로 모셔왔다. 그래도 이성계의 분은 다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심한 분노감에다 무력감, 수치심 등이 착종된 심정의 상태였을 것이다. 그는 궁전 안에 德安殿이라는 건물을 지어 매일을 하루 같이 염불로 소일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믿어온 불교에 몰입하다가 한을 품은 채 승하했다.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 74세의 일기였다.
이성계가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종이 취한 조치가 바로 정능의 이전이었다. 그는 계모 신덕왕후를 아버지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1409년(태종 9년) 태종은 도성 안에 있던 정릉을 지금의 그 자리로 옮기도록 명하고 왕비가 아니라 일반인의 묘와 같이 만들었다. 그곳에 원래 조성된 석물들과 목재의 일부는 청계천 광통교 및 태평관 공사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계모가 정실에서 난 자기 형제를 무시하고 자기 속으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권력이 부모형제도 서로 갈라서게 만든 과거 왕조시대 제도화 되지 못한 왕권은 살아 있을 때뿐이었다. 이성계가 자식들에게 너무 일찍 권력을 물려준 게 화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전통시대와는 달라진 게 많아서 오늘날에는 권력투쟁에서 져도 인명이 살상되는 일은 없지만, 여전히 인간성을 황폐화시킨다는 건 분명한 진리임을 또 한 번 체감하게 만든다.
무덤 속의 신덕황후는 무슨 생각을 할까? 과욕을 부린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다. 시대적 한계였다. 이 여인 보다는 오히려 태조에 대해선 약간의 동정심이 일어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때 판단을 잘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것이 그처럼 큰 대가를 치를 줄이야 자신인들 알았겠는가?
암튼 그 스스로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좀처럼 삭일 수 없던 분노와 낙담 속에 인생무상, 화무십일홍의 허무를 뼈저리게 느끼다가 간 이성계의 말년이 떠오른다. 얼마나 분했을까? 얼마나 무력감을 느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권력의 비정함과 인생무상에 얼마나 치를 떨었을까? 비교 자체가 되진 않지만, 최근 수년간 교활한 인간들에게 견제와 이용만 당하면서 살아온 나의 처지와 닮아 있는 것 같아서 입이 쓰다. 능을 나와서 쓴 입을 가시게 하려고 먹은 묵밥도 여느 때와 달리 쓰기만 할뿐이다.
2020. 5. 13. 06:39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草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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