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영월 淸泠浦에서 단종을 생각하다

雲靜, 仰天 2020. 10. 10. 12:18

영월 淸泠浦에서 단종을 생각하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귀에 익은 것이리라. 한시냐고? 아니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기억하고 있듯이 나도 중딩 때 역사시간에 이걸 외우면서 단종이라는 왕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얼마 뒤 고딩 시절엔 일제 시기 경향신문에 연재된 1928~29년의 당시로선 스테디셀러 격인 春園 이광수의 걸작 소설『端宗哀史』를 통해 다시 한 번 단종의 왕호를 각인시켰지. 근 반세기가 지나 단종애사를 지금 다시 보니 간혹 작중 인물들 중 누가 누구인지 불명확하게 묘사한 걸로 봐선 博覽强記형의 당대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었다는 춘원의 명성은 조금 부풀려 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인다.
 
그런데 말이야 한국사 전공자도 아닌 내가 단종을 얘기한다면 필히 건드리게 될 그와 그의 포악한 숙부 세조를 평하게 되는데 그건 오만을 부리는 거와 같지. 잘못 말했다간 시비에 휘말려 피곤해진다네.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이지만, 요즘엔 “사자명예훼손죄”(형법 제308조)란 게 있어 후손들도 두고만 보지 않으니 기냥 객관적 사실에다 의문과 느낌만 적는 걸로 끝내야지 뭐.
 
어쨌든, 별다른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걸로 하고 떠난 이번 여로에 첫 번째로 탄성이 나온 곳이 영월 청령포다. 저 강 가운데 한 눈에 들어오는 작은 섬이 바로 단종이 역부역강의 나이인 예닐곱 살 때 숙부 세조에게 강제로 유폐 당한 곳이렸다. 단종이 유폐 당한 강안의 작은 섬 청령포가 천하 절경이로구나! 여름의 푸르름과 가을로 넘어가는 주황이 묘하게 버무러진 기운이 감도는 녹자색 빛깔! 지세가 신이 내렸다는 중국의 桂林과 조금 닮았다는 느낌이다. 한국판 작은 계림이라고나 할까?

 

청령포가 보이는 이쪽 강가에 서면 전방의 풍광에 속이 확 트인다. 산세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전면 산의 윤곽과 강이 어울어진 모습은 중국의 계림을 연상시킨다.
하늘로 쭉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이곳의 역사가 짧지 않음을 말해준다.
안방에 갓과 도포에 위의를 갖추고 앉아 있는 이는 단종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엎드려 있는 자는 세조가 한양에서 딸려 보내 노산군에 시중드는 것을 허락한 내시 두 명 중에 한 사람이겠다. 그런데 내시 복장이 아니라 노산군을 찾아온 선비의 옷차림인데, 찾아온 손님이라면 안으로 들라 했지 옆으로 보고 부복하도록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뭔가 고증이 의심스러워 보인다.

이참에 한 마디 사족을 달면, 단종이 12세에 즉위했다고 해서 “어린 단종"이란 말이 붙었는데 세조로부터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 유폐됐을 때는 이미 17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니 “어린 단종”이라고 계속 부르는 건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갖게 할까 하는 노파심에서 다는 사족이다.

 

세조는 왕 자리를 차지하기 전엔 수양대군으로서 세종대왕 슬하의 총 21명의 大君, 公主, 君과 翁主들 중 둘째로서 장자 문종에게는 소헌 황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동복의 아우였다. 문종은 평소 세종의 꾸지람을 듣던 일을 자주 저지른 바로 밑의 아우 수양대군에게 마음을 많이 쓰고 챙겨 주곤 했었다.
 
단종은 이곳에 유폐된 뒤 몸서리쳐지는 두려움 속에서 목숨 부지하느라 분함을 한 번이라도 표해 봤을까? 그냥 자주 망향대에 올라 마냥 한양을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지? 절벽에서 띄어 내릴 분노도 없었던가? 앞은 가뭄으로 강바닥이 말라붙지 않는 한 결코 귀하신 몸 혼자선 건너지 못할 폭과 깊이의 강물, 뒤는 대략 표고 6~70m 쯤 돼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조선의 빠삐용”이 되고자 한 엄두가 전혀 나지 않았던가베?

강낭콩 보다 더 짙은 남빛 강물이 단종의 비애를 더해주는 듯하다.

그래도 기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던 자라면 자진하지 못한 자신을 보면 망향대 뒤쪽 아래 푸르디푸른 靑浪 보기가 부끄럽지 않았을까? 겨우 애오라지 숙부가 내린 사약을 받지 않고 목매어 죽는 게 왕위찬탈자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던가? (단종에게 사약을 먹여 자진케 하라는 세조의 명을 받고 다시 청령포에 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 진어하기를 주저하니까 세조 측 사람이 기다리다 못해 활시위로 만든 올가미로 단종의 뒤에서 목을 잡아채어 죽였다는 설도 있음) 혈육이 자기를 내치니 세상도 버리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연지사 일터!
 
그런데 세조여, 지금 일개 서생에 불과한 내가 봐도 그대는 국정운영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듯이 보이고 나라 경영에도 자신감과 능력이 있어 보인다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수양대군은 그 바로 밑의 아우 안평대군과 함께 세종대왕에게 가장 골칫거리의 존재였다. 춘원은 수양과 안평을 각기 “豪俠”과 “放蕩”이라는 넉자로 특징지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수양은 나이 열여섯 살에 왕방산 사냥에서 하루에만 노루와 사슴을 20마리나 잡아서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적이 있는 걸 보면 호협하다는 말이 맞다. 하지만 그보다 2년 전인 14세 때에 벌써 유부녀의 방에서 자다가 본서방에게 들켜 발로 뒷벽을 차서 무너뜨리고 내빼기를 10리나 한 걸 보면 방탕기도 있었고 실제로 방탕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 방탕의 성격이 공인된 작부인 기녀들 위주로 놀았던 안평대군과 달랐다는 것이다. “대갈님”에 피가 막 마르기 시작한 그 나이에 벌써 남편 있는 여염집 아낙을 탐했다는 것은 나이가 더 들면 그보다 더 큰 도둑질, 바로 왕위를 뺏는 것, 즉 國賊이 될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봐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자식이 어떤 성품인지는 누구 보다 그 자식을 낳아서 길러 본 부모가 잘 아는 법, 벌써 세종대왕도 이 점을 크게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주야로 걱정했던 것이 병약한 세자(문종)가 병사하거나 아니면 여러 대군에게 제거되지 않을까 한 점이었으니 말이다.
 
문종 승하 후 이런 호방하고 탐심이 컸던 수양대군이 봤을 때 유약한 조카에게 나라를 맡기자니 왕권이 신권에 휘둘려 권신들에게 끌려 다닐 것으로 보이기도 한 상황이었다는 점도 동의할만하다. 허나, 그렇다고 능력과 담력이 있던 만큼 상대적으로 유약하게 보인 조카라고 그의 보좌를 뺏어선 안 되지 않나? 힘 있다고 다 국가 권력을 넘보면 그런 나라에 무슨 義로움과 正義와 公正이 생겨나겠는가? 더군다나 임진왜란이나 양차의 호란 때처럼 왜놈들이나 땟놈들이 쳐들어와서 그 침략을 막아야 할 비상시국도 아니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따르는 무리가 많아서 자신은 힘이 있는 반면, 현재의 국가권력자가 지나치게 인자해서 보잘 것 없이 용속한 인물이라고 해도 국가의 법도와 왕실의 종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 국가에서 아무리 국가지도자가 매가리 없고 비전까지 없더라도 쿠데타로 국민이 합법적으로 부여한 그 권력을 뺏어선 안 되듯이 말이다. 대권의 임기가 정해져 있는 이상 태평치세를 할 꿈과 비전이 있다면 4년이든 5년이든 조금 기다렸다가 자신이 정권을 잡아서 꿈을 펼치든가 해야 하듯이 말이야.
 
설령 백번 양보해서 세조를 위시해 양정, 유수, 임운 따위 천하의 몹쓸 파락호나 불한당들을 수하로 끌어들인 한명회, 義 보다는 개인의 명리를 더 우선시했던 신숙주 패거리들이 말하는 세조의 치적이 좌의정으로서 당시 정계에 군계일학으로 우뚝 선 만고의 충신 김종서는 물론 수많은 충신들을 격살한 것도 모자라 왕의 골육까지 죽이기까지 한 피비린내 나는 살륙의 대가라면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이냐 말일세. 
 
그때나 지금이나 힘이 없으면 적어도 세속권력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일! 세조가 逆臣임이 명백해도 어린 왕에겐 그를 잡아들일 힘이 없었는 걸! 거사가 성공한 당일 밤 정인지의 주청을 받아 단종이 어쩔 수 없이 내리게 된 윤허로 수양대군이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겸 내외병마도통사를 맡게 됐다. 즉 수양대군이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 행자부장관,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직을 한 손에 움켜쥐게 됐으니 국가행정권뿐만 아니라 검찰과 경찰, 군대의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당시 사헌부, 병부나 한성부의 국가 공권력은 죄다 세조 패거리가 자기들 손안에 넣고 있었기에 사육신인지 생육신인지는 文治의 나라라고 뻐긴 조선의 사대부들이 입과 몸이 따로 노는 상징에 불과한 창백한 저항이었을 뿐 내가 보기에 사실 별반 의미가 큰 건 아니로소이다.
 
측백이 추워봐야 진가가 드러나듯이 목을 건 거사를 해보면 충신인지 역신인지가 바로 나타나지. 한명회! 아부 잘하고 꾀주머니의 智囊이자 역신의 상징, 그러나 훗날 세조가 집권한 뒤 “한명회는 내 子房(한나라 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張良)이야”라고 누누이 칭찬 받았던 建君공신의 지위에 있었지만 나중에 부관참시까지 되리라곤 역모 전엔 알기나 했을까? 아뭏튼, 거사 성공 후는 세상이 다 지들 거로 보였겠지. 계유정난을 기획해서 세조의 왕위찬탈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덕에 미관말직에서 일약 정승 반열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세조와 사돈을 맺었고, 세조 사후에도 예종과 성종의 장인까지 되었으니 쿠데타로 그가 누린 권세, 위세와 부귀영화는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고려조의 충신 목은 이색의 손자 이계전, 또 같은 고려조의 충신이었지만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해서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른 권근의 손자 권람이 일찌감치 수양대군의 사람이 된 것은 그렇다고 치자. 내가 생각하기에 특히 괘씸한 일은 신숙주,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의 배신이다.
 
신숙주는 세종대왕 재위시에 왕의 성은을 듬뿍 받던 젊은 신하가 아니었던가? 그는 세종대왕으로부터 단종이 태어난 날 그날 친히 “나를 섬기던 충성으로 이 어린 손자를 잘 섬겨다오”라는 당부를 받자마자 바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상감마마 성상을 섬기고 남는 목숨이 있다면 백 번 고쳐 죽어도 元孫께 犬馬之役을 다할 것을 천지신명 앞에 맹세합니다”라고 언명한 자였지 않았냐 말이다. 그 뒤로도 한 번 더 그는 세자를 잘 보필하라는 세종과 문종의 고명까지 받아 놓고도 배신해버린 인물이다.
 
정인지도 대세가 수양대군에게 기울어지는 것을 간파하자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고선 계유정난 거사 당일 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이라고 인정하게 만든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정인지는 잔인한 데다 능청스럽게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왕을 속일 정도로 교활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양대군에게 한명회 수족들의 손에 철퇴를 맞아 두개골이 으스러지고 얼굴이 짓이겨지면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영상 황보 인의 목을 잘라 그 수급을 들고 단종에게 가서 정난의 首末을 주달하기를 청하고선 직접 홍윤성, 양정, 함귀 등에게 죽어 있는 황보 인의 목을 자를 것을 서슴없이 지시했다. 그 뿐만 아니라 또한 정인지는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에게 가서는 김종서, 황보 인 등이 안평대군을 옹립해 단종을 해하려고 한 모반을 수양이 제압하는데 공을 크게 세웠다고 거짓으로 고하기까지 한 냉혈한이자 음험한 자였다.
 
바로 이런 인물인 정인지를 수양대군의 편에 서게 만든 자가 신숙주였다. 과연 이들을 수양을 닦고 청정심의 유지를 본분으로 삼은 조선의 유학자였다고 할 수 있을까? 주자학을 생명처럼 받들면서 말끝 마다 義를 읊조렸던 조선의 그 사대부들이 맞냐 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정신적 지기 사이에도 정치적으로 갈라서면 원수가 되고, 義와 목숨을 맞바꾸는 이는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문 세상이니 정인지를 자신 있게 탓할 수 있는 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말이 나온 김에 계유정난이 발생한 1453년 10월 10일 그날 밤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해도 이 졸고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진 않겠지? 수양대군, 정인지, 한명회 등 사건 주역들이 긴박한 상황에서 나타난 다양한 내면의 감정까지는 일일이 다 묘사할 순 없고 단지 사건의 흐름만 얘기하면 대략 이러했다.
 
10월 10일은 단종의 서너 살 많은 누이 경혜 공주의 생일이었다. 경혜 공주는 일찍 승하한 문종의 3년 상이 2년째에 접어들면서 어린 단종이 나이 많은 숙부들 틈에서 평소 정을 붙일 데라곤 누이 밖에 없었을 정도로 동기간에 우애가 깊었던 관계였다. 그래서 그날도 단종은 누이의 생일을 축하해줄 겸 해서 오랜만에 경혜 공주의 남편, 즉 문종의 부마이자 단종의 자형 영양위 정종의 집으로 행차했다. 단종은 대행대왕의 상중에 국사나 독서 보다 한창 가댁질(장난)에 재미를 붙일 13세의 나이였기에 그날 밤도 밤늦도록 같은 또래의 내시나 나인들과 어울려 윷놀이와 각종 놀이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수양대군 패거리가 이 날을 난의 거사일로 정한 배경이었다.
 
한편, 그날 밤 수양대군은 홍윤성, 양정 등 한명회의 졸개들을 데리고 김종서 집으로 쳐들어 가서 김종서 부자를 척살했고, 그 길로 임금이 놀고 있던 영양위 정종의 집으로 말을 달려가 단종을 알현했다. 김종서를 의심 없이 꾀어 안채에서 나오도록 유인한 것은 모두 한명회가 꾸민 모략에 의한 것이었다. 정인지가 단종에게 위에서 소개한 내용을 주청하기 전, 수양대군은 단종 앞에서 영의정 황보 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새로운 임금으로 세우려는 모반을 꾀한 것을 알고 막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그를 척살하고 오는 길이라고 하면서 나머지 일당들이 단종을 없애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면서 자신을 믿고 안심하라고 했다.
 
김종서, 황보 인 같은 나이 든 충신들은 모두 선대 대행대왕의 특별한 총애와 함께 단종을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받은 고명대신들인데다 또 다른 숙부 안평대군이 설마 자기를 배신할 턱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린 단종은 수양대군의 이 말을 믿어야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같은 시각, 한명회는 수양대군과 미리 작성해놓은 살생부에 따라 수하의 홍윤성, 양정, 함귀 등을 집 안에 숨겨 놓고 영의정 황보 인을 임금의 입궐 명이라고 정종의 집으로 불러 들여 단종이 안채에서 수양대군과 정인지에게 붙들려 있는 사이 척살했다. 계유정난의 첫날밤에만 홍윤성, 양정, 함귀 등이 휘두른 철여의와 철퇴에 맞아 의정부 좌찬성 이양, 이조판서 조극관, 영의정 황보 인 등 10여 명의 충신들이 죽었다. 그날 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종의 집은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희희낙낙, 껄껄 대는 비웃음 소리가 섞여나던,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태조 이성계부터 3대에 걸쳐 출사해서 녹을 먹은 노재상 황보 인을 비롯해 척살된 이들은 하나 같이 국궁진췌하여 충성으로 선대의 성상들을 보필한 신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을 품고 쓰러져 죽었다. 특히 황보 인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날 밤, 긴장한 모습으로 수양대군과 정인지가 단종 앞에 수급을 들이밀면서 역모자들을 다 처치했다고 보고하는 어전에서 쟁반에 놓인 목 잘린 황보 인의 눈은 아무리 감겨도 감기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물론, 조정에는 배신을 때린 역신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계유정난이 있고 3년이 지난 1456년(세조 2년), 유배 가있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에게 발각돼 처형되거나 자결로 충절을 지킨 6명의 사육신도 있었고, 생육신은 不事二君의 지조를 보이느라 살아생전 세조와 그 끄나풀들과는 입도 섞지 않았지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단종에게 바친 뒤 “고운님 여의옵고” 지 마음 둘 데 없어 청령포가 보이는 강가에 퍼질고 앉아서 하염없이, 단 목숨이 아까우니 숨죽이면서 울어 제낀 금부도사 왕방연처럼 의리와 현실 사이에서 고뇌한 자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춘원이 소설 『단종애사』에서 한 표현을 빌리면, 단종 “왕 때문에 의분을 머금고 죽은 이가 사육신을 필두로 백이 넘고, 세상에 뜻을 끊고 일생을 강개한 눈물로 지낸 이가 생육신을 필두로 천에 이른다”니 말이다.
 
이곳 청령포의 노산군에게 사약이 내려진 것도 노산군 자신이 잘못해서 벌어진 게 아니라 1457년(세조 3년) 7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돼 있던 錦城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노산군을 복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했기 때문이어서 더욱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또 다른 한편에선 오히려 한 때나마 한 나라를 움직인 군주라면 옹색하게 천수를 지킨다는 것도 군주답지 않다는 二價的인 생각도 든다. 금성대군 등은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음은 물론이다.
 
단종이 자주 올라 한양의 궁성을 바라보면서 눈물지었다는 망향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푸르다 못해 검푸른 벽계수가 흐른다. 검푸른 靑浪은 한 섞인 단종의 눈물이련가? 이 절벽에서 뛰어 내릴 기백이 없었지만 그 대신 그가 사약을 거부하고 목을 매 자진한 것만으로도 최소한 왕으로서의 자존감은 살아 있었다고 좋게 봐줘야 할까? 어쨌든 분명한 건 청령포가 절경이라도 세조 자기는 구중궁궐에 거하면서 울부짖는 어린 조카만 머나먼 천리 길의 이곳에다 잡아 가둔 걸 보니 권력과 부귀영화가 좋긴 좋은 모양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숙부! 그가 무서워서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한 단종! 비운의 소년 왕이 잠시 기거했던 御所를 나오려니 일자로 누운 소나무가 두 눈을 사로잡는다. 옆으로 90도로 바싹 엎드린 이 소나무는 단종이 당한 語屈의 기가 모여서 생긴 현상일까? 아니면 누구의 의지일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고! 기이한 일이로고!
 

90도로 누운 이 소나무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다.

 

이런 저런 감회가 폐부 깊숙히 파고 든다. 애상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아무리 가고 나면 끝인 지나는 과객이라지만 분기를 삼키고 그냥 지나칠 순 없다는 생각에 한시 한 수를 읊고 간다.

 

淸泠浦
 
眼前絶景淸泠浦
河島秋草含慯哀
登臺望似看漢陽
靑浪爲君抱恨淚
 
雖絶景豈勝於宮
閉姪權似好是好
苟全連怒也蒼白
御所臥松誰造化
 
눈앞에 펼쳐지는 천하 절경의 청령포
강물에 둘러싸인 섬에 가을 풀이 서럽구나
단종이 오르던 망향대에 올라보니 한양이 보일 듯한데
절벽 아래 흐르는 靑浪은 한 품은 그대의 눈물인가?
 
청령포가 절경이라도 구중궁궐 보다 낫겠는가?
울부짖는 조카를 가두다니 권세가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오기 없는 목숨 부지하느라 분노마저 창백한데
御所에 일자로 누운 소나무는 누구의 造化일까?
 
2020. 10. 1. 11:46
寧越 淸泠浦에서 草稿
10. 2. 21:23
雪嶽山에서 推敲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