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서부시장의 포항집
세상이 전례 없이 어수선하지만, 늘 건강하시고 한가위 명절 잘 쇠시기 바랍니다.
쇤네는 발길 닿는 대로 강원도 여행을 왔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영월 읍내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김삿갓의 “방랑시장”이 눈에 확 들어와서 망설임 없이 바로 들어갔습니다. 김삿갓은 단종과 함께 영월이 대표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상징적 인물은 맞지만 김삿갓의 이 방랑 시장에는 별로 볼 것도 없고 요기꺼리도 없어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부시장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랬더니 또 한 번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습니다. “포항집”이라는 좌판 가게가 아니겠습니까?
명절엔 고향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데 머나 먼 강원도 땅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게 고향사람을 만나다니! 바로 자리에 앉아서 포항 송도가 고향인데 이곳에 남편과 같이 온지 52년이 됐다는 이 가게의 주인 할매를 보고 대포 한 잔 하고 있습니다. 나도 과거 한 동안 송도에 살았다고 했더니 할매는 더 반가워하시네요. 영월의 대표적인 먹거리라고 하는 배추전과 메밀전병을 안주로 시켜 먹어 보니 맛이 별미네요. 값도 싸고요.
반갑기도 하고, 또 포항에서 길이 얼마인데 이 먼 곳에까지 와서 장사를 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에 필시 사연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몇 마디 물어봤습니다. 곱상하게 생기셨지만 할매의 주름에 묻어나는 고된 세월이 너무 짠하게 느껴져 얘기를 나누면서도 연신 내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살아 계시면 이 분 보다 너 댓 살 많아 보이는 내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듯이 “할매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언제 포항에서 이 먼 곳까지 오시게 됐냐고 묻고선 사연을 들어 보니 참 눈물이 나네요. 안 그래도 이미 오전에 청령포에서 단종과 왕방연을 생각하면서 비애를 느끼던 몸이었으니 연소가 쉽게 되겠죠. "또 울어요?" 옆에서 집 사람이 핀잔 아닌 핀잔을 주네요.
이 할매의 남편은 안강 분이고, 26세에 안강으로 시집갔다가 남편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는데, 갖가지 사정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할매에게 들은 사연을 여기에 공개적으로 다 늘어놓을 수 없어 생락합니다만......그래도 자식들이 다 잘 됐다고 하니 참 잘 됐다고 말씀드렸지요.
남편 분의 고향이 안강이라는 말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 고향과 같아서 더 정감이 가서 그런지 감정이 조금 업이 돼서 자꾸 눈물이 나는군요. 한 가위 명절이니까 더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모양입니다. 더 있다간 가게가 눈물로 흥건히 젖을 거 같아서 탁배기 한 비 퍼뜩 비우고 일어났지만, 돌아가신 내 어무이 얼굴도 연신 저 가게 할매와 겹쳐지면서 어른어른 거려서 여운이 징하게 남네요.
뜻밖에도 이곳 강원도 땅에서 고향이 뭔지, 객지에서 보게 된 고향사람이 어떤 마음작용을 불러일으키는지 또 한 번 진하게 체험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불교에서, 특히 티베트불교에서는 자비심을 기르기 위한 방편으로 수행자에게 살아 있는 만물은 모두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라는 점을 마음에 담아서 체화시키는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 할매도 나의 어머니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잔돈을 내주려는 할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매요 쭈리는 고마 놔 두이소! 쭈리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보시죠? 어릴 때 많이 듣고 쓴 일본말이잖아요.” “참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쭈리’네요. 고마봐요!”
할매요, 건강하게 오래 사시면서 여생은 복 많이 받는 삶이 되시면 좋겠심더!!
2020. 9. 30. 13:47
영월 서부시장 내 포항집에서
친구들에게 보낸 카톡 글
雲靜
'왜 사는가? > 여행기 혹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蘭皐先生 김삿갓을 찾아서 (0) | 2020.10.11 |
---|---|
영월 淸泠浦에서 단종을 생각하다 (0) | 2020.10.10 |
정릉(貞陵)과 태조 이성계 (0) | 2020.05.13 |
마젤란이 괌의 최초 “발견”자라고? (0) | 2020.04.09 |
침략전쟁 패잔병이 “전쟁영웅”? : 28년간 숨어산 괌의 일본군 (0) | 2020.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