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전쟁 패잔병이 “전쟁영웅”? : 28년간 숨어산 괌의 일본군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각기 투하된 원자폭탄 한 방으로 중국, 동남아, 태평양으로까지 전장을 넓혀 15년간 끈질기게 끌었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 끝났다. 주저 없이 연합군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일왕의 “종전 조서”가 공표됐던 것이다. 해외 도처에서 집요하게 침략전쟁을 수행하던 수백만 명의 일왕 및 일제의 침략도구 일본군들은 자결하지 않으면 포로가 되거나 아니면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도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적지”였던 서태평양의 괌도(Guam island)에 30년 가까이 숨어 살았던 일본군이 있었다. 요코이 쇼우이치(橫井庄一, 1915~1997)라는 일본 육군 ‘군소’(軍曹, 당시 하사관 계급의 하나로 미군의 sergeant에 해당)였다. 그는 치열했던 괌 전투에서 미군의 공격에 밀려 전우들과 함께 정글 속으로 퇴각해 있다가 나중엔 “종전”이 된 줄도 모른 채 혼자서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원시인처럼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종전 28년째 되던 1972년 2월 미국령 괌도 현지의 원주민 사냥꾼에게 발견됐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모기, 진드기, 전갈 등의 각종 해충, 독충과 원숭이, 갈색나무뱀(brown tree snake) 등 야생동물들이 우글거린 정글에서 약 2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내면서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다. 나도 필리핀, 대만과 베트남 같은 열대지방에서 경험한 바 있지만, 그곳 숲속에 앉거나 누우면 바로 붉은 독개미를 위시해 온갖 벌레들이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게 정글이다. 게다가 의사는커녕 비상약도 하나 없어 일단 크게 다치거나 전염병 등의 중병에 걸리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그렇게 장기간을 숨어 지냈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던 궁금증이 결국 나를 그곳 괌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내가 직접 현장을 찾아 가본 게 2007년 9월 중순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의 일이다. 괌도의 주도 하갓냐(Hagåtña)에서 승용차로 대략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현장으로 내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맨 먼저 눈에 띤 것은 현장에 마련돼 있는 소규모 전시관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관광용으로 재현한 땅굴에다 일본 측에서 세운 ‘横井氏の穴(Yokoi’s Cave)’, 즉 “요코이씨의 굴”이라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간판에 요코이 쇼이치를 두고 “영웅”이라고 써놓은 문구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투항을 모르고 끝까지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도주한 패잔병이 “전쟁영웅”이라고? 일제 패잔병을 전쟁영웅으로 둔갑시켜 놓다니! “일본인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는 민족이란 말인가?” “무슨 속셈이기에 나 원 참!”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약간의 분노와 함께 일순 어안이 막혔다. 일본이 부각시킨 “전쟁영웅”은 일본 극우세력들이 국가차원에서 유도한 허구이자 극우화의 환경조성과 토대다지기다. 이 사실을 까발려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에서 나는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단, 나는 현장에 온 김에 요코이가 숨어 살았다는 곳의 주변 환경을 찬찬히 살펴봤다. 타로포포(Talofofo)라고 불리는,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강도 흐르고 작지만 제법 가파르게 솟아오른 폭포도 있어 경관이 꽤 괜찮은 곳이었다. 그가 산 곳은 “동굴”(일부 언론에 동굴로 소개됨)이 아니라 땅굴이었으며, 내가 본 요꼬이가 살았다는 그 땅굴은 관광객을 위한 모형이었고, 실제의 원 땅굴은 이 보다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있다고 했다.
실제의 땅굴은 현재 개인 사유지로 돼 있어 이방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그 땅굴은 훗날 귀국한 요코이가 결혼하고 처와 같이 신혼여행으로 다시 찾아 간 1972년만 해도 아래로도 내려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한 사람 정도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깊이 2.5m, 내부 실내 길이 3m, 높이 1m, 폭 2m에다 직경 약 7~80㎝ 정도의 입구는 남아 있었으며, 다만 태풍으로 천정이 내려 앉아 안쪽 깊숙이는 들어갈 수 없었을 뿐이라고 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내부의 실내에는 화장실까지 만들어놨으며 매우 무더운데다 답답한 곳이었다.
다음으로 나는 요코이 쇼이치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적 이해를 위해 먼저 그가 일제의 침략 실행자인 군인이 돼 최전선 괌도로 배치되기까지의 전반기 삶부터 소개할 필요성을 느꼈다. 요코이는 1915년 3월 31일 아이치(愛知)현의 사오리촌(佐織村, 현 아이사이 愛西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제 소학교 졸업 후 약 5년간 아이치현 토요하시(豊橋)시 소재 양품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1935년 만 스무 살 때, 의무였던 징병검사를 받고 제1보충병으로 편입됐다.
그 뒤 요코이는 육군에 소집돼 1939년까지 4년간 근무하고 제대해서 양복점을 열었다. 평탄한 삶은 잠시뿐이었다. 요코이는 1941년에 다시 재소집 돼 태평양전쟁의 주도권이 미군에게 넘어가고 있던 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3월, 자신이 소속된 보급중대가 괌으로 가는 보병 제29사단 제38연대에 편성됨에 따라 만저우(滿洲)의 랴오양(遼陽)에서 괌도 방어전을 위해 이 섬으로 이동해왔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전쟁 전 괌도는 미국령이었지만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뒤 몇 시간이 지나서 바로 폭격을 가하면서 일본 육군에게 무혈 점령당했다. 당시 괌은 대미 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에게는 군사전략적으로 미군의 일본본토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제1선 방어선 역할이 가능한 대단히 중요한 ‘공중’(당시 일본군은 공군이 없었고, 전투기와 수송기는 모두 해군 항공대에 편성돼 있었음) 및 해군 전진기지였다. 그것은 나중에 괌을 점령한 미 공군이 괌 섬과 사이판 섬(Saipan island)의 비행장에서 발진한 B-29폭격기를 멀리 일본 본토의 주요 도시들을 폭격하고 되돌아오게 하는 등 일본의 전쟁 지속능력을 빼앗았던 사실에서 증명된다.
1944년 6월, 미군은 마리아나도 전투(Battle of Mariana island)에서 일본해군의 기동부대를 궤멸시키고 마리아나 제도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했다. 이어서 사이판도까지 공략한 미군은 7월 21일 함포사격과 공군폭격의 개시와 함께 총 5만4,891명의 대군을 일제히 괌도 북쪽에서 남서부에 이르는 해안의 아산(Asan), 아가트(Agat)와 아데럽(Adelup) 등지로 상륙시키려고 했다. 미 해병대의 이 상륙지들 중 아가트 해변은 마침 요코이가 소속된 제29사단 제38연대의 방어지역으로서 미군 공격의 정면이었고, 연대 본부도 아리판산(Mt. Alifan, 일본명 有羽山)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당시 괌도에 주둔한 2만 2,554명의 일본군 중 해안수비대 병력(독립혼성 제48여단 예하 2개 대대, 제10연대 포병대대 및 보병대대, 제18연대 제3대대 등등)이 미군의 괌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포격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7월 21일~22일 사이에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간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우수한 화력과 전차를 앞세운 미군에 밀려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고 방어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제38연대가 상당한 타격을 입음으로써 제29사단 주력이 괴멸됐다. 그 결과 미군 선발대가 해안으로 상륙해 교두보를 마련했다.
계속해서 이어진 쌍방 간의 전투에서 상륙에 성공한 미군은 전과를 확대하면서 점령지를 넓혀나갔다. 7월 25일, 일본군 주력은 지원군도, 보급도, 퇴로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국의 심장 대본영으로부터 하달된 명령으로 총공격을 강요받고 미군에 대해 만칸산(Mt. Manqan)에서 야간기습으로 아가트 방향의 수원지 쪽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이 때 요코이도 자신이 소속된 제38연대가 방어전투에 들어감에 따라 같이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군의 기총소사 앞에서 주력이 무너져 이번에도 패했다. 제38연대가 패해 연대본부를 떠나 패주함에 따라 요코이도 소속 부대의 대오에서 벗어나 페나산(Mt. Fena, 일본명 牧山)의 페나 저수지 방향으로 도주했다.
일본군의 총공격을 물리친 미군은 다음날 7월 26일 아침부터 만칸산의 일본군 잔존 부대를 공격했다. 일본군 제48여단의 여단장 시게마츠 기요시(重松潔) 소장 이하 사령부요원들 전원이 총을 들고 싸웠지만 전멸했고, 여단장도 전사했다. 이틀 뒤인 7월 28일, 일본군 제31군단 사령관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 1890~ 1944) 중장과 제29사단 사단장 다카시나 다케시(高品彪, 1891~1944)는 잔존 병력으로 섬의 북부 밀림지대에서 지구전을 펼치기로 결의하고 재차 공격을 감행했지만 미군의 우수한 화력에 무참히 무너지고 다카시나 사단장도 전사했다.
뒤이어 미군의 대규모 반격이 개시됐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7월 29일 시점엔 미군 주력이 이미 일본군 제38연대 본부가 있던 아리판산을 넘어 페나산 직전 지점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로 8월 3일에 이르러 일본군의 포병이 전멸했다. 포병이 궤멸된 이상 화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일본군의 패배는 필지의 사실로 시간문제였다.
이즈음 페나 농장 근처에 있던 요코이 쇼이치는 페나산을 지나 8월 8일 경 북동쪽으로 꺾어 타로포포강 지대로 이동했다. 한편, 마실 물이 없어 잎사귀의 이슬로 갈증을 해소하고 개구리, 소라게 따위도 없어 못 먹을 정도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늘어가던 상황에서 8월 9일 새벽을 기해 일본군은 전차 제9연대 소속 2개 전차 중대의 지원 하에 공격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이튿날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미군의 총공격을 받아 또 한 번 참패했다.
다음날 8월 10일엔 미군이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일본군 제31군단 사령부가 있던 섬 남부의 마타구악산(Mt. Mataguac, 일본명 叉木山)까지 쇄도했다. 더 이상의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보고 최후의 반격을 결심한 군단장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은 8월 11일 옥쇄를 각오한 최후의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마타구악산에 집결한 약 300명의 일본군 잔존병력은 대부분이 부상병이었다. 그들은 총도 없이 총검만 손에 들고 총 40대 중 남아 있던 전차 10대를 앞세워 미군 전차를 공격함으로써 전차전을 감행했지만 결과는 모두 200대 이상이 괌으로 상륙한 미군 전차의 수와 성능에 제압돼 파괴됐고, 보병도 전멸했다.
이날 식량도 없고, 무기도 없었으며, 바다 외에는 퇴로도 없던 막다른 사지에 몰린 상황에서 군단장 오바타 히데요시도 마타구악산 동쪽 사면의 사령부 벙커에서 타무라 요시토미(田村義冨, 1897~1944) 참모장을 비롯해 휘하 60여명의 장병과 함께 자결해버렸다. (오바타 중장은 자결이 아니라 미 공군기의 공습에 전사했다는 설도 있음) 대본영에 “내 몸으로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겠다”(己の身を以て、太平洋の防波堤たらん)는 결별의 전보를 친 직후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조직적인 공격과 전투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괌도 공방전은 여기서 끝났다. 그리고 괌도 전역은 미군의 손에 들어갔다. 제2차 괌전투(Battle of Guam)로 명명되는 이 전투에서 미군도 2,500명의 전사자와 약 7,000명의 부상자가 생기는 등 희생이 적지 않았지만, 8월 13일 미군은 라디오 방송으로 미군이 괌도 전역에 대한 점령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괌도 주둔 일본군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다. 일본군 괌도수비대가 괴멸되다시피 하고 조직적 전투가 종료된 후 살아남은 일본군은 제29사단 작전 및 정보참모 타케다 히데유키(武田英之) 중좌가 중심이 돼 남쪽 마타구악산의 밀림 지대로 도주했다. 정글로 숨어들어간 일본군은 북부 밀림지대와 남부의 산악지대에 산재해 있던 병력을 다 합해 대략 7,500명으로 추산됐다.
대부분이 부상자와 환자였던 이 잔존 병력들은 일본군의 반격을 믿고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수명에서 십 수 명의 소부대 규모의 산발적인 게릴라전으로 저항했다. 당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이 죽음 보다 더한 금기로 금지돼 있던 상황에서 끝까지 결사적으로 항거했고, 비행장과 송유관 파괴, 전신선 절단, 미군 자동차 습격 등으로 이듬해 9월까지 약 1년간에 걸쳐 게릴라전을 지속해 나갔다.
일본군 패잔병들은 식량도 부족했고 미군의 소탕전도 격화돼 1945년의 전반기 반년은 미군에 저항했다기보다는 목숨 부지에 급급했다고 보는 게 실상에 가까운 옳은 표현이다. 그들 중 일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일왕과 일본군 전체가 항복하고 약 20일이 지난 1945년 9월 4일, 타케다 중좌 이하 일본군 패잔병 1,250명이 최후로 투항했다. 총괄하면, 7~8월의 미일 괌도 공방전에서 사망한 전체 일본군 전사자는 1만 8,500명, 미군에게 잡힌 포로는 1,250명이었다. 미군에게 포로가 된 1,250명 이외 나머지는 미군의 소탕으로 전사했든가, 아니면 질병과 기아로 사망하거나 그것이 아니면 자결했다.
요코이 쇼이치도 이 때 전사한 것으로 돼 그의 전사 통지서가 고향의 가족에게 송달됐다. 전시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그가 괌의 땅굴에서 홀로 숨어 지내던 시기인 1965년 10월 30일 일본에서는 제19회 전몰자 서훈에서 전몰자로서 전전에 받은 ‘勲八等’급의 훈장이 ‘勲七等’급의 青色桐葉章을 받게 됐다고 관보에까지 게재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일본군 패잔병들이 있었다. 미군에게 소탕되지도 않았고, 포로가 되지도 않았으며, 사망하지도 않은 병사들이었다. 재차 후술하겠지만, 괌 이외 여타 태평양상의 여러 섬들에서 항복하지 않고 패전을 모른 채 살다가 수년이 지나 죽거나 나타난 일본군 패잔병들이 적지 않았다. 괌도에도 그런 일본군 패잔병들이 잔존했다. 현재 몇 명이었는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기존 자료들을 종합하면 대략 최소 10여명 이상의 패잔병들이 1945년 8월 일왕의 “항복 선언”사실도 알지 못한 채 끝까지 일본군의 반격이 있거나 혹은 일본 해군의 잠수함, 초계정이나 비행기가 자신들을 발견해 구출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1950년대까지 최소 5년 이상을 밀림 속에 숨어 살았다.
요코이 쇼이치도 죽지 않고 밀림 속으로 도망간 패잔병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46년 1월부터 미군의 소탕전이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에도 일본군 잔존 병력들은 꽤 살아 있어 무리 지어 여기저기로 미군의 정찰을 피해 다녔다. 요코이 쇼이치는 미군 정찰대에 쫓겨 후퇴할 당시인 1944년 7~8월 이후 시점엔 같이 정글로 도주한 여러 전우 7명과 함께 움직였다. 요코이 무리들 외에도 북부와 남부의 여타 지역에 숨어 산 작은 그룹들로 분산됐다. 이토 타다시(伊藤正)와 미나가와 분조(皆川文蔵) 일행도 그 중 하나였다.
얼마 안 있어 이토 그룹에서 미나가와 분조가 합류해오자 7명이던 요코이 일행은 8명으로 불어났다. 1945년 6월 경 카미죠오 케이조오(上条敬三), 후지타 히데오(藤田秀夫), 해군 군속 나카하타 사토루(中畠悟)가 합류해 일행은 11명으로 늘어났다가 7월에 미군 정찰대의 기습을 받아서 4명이 사망함에 따라 다시 7명이 됐다. 그 뒤 1945년 9월 서로 간에 언쟁이 벌어져 미나가와 분조와 운노 테츠오(海野哲男)가 떠나 버려 요코이 일행은 시미즈 시게지(淸水茂二), 군속 니와 시키조오(二甁喜蔵), 위생병 시치 미키오(志知幹夫), 나카하타 사토루 등 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듬해 1946년 봄에도 5명 중 서로 기가 맞지 않아서 니와 시키조오와 시미즈 시게지 두 패잔병이 따로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뒤 니와와 시미즈는 각기 동년 여름과 가을에 미군에게 발각돼 투항했다. 두 사람은 패전 이듬해 포로나 투항한 일본군 병사들 약 900명이 일본으로 송환될 때 같이 귀국했다.
괌도 남서부 산야지대로 와 있던 요코이는 시치 미키오, 나카하타 사토루와 함께 더 안전한 곳을 찾아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타로포포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세 사람은 수차례에 걸쳐 안주할 곳을 찾아서 타로포포 계곡의 밀림 속에다 갈대나 나무와 숲으로 만든 띠집을 짓고 은거했다. 그들은 띠집 안에 ‘이로리’(居炉裏, 일본의 농가나 어촌 등지에서 마룻바닥을 사각형으로 도려 파내어 그곳에다 난방용, 취사용으로 불을 피우는 장치)까지 만들어 우기시의 한기를 피했다. 그러나 요코이 일행은 미군의 소탕을 피해 여러 곳으로 자주 옮겨 다니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빈번한 이동생활을 약 7년 반이나 했다. 그 간의 과정은 대체로 아래와 같았다.
1948년 초, 요코이 일행은 타로포포강 상류의 정글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띠집생활을 했다. 타로포포강 상류에는 여러 지류가 형성돼 있었지만 먹을 것이 부족한 곳이었다. 과연 요코이를 비롯해 정글에 숨어 지내던 일본군 패잔병들은 무엇으로 연명했을까? 그들은 미군의 정찰을 피하기도 하고, 원주민의 눈도 피하느라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옮겨가는 곳마다 먹거리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종합하면, 요코이 일행이 필요했던 의식주 문제는 대략 아래처럼 해결했다.
요코이 일행은 정글 속 열매를 따먹거나 요코이가 입대 전 습득한 양복기술로 “빠고”라고 불리는 하이비스커스(부용 비슷한 서양 화초로서 하와이의 대표적인 꽃) 나무섬유를 짜는 베틀기를 만들어 옷을 기우거나 만들어 입었다. 동시에 대나무나 나무로 물고기 통발도 만들어 주로 낮에 강에서 물고기, 소라게, 민물새우를 잡아서 구워 먹었다. 아래 사진의 타로포포강의 폭포와 강물을 보면 민물 어류가 제법 많았을 것으로 보여 고립된 정글생활이 문명과는 단절됐어도 최소한의 자급자족적 삶은 가능했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훗날 요코이 자신이 귀국 후에 기록을 남긴 수기 『明日への道 全報告グアム島孤独の28年』(내일에의 길 전보고 괌도 고독의 28년)에는 자신이 타로포포강에서 어류와 가재, 새우들을 잡아먹었다고 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요코이 무리는 또 야자열매로 식용기름을 만들어 식용바나나, 고구마, 뱀장어, 개구리와 들쥐 따위를 튀겨서 먹기도 하고, 야자열매와 코브라 뱀을 구워 먹기도 했다. 불은 맑은 날엔 바깥에서 렌즈에 햇볕을 쬐어서 일으켰고,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 때는 대나무 죽통에다 비벼서 지폈다. 그들에게 생명이나 다를 바 없는, 그렇게 일궈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언제 어디서든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그 불은 그들이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는 화식에 없어선 안 될 유일한 수단이었다. 수기에는 또 여럿이서 산돼지를 잡아먹었고, 입치레로 꿀, 초, 크림과 유사한 것까지 만들어 먹었으며 심지어 감주, 술과 유사한 음료까지도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도 있다. 야생에서 적당한 먹거리를 구하지 못할 때는 간혹 미군 순찰대가 먹다 버리고 간 통조림을 주워 그것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식사 도구는 자신들이 휴대한 군용 식기, 수통, 야전용 냄비, 물 긷는 통, 칼 등과 현지주민들의 냄비와 그릇을 사용했고, 그릇이 부족하면 코코넛 열매로 만들어 썼다. 이 취사도구들은 자신들이 없는 사이 미군 정찰대에 발각돼 없어질 것을 우려해 띠집 안에 놔두지 않고 죄다 근처 나무 위에다 숨겨 놓고 다녔다.
대략 1952년 이전의 이 시기 요코이와 그의 부하 시치 미키오, 나타하타 사토루는 일왕의 포츠담선언 수락 공언 사실과 일본군의 항복이 발령된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시계 없이 정글 속 은신처에 숨어 지내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었고, 라디오도 없어 소식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글 속에서 그들은 시간을 어떻게 분별했기에 그랬을까?
그들은 일출과 달의 모양 그리고 별자리 이동을 보고 시각과 달의 흐름, 계절과 1년의 변화를 대충 감 잡았다. 하루 중의 시간은 인근 원주민부락에서 들려오는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늠했다. 예컨대 밤중에 첫 번째 닭이 울면 대략 자정 12시, 2~3번째 닭이 울면 새벽 3시라고 인식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1년 내내 고온의 기온이 비슷하고 큰 변동이 없다 보니 요코이는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요코이가 남긴 수기에도 그가 언급한 시간은 정확하지 않고 반년이나 차이가 나는 등 들쑥날쑥하다.
이 시기 요코이 일행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한시도 총과 수류탄을 내려놓는 일이 없었다. 만약에 적을 만나면 상대를 넘어뜨리고 자신도 죽을 각오로 돌아 다녔다. 설령 부상을 입어도 살아서 포로는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지냈다. 요코이는 고생이 됐어도 스스로 자살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미 수도 없이 만세일계의 “천황”의 절대성을 잊지 않고 “천황”의 성전을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또 짐승 보다 못한 “귀축”(鬼畜)의 영국과 미국의 군대에게 붙잡히면 바로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모진 고문 끝에 처형해버린다는 거짓말도 의심 없는 사실인 것으로 주입됐으니 쉽게 생각이 바뀔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미군 기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타로포포강 하구에도 미군 진지가 구축돼 있어 탈출시도를 감행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정글에서의 이동 생활은 한계가 있어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요코이는 자연동굴도 이미 현지인들이 옛날부터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카하타, 카미죠오, 후지타 등 부하들이 떠나버려서 따로 자연동굴에 숨어살다가 미군의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띠집도 인근 현지 주민들의 방화로 불에 타서 없어진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잠시 요코이 곁을 떠났던 시치 미키오와 나카하타 사토루가 다시 돌아와 요코이와 합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48년 12월에 또 다시 다른 곳으로 가버려서 요코이는 다시 혼자 지냈다. 그러다가 그들은 곧 요코이에게 되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이런 식의 이합집산은 요코이가 완전히 혼자가 된 대략 1964년 1월 이전까지는 여러 차례 반복됐는데, 주로 먹을 것과 거주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의견의 차이와 언쟁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해 요코이 일행이 이동을 그만 두고 땅굴을 파서 지내기로 결정한 것은 대략 1950년 4월부터였다. 미군이나 원주민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불편하지만 근처에 식량이 없는 곳, 물과 땔감이 부자유스럽지 않는 곳, 사람이 다니지 않거나 다니기 어려운 곳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을 찾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세 번째 조건은 길이 없거나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아서 요코이 등 세 사람은 타로포포 강 주변에서 산으로 조금 올라간 갈대숲 근처에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들은 낮엔 땅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숲속에 숨어서 잠만 자고 밤에만 굴을 팠다. 흙을 파내고 나르는 도구로는 자신들이 갖고 온 군용 식기, 반합, 호미와 쟁기 따위에다 미군이 쓰다 버린 탄약통, 현지인이 쓰던 용기들을 사용했다. 식사도 이때부터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세 사람이 역할 분담을 해서 파낸 흙은 눈에 띄지 않게 멀리까지 실어 가서 버렸다. 지상의 입구에서 5m 정도 땅속으로 파 들어간 상태에서 횡으로 T자형으로 뚫린 공간이었다. 우로 3m, 좌로 2m의 넓이였으며, 땅굴 속에는 밖으로 통하는 작은 공기구멍도 만들어놓았다. 약 1개월에 걸쳐 완성한 첫 번째 땅굴이었다. 이 땅굴을 만드는 데에도 요코이의 양복기술이 도움이 됐다.
그러나 요코이 일행은 밤에 땅굴 속에서 자보니 거주성이 떨어져서 낮에 띠집에서 부족한 잠을 잤다. 이 땅굴에서 1개월 정도 살다가 다시 이동 생활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 그들은 두 번째 땅굴파기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엔 종혈식의 L자 모양의 땅굴을 만들기로 하고 약 70% 정도의 공정을 보였을 때 우기로 인해 굴 안으로 물이 흘러들어와 배수로 문제가 생겼다. 고심 끝에 그들은 3인의 침실공간을 만들어 배수구 문제를 해결했지만, 천정이 낮아 등이 천정에 닿거나 침수 등의 문제들이 속출해 결국 이 땅굴도 약 반년 남짓 밖에 살지 못하고 포기했다.
요코이 일행은 갈대밭에 야숙하면서 또 다시 띠집을 만들어 살다가 일행들 사이에 사소한 틈이 벌어져 요코이 혼자만 그곳에서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혼자 지냈다. 그 뒤 현지 원주민에게 발각돼 띠집이 불타 없어지는가 하면 요코이 외 2명이 따로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합치면서 1년 반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또 다시 땅굴을 차례로 3개나 더 파게 됐지만 매번 팔 때마다 완성되기 전에 침수로 혹은 지하수 용출 등의 문제로 모두 실패했다.
1959년 9월로 추정된 때에 요코이 일행 세 사람은 다시 힘을 모아 재차 본격적인 6번째 땅굴을 파기 시작해 3개월 걸려서 3명이 거주할 정도의 크기로 완성했다. 이번 땅굴은 포탄 파편 껍질로 팠는데, 그때까지 사용한 땅굴 보다 더 크고 깊었다. 요코이 일행은 고구마류도 재배했고 산돼지와 사슴도 잡아서 소금 없이 구워 먹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지방질을 보충하면서 이 땅굴에서 1년 정도는 태평하게 잘 보냈다.
그런데 그 이듬해부터 획득한 양식의 소비를 두고 의견이 갈려 요코이는 따로 떨어져 나와 그 땅굴에서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진 강가에서 멀지 않은 대나무 숲에다 지하 땅굴을 팠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요코이가 3개월 걸려 변소와 공기구멍까지 있는 굴을 완성한 이 땅굴이 바로 이 글 모두에 소개한 그 땅굴이었다. 그가 대나무 숲을 선택한 이유는 강가의 수로로 다니면 흔적이 나지 않아 발각되지 않을 것이고, 괌도의 빈발한 지진 발생시 대나무 숲 지하여서 땅이 갈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주변에 야자 등의 각종 열매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요코이는 혼자서 이 땅굴에서 살면서 약 5년에 걸쳐 지하 변소가 강으로 연결되도록 배수구까지지 만들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이 땅굴은 땅굴의 입구는 덤불로 위장해놓았다. 또 입구가 비에 함몰되지 않도록 가장자리에 갈대나 대나무를 꽂아서 견고하게 했다.
요코이를 포함한 세 사람은 다른 두 땅굴에서 따로 살면서 1963년 한 때 같이 모여 이 섬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이 가능한지 주민이나 미군의 눈에 띄지 않게 해변에까지 나가 정찰을 했지만 사면이 망망대해여서 결국 불가능하다고 보고 단념했다. 그리고 그해는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치 미키오와 나카하타 사토루는 1964년 1월경에 잠을 잔 채 죽어 있었다. 사인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요코이가 손수 두 사람을 묻어줬다. 요코이가 발각되기 약 8년 전의 일이었다. 결국 1964년 1월 이후부터 정글에 완전히 홀로 된 요코이 쇼이치는 발각되기 전까지 더 이상 일본군 패잔병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밀림에서의 고립된 생활을 한 기간은 총 28년간이었지만, 이 마지막 땅굴 속에서 완전 홀로 산 기간은 8년간이었다.
훗날, 귀국해서 요코이 쇼이치가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1952년 무렵에 가서야 일본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종전 전에 받은 사상교육이 자신을 미동도 하지 않게 만들어 끝까지 투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미군에게 포로가 되면 잔혹한 고문을 고통스럽게 받고 죽게 된다”거나 “일본 황군은 포로로 잡혀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전사하는 것이 낫다”는 내용으로 세뇌돼 있었다. 이 경우, 세뇌가 풀리지 않으면, 또 자신을 세뇌시킨 군대 상관의 명령이 없고선 제 발로 정글을 나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요코이는 만약 자기가 속했던 부대의 사토(佐藤), 타케다(武田) 참모 정도가 직접 투항하라고 하면 믿고 따랐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미군의 포로가 돼 미군 지시를 받은 같은 부대의 일본군 사병이 “나는 제38연대의 야마모토(山本) 병장입니다”라고 투항권고 방송을 들었을 때도 요코이는 그것을 모략이라고 일축했다. 또 미군이 일본군 제29사단, 제38연대 공병대, 해군개간대 소속 패잔병들을 대상으로 미군에 투항한 일본군 병사가 직접 육성으로 내보낸 두 번째 투항권고 방송을 1주일씩이나 반복해서 내보냈을 때도 요코이는 그것마저도 미군이 자기를 기습하고자 벌이는 술책이라고 무시해버렸다. 그의 완고함은 세뇌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일제가 군에 행한 세뇌가 어느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는지 실증해주는 좋은 사례다.
그런데 요코이 쇼이치는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누구에게, 어떻게 발각됐을까? 1972년 1월 24일, 그날도 요코이는 평소 해오던 대로 새우, 장어 등을 잡을 대나무 통발을 놓기 위해 인근 타로포포 강의 하류 쪽으로 1km 쯤 내려갔다. 그날따라 요코이는 보통 때 보다 늦게 땅굴에서 나와서 발자국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홍수로 강물이 불어난 강에 들어가 강 중간을 걷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갑자기 괌도의 원주민과 맞닥뜨렸다. 요코이는 그 전날 마을 원주민들이 사냥을 나와서 땅굴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함성을 지르며 사냥몰이를 하던 소리를 들은 바 있어 땅굴에서 늦게 나오면 그들이 다 가고 없어 안전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판단이 빗나갔던 것이다.
요코이를 발견한 사람은 괌도의 원주민 마뉴엘 데 그라시아(Manuel De Gracia)였다. (요코이는 수기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그라시와 같이 사냥 나온 일행이었던 그의 매제 “쥬나스”라고 했다.) 때마침 이 부근에 사슴사냥을 나갔다가 해가 질 무렵 주위가 어둑해지려고 할 때 요코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라시아는 가족과 함께 사냥을 나왔던 것인데, 일행은 각자 사냥총을 든 어른 3명과 아이들 2명이었다.
그라시아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발견 당시 요코이는 너덜너덜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짐승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라시아는 생각지도 않게 돌연 자기 눈앞에 나타난 요코이를 보고선 순간적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일본군 병사닷!” 뜻밖에 발각된 요코이는 “앗!”하고 기겁을 하고선 두 손을 모아 살려달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수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눈앞의 현지인에게 뛰어 들어 사냥총을 낚아채려고 했지만 체력이 딸려 밀려 넘어져버렸다.”
그러나 요코이의 수기 내용과 달리 그라시아는 요코이가 “체력이 쇠했기 때문이었던지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어서 그라시아는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한 가지를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사냥 중에 거의 동시에 요코이를 보게 된 그라시아의 매제가 일본군에 대한 원한을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살아오던 차에 요코이가 일본군이라는 걸 알고선 맨손으로 요코이를 “후려갈긴 뒤 그를 사살하려고 총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그라시아가 황급히 큰 소리로 “그만둬!”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면 자신들도 살인자가 돼 경찰에 붙잡힐 것이라고 다급하게 설득했다.
일본군을 증오해오던 그라시아의 매제가 뜻밖에 요코이를 본 순간 즉각 그런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오래된 일이었지만, 1950년에 자신의 동생과 조카가 정글에 숨어 지내던 일본군 잔류병들에게 살해당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동생과 조카를 손도끼 같은 칼로 찔러 죽인 것을 알게 된 그 매제는 분노가 극에 달했고, 자기가족을 죽인 일본군에게 엄청난 원한과 증오심을 가지게 됐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시도 잊지 않고 늘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요코이를 발견한 그곳이 과거 살해된 두 사람의 시신이 발견된 근처였다. 그래서 바로 요코이를 살해의 용의자로 의심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라시아는 요코이의 손을 뒤로 묶고선 그를 발견 현장에서 400m 가량 떨어진 밭에 주차해놓은 지프차에 실어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겁에 질려 있던 요코이에게 커피와 밥을 제공한 뒤 그라시아는 요코이의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 그를 다시 트럭에 실어 타로포포 마을 촌장 사무소에 데리고 가서 경찰에 이 사실을 신고했다. 신고를 받고 촌장의 사무소로 달려온 괌 경찰당국은 현지 주민과 결혼한 오키나와(沖縄) 출신의 여성 통역을 통해 요코이 쇼이치의 진술을 듣고선 그가 과거 그라시아의 매제 가족 두 사람을 살해한 범인일 수 있다고 보고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요코이를 하갓냐 소재 경찰본부로 연행해간 괌 경찰관은 그라시아 매제의 모친에게 과거 이 피살사건에 대해 재수사를 할 생각인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그 모친은 경찰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체가 돼버렸지만 아이는 나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범인은 용서했기 때문에 수사를 다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카톨릭 신자인 그라시아 매제의 모친에겐 일본군 패잔병도 전쟁의 피해자이니 그들을 탓해선 안 된다는 자비심이 생겨난 상태였다.
요코이 쇼이치가 남긴 수기에는 자신이 사살될 뻔했다가 살아나기 직전의 위와 같은 긴박한 위기상황에 대해선 언급이 일체 없다. 또한 훗날 그의 미망인도 요코이가 총살될 찰나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생전에 말한 바 없고, 그라시아가 말해서 처음 들었다고 했다.
사실상 나중에 요코이 쇼이치와 결혼한 그의 처가 말한 대로 당시는 일본군에 대한 괌도 전체와 그곳 발견자들의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요코이가 발견됐을 시점에 그라시아 일행이나 주민들에게 사살돼버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죽였는지 집단적으로 입을 다물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요코이는 일본군에게 자식을 잃고도 자비로 대해준 괌의 그 모친 덕분에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일본으로 생환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요코이 쇼이치의 귀환수속을 협의하기 위해 괌 현지의 일본영사가 달려 나왔고, 그리고 1월 27일 일본정부에서 급파한 厚生省의 나카무라(中村) 원호국장도 즉각 괌으로 날아와서 요코이에게 친척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를 들려줬다. 일본정부가 나서 괌 정부와 전격적으로 시작된 협의가 빠르고 원만하게 이뤄졌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우리가 놓쳐선 안 될 부분이 있다. 즉 괌 경찰당국이 과연 요코이의 전쟁범죄 유무에 대해 추궁하거나 수사를 했을까 라는 점이다. 아마도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귀속 인정으로 미일 간에 형성되기 시작한 밀월관계 속에서 요코이의 전쟁범죄유무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았거나 했다고 해도 그의 진술을 100%로 믿어주는 선에서 끝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귀국 전, 요코이는 괌의 병원(Memorial Hospital)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당시 사진에 나온 그의 얼굴을 보면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으로 보이진 않고, 요코이의 영양상태가 대체로 괜찮아 보인다. 요코이 쇼이치는 괌 경찰의 보호와 입회하에 그가 은거한 땅굴에 대한 현장검증을 마친 뒤 2월 2일, 간호사의 보호를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발각되고 열흘도 지나지 않아 이뤄진 신속한 대응과 조치의 결과였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기억이 점차 옅어져 가던 시기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기적 같은 생환이었다. 요코이 나이 만 57세였다.
외국 언론까지도 취재경쟁에 뛰어든 상황에서 일본 언론들은 연일 요코이에 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벌써 요코이가 괌을 떠나기도 전에 NHK방송 등에서 국제전화로 그를 인터뷰한 뉴스를 내보내는 등 부산을 떨었다. 요코이 쇼이치의 28년간의 혹독한 생존 및 생환소식이 전 매스컴을 통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그를 마치 전쟁영웅이나 되는 듯이 떠들었다.
요코이가 생환되던 날, 동경 하네다(羽田)공항에는 5,000명이나 되는 많은 환영객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비행기에서 내린 요코이는 “살아서는 본토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로 임했다고 발언했다. 환영 나온 사이토 구니요시(斎藤邦吉) 후생대신에게는 “뭔가 도움이 될까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돌아왔습니다.”(何かのお役に立つと思って恥をしのんで帰ってまいりました)라고 했다. 또 뒤이은 기자회견에서도 “부끄럽지만 오래 살아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이 날 14시부터 60분에 걸쳐 NHK방송에서 특별 프로그램으로 보도한 “요코이 씨 돌아오다”(横井庄一さん帰る)는 41.2%이나 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생환 후, 요코이 쇼이치는 일본국립병원 의료센터에 입원해 검진을 받은 뒤 그의 고향 나고야시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전후 일본사회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 우려의 소리가 많았지만, 요코이는 30년에 가까운 오랜 정글 속 생존을 위한 사투와 고립된 혼자만의 땅굴생활 탓으로 불에 익히지 않은 생선 사시미에 대해서만 경계심이 있었을 뿐, 전반적으로 잘 적응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엔화의 돈 가치가 전쟁 전의 10분의 1로 떨어졌음에도 전국 각지에서 적지 않은 금품도 계속 답지했다. 그해 1972년 11월 3일, 요코이는 57세의 늦은 나이였음에도 13세의 나이 차이가 난 하타니 미호코(幡新美保子)와 결혼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나중에 자식도 낳았다. 신혼여행을 포함해 그가 살았던 괌의 땅굴도 여러 번 찾았다. 이듬해는 1973년 전국에서 들어온 위로금으로 자택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1974년 2월, 요코이 쇼이치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체험수기(『내일에의 길 전보고 괌도 고독의 28년』)도 유력한 출판사(文藝春秋)에서 냈으며, 괌에서의 생존경험을 얘기하는 것을 주업으로 한 “생활평론가”로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는 당시 석유 오일쇼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언론에서 위기를 조장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전국 각지를 돌면서 절약생활 그리고 “일본침몰” 등의 붐에 편승해서 전국을 돌면서 재해시의 ‘서바이블’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전해주는 강연도 하러 다녔다. 또 오키나와의 일본 편입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났다는 사회적 긴장완화 분위기를 일신시켜 보려고 그 뒤로도 한동안 끊이지 않았던 방송, 신문과 잡지 등의 인터뷰에도 응해서 일본사회를 전전의 가치와 정신 상태로 단결시키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런데 나는 한 사람의 역사학자로서 당시 일본사회가 요코이 쇼이치를 지나치게 영웅시 한 것에 대해 그냥 무신경하게 넘어 갈 순 없다. 그것은 보통의 일본인들을 기만한 행위이자 또 다른 역사왜곡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지나간 일이지만 내가 이 글에서 주안점을 두고 문제를 환기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지금부터는 그 맥락의 내피와 외피를 찾아서 얘기가 진행된다.
한 사람의 자연인이라는 관점에서는 누구든지 문명과 문화세계와 완전 단절된 원시상태의 최악 환경에서 28년을 생존했다면 그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랄 일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요코이는 충분히 매스컴과 국민의 관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인간승리’ 따위의 감동 드라마로 마음 편히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지금까지 자세하게 고찰해봤듯이 당시 요코이가 처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괌에서 그가 혼자 패잔병이 된 배경을 보면 그를 찬사 일변도로 영웅시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게 아니라 미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낙오된 일제 침략군의 패잔병에 불과한 요코이를, 어쩌면 침략전쟁의 하수인들이 수없이 일으킨 전쟁범죄자일 수도 있는 자에 대해 침략전쟁의 실행자라는 사실은 깡그리 무시한 채 전쟁영웅으로 만들었다.
먼저 생환 당시 당사자인 요코이 쇼이치의 생각 혹은 정신상태부터 가늠해보자. 그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반성과 참회가 전혀 없었다. 귀국하던 날, 요코이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괌의 정글생활 중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가 가져온 38보병 소총을 일왕에게 봉헌하겠다고 보고해 이를 지켜본 수많은 일본인들의 일왕 존숭의식과 비뚤어진 애국심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게다가 그는 일제의 패전에 대해선 치밀한 계획 없이 무모하게 전쟁을 벌인 일본 군부 지도자들의 무책임과 “인명경시”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지만, 결코 침략전쟁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요코이는 괌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원혼을 대변하듯이 자신이 살아서 돌아온 것은 바로 그들의 혼이 보살펴줬기 때문이라면서 전쟁을 완전히 잊고 사는 일본인들 앞에서 나라를 위해 전사한 그들의 혼을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글생활에서 돌아온 자신을 거국적인 “전쟁영웅”으로 받드는 분위기에 취했다고 할까? 요코이는 과거 자기가 수행한 전투행위가 궁극적으로 전쟁 밖에 모른 일왕과 상층부의 군국주의자들과 전쟁광들의 어리석은 망령과 욕심 때문에 일어난 헛고생이란 걸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요코이 쇼이치라는 일제 패잔병을 전쟁영웅으로 각색하고 일본사회를 과거 일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로 몰고 간 것은 일본의 언론이었다. 물론 기획자는 일본의 정치인이고 조력자는 열광적으로 지지한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었다. 이는 귀국 후 요코이 쇼이치가 언론에 “부끄럽지만 돌아왔습니다”(恥ずかしながら帰って参りました)라고 한 말들이 화제가 되고 그 말을 따라서 하는 것이 유머가 됐을 정도로 저도 나도 한 마디씩 하면서 찬사를 보낸 사실이 방증한다. 이 말은 일본사회에 한동안 대유행어가 됐다.
요코이가 귀국한 그 해 4월 NHK의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요코이가 부모 묘소를 참배해 묘석을 끌어안고 “부모님께 효도를 못해서 죄송합니다”라며 눈물 흘리는 장면도 방영했다. 당시 이 방송 프로그램을 본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거 일제의 침략을 받아 억울하게 죽어간 여타 국가 국민들의 고통과 한을 한 번이라고 진지하게 생각이나 해봤을까?
물론 일본인들 중에는 그를 정글로 피해 도망가 숨어 지낸 “비겁한 겁쟁이”(卑怯な臆病者)로 비판하고 그를 전쟁영웅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한 이들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봤자 그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십중팔구는 요코이가 효자라고 칭송하면서 환호하고 열광했다. 내가 보기에 요코이가 그토록 오랫동안 부모를 찾지 못한 것은 결국 미군 때문이었다는 논리적 귀결이 숨어 있도록 일본이 만든 술수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가 침략전쟁에서 패했음에도 군국주의의 향수에서, 그리고 잘 나가던 제국주의시대의 식민지침략에서 전승을 구가하던 시절의 몽환에서 깨어나지 못한 일본사회의 사회적 기류와 분위기에 맞춘 것이다.
더군다나 어쩌면 요코이 쇼이치도 당시 다른 일본군이 그랬던 것처럼 괌 방어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무고한 주민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수기에는 이와 관련된 얘기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된 게 없다. 요코이의 혐의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민간인 원주민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1944년 1월 시점 2만 4,000명으로 괌 도민의 대다수를 차지한 원주민 차모로(Chamorro)족을 대상으로 방어전에 필요한 주민들의 강제동원뿐만 아니라 강제수용 및 살육에 협력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당시 차모로족은 부족들 중 대다수가 친미적이었으며, 일본군이 점령한 뒤로 물자부족, 생활의 곤궁이 심해지자 그들의 반일 친미경향은 더 심화돼 갔기 때문이다. 당시 차모로족 출신 최소 1,000명 이상의 자제들이 미군에 종군 중이었던 것도 현지인들이 자연스레 일본군에게 비협조적이고 적대적인 대일감정을 가지게 된 배경이었다. 일본군이 괌도 원주민들에게 행한 아래와 같은 범죄행위들은 그들의 반일적개심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첫째, 일본군은 괌도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무혈점령한 뒤 차모로족들을 수탈했고, 그 뒤 대미 방어전 준비의 일환으로 미군 공격에 대한 방어진지구축에도 차모로족 다수를 동원해 대부분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은 차모로인들에게 강제수용, 약탈, 학대, 살해, 감금, 매춘 등을 강제했다. 이것은 그로 인해 차모로인들이 일본군에게 증오심과 원한을 품게 된 원인이었고, 미군의 일본군 소탕작전에 협력한 사실이 증명한다.
둘째, 괌 주둔 일본군은 스파이 혐의로도 차모로족을 많이 살해했다. 미군의 괌도 상륙이 임박해지자 야간에 섬에서 발화신호가 해상을 향해 보내지기도 했고, 해안에 미제 고무보트가 버려져 있는 것을 일본군이 발견하고선 이것을 도민이 미군에 스파이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고선 체포한 차모로족 다수를 참호에 집어넣고 수류탄을 던져 죽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런 상황발생은 미군의 일본군 소탕작전에 협력한 차모로족의 일부가 미군의 상륙에 호응해서 벌인 “이적행위”였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체포한 민간인들을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참호 속에다 몰아넣어 집단 학살한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 행위였다.
셋째, 미군이 괌도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군은 차모로족의 5분의 4에 해당하는 2만 명을 괌도 남동부에 위치한 마넹공(Manenggon)의 수용소를 비롯해 다섯 곳의 수용소에 감금했다. 그렇게 조치한 목적은 미군의 공격을 기회로 차모로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방지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격리시켜야 함과 동시에 전투지역으로부터 대피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을 그대로 놔뒀다간 그들이 미군에게 협력할 것임은 불 보듯이 분명한 일이었기에 반드시 격리시켜야 했던 것이다. 기밀을 유지할 목적으로 미군이 오기 전에 미리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차모로족은 700여명이나 됐다.
일본군이 괌의 원주민들인 차모르족을 살해한 방법도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수류탄과 총으로 살해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대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중국 남경대학살 시의 잔악한 전쟁범죄가 이 작고 아름다운 섬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원주민들 가운데는 자기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뜻하지 않게 전투에 휘말려 사망한 이들도 수천 명에 이른다. 이 모든 경우를 다 합쳐 당시 일본군에게 직접 살해됐거나 혹은 그들 때문에 사망한 현지 원주민은 무려 1만 6,000명이나 됐다는 자료가 있다.
이처럼 당시 괌도 주둔 일본군 전체가 생존하기 위해 자기 아군들끼리는 어떤 일이든 서로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전쟁범죄 집단이었다. 그런 면에서 요코이 쇼이치 역시 전쟁범죄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설령 그가 전범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침략전쟁의 실행자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요코이가 전쟁영웅이란 말인가? 단순히 오랜 기간을 혼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아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언어유희의 말장난이었다. 그것은 큰 틀에서 일본 극우세력이 자신의 선배들이 침략전쟁을 도발한 대가로 패전한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오히려 원폭을 맞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한 이미지 조작이자 항변이었다. 일본이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한 사회였다면, 요코이를 “전쟁영웅”으로 미화하면서 일본열도가 떠들썩하게 영웅대접을 할 게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전쟁 생환 병사”로 보고 조용히 귀국시키는 것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해마다 8월이 되면 일본 매스컴은 연례적으로 국민적 캠페인을 벌이듯이 방송을 내보내 왔다. 일본정부와 극우세력의 의중에 맞춰 이른바 패전을 “종전”이라고 포장하면서 해외전장에서의 일본군전투, 일본군포로 생환, 원자폭탄투하 장면 등등을 방영하면서 전쟁도발자인 일본이 오히려 마치 전쟁 피해자인 것처럼 절대 잊어선 안 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것이 특히 심하고 빈번했던 그 시절, 요코이처럼 전장에서 낙오됐다가 오랜 정글생활에서 돌아온 패잔병들을 모두 전쟁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당시 이런 정치놀음에 도구로 이용되고 동원된 생환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괌에서도 그랬었지만 괌도 이외의 섬들도 마찬가지였다. 괌 바로 위에 위치한 마리아나군도, 사이판, 남태평양 솔로몬군도(Solomon Island)의 과달카날 섬(Guadalcanal Island) 등 일본군이 주둔했던 여러 섬들에서도 일왕의 항복 수락이 있고 난 뒤 투항하지 않고 미군에 저항하다가 나중에 포로가 된 일본군 패잔병들이 많았다. 예컨대, 사이판에서 1945년 12월 1일 투항한 오바 사카에(大場栄, 1914~1992), 팔라우 섬(Palau Island)의 페레류(Peleliu) 섬에서 일본이 패한 걸 모른 채 2년 반이나 굴속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상관의 설득을 받고 투항한 야마구치 히사시(山口永) 등 34명, 대본영에서 일본군 수비대 전원이 옥쇄했다고 발표한 뒤 몇 년이 지난 1949년 1월 9일 미군에게 체포된 이오지마(硫黄島)의 마츠도 린소키(Matsudo Linsoki)와 야마카게 쿠푸쿠(Yamakage Kufuku)가 그들이다.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패전하고나서 11년 간이나 종전사실을 모른 채 항복을 거부하고 필리핀 루손 섬(Luzon Island)의 산중에 숨어 살다가 1955년 11월 14일 목을 매어 자살한 키노시타 노보루(Kinoshita Noboru), 루손 섬의 서남쪽에 위치한 민도로섬(Mindoro Island)에서 전쟁종결 후 11년이 지난 1956년에 발견된 야마모토(山本), 이즈미다(泉田), 나까이(中井), 이시이(石井) 등 4명의 일본군 낙오병 혹은 패잔병, 1974년 3월 9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남서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루방섬(Lubang Island)에서 일본으로 생환한 오노다 히로우(小野田寬郞, 1922~2014) 소위,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Morotai Island)에 1974년 12월에 발견된, 대만 소수민족 아미족(阿美族) 출신의 일본군 패잔병 나까무라 테루오(中村輝夫, 중국명 리광후이 李光輝)도 있었다.
정상적인 인지기능과 이성적인 판단력이 있는 이라면 이러한 비극은 모두 기본적으로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이성에 바탕을 둔 상식이다. 그런데 전장에서 돌아온 일제 패잔병들은 거의 대부분 그렇지 못했다. 반성과 참회를 한 극히 일부의 양심적인 자들 외에는 대부분이 여전히 황군임을 영광스러워 하면서 “천황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지은 전쟁범죄를 눈꼽만큼도 뉘우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45.4%의 일본인들이 NHK방송의 생중계를 지켜보는 가운데 공항에 내리면서 “텐노우 헤이까 반자이!”(天皇陛下 萬歲!)라고 호기롭게 외친 천황주의자, 황도주의자가 바로 오노다 히로우였다. 이를 지켜본 일본 극우파는 한 술 더 떠 그를 “야마또 타마시이(大和魂)의 일본정신을 굳게 지킨 영웅”이라며 한껏 추켜세우기도 했다.
사실, 오노다는 루방섬에서 숨어 지내면서 현지인 최소 30여명을 사살한 흉악한 A급 전쟁범죄자임에도 끈질기게 투항하지 않고 있다가 과거 자기 상관이 현지에까지 와서 투항을 권고하자 그때서야 손들고 나와 필리핀 당국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 1917~1989) 필리핀 대통령에게 자신의 총과 군도를 내려놓으며 정식으로 항복을 선언했고, 마르코스의 특별사면 덕분에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일본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이처럼 전쟁범죄자 혹은 제국주의 침략의 일선에 섰던 자들이 갑자기 일약 일본사회의 전쟁영웅이 됐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영웅시하는 전후 일본사회의 비이성적 분위기에 편승해 사회적인 명사가 되거나, 그것을 업으로 호구를 해결하는 직업적 명사가 돼 존경을 받으면서 살았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정치에까지 진출해 각종 의원을 지낸 이들도 없지 않았다.
요코이 쇼이치도 사과와 참회는커녕 오히려 괌에서 죽은 자기 전우들의 시신 앞에서 패전의 한을 씻어주겠다고 한 맹서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1974년 7월, 비록 낙선되긴 했지만 요코이 쇼이치가 제10회 참의원의원 전국구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것도 그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요코이 쇼이치 외에 위에서 언급한 오바 사카에는 아이치현 가마고오리(蒲郡)시의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급 전쟁범죄인이 사형을 면하고 수상으로 등극한 현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처럼 국가 지도자 차원의 중앙정부의 정치인이 나왔듯이 그 하부 차원에서도 정치를 한 지방의회 정치인들이 있었다. 요코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반성을 모르는 도덕 불감증의 철면피들이 바로 전후 일본사회에서 극우세력의 외연을 넓힌 주범들이다.
그 뒤 언론의 관심도 점차 줄어들어 요코이 쇼이치는 생활이 안정되긴 했지만 위암 등의 병고에 시달리다가 1997년 9월 22일 심장발작을 일으켜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요코이 쇼이치의 흔적은 사망 후 2006년 그의 미망인이 남편의 고향 나고야시의 자택을 개조해 개설한 ‘요코이 쇼이치 기념관’(横井庄一記念館)에 그가 기거한 땅굴의 모형, 나무섬유 짜는 베틀기구, 물고기 어획용 채와 통발, 코코넛열매 그릇 따위의 전시물에 남아 있다.
오늘날까지도 괌의 일본군 주둔지나 전투지 곳곳에는 요코이 쇼이치 땅굴의 모형과 일본을 위해 싸우다 희생한 영령을 잊어선 안 된다는 따위의 낙서들이 곳곳에 덕지덕지 나붙어 있다.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 침략전쟁이 끝난지 70여 년이 지났건만 그들의 작태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이래저래 반성을 모르는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는 야마토(大和)민족의 후손들이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과거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거론될 때마다 "어쩔 수 없는 놈"(しょうがないやつ)들이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자들이 많았다. 나는 그 말을 그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다. 일본인들이야말로 정말 "어쩔 수 없는 놈"들이라고!!!
2020. 3. 30. 18:34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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