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마젤란이 괌의 최초 “발견”자라고?

雲靜, 仰天 2020. 4. 9. 16:44

마젤란이 괌의 최초 “발견”자라고?


서태평양의 아름다운 진주! 마리아나 군도 중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이 군도 중에 가장 큰 섬! 대소 15개 섬으로 구성된 발바닥 모양의 이 섬은 길이 48㎞, 폭 최단 6㎞에서 최장 14㎞ 밖에 되지 않고 총 면적 546㎢로서 우리나라의 거제도만한 크기다. 어떤 섬인지 금방 떠오르지 않는가? 한 때, 한국, 일본, 대만인들의 신혼여행지로 최고 각광을 받았던 섬이라고 하면 바로 알 것이다. 괌도(Guam island)다. 주도는 하갓냐(Hagåtña, 또는 Agana)이지만 가장 큰 도시는 데데도(Dededo)이다.   

태평양상에서의 괌의 위치. 미국 본토 보다 필리핀이나 뉴기니에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다.

 
괌도는 산업이라는 면에선 특이한 게 없다. 한 마디로 주민들이 관광수입으로 먹고 사는 곳이다. 인구라고 해봤자 20만 명(July 2018년 7월 시점에 167,772명)도 되지 않는다.
 
2000년에 실시된 인구조사에 의하면, 이 섬엔 원주민으로서 37.1%를 차지하고 있는 차모로(Chamorro)족이 다수 종족이며, 26.3%나 되는 필리핀인도 많다. (괌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99%가 필리핀인이라고 한다.) 2.6%의 한국인을 비롯해 약간의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거주한다. 백인은 6.9%고, 황인종도 약간 있지만, 그밖엔 모두 갈색이다.
 
이곳 주민들은 영어(38.3%), 차모로어(22.2%), “타갈로그”라고 불리는 필리핀어(22.2%) 등을 사용한다. 영어 사용자가 전체 인구 중 약 4할에 가까운 다수지만 원주민들은 차모로어를 쓰기 때문에 차모로어 교육을 따로 실시하고 있는 학교들도 있다.

면적이 작고, 인구도 얼마 되지 않지만, 군사 전략적 면에서는 결코 내팽개칠 수 없을 만큼 요긴한 섬이 괌이다. 과거 스페인, 일본의 통치를 받은 적이 있는 괌이 현재 미국령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괌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코드 8형’(Title 8 of the U.S. Code)의 미국 시민권(citizenship)을 갖는다. 그들에게는 미국 본토 출생의 미국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괌섬은 미국 본토로부터는 대략 7,000 마일이나 떨어져 있고, 하와이로부터도 4,000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1마일이 약 1.61km이니까 미국 본토와는 대략 11,300km, 하와이와는 약 6,500km 정도의 거리라고 보면 된다. 하와이에서도 많이 떨어져 있고 필리핀, 대만, 일본에 더 가까워 미국의 아시아 지역 변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지리적 이격 때문에 역설적으로 미국에 대단히 중요한 군사전진 기지가 됐다.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이나 호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 괌은 전략적인 면에선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미국이 이 섬에다 태평양 전략군 기지를 두고 있는 이유다.
 
또 오키나와와 함께 미군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한 억지력이 돼주고 있는 우리에게도 괌은 의미가 있는 섬이다. 과거 일본도 대미 침략시 괌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을 알고선 1941년 12월 7일(미국 시각), 진주만을 공습하고 나서 바로 몇 시간 뒤에 공습과 동시에 괌을 무혈점령해서 1945년 9월까지 약 4년간 통치했다.

괌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이 정도면 족할 것이다. 그 보다는 세계사 지식으로 굳어지다시피 한 “정설”을 다시 생각해보는 게 더 의의가 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포르투갈 태생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트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라는 게 “정설”이다.
 
마젤란이 최초의 발견자라는 “정설”과 “상식”이 과연 바른 것인가? 내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오래 전 괌으로 신혼여행을 간 김에 마젤란이 처음 이 섬에 상륙했다는 해안을 찾아가봤을 때였다. 오래 전 일이지만 이제서야 그 당시 찍어 놓은 사진과 자료들을 정리한다.
 

마젤란 초상. 마젤란은 욕심이 많고 성격도 불 같았던 데다가 항해 중 아랫 선원들에게 폭언과 폭행도 서슴치 않은 독재형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인상에서도 그런 고약한 성격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보인다.

괌도와 그곳 토착민인 차모로족의 역사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은 16세기 유럽의 탐험역사에서 유래한다. 괌과 차모로족에 관해 최초로 서양에 알린 문헌은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학자이자 탐험가였던 안토니오 피가페타(1491~1531)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펴낸 ‘안토니오 피가페타 저널’(the journal of Antonio Pigafetta)이었다.
 
안토니오는 마젤란탐험대의 일원으로 탐험에 참여했다가 마젤란이 1521년 4월 27일
필리핀 막탄 섬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나머지 배로 인도양과 대서양을 지나 스페인으로 돌아옴으로써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를 성공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항해 중 안토니오는 조력자로서 마젤란을 도운 일들을 포함해서 세계일주 항해를 기록한 항해일기를 나중에 세부아노어(the Cebuano language)로 번역 출간해 마젤란의 항해과정과 괌의 발견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 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이 넘게 서방의 역사 서술에서는 “1521년에 탐험가 페르디난트 마젤란이 생각지도 않게 우연히 (괌도를) 발견했다”(Stumbled upon by explorer Ferdinand Magellan in 1521)는 게 전형적인 기술이다.
 

마젤란이 타고 지휘한 마젤란 탐험대의 기함 빅토리아호의 모형
실제 크기로 재현해놓은 빅토리아호

그런데 마젤란이 괌도를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얘기다. 세계사의 상식이다시피 한 마젤란의 괌 “발견”은 최초가 아니다. 세계가 아니라 단지 서양에 괌을 알린 게 마젤란이 최초였을 뿐이다. 괌도를 서구인이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세계 최초의 괌도 발견자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서구인의 관점이다. 세계는 서양만으로 구성돼 있지 않음에도 서양인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서양사회만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오리엔탈리즘은 재고돼야 마땅하다. 이는 서양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그들의 사고가 반영된 서양우월주의적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괌의 최초 발견자는 현재 이 섬의 원주민인 차모로족이다. 차모로족의 역사는 기원전 21세기부터 남동부 인도네시아에서 뱃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마리아나도에 정착한 4,000~4,5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실은 학계에서 고고학적 증거가 제시된 것인데, 최소한 4,000년도 더 전의 일로서 마리아나군도가 뱃사람들에게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곳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따라서 서구인들이 이 섬을 발견하지 않았어도 괌은 그 자체로 존재했으며, 서양인들이 이 섬에 오기 전에 이미 차모로족이 인근 도서들의 다른 민족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괌도의 토착 원주민 차모로족의 퍼포먼스

괌이 일찍부터 인근 주변 일대의 사람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증거의 하나로 괌의 토착민인 원주민이 오스트로네시안(Austronesian)이라는 점이다. ‘오스트로네시안’이란 10여종이나 되는 대만의 원주민들, 동남아시아의 제군도, 미크로네시아, 뉴기니 해안,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심지어 멀리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 섬에 이르기까지 서태평양에서 인도양에 걸친 광활한 해역에 살고 있는 인종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필리핀인들의 고유어인 타갈로그를 제외하면 차모로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많다.
 
따라서 괌, 마리아나 군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대만 등등의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일대의 도서지역은 해양을 매개로 거대한 해양문명과 역사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그 유력한 근거는 차모로 족이 동남아 일대의 섬사람들과 동일한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 그 종족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혈연적 유사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엇비슷한 도구와 이기들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괌도의 원주민들에겐 마젤란의 괌 발견은 곧 침략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마젤란 탐험대의 선단이 상륙한 우마택만의 위치
우마택만의 전경. 한적한 어촌임을 느끼게 한다. 하얀 집의 교회가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케 한다.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마젤란의 상륙지임을 알리는 입간판
마젤란의 상륙지점을 알리는 표지판
주민들이 마젤란의 상륙상황을 재현하는 장면
마젤란 기념비는 이곳의 수령이 오래 된 나무 옆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 가서 본 마젤란 기념비
우마택 만에 선 필자

그런데 마젤란의 괌섬 발견은 그 뒤 차모로족이 겪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괌에 상륙한 마젤란의 탐험대는 선원들의 휴식과 식량 보충이 목적이었다. 선원들은 오랜 항해 동안 여러 날을 엄청나게 굶주린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먹을 것을 구할 요량으로 성급하게 해변에 상륙하려고 서둘렀다. 마젤란 일행은 가까스로 괌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몇 가지 이유들로 이들의 배를 처음 본 이곳의 차모로 원주민들이 마젤란이 탄 모함에 실려 있던 소형 보트와 여타 물건들을 가져가버렸다. 그 바람에 선원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있어났고,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젤란이 보복으로 마을주민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해해버렸다.
 

필리핀에 상륙했을 때의 마젤란 탐험대원들과 현지인들. 괌에서의 모습도 이와 유사했을 것이다.

섬의 토착민들이 마젤란 일행에게 저항하던 과정에서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두 언어는 상당히 유사해서 대략 70% 정도가 통함)를 구사한 마젤란 및 그 휘하 선원들과 이 섬의 원주민들 사이엔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이야 영어가 괌의 공용어이지만 500년 전 당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말인 차모로어 밖에 몰랐다.
 
선원들이 원주민들에게 물건을 훔쳐간 자를 내놓으라고 험상 궂게 윽박지르자 차모로족 추장이 자신들의 언어로 “우리 부족 중 도둑놈이란 없다!”라고 주장했다. 차모로어로 ‘Guahan’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What we have)이라는 뜻이고, ‘없다’라는 뜻의 단어는 ‘Guaham’인데, 그 추장은 자기들이 훔쳐가지 않았다는 의사표시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구아함!”, “구아함!”, “구아함!”이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이 과정에서 현재 이 섬의 이름인 ‘Guam’이란 명칭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당시 마젤란 측에서 이 말을 이 섬의 이름으로 불렀다는데서 연유한다. 마젤란 일행은 이 섬을 스페인어로 “도둑들의 섬”(Islands of Thieves)이라는 뜻의 “이슬라스 데 로스 라드로네스”(Islas de los Ladrones)라고 불렀다.

서양인으로선 마젤란이 처음으로 괌을 발견하자 스페인이 국가 차원에서 괌도를 카톨릭 포교와 스페인문화지라고 선언함에 따라 자연히 스페인령이 돼 버렸다. 마젤란이 괌을 발견하고 난 뒤 꼭 44년이 지난 1565년 스페인의 장군으로서 필리핀 총독을 지낸 미구엘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 1505~1572)가 스페인의 괌 영유를 선언했다.
 
이 시기는 선언으로도 자신이 발견한 섬이나 지역을 자국 영토로 만들 수 있던 시대였다. 즉 발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국의 영토로 삼을 수 있었다. 힘 센 나라가 자의적으로 여타 유럽의 경쟁국들에게 발견을 선포하고 소유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현대처럼 국제법상 영유를 인정하는 요건이 강화되기는커녕 국제법 자체가 없던 때였다. ‘국제법’이라는 말의 ‘International law’는 1648년 종교전쟁 이후에 생긴 용어다.

국제법도 처음부터 영유 요건이 강력하진 않았었고, 점차적으로 요건이 강화돼왔다. 나중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입법, 사법, 행정 면에서의 통치행위 유무가 중요한 요건이 됐다. 오늘날 현대 국제법에서 영토취득의 요건은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주관적인 요건으로서는 ‘영유의사의 표시’이고, 객관적인 요건으로는 ‘실효적 지배’(effective control)이다.
 
주인 없는 땅을 먼저 발견한 자가 영유할 수 있다는 이른바 ‘무주지 선점이론’(無主地先占理論, doctrine of terra nullius)은 서방국가들 사이에서 1908년에 처음으로 판례가 적용된 바 있다. 강대국들은 과거의 제국주의 시절 서방에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 대해 마음대로 자국 영토로 선언한 영유 행위를 인정하고 합리화한 것이다.

레가스피가 스페인 영유를 선언한 1565년부터 계산하면 미국이 스페인과 괌의 양도 관련 협정을 맺고 그 이듬해 정식으로 협정을 체결해 스페인이 괌과 필리핀을 2,000만 달러에 미국에 양도한 1899년 4월까지 스페인의 괌 통치 기간은 약 334년 동안이라고 볼 수도 있다. 1867년 미국이 알래스카 매입비용으로 러시아에 지불한 500만 달러의 4배였다.
 
반면, 학계에서는 그 보다 약 100여년 뒤 괌에 천주교 신부 산 비토레스(San Vitores)가 도착한 1668년을 괌의 스페인 식민지가 개시된 원년이라고 본다. 그리고 334년 동안 스페인의 괌 통치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1899년의 미국-스페인(미서) 전쟁에서 이긴 미국이 괌을 자국령으로 삼게 되면서부터였다.

괌이 자국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스페인의 통치를 받은 것은 긴 세월 동안 토착민들에게 득이 됐을까 아니면 실이나 해가 됐을까? 영국이 인도와 홍콩을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듯이 스페인의 괌에 대한 손익계산서는 어떻게 될까?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인 이기 외에 원주민들 고유의 무형적 행복까지 더하면 아마도 행복을 누린 것보다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착취당한 것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자본주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괌이 아래 단락에서 제시한 것처럼 스페인으로부터 강제로 세계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이상, 착취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전근대 시대 비서구 국가들에게 이른바 "문명"은 이기와 야만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였기 때문이다.

스페인 영토로 되면서 괌은 멕시코에서 멀리 필리핀까지 통하는 태평양을 가로 지르는 스페인 무역선이 다니는 소위 ‘마닐라 갤리온’(galleons, 또는 ‘아카풀코 갤리온’이라고도 함)에 연계되는 정식 항구(a regular port-of-call)가 되었다. 괌은 이제 서구사회가 획책한 세계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갤리온 무역’ 또는 ‘아카풀코 무역’이라고도 불린 ‘마닐라 갤리온’이란 국제무역과 상업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이뤄지기 시작한 16세기 해외의 자원과 부를 스페인 본국에 실어 나른 스페인의 무역선을 가리킨다.
 
당시 스페인의 이 바닷길은 통상 1년 내지 2년 간격으로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와 누에바 에스파냐(현 멕시코의 아카풀코)를 왕래한 것인데, 1565년부터 개시돼 멕시코 독립전쟁과 나폴레옹전쟁으로 끝나게 된 19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다. 이 노선의 취항으로 마닐라 갤리온은 스페인이 인도의 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져간다”는 콜럼버스의 꿈을 현실화시켰다는 평가가 있다.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등등 다른 서구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도 괌에다 천주교를 전파했고, 카톨릭 교회는 부락활동의 초점(focal point)이 됐다. 지금도 괌도 주민들 중 75%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역사적 배경이다. 1680년 괌에 9명의 스페인 신부들과 3명의 평수사가 차모로 족을 대상으로 카톨릭의 믿음을 강제했다.
 
그 이듬해인 1681년에는 안토니오 사라비아(Antonio Saravia) 선장이 스페인 국왕 찰스 2세(Charles II)의 직위에 오른 괌도의 초대 공식 군사령관(Military Head Commander, 나중엔 총독이 됨)으로 임명돼 괌에 대한 스페인의 통치권이 강화됐다.

스페인의 괌도 식민통치를 평가하면, 한 마디로 카톨릭을 매개로 원주민을 착취, 통치한 신정주의와 독재적인 것이었다. 이 섬에 민주주의 개념이 들어간 것도 그 긴 식민지 통치기간이 끝나갈 무렵인 1885년이었다. 그것도 스페인 국왕의 명령에 따라 민주주의가 들어갔지만 그것의 이식 내지 이입의 정도는 촌락 수준의 민주주의적 요소가 소개됐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 이전까지 스페인 사람들에게 차모로족들이 당한 멸시와 착취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괌의 원주민 숫자가 대폭 줄어든 사실로도 가늠할 수 있다. 마젤란이 괌도를 발견한 시점에 약 5만 명 정도로 추산된 인구가 1680년에 7,000명으로 줄어든 것은 무엇을 뜻할까?

식민지를 경영한 서방 국가들 중에 식민지 주민들에게 착취를 하지 않은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었다. 괌의 차모로족도 위 그림처럼 스페인 지주의 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일상을 살았을 것이다.

엄청나게 감소한 도민의 숫자 역시 스페인의 차모로족 침략전쟁 시에 있었던 학살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스페인의 차모로족 침략전쟁 때문에 줄어든 인구는 그 뒤 1688년과 1693년 이 항구로 드나든 스페인 무역선들이 이 작고 아름다운 섬의 원주민들에게 가져다 준 질병들에서 비롯된 전염병 때문에 더욱 줄어들었다. 내가 앞에서 마젤란의 괌도 발견이 평화로웠던 차모로족이 입게 된 비극의 시작이라고 한 이유다. 
 
이제 긴 글을 마무리 지을 단계에 왔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헤로도토스가 얘기한 것처럼 위대한 업적은 대개 커다란 위험을 감수한 결과(Great deeds are usually wrought at great risks)이듯이 마젤란의 함대가 천신만고  끝에 지구 반 바퀴 정도의 긴 항해에 성공한 것은 기록할만한 기념비적인 일이다.
 
하지만 마젤란이 괌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역사책에 그렇게 적는다는 것은 곧 그 이전에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진행돼온 차모로족의 역사를 깡그리 부정하는 처사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거다. 혹여 한국의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면 과감한 수정이 필요하다.
 
이걸 계기로 은연 중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구의 역사관과 사실들이 적지 않게 반영돼 있는 서구 중심의 세계사를 다시 한 번 세심하게 되짚어 볼 일이다. 서구인의 비서구 지역에 대한 침탈의 이론적 도구로 기능해온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은 의외로 한 편의 여행기에서도 촉발될 수 있다.

2020. 4. 9. 11:10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괌 대학을 찾은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