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생각과 마음

雲靜, 仰天 2019. 12. 18. 21:07

생각과 마음

 

생각은 모든 현상과 결과들의 일차적인 원인이다. 이 세상과 우주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으로 접하거나 경험 혹은 행위하고, 생각 혹은 의식(六識)하는 일체(六處와 六境)는 생각의 결과다. 특히 행위는 그 생각의 연장인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엉겁결에, 얼떨결에, 혹은 부지불식간에 한 것처럼 보이는 언행조차도 모두 생각의 결과가 아닌 게 없다. 뇌의 어느 한 부위(현대 과학에선 생각과 마음이 어느 부위에서 작동하는지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뇌의 전두엽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정도로 추정하고 있음)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속도가 전광석화처럼 너무 빨라 감각적으로 미처 인식하거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생각은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에 해당되는, 인간의 감각기관으론 감지할 수 없는 초극도의 짧은 시간에 이뤄진다.

 

현대 과학자들은 인간이 하루에 생각하는 것이 6,000 가지나 된다고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이 많은 생각들을 어떻게 통어할까? 그 생각들은 실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이 이익을 챙기려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과시하려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을 위해서 그러려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행위의 동기와 목적은 물론, 마음의 뿌리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마음은 다른 말로는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心을 觀한다고 해서 불교에서나 명상가와 신비주의자들, 서양의 심리학 등에서 마음을 바로 보려고 하는 ‘觀心’과 마음 다스리는 것을 대단히 중시한다. 특히 불교에서 마음의 통제는 깨달음의 첩경이다. 그것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며, 알파요 오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와 유교에서도 생각과 마음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중요시 하는 건 마찬가지다. 단지 접근하는 방법이나 수단에 조금씩 다를 뿐이다. 카톨릭에 반기를 든 초기 프로테스탄트에서 강조한 신과의 즉자적 교통도 세속의 욕망을 놓아버린 겸허한 마음을 통해야만이 가능해진다. 宋明理學의 한 분파로 가지를 친 陽明學의 心學이 그런 것이고, 理니 氣니 誠이니 愼이니 하는 유교의 이론적 바탕을 이루는 것들도 모두 마음이 상정돼 있고 마음을 떠나선 이뤄지지 않는다.

 

일상 속에 거하고 있는 우리들에겐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혹은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스스로 대상화, 객관화 시켜 동영상을 보듯이 바라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개개인들의 마음과 생각들이 집적이 되면 그게 집단지성이나 시민의식이 될 수 있으며, 사회 전체로서 국가의 마음과 생각으로 나타나거나 형성되기 때문이다.
 
 

굶어서 뼈만 앙상한 이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이나 돈을 주라고 손을 벌릴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까? 아니면 어떤 마음이 들까? 그에 대응하는 것을 보면 생각인지 마음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는 정치지도자가 마음을 어떻게 먹는다거나 생각을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관계성과 그 상호작용에 관한 좀 더 자세하고 실증적인 얘기는 굳이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각자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대부분 알 수 있는 것이어서 부연하지 않고 생략한다.
 
다만 생각을 통어하고 마음을 모으기 위해선 생각과 마음이 무엇이 다른지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연 생각과 마음은 무엇이 다를까? 둘은 하나인 거 같아도 둘이며, 둘인 거 같아도 하나인 형태로 존재한다. 한 겨울 추위 속의 길거리 노숙자를 보고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을 비유로 들어보자. 
 
노숙자들을 보고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이 인식의 대상에 들어오지 않는 무반응, 그들에 대한 동정과 혐오라는 세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무반응도 사실은 마음과 생각이 작동한 결과다. 추위에 떠는 노숙자들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떠오르지 않거나 괜히 지저분한 장면을 봤다는 식으로 언짢은 기분이 든다면 그것은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두고 ‘인생의 패배자들!’이라거나 ‘에이 재수 없어!’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생각의 작용이다.
 
 

연일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도 집이 없거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 데서 생활하는 노숙자들. 사연을 들어보면 제각각이지만 국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사진 출처 : 연합뉴스)

 
마찬가지로 ‘불쌍하다’, ‘안 됐다’, ‘춥겠어!’라고 느끼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저 사람들은 어떤 사연으로 저런 처지가 됐을까?’, ‘정부가 대책을 세워 줘야 할건데...’라는 의식이 들고, 계속해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동전을 적선하거나 혹은 순간적인 판단이지만 “돈을 얼마를 주는 게 좋을까?”, "수중에 지금 돈이 얼마있지?" 하고 따져보는 행위는 생각의 작용이다. 

화가 나는 상황이나 어이 없는 일을 당할 때 화가 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지만, 화가 나지만 "지금 화를 내서 안 된다"라거나 "지금 화를 낼 상황이 아니지!"라는 식으로 마음을 통어하는 行은 생각의 작용이다.

 

어이없는 각종 사건 사고로 두 눈 버젓이 뜨고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영원히 자식을 잊지 못하는 건 생각과 마음이 한 곳에 같이 있는 경우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의 작용은 마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 찰나에 그 아이를 구하려거나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는 걸 보고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선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 맹자의 성선설과 그 반대의 주장을 편 순자의 성악설이 나온 배경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모두 현대과학이 다다른 연구성과에 비춰보면 최종적, 단정적인 진실은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슨은 인간의 몸과 마음은 과거 태어나기 전부터 조상들로부터 받은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의 결과라고 본다. 이는 현재의 모든 행위는 과거 집적된 행위인 業(Karma)의 결과로 보는 불교적 해석과 갈래가 닿는 해석이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잘 통어하는 것이 곧 자신이 생각의 주인이 되는 삶이 되도록 할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진정한 주인의 되는 지름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생각이 바르거나 곧지 않으면 정화된 마음을 기대할 수 없다. 마음이 맑지 않으면 바른 생각이 생겨나지 않는다. 바른 생각이 갖춰지지 않으면 삶이 대단히 취약해진다. 사회도 혼탁해진다.
 
파동으로 움직이는 생각의 뿌리와 마음의 입자들을 매초, 매분, 언제 어디서든 부단히 觀할 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자기 자신이 생각과 마음의 주인이 되는 隨處作主가 중요하다. 그게 안 되면 자신의 몸은 조가비 속에 들어가서 보호막 삼아 사는 게에게 끌려다니는 것처럼 그냥 고깃덩어리(肉塊)일 뿐이다.

 

2015. 6. 8 초고
2019. 12. 18. 09:32 가필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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