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Ⅲ
삶이란 때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때가 있다. 작년 여름, 전혀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대만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올해 초부터 대만에서 약 1년간 생활하게 됐으니 말이다. 인연 역시 가늠할 수 없는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한 여인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기 혼자서 나를 마음속 연인으로 생각하다가 여운이 긴 편지 한 통 남겨 놓고 홀연히 사라진 게 마지막이었으니 말이다.
그 여인이란 얼마 전 볼 일이 있어 과거 30대 초반 내가 일본어 강사로 있었던 보습반(학원)이 있던 타이베이역 건너편 충칭난루(重慶南路)에 갔다가 문득 떠오른 20대 중반의 한 “샤오졔”(小姐, 아가씨)였다. 그녀는 내가 약 2년 남짓 이곳 타이베이의 한 보습반에서 일본어 회화를 가르쳤을 때 나의 일본어 회화강의를 수강한,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수강생이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출석부엔 이름이 있었으니까.
당시 나는 일본어 중급회화반을 맡았는데, 수강생은 주로 대학생, 직장인과 일반인들이었다. 그 중에 직장 여성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화요일과 금요일 주 2회 저녁 7~9시까지 진행한 강의는 주로 일본어 기본문형과 문법 및 어법을 설명한 뒤 관련 표현을 구사할 수 있도록 수강생들에게 질문하고 답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 일본인의 특성도 곁들이면서 가끔씩 우스갯소리도 섞어서 강의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우리 반은 분위기가 좋았고, 수강생도 일본인 강사가 가르치는 반 보다 더 많은 25~30명가량이었다.
그런데 그들과의 짧은 인연은 성탄절을 이틀 앞둔 1993년 12월 23일로 끝이 났다. 나는 결강에 대한 보강이 잦아서 수강생들에게 미안해서 강의를 그만두기로 하고 반 수강생들에게 다음 주 금요일을 끝으로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다고 알렸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에 자주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국에 자주 드나들다보니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마지막 수업 날, 수강생들이 모두 각자 자기 이름을 적은 성탄절 카드와 작은 선물을 나에게 선사했다. 학업 따라가랴 아르바이트 하랴, 여러 가지 악조건에 부딪혀 심신이 피곤했던 그 시절, 순간이나마 작은 위안이 됐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뒤 교실에서 나와 출구 쪽으로 나가려는데 원장실에서 나를 본 중년의 학원 원장이 웃으면서 내게 한 뭉치의 선물 꾸러미를 건네줬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원장은 내 반의 어떤 한 여자 수강생이 이틀 전에 와서 내게 전해주라며 부탁하고 간 것이라고 했다. 누굴까? 그 여자 수강생이 누군지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예쁘게 포장된 그 선물상자를 오토바이에 싣고 성탄절 분위기가 나는 거리를 달려 한국유학생 지인들이 모여 있던 師大路의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선물상자를 들고 온 나에게 지인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그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약간 우쭐한 기분으로 누군지 알 수 없는 내 반의 젊은 여자수강생한테서 받았다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선물꾸러미를 풀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편지 한 통과 함께 붉은 색 비단 실로 짜인 두 마리 큰 잉어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의 우아한 매듭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좌중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하오 퍄오량!(대단히 아름답다!)”, “쩐 빵!(정말 멋지다!)”
중국인들 사이에 ‘중궈졔’(中國結)라고 불리는 매듭은 맺을 結이라는 말 그대로 이성 간에 자신이 소망하는 사람과 맺게 되기를 바랄 때 상대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봉투를 뜯자 또박또박 정성껏 쓴 정갈한 느낌을 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읽어보니 중국어 문장이 너무나 유려했다. 내용은 더 감동적이었다. 편지를 같이 읽은 지인들의 입에서 또 한 번 감탄사가 발해졌다.
이 편지는 수년이 지나 내가 대만에서 귀국한 뒤에도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있었다. 글에 묻어 있는 그 수강생의 애틋한 마음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줬기 때문이었다. 나의 삶속에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지층으로 들어앉았다. 최근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편지를 찾아봤더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존재가 나의 표층의식에서 사라져 심층의식으로 들어가 있었다는 증좌다. 다만 편지내용은 지금도 대충 기억하고 있다. 한국어로 옮기면 맛이 제대로 날지 의문이지만,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로 시작된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수업 때마다 앞자리에 앉아 태연한 척 있었지만, 그는 내가 늘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걸 모를 것이다. 나는 수업 중에 질문을 받으면 얼굴이 홍당무가 돼 한 마디도 대답을 못했다. 그는 나의 마음 속 情人이라는 걸 모를 것이다. 그의 눈매는 여름날의 뭉게구름이요, 그의 목소리는 가을날 연꽃잎사귀의 이슬방울이 구르는 소리다.” (중략) “그는 지금도 내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대목까지 읽어내려 갔을 때도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누구였는지 얼굴이 떠오른 것은 다음 글귀들을 보게 되면서였다.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세요? 지난 주 학원 출근길에 뒤에서 나를 불렀죠? 그때 돌아보면서 대답도 못한 채 또 얼굴이 빨개진 그 사람입니다.”
그제야 나는 이 편지를 쓴 이가 누구인지 얼굴이 떠올랐다. 학원 가던 도중에 우연히 2~3m 정도 앞에 나의 반 수강생이 걸어가는 게 보이기에 “니하오!” 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자 수줍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띄던 그 샤오졔였다. 그녀 말대로 그는 수업시간에 늘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수강생이었다. 내가 질문을 해도 답을 제대로 못하고 부끄러워만하던 수강생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녀가 나에 대한 情念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마음속으로 나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애태웠다는 걸 신이 아닌 이상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무엇 보다 내 마음을 일렁거리게 한 그날의 압권은 편지 말미의 마지막 문구였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제 손에는 비행기 티켓이 한 장 쥐여져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편지를 읽고 있으실 때는 저는 저 멀리 하늘가를 날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중략) “정녕 떠나시는 겁니까? 이제 떠나시면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왜 하필이면 마지막 수업 전에 그녀가 잉어매듭을 선물로 전하고선 외국으로 떠났는지 모르겠다. 또 연락처는 왜 남기지 않았을까? 편지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놓지 않은 까닭은 내가 그 말을 들으면 강의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기 때문이었을까? 내게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고 물은 것은 나에게 계속 강의를 해주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을까?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의문이 가시지 않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 궁금증은 실제 그녀를 만나기 전엔 영원히 풀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풀 수 없기에 아련하고 운치 있게 상상 속에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필설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성과 논리를 뛰어 넘은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게 인연이다. 때론 당사자의 개인적 의지로도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작용하는 듯하다. 불교에선 그걸 개개 업(Karma)의 차원을 넘어서 행위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치는, 전체로서의 “共業”이라고 부르고,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은 숙세에 자신이 지은 모든 작위의 결정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因만으로는 쉽게 緣과 融攝 되지 않는다. 현재의 업보는 과거의 행위에서 결정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과거 한 번 지은 업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업이 현재를 결정짓고 현재의 업은 미래를 결정짓듯이 과거의 업만이 아니라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는 것도 인연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숙업은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自性(Atman)이 없는 잠시 因緣假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세월 속에 묻힌다. 불가역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선연했던 기억도 언젠가는 퇴색되고 만다. 하지만 평소엔 잊고 살다가도 일생에서 선 굵게 각인된 기억은 緣에 맞닿으면 바로 되살아난다. 의식의 심연(불교 唯識學에서 말하는 제7식인 마나스識)에 因으로 갈무리 돼 있어 당사자가 죽어 육신이 혼백으로 분리되기 전까지는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평소 컴퓨터에 폴더나 파일로 저장해놓은 걸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하다가도 폴더명이나 파일명을 입력하면 재까닥 찾을 수 있는 원리와 같다. 비록 찰나에 불과한 假合的 양태이긴 해도 말 그대로 因과 緣이 합치됐을 때, 없던 곳에서 기온이 맞으면 생성되는 수증기나 연무처럼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 옛날 타이베이의 보습반을 보고 그녀가 생각난 게 아니라 무의식속에서 그녀의 편지에 대한 기억이 나를 이곳 보습반으로 와보게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단지 까마득히 잊고 사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편지 한 통이 촉발시키는 상상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데는 일차적으로 집안의 빈번한 우환 때문이었고, 좁게는 나의 일본어 강사직 사직 그리고 그녀가 그 때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선 해외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환이 빈발하고 학생들에게 미안해서 볼 낯이 없어도 낯 두껍게 견뎌내면서 사직만 하지 않았더라면 강의는 계속됐을 것이고, 그러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을 터다. 또한 내가 강의를 그만두기 전에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표시했었더라면 또 어찌 됐을까? 두 사람에겐 마지막 수업, 그녀의 해외여행이라는 서로 다른 인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기 그에 대한 緣들이 받쳐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나는 이곳 생활을 모두 끝내고 완전히 귀국한다. 시간의 선후가 매개되고 공간의 제약을 받아 생멸을 하는 게 인연이기에 내가 이곳을 떠나면 그녀와 재회할 가능성은 더 멀어진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게 인생이듯이 언제 또 다시 대만으로 올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다시 오든 오지 않든 그와 별개로 지금은 중년이 돼 이곳 대만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큰 그녀가 무탈하게 잘 살고 있으면 좋겠다. 젊은 시절 찰나의 한 순간이었지만 내게 울림이 컸고 긴 여운을 남긴 순연한 감동을 선사한 이름 모를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내가 있는 이곳 중앙연구원에도 어느덧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 단풍들이 질 때면 나는 또 다시 그녀를 심층의식에 넣은 채 평소처럼 회상의 여백이 많지 않은 번삽한 서울거리를 걷고 있을 것이다.
2019. 11. 5
臺北 中央硏究院에서
雲靜
위 글은 『형산수필』 제35집(2019년 12월)에 실린 수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