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인연 Ⅱ

雲靜, 仰天 2019. 12. 16. 07:29

인연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만나고 헤어짐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의 인연이다. 애틋하게 만나고 싶어도 한 번 보고는 평생 동안 못 보고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는데도 자주 얼굴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도 있다. 그야말로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이다.

 

생각나는 사람이 많은 계절의 이 가을날 오후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오늘은 약 30년 전 30대 초반의 타이완 유학 시절 타이베이 시내 한국 사찰의 법회에서 인연이 된 한 스님이 몹시 생각난다. 그분은 道山이라는 법명을 가진 젊은 한국인 선승이었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긴 비구승으로 파르스름한 깎은 승발이 퍽 인상적이셨던 분이었다.

 

스님은 출가 전 세속에서 대구 소재 모 공고를 졸업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는 처음 만난 뒤 자주 일요일 법회에서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다. 만남이 잦아짐에 따라 나중엔 내가 가고 싶을 땐 법회 없는 평일에도 타이베이 시내 중국인 사찰 내 스님의 처소로 달려가서 삶과 죽음, 운명, 불법, 연기법, 인연, 괴로움의 근원, 출가, 인생 등등 많은 것을 논했다. 누구든 깨닫고 나면 가식이 없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마음상태가 되지만, 꾸며낸 자비심은 바로 들통 나기 마련이다. 도산 스님에게선 그런 가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도산 스님은 장차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큰 법기(法器)로 느껴졌다. 스님 신분이니 불법에 대한 깊은 이해는 당연한 걸로 치고 그의 출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이 원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요법회를 주관한 타이베이 한국 사찰의 주지 스님이 신도들의 관심이 법회에 나온 도산 스님에게 쏠릴까 봐 경계하는 눈빛을 보낼 정도로 비범함이 엿보였다. 그런 만큼 난해하고 복잡다기한 여러 갈래의 불법을 논리정연하면서도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이론가이자 달변가이기도 했다. 말씀 중에 자주 수인(手印)으로 전하고자 하는 불법의 의미를 강조하는 화법도 뭇 스님 같지 않았다.

 

불법은 이론적으로 공부를 하면 누구든 대부분 따라가고 지식을 갖출 수 있어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순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불법에 대한 그런 축적적 지식 보다는 스님이 맑디맑은 청정심으로 내게 출가를 권유한 그 마음 그리고 어려운 처지의 내게 조건 없이 베푸신 보시의 자비심이었다. 무릇 출가권유는 권유자 자신이 청정하지 못하면 자신 있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잘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금전을 제공하는 이타행도 베푸는 이가 베푼다는 생각이 없을 정도의 한 자비심이 없으면 실행이 되지 않는다. 청정심과 자비심은 흉내를 낸다고 해서 갖춰지는 게 아니다. 당시 도산 스님의 그것은 마치 불상과 불화에나 있는 광배(光背)처럼 빛났다.

 

어느 날이었다. 대화 중에 도산 스님은 문득 내게 영성이라도 발견한 듯 불법의 근기(根氣)가 있다면서 세상공부 보다 불법공부를 해서 세상과 중생을 건질 큰 뜻을 품기를 권면했다. 그보다 4~5년 전쯤 20대 후반 한국에 있었을 때도 인연이 닿은 한 스님께서 내게 여러 차례 출가를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 스님은 지금 한국불교계에선 누구라면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스님이 돼 계신다. 내가 출가권유를 받기는 그 스님에 이어 도산 스님이 두 번째였다. 당시 나는 도산 스님의 권유에 마음이 약간 동요되기도 했었다. 스님의 인품과 그릇의 됨됨이에 끌려 잠시나마 출가를 생각한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연꽃처럼 청정한 스님의 자태와 향기 나는 스님의 마음에 훈습되고 싶은 생각이 일렁거렸다. 스님이 나보다 대여섯 살 더 많았으니 내가 출가했더라면 스님은 나의 사형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산 스님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스로 돌아보아 나에게는 종교성직자가 되기엔 세속의 잡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스러움의 아우라(Aura)가 없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양에 도산 스님은 더 이상 권하진 않으셨다. 불연(佛緣)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고 하더라도 걷고자 한 길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본분이 같지 않은 이상, 각기 세간과 출세간에서 할 일이 달랐다. 비록 가는 길은 서로 달라도 구극에는 서원(誓願)이 한곳으로 모아질 것으로 봤다. 사바세계와 출세간에서 각기 사는 방식과 취하는 수단이 다르고 방편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결국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두 사람이 다다르고자 한 미래의 희원(希願)이었다고 믿었다.

 

아쉬운 시간은 늘 찰나 같은 법! 시간이 흘러 이윽고 작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얼마간 거주하셨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진 않지만, 도산 스님이 대략 1년 정도의 타이완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시게 됐다. 마음의 교감이 이뤄진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게 됐다. 만나면 헤어지게 돼 있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법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떠날 즈음에 도산 스님은 평소 당신께서 제대로 드시지도 않고, 잘 입으시지도 않으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모두 아낌없이 나에게 다 주시는 게 아닌가! 몇 번이나 손사래 치던 내 손에 쥐어준 봉투를 열어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 있었다. 스님이 고급 채식인 쑤스’(素食) 요리집에 전혀 출입을 하지 않고 하루 두 끼의 허름한 차래식(差來食)만 드시면서 수행에 정진하면서 모은 목돈이었다.

 

식도락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타이완에는 고기와 오신채를 전혀 쓰지 않고 각종 채소, 열매나 식물의 뿌리들, 콩과 두부 등의 재료만으로 만드는 쑤스가 매우 발달해 있다. 쑤스는 맛이 기가 막힐 정도로 독특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일반 쑤스집이 아닌 고급 쑤스집은 음식 값이 꽤 비싸다. 그래서 스님이 돈을 쓰려고 했으면 쉽게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님은 일일이식(一日二食)에다, 겨울엔 습기가 많아 으스스한 타이완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기를 막아주는 가사장삼을 두르지 않고 늘 홑겹의 승복만을 입고 수행에 정진하셨던 분이다.

 

나는 도산 스님이 주신 그 돈을 참으로 생광스럽게 잘 썼다. 나는 처음에 유학자금이랍시고 가져간 단돈 50만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져서 한 끼에 만두 다섯 개로 겨우 연명하다시피 하면서 몹시 궁하게 살던 처지였다. 삼시 세끼를 다 해결하지 못해 어떨 때는 우유 하나로 한 끼를 때우던 시절, 피골이 상접한 내게 그 거금은 정말 요긴한 돈이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폭포수 세례를 받는 듯한 감로수였다.

 

 

남들이 부러워 한 안정된 직장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만 두고 바로 떠난 유학! 위 사진이 말해주지만 안정된 직장생활 탓인지 그 시기는 얼굴에 생기가 돌던 시절이었다. 내 기억에 삼성 신입사원 초봉이 38만원이었을 때 내가 다닌 공장은 보너스가 1100%여서 합산하면 월 평균 110만원 정도 됐었다. 이유는 신군부가 언론사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언론인 과세에 특혜를 많이 줬기 때문이다. 암튼 당시 주위 친구들과 지인들은 하나 같이 서른이 넘어서 가는 유학을 반대했지만 나는 도박하다시피 결행했다. 첫날부터 10여년 동안 끊임 없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나의 인생에서 작지 않은 결단이었다.

 

헤어질 때 두 사람은 서로가 약속이나 한 듯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언약의 말은 한 마디도 끄집어내지 않았다. 앞으로 어디에서 거할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거처를 찾지도 않을 것이며, 연락도 하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을 했다. 이심전심이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연 따라 살고 부평초처럼 오가는 몸, 인연이 하면 어디서든 만날 수 있지만, 인연이 하면 스쳐가도 몰라보는 게 사람의 인연이니 굳이 애써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도산 스님이 어느 절에 주석하고 계시는지 모르고 살고 있다. 어쩌면 환속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기대대로라면 여전히 구도승의 초발심과 깨친 자의 자비심으로 대중을 향해 수승(秀勝)한 법을 설하고 있거나 산사나 암자에 거하면서 변함없이 용맹정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도 조계종 총무원에 스님의 거처를 문의하거나 수소문하면 단박에 알 수도 있겠지만 아직 인연의 기운이 그런 방향으로 모여들지 않고 있다는 직관이 든다. 여태까지 스님을 찾으려는 마음을 내지 않았고, 지금도 찾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두 사람이 이승에서 해후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법화경에서 석가세존께서 설한 바 있지만, 내게는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게 돼 있다는 거자필반(去者必返)의 가르침이 아직 진리의 법으로 실증되거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승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해서 저승에서도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저승에서도 만나지 못하면 스님과의 만남은 인연법에 따른 운명이라고 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어쩌면 스님께서 그간 쌓아온 수행과 무량한 공덕으로 하늘(), 사람(), 아수라 아귀, 지옥, 축생의 육도(六道)를 돌고 도는 인연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불생불멸의 해탈열반에 들 수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왠지 나는 나의 운명이 다하기 전엔 도산 스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꼭 빚을 갚아야 한다는 발원 때문만은 아니다. 진 빚은 갚고 가야겠다는 채무의식이 있어 스님을 만나 진 빚을 갚아야 하지만, 굳이 도산 스님 본인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베풀어도 된다. 그것이 불교식의 회향(回向)이라는 걸 아는 이상 크게 마음에 걸릴 건 없다. 귀국 후 직장을 잡은 뒤 얼마 되지 않은 금액이지만 내가 매달 에티오피아와 미얀마의 두 아동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10여 년 이상 기부해온 것도 그런 빚을 세상에 회향하겠다는 마음의 발로였다. 세상의 구석구석으로 혈류처럼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라고 이름 붙여졌고, 인드라의 그물망 코처럼 보시 또한 서로 상의상종(相依相從)하는 관계로 돌고 도니까 말이다. 도산이라는 응신불을 통해 내가 입은 불은(佛恩)에 대해 직접 빚을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물론, 스님께서도 전혀 섭섭해 하시지 않을 것이다.

 

도산 스님과의 해후를 예감하는 것은 그분과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잔잔한 여울이 흐르듯이 영혼이 가다듬어짐을 알기 때문이다. 속세에 거하는 나에게 그런 만남은 구도의 한 방편이나 다를 바 없다. 사바세계의 찌든 때를 씻겨내는 자등명(自燈明)의 탈속의식일 수도 있다. 청정한 구도승의 기를 느낄 수 있는 도산 스님과의 해후 가능성을 세월이 흘러도, 스님의 거소를 알지 못해도 접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바깥엔 어둠이 깔리면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옛일을 추억하느라 어느덧 비감에 젖어든 나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비 뿌리는 만추의 날씨가 오늘따라 더 스산하고 을씨년스럽다. 30년 전 도산 스님을 마지막으로 본 날도 늦가을이었다. 그날도 타이베이엔 오늘처럼 비가 내렸었다. 때론 소리 없이 내리던 보슬비를 맞으며, 때론 세찬 비속을 뚫고 오토바이로 달려가곤 했던 타이베이 스님의 그 처소로 달려가 서로 말없이 앉아 차만 마셔도 좋을, 그 시절이 몹시도 그리운 저녁이다. 형형한 스님의 두 눈빛이 비 내리는 초저녁 어스름을 밝히는 듯하다.

 

2015. 11. 9 초저녁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

 

위 글은 형산수필35(201912)에 실린 수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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