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향산(香山) 혁명기념관 관람평
역사는 과거 사실의 재구성이지만 재구성 과정에선 반드시 현재 상황이 반영된다. 현실이 어떻게 반영되는가에 따라 그 나라의 정치적 자유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중국 전역은 지금 시진핑을, 모택동을 능가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와 동급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의지의 실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어제 오전에 들른 북경 서북쪽 교외 香山에 자리 잡은 ‘향산혁명기념관’도 이러한 현실이 반영되고 있는 현장의 한 곳이었다.
향산혁명기념관은 마치 현 중국의 최고 지도자 시진핑을 위해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전시내용이 시대착오적인 개념으로 채워져 있었다. 지난 20세기 중국공산당의 혁명과정 그리고 그들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정 및 중국의 굴기를 자랑하고 선양하면서도 끝단에 가선 전시내용의 논리적인 귀결은 시진핑에게 닿도록 하고 있다. 역대 중공 지도자였던 모택동, 유소기, 등소평, 강택민, 호금도의 치적이 차례로 소개돼 있지만 전시내용을 구조적으로 분석해보면 결국 현 시진핑이 지금까지의 치적과 성공을 토대로 기존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중국을 건설해야 하니 그를 따르고 지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유도돼 있는 것이다.
먼저, 향산혁명기념관은 왜 하필 북경 외곽의 향산에다 건립됐을까? 중국공산당이 그렇게 계획한 데는 나름대로 정치적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일단 이곳 향산은 1949년 2월 모택동이 이끈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국공투쟁에서 동북지역을 손에 넣은 뒤 동북에서 화북을 거쳐 北平(당시 북경의 명칭) 쪽으로, 또 섬서성의 연안에서 출발한 모택동의 지휘부는 山西省으로부터 향산을 넘어 북평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리를 잡은 북평 해방작전의 총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모택동, 주덕 등 중공의 주요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면서 북평 해방작전의 마지막 고삐를 죄고 있던 곳이었다.
다음으로 시진핑의 의도를 보자. 시진핑은 중국의 역대 지도자들 중에 모택동을 제외한 나머지 지도자들은 모두 지도력 면에서 자기보다 한 수 아래의 지도자로 낮춰놓았다. 중국인민들은 모택동이 말년에 “문화대혁명”(문혁을 일으킨 모택동의 정치적 의도와 동기를 인정하는 아주 잘못된 용어임)을 일으켜서 국민을 핍박하고 지도자들 끼리 싸움을 붙이고 해서 중국을 혼돈과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그의 건국 공 때문에 그가 저지른 과에 대해선 과도하게는 비난하거나 원망하진 않는다. 오랜 관습상 저마다 자연스레 자기검열적인 수위 조절이 있는 것이다. 일부 반체제 민주인사들을 빼고는 아무도 모택동에 대해서는 감히 한물 간 역사적 인물로 용도폐기하려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 그래도 수성한 등소평은 비판하는 사람은 있어도 창업한 모택동의 권위에 대해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어떤 성역이나 마지노선이 존재한다. 바로 이 지점에 시진핑의 동기가 도사리고 있다.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시진핑은 모택동의 공과 권위나 위상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고 단지 자기를 모택동과 동급의 지도자로 격상시켜 놓고선 “중화민족의 흥기”, “중국의 꿈” 같은 배타적이고 패권적이며, 민족주의적 몽상에 지나지 않는 ‘이상’을 새시대의 비전이랍시고 이를 실현시킬 강력한 리더십의 지도자임을 선전하고 있다.
이곳 향산혁명기념관은 필경 이러한 시진핑의 야망과 포부를 선전하는 도구로 건립된 것이리라. 전시 내용도 그 구상에 다 맞춰져 있음은 물론이다.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지만, 지면 관계상 대표적인 예만 한 가지 소개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및 대만 통일의 당위성과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대목에서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 장개석을 완전 부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전시내용 중엔 지난 세기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실권을 거머쥐고선 독재, 부패와 전횡으로 전중국을 다 말아 먹었다고 "매판 부르주아지 자본가"로 혹평한 이른바 중국의 4대가족(장개석 가족, 宋子文 가족, 孔祥熙 가족, 陳果夫 陳立夫 형제 가족)이 중심이 된 국민당의 부패상을 전시함으로써 국민당 및 중화민국이 무너져야 할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한다거나 현재 미국의 중국포위에 처해 있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시진핑이 아니면 이러한 위기는 헤쳐 나가기 어렵다는 점이 암시되고 있다. 이른바 “4대가족 부패론”은 역사가였지만 나중에 모택동의 정치비서로서 중국공산당의 혀가 된 陳伯達이 자신의 저서로 1940년대에 내놓았던 것이다.(『中國四大家族』, 長江出版社, 1946年)
중공 이론가들이 중국 공산주의혁명의 당위성과 역사적 필연성을 거론할 때마다 써먹는 4대가족의 비판은 사실 중공에게는 단골메뉴다.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레퍼토리다. 중공이 걸핏하면 “蔣씨 가족의 천하, 陳家黨, 宋씨 자매 孔家 재산”이라고 비난하면서 교육해온 게 어언 70년이나 됐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다.
그러나 이것은 중공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이고 온당한 역사 평가는 아니다. 4대가족이 부패했고 권력을 전횡하고 농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 때문에 중화민국 전체가 망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논리비약이다. 또 그들에게도 공과 과가 같이 있다. 물론 중공은 중국에 공산주의 국가가 들어서야 할 역사의 필연성으로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소위 ‘역사발전 5단계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4대가족은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역기능과 순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과보다는 적지만 얼마간 공도 없지 않다. 특히 항일전쟁 전후 중국 각지에 군벌들이 난립한 상황을 군사적으로 평정해 강력한 지도력으로 그들을 중앙정부 아래로 재결집시켜 항일전을 이끈 장개석의 공은 적지 않다. 그래서 대만 학계 외에 최근 들어 약 10여년 전부터는 이곳 중국 대륙의 사학계에서도 장개석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하기 시작했다. 즉 장개석이 아니었으면 항일전쟁은 승리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실, 이 평가는 이미 1936년 12월 12일 장개석에 이어 국민당 서열 2인자 張學良이 자신의 상관인 장개석을 체포해서 연금시켜 놓은 西安사변이 발발해 중공 내 모택동, 주덕 등 급진파들이 그를 죽이자고 주장했을 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린 스탈린이 이미 얘기한 바 있다. 당시 스탈린 역시 장개석이 없으면 대일 항전의 구심점이 사라져서 일제의 침략을 막을 수가 없다면서 장개석을 처단하고자 당내 의견대립이 있던 중공 급진파의 장개석 처단주장을 제지해 잠재웠다. 말하자면 서안사변에서 장개석이 처형되지 않고 무사히 풀려난 것은 스탈린의 숨은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스탈린의 속셈은 장개석이 제거돼 항일전선이 무너지고 중국전체가 무너지면 결국 소련이 일제의 위협에 처하게 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1917년과 1922년에 이어 또 다시 소련영토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을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중공은 장개석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낡은 평가를 또 다시 끄집어내서 선전의 정치적 오브제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장해온 바 있지만, 중국은 지금 퇴보하느냐 아니면 큰 거보를 내딛느냐가 결정될 중대한 고빗사위에 처해 있다. 구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일당독재체제에서 벗어나 지구 환경 생태계, 이상기후, 자원고갈 등등의 범인류적 과제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문명사적인 시대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지금까지 해온 대로 시대착오적인 공산주의 이념을 붙들고 대다수 인민을 기만하면서 소수의 권력자들만 권력과 부를 맘껏 누려온 기존 이념 및 국가 존재방식과 정치적 작동시스템을 유지함으로써 결국 일시에 붕괴하고 말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역사의 흐름은 일개 정치지도자의 결단에서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때로는 한 사람의 정치지도자의 결단으로는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문명사적인 변화와 변혁의 당위는 절대 막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지금 시진핑은 인류의 안전을 담보로 큰 도박을 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그 허망한 미몽에서 깨어나야 된다. 그래야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혼돈과 불안의 늪에서 안전해질 수 있다.
2019. 12. 12. 10:51
포항행 KTX열차 안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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