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인도 타고르 기념관에서 타고르 다시 보기

雲靜, 仰天 2019. 10. 10. 15:49

인도 타고르 기념관에서 타고르 다시 보기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 시대 본거지였던 동부의 최대 도시이자 벵갈문화의 중심지 꼴까따를 찾았다. 원래 답사하고자 한 1962년 중국-인도 전쟁의 주요 전투지역이었던 인도 동북부 지역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현지 사정에 맞춰서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는 기분으로 왔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지 않는가? 개인의 특별한 여행목적을 포기하고 인도를 이해하는 여행을 한다고 하면 도처에 들이 널려 있는 게 인도다. 

 

아루나찰 프라데시 대신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인도의 詩聖으로 평가되는 라빈드라나쓰 타고르(Labindranath Tagore, 1861~1941)가 살았던 타고르하우스’(Tagore’s House), 즉 타고르기념관(Jorasanko Thakur Bari)인데, 여기도 숱한 들 중에 한 곳이었다.

 

타고르하우스를 찾아가려고 이곳 꼴까타 길거리의 여러 사람들에게 타고르의 집이 어딘 줄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안다는 사람이 없었다. “따꾸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는 걸 안 것은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수고한 끝에 타고르하우스에 들어서고 난 뒤였다. 이곳 벵갈인들은 타고르의 이름을 벵갈어로 조라상꼬 따꾸르”(Jorasanko Thakur)라고 해야 바로 알아듣는다. 이곳 지식인들에게 타고르이름을 발음시켜 보니 힌두어와 벵갈어는 따꾸르로 발음이 유사하게 들렸다. 하지만 우리끼리니까 그냥 입에 익은 대로 타고르라는 영어음의 한국식 발음으로 부르겠다.

 

이윽고 타고르하우스에 도착했다. 타고르기념관’이란 그가 기거했던 대저택을 박물관 형식으로 꾸며놓은 것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타고르기념관은 기념관 바깥에서 봐도 아주 큰 2~4층 건물 4개 동에 걸쳐 있어 건물에다 전원과 후원을 합하면 총 대지 면적이 상당히 되는 듯했다. 입구에서 15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반나절 이상을 관람했다.

 

 

타고르 기념관 내 전시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타고르 흉상

 

이곳 기념관에 전시된 타고르 관련 사진, 유품 및 유물들은 거의 다 내가 처음 접하는 것들이었다. 가치가 높아 보이는 귀한 사진들, 미술작품과 유품들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관음보살(Padmapani Avolokitesva)의 상호를 클로즈업해서 찍은 두 장의 사진이 눈에 번쩍 띄었다. 이 관음보살 사진은 일본 국보 제1호로서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극찬한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 금당벽화 관음보살상의 원본을 찍은 것처럼 보였다.

 

이곳 전시물을 사진 찍어 나중에 천천히 관련 자료들과 대조해보고 싶었지만, 처음 입장하는 순간부터 기념관측에서 일체 사진을 못 찍게 했다. 심지어는 직원들이 내가 핸드폰에다 전시물에 대해 글로 메모하는 것조차 하지 말라고 따라다니면서까지 통 사정했다.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 글을 쓰는데 전적으로 좋지 않은 나의 기억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단지 몇 가지 사진과 유물만 보고 판단하는 이런 식의 인물인상기는 의심쩍기 짝이 없는 일일테니 이에 대해선 좀 더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기 전에 일단 이곳 기념관에 연출돼 있는 타고르의 삶 혹은 인물의 특징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된다.

 

첫째, 타고르는 이곳에 전시된 그의 조상 가계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 벵갈지역의 유력한 왕국의 왕족 후손이었다. 사진이나 초상화로 그려진 그의 조상들과 가족들의 모습에서 기품과 교양이 몸에 배어 있는 게 한 눈에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타고르기념관의 전시물들에서 보이는 타고르 역시 성자를 연상시키는 아우라(Aura)가 빛나 보인다.

 

특히 타고르기념관의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가면 첫째 동의 2층 입구의 왼편 벽면에 걸린 전신상의 사진은 마치 예수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타고르가 생전에 예수의 복장처럼 긴 흰옷을 입고 찍은 것인데, 두발, 콧수염과 구렛나루에서 턱으로 이어진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 흔히 보는 사진이나 성화에서 본 예수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서 깜짝 놀랐다. 하기야 인도엔(특히 아리안족과 벵갈족) 종족적으로 골상이 예수상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면 별 건 아니다. 그럼에도 타고르의 외모와 자태에서 성인이나 예지자를 연상시키는 아우라는 이곳 왕국의 왕자였던 증조부 의 조상들과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인 요소,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부, 지식인이자 시와 미술과 음악, 연극 등 예술과 인문학적 소양이 어우러져 풍겨 나오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둘째, 타고르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대부호였다. 그가 살았던 이 저택이 대단한 규모인데, 이 저택과 함께 무역업 전용의 거대한 범선(clipper)2척이나 소유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모와 조부모대에 걸쳐 은행업, 제당업, 석탄, 수운, 선박수리, 아편판매, 영국과 대규모 수출입 무역을 해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 타고르가의 거대한 부는 주로 아편거래가 큰 몫을 했다. 아편은 영국정부가 차와 도자기 등의 중국생산품의 과다 수입으로 인한 은의 출초, 즉 적자가 난 재정난을 메우기 위해 인도동부(아샘, 다르질링 등)지역에 인도인들을 동원해 재배한 마약이었다. 타고르는 인도 하층민중의 고혈을 대가로 아편을 상업적으로 거래한 것이다. 타고르는 창작활동을 하고 여행을 하면서도 가업을 물려받아 사업도 직접 관장했다고 한다.

 

셋째, 타고르는 시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점이다. 1906년에 발표한  신에게 바치는 頌歌(Song of Offerings)라는 의미의 기탄잘리(Gitanjali)라는 시로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57편의 시가 실린 이 시집은 인도에서 1910년에 출판됐다. 타고르는 이 가운데 57편을 추려 직접 영역해서 1912년에 영국에서 출판하였고, 그 이듬해에 작품성이 인정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에선 시, 소설뿐만 아니라 그가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진 화가이자 2,000여곡이나 작곡한 작곡가였으며, 극작가로서도 활동했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과거 한 때 그림을 다년간 그려 봐서 아는데”, 이곳에 전시돼 있는 타고르의 작품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미술적 재능은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은 프로급이었다. 탁월한 그의 작품들은 수채화에서부터 유화, 심지어 수묵화 등 동양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장르도 풍경화, 산수화, 문인화, 구상화와 반추상화,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일본의 春畵까지도 그렸다.

 

넷째, 타고르는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많이 수집했는데, 심미안이 있어 보였다. 특히 일본과 중국의 미술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에도(江戶) 시대 후기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浮世絵) 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작품 붉은 후지’(Red Fuji)도 보이고, 근대 일본미술사학 연구의 개척자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기타자와 우타마로(北澤歌麻呂)의 인물화와 게이샤(藝者)가 그려진 작품도 여러 점 소장돼 있다.

 

타고르가 카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을 소장한 것은 카츠시카가 워낙 다작의 작가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 몇 점 정도야 타고르에게까지 연이 닿을 수도 있다 싶다. 카츠시카는 우키요에 목판화에서부터 육필화, 만화, 춘화 등등 해서 무려 3만 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남겼으니 그 중에 몇 점이 타고르의 손에 들어왔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카츠시카의 많은 우키요에 작품들 중에는 동물과의 수간을 묘사한 춘화들(그 가운데 문어와 해녀라는 작품은 세계 최초의 촉수물로 인정받고 있음)도 있는데, 그런 것은 한 점도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소장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타고르가 소장했던 작품들은 수준급도 더러 있었다. 동시에 그는 교류를 위해 자기 지인들의 작품들을 사줬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카츠시카는 초탈적인 여러 가지 기행으로 유명한 괴짜 화가였는데, 그의 작품은 반 고흐와 드뷔시 등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와 음악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타고르도 그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일본미술사와 미술평론을 쓰면서 계몽가로서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일본미술의 개념정립에 기여한 오카쿠라 텐신의 작품을 타고르가 소장한 것은 오카쿠라가 1902년 꼴까따로 타고르를 찾아왔었고 타고르도 답방 차 일본에 갔으며, 오카쿠라 사후에는 그의 묘소까지 참배하는 등 교류의 인연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 타고르는 외국경험이 풍부했다는 점이다. 그는 1877년 영국유학 생활에 이어 1879~1880년 식민지 종주국의 심장부였던 영국의 런던에서 거주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여행도 엄청나게 많이 했다. 19418780세로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전세 기차로 인도 국내여행을 떠났을 정도였다. 이 여행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그는 해외여행도 상당히 많이 했다. 그가 여행한 나라로는 미얀마, 미국(1916, 1930), 일본(1916, 1917, 1924, 1929년 등 총 5), 독일(1921), 중국(1924, 1937), 이탈리아(1926), 아랍과 이란(1932), 러시아(1930), 영국(1940) 등이 있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여행업이 서비스산업으로 보편화 돼 있는 오늘날과 달리 교통수단이 제한돼 있어 1900년대 전반기에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섯째, 타고르가 세계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거나 방문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에 눈길이 가짐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들도 떠올랐다. 과연 왜 여행을 그렇게 많이 했으며, 여행을 통해 그는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얻고 체득했을까? 가족까지 데리고 간 일본여행에서는 대불로 유명한 요코하마(橫浜)의 사찰을 찾아 가마쿠라(鎌倉) 대불상 앞에서 일본 전통복장을 한 일본인들과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일본 전통 다도회에 참여하거나 강연, 강좌,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그 시절 타고르는 일본인을 좋아했는데, 그들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씨와 그런 문화가 좋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럽의 물질문명과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긍정이었을 것이다.

 

 

일본 방문시 지인들과 함께 한 타고르

 

미국여행 때 철학이야기의 저자로 알려진 철학자 윌 듀란트(Will Durant)와 같이 찍은 사진도 보인다. 아랍과 이란을 방문했을 땐 아랍에서 베두인(Bedouins)사람들 여럿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연설을 한 사진도 보인다. 또한 당시로선 64세의 노령임에도 그는 중국을 한 달 반 동안 여행했다. 중국지식인들 중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유학파 시인이었지만 30대 중반에 타계한 것으로 유명한 徐志摩(1897~1931)와 교류한 것이 눈에 띈다. 두 번째 중국여행시 “Bhavan”이라는 곳을 갔을 때는 네루와 함께 간 것으로 보이는데 “Tan-un-Tsung”(譚恩宗?)이라는 중국인과 함께 한 장면도 보이고, 그림을 같이 그리는 장면도 소개돼 있다. 모스크바에선 큰 회의장에서 축사를 하는 사진도 걸려 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타고르를 위해 특별 축하연을 베풀어 준 사진들도 보였다.

 

일곱째, 타고르는 인도의 국부로 추앙 받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혹은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의 명성에 버금가는 식민지 인도의 지식인이자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저명한 시인으로서 과연 당시의 제국주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했는지,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살았을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식민지 종주국 영국 제국주의에 대해서나 혹은 모국 인도에 대한 그의 정치적 입장을 짐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1905년 그가 인도분할 반대운동에 참여한 사실이다. 타고르가 제국주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영국,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 기념관에는 1909년 당시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던, 안중근(1879~1910)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아시아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사살한 사건에 대해 그는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타고르는 동양의 제국주의국가 일본에 가서 일본여자대학에서 강좌도 맡았으며, 일본지식인들과 함께 강연 및 다도회에도 참석하고 상호 방문을 하는 등 다양하고 폭 넓은 교류를 하면서도 일본의 대외침략을 비판했다. 1916년 최초의 일본여행시에 일제가 중국의 袁世凱(1859~1916) 정부에 이권을 요구한 날강도 같은 “21개조 요구를 겨냥해 침략적인 국가주의를 비판했다. 그가 일본의 침략을 받은 중국을 방문해선 중국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중국민족에게 동정을 표시한 것을 보면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선 분명 부정적이었다.

 

타고르는 공산주의에 대해선 어떻게 인식했을까? 그가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은 1930년이었다. 이 시기는 스탈린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각기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선 영국과 일본에 대해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획책하고 제국주의를 쳐부숴야 할 인류의 적으로 투쟁하고 있을 때였다. 과연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타고르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을 앞에 둔 강연에서 어떤 얘길 했으며, 러시아 지식인들과는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을까? 자신과 같이 이곳 벵갈지역에서 태어나 동시대를 살면서 인도사회의 공산혁명을 부르짖은 로이(Manabendra N. Roy, 1887~1954)에 대해선 짐승이나 벌레처럼 봤을까? 로이는 1920년대 모스크바의 적도를 드나들면서 코민테른 대회에까지 인도공산당 대표로 참석해 레닌과 공산주의 이론논쟁을 벌인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였다.

 

여덟째, 타고르의 정치적인 입장의 연장선에서 과연 오늘날 힌두교의 절대적인 위상과 그 배타성, 인도 전역의 길바닥 곳곳에 진동하는 악취와 소음, 넘쳐나는 매연과 공해, 이방인의 혼을 빼놓는 무질서와 거짓말 그리고 떠올리기조차 싫은 절대빈곤과 엄청난 빈부격차가 뒤섞인 현실에서 과연 타고르의 사상과 시와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빈곤으로 배를 굶고 상시적인 기아에 허덕이는 민중들이 바글거리는 상황에서 신에 귀의하고 신을 열렬히 떠받든다는 내용의 기탄잘리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타고르는 신을 찬미했다. “나는 당신을 모든 면에서 보며/모든 면에서 당신과 교제하며/밤낮을 가리지 않고 당신에게 사랑을 바칩니다라고. 그런 열정으로 자신의 부와 재능을 사회에 환원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불가촉천민의 절대 빈곤자들을 기아에서 구원해주는 게 정말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힌두신의 이름으로 현재의 모든 것을 전생의 과보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힌두교의 종교체계를 의심 없이 찬양한 타고르가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길가에 곤하게 자고 있는 인력거 꾼 노인네. 멀리서 보니 노인네가 죽은 줄 알고 급히 달려가서 보니 가늘게 숨을 쉬고 있어 다행이다 싶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행인들이 다니는 길가의 벽에다 냄비를 걸어놓고 취사를 하고 사는 한 가족
냄비에다 죽인지 국인지 모를 음식을 끊이고 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육안으로 봐도 영양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이러한 형편 없는 음식을 먹고 산다. 이들처럼 길바닥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인도 전역에 부지기수로 넘쳐 난다. 인도정부는 뭘하고 있는가?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할 생각은 하지 않고서 중국과 파키스탄에 대적하는데 많은 국방비를 쓰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지옥 같은 현실을 내버려 두고선 타고르가 신을 열렬히 찬미한 기탄잘리를 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홉째, 한국인이라면 결코 지나쳐선 안 될 의문들이 치솟는다. 타고르가 일본, 중국과는 교류를 많이 했는데, 특히 일본은 무려 다섯 차례나 방문했으면서도 한국과는 인연이 없었던지 조선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타고르가 마지막으로 간 1929년의 다섯 번째 일본방문 때 당시 동아일보 도쿄지국장이 그에게 한국을 방문해주길 요청했으나 수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짧은 글을 한 편 써주는 것으로 방문을 대신했다. 타고르가 영어로 써준 글을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이 한글로 번역해 1929328일자 동아일보에 실은 기사는 이랬다.

 

 

 

 

일즉이 亞細亞黃金時期에 빗나든 燈燭의 하나인 朝鮮, 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비치되리라.” (후략)

 

이것은 라기 보다는 조선방문 요청에 응해주지 못한 데에 미안해서 한 덕담 형식의 메모라고 보는 게 옳다. 그렇더라도 미래가 보이지 않던 암담한 식민지 조선을 빛나는 등불이라고 표현한 건 상당한 예찬이다. 그는 무슨 생각 혹은 어떤 의도에서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을 빛나는 등불이라고 찬미했을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게 타고르는 조선만 빛나는 등불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찾아간 아시아의 나라마다 모두 빛나는 등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서양 근대의 물질문명에 문제가 많다고 인식한 타고르는 자연주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아시아가 서양문명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선 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등불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타고르가 식민지 조선이 동방의 빛나는 등불이 될 것이라는 찬사에 감동을 먹은 나머지 전후 맥락을 보지 않으려고 한 자폐증을 앓았던 건 아닐까?

 

열째, 타고르 기념관의 전시대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나온 타고르 관련 각종 출판물들이 수십 가지가 진열돼 있었지만, 타고르와 한국이 관련된 자료는 단 한 건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국공산당 창당발기인으로서 초대 중공 서기를 지낸 陳獨秀(1879~1942)는 자신이 창간한 잡지 新靑年에다 타고르의 영시를 중국어로 번역해 중국독자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일본에서도 타고르와 일본과의 관계를 논한 저서들이 많이 간행됐다.

   

그런데 유독 타고르와 한국이 관련된 간행물은 단 한 권도 전시돼 있지 않았다. 타고르가 조선에 온 바 없다고 해서 조선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는 19207월에 창간된 잡지 學生界창간호의 표지인물로 실렸다. 이 사실로 봐서 타고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908년 평양의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던 청년 조만식이 같은 인도 출신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듯이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이들도 있다. 예컨대 1923金億(1895?)이 번역한 타고르 시집이 나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바로 이 번역본을 통해 정지용(1902~1950), 김소월(1902~1934), 한용운(1879~1944) 등 조선의 내로다 하는 문인들에게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시 불교로 서구의 근대화를 넘어서는 화두를 생각하고 있던 한용운에게도 타고르는 좋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5년에 쓴 님의 침묵에다 타고르에게 바치는 시를 쓸 정도로 타고르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번에 타고르의 시를 보고선 깜짝 놀랐다. 시문학이 전공이 아닌 내가 봐도 님의 침묵에 담긴 사상과 형식이 완전히 타고르 문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 단박에 왔기 때문이다.

 

 

『學生界』 창간호 표지인물로 나온 타고르

 

이글을 접하는 이들 중엔 우리와 직접 상관이 없는 타고르를 왜 이리 길고 장황하게 얘길 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 분도 있을 것이다. 지난 세기의, 그것도 한국과 연을 맺지 않았던 인도시인 타고르를 안다는 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모든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21세기 문화강국은 세계의 모든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성에 토대를 둔 창발성과 세계성을 갖추기 위해선 타고르뿐만이 아니라 세계적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역문화건, 북방 유목문화건 무엇이든 받아들였기 때문에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중국의 당나라와 로마제국처럼 말이다.

 

사실타고르가 우리 역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제시한 대로 이역만리 떨어져 있었지만 타고르가 식민지 시대 조선에 문학과 문화면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문학분야에서 특히 그러했다. 한시에서 현대시로 넘어가던 20세기 초의 과도기에 조선의 시인들이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타고르의 시에서 얻었던 게 좋은 예다. 그들은 한시는 다 지을 수 있었지만 현대시는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라서 한 발 앞선 일본 현대시로 공부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고르 작품의 일본어 번역본으로 타고르를 공부한 만해 한용운이나, 타고르의 영시를 한글로 번역해서 현대시를 공부한 정지용과 김소월처럼 이 시기 조선의 시인들은 일본시로 해결되지 않던 부분을 타고르의 시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연구하기에 따라, 또 활용하기에 따라 타고르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 같다. 타고르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갈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내가 시문학 전공자가 아닌 게 아쉽다. 아무튼 타고르의 방대한 면면을 다 접하기엔 실로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뜻하지 않게 타고르를 다시 보게 된 의미 있는 꼴까따여행이었다.

 

2019. 9. 14. 15:05

인도 꼴까따 타고르기념관에서 초고

10. 10. 오후 가필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