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현대 중국 군사인재의 산실 황포군관학교를 찾아서

雲靜, 仰天 2019. 7. 29. 22:08

현대 중국 군사인재의 산실 황포군관학교를 찾아서


황포군관학교를 아시나요? 지난 세기 중국국민당 인물이든, 중국공산당 인물이든 수많은 군사 인재들이 배출된, 중국 현대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군사교육기관말입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24년 6월 16일 남방 광동성의 성도 廣州에 세워진 육군 장교 육성 사관학교였죠.
 
황포군관학교의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습니다. 영어로는 Whampoa Military Academy라고 표기하는데 Whampoa는 중국 표준말인 북경어가 아니고 黃埔를 광동어로 발음나는 것을 영어로 적은 것입니다. 훗날 이 학교는 남경으로 옮겼을 때는 중앙육군관학교로 개명된 바 있고 사천성의 성도(成都)를 거쳐 중국국민당이 중공에 패해 대만으로 건너온 후엔 국민당 당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장교양성 학교로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로 격상됐습니다.

이 학교는 설립시부터 당시 손문을 지원해서 궁극적으로 그로 하여금 국가권력을 잡게 해서 중국을 일본의 소련 침략을 견제해줄 친소 국가로 만들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던 레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지원에는 학교 운영 자금 뿐만 아니라 무기 장비도 포함됐습니다. 출범 초기에만 소총 8천 자루, 탄환 400만 발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924년 군사고문으로 파벨 파블로프 장군을 보내주기도 했죠. 파블로프가 부임해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익사하자 소련공산당은 그를 대신할 후임으로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을 파견해줬습니다. 러시아혁명 이후부터 줄곧 레닌의 소련은 유럽과 극동 양 지역에서 각기 미국과 일본, 영국과 프랑스의 엽합군에게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봉쇄당하면서 국가 재정이 바닥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국고가 빈 소련이 무슨 돈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싶지만 소련공산당은 자기들이 볼셰비키혁명으로 손에 넣은 크레믈린궁에 소장된 짜르의 막대한 금은 보화와 미술품들을 영국 등 서방의 암시장에서 매각하여 마련한 달러로 세계적화를 위해 중국은 물론, 여타 튀르키예, 티베트, 몽골, 베트남, 조선, 일본 뿐만 아니라 심지어 멀리 남미 국가들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그 세력들을 지원했습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국민당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포함해 현대 중국의 군사발전에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했습니다. 나아가 두 차례의 국공내전이 상징하듯이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친 중국 현대사상 최초의 군사교육기관이었습니다. 20세기 역사에서 거의 모든 신생 독립국이나 개발도상국은 군사, 경제 발전과정에서 군인의 역할이 비중이 컸다는 점에서 볼 때 황포군관학교 역시 중화민국과 중공 모두에게 국가 발전을 견인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24년 6월 16일에 거행된 황포군관학교 개교 기념식. 청천백일기 중간의 단상 위에 있는 중화민국 총리 손문, 그 오른쪽 여성은 손문의 부인 송경령이다. 손문 왼쪽에 군복을 입고 서 있는 이는 장개석이고, 그 옆은 손문 재세시 유력한 후계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왕정위(汪精衛) 같아 보인다. 이 시절엔 장개석은 아주 마른 체구였고, 왕정위는 인물도 상당히 준수한 미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해외로 나갔는데 서구풍의 양복을 즐겨 입었다.
개교 당시의 학교 전경. 학교 뒤편엔 산이 있고, 앞에는 황포강이 흐르는데, 학교의 위치는 배산임수의 전형이다. 중국인들은 음택이든 양택이든 중요한 인물이나 기관 혹은 심지어 도시까지도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터를 잡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중국의 여러 역사적 인물의 묘터나 사찰 등을 가본 바 대부분 도참설에 입각해 세워져 있었음을 확인한 게 많다. 북경시도 원래 원나라 시대 때에 불교사상과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세워졌다. 황포군관학교의 배산임수를 보니 한 눈에도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이 학교가 들어앉아 있는 지세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여름의 녹음이 짙게 우거져 있어 이 터가 풍수지리의 어떤 형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퍽 아쉽다.
러시아 풍의 학교 전경. 연병장에서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1차 국공합작은 군벌을 척결하기 위한 북벌이라는 중국 내부에서 요구된 시대정신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외부 요인으로는 그 막후에 세계적화의 세계혁명을 추구한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이 구사한 당근과 채찍 정책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소련공산당원이었지만 코민테른 요원 신분으로 가장해 중국 남방 손문의 광동정부(중화민국)에 접근해 손문과 국민당 개조와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 밀사역할을 한 두 주역. 왼쪽이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스니블리트 마링, 오른쪽은 손문과의 협상을 목적으로 중국으로 파견된 소련정부의 전권대표 요페. 이외에 손문의 군사고문으로서 당시 광동정국에 깊숙히 개입한 소련공산당원 미하일 보로딘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민테른은 독자적인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 기구라고 하지만 완전히 세계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소련공산당이 뒤에서 결성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조종한 전위 조직이었다.
소련군사고문들은 황포군관학교의 교육을 통해 소련식 군사제도와 전술교리를 중국에 전수했다. 심지어 그들은 중국 각지에 존재한 전근대적인 군벌세력을 군사적으로 제거하고자 한 국민당군을 지휘하거나 군사전술적으로 작전계획을 잡아주기도 했다. 사진 속 인물들은 1925년에 중국국민당군이 광동성 군벌 陳炯明군을 제압하기 위해 감행한 이른바 제2차 東征의 작전계획을 지도하고 실제로도 국민당군을 따라나서 전투를 지도한 소련군사고문들이다. 소련은 레닌 정권에서부터 스탈린 정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군사고문들을 동아시아 지역에 파견해 중국 뿐만 아니라 북한, 월맹, 몽골 등지에 소련군사교리와 전술 전략을 전파하고 이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소련군사고문단의 지속적인 지원을 통한 결과 특히 중국공산당과 북베트남 공산당에는 한 동안 소련식 군사제도와 전술이 골격을 이뤘다. 이 부분에 대해선 중국현대사학계의 심층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직도 혹은 지휘계통도. 학교 운영의 지휘부로서는 최상부의 정점에 총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교장과 당대표가 보좌하는 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 8개 부서가 있고, 맨 아래 기층에 학생총대가 조직돼 있었다.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은 장개석이었는데(장개석은 교장직 복이 있었던지 雲靜이 다닌, 1925년에 중국에서 설립된 뒤 나중에 대만으로 옮겨온 국립 정치대학도 초대 교장을 지냈음), 그는 1947년 10월 명예교장으로 물러날 때까지 줄곧 교장직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당시는 '교장'이라는 단어는 장개석에게만 불려진 그의 전유물이었죠. 이 학교의 중국국민당 당대표는 료중개(廖仲愷)였습니다. 료중개는 손문의 총애를 받던 국민당 내 대표적인 좌파의 지도적 인물이었는데 그 이듬해 우파 측 괴한들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그의 미망인 하향응(何香凝)은 남편의 조기 유고 덕에 중공 건국 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역임하는 등 혁명 원로로 대접 받았죠.

당시 국민당의 여타 조직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황포군관학교의 국민당 당대표는 교장을 능가하거나 비등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손문이 료중개를 당 대표 자리에 앉힌 것은 료중개가 자신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인 국민당 개조 및 레닌정권과의 합작에 앞장서서 추진한 인물이었기에 신임이 두터워서 믿고 맡길 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훗날 역사가 증명하듯이 소련의 자금 지원을 받을 요량으로  당내 여러 계통의 우파들(손문 사후 유력한 후계자가 된 호한민 胡漢民, 당시 국민당 내 최고의 일본통이자 당내 최고의 삼민주의 이론가였던 대계도 戴季陶 등등)의 반대를 무릅쓰고서 밀어부친 손문의 소위 “연소용공(聯蘇容共)” 정책은 결과적으로 국민당이 중공에게 국가권력을 내주고 대만으로 패퇴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실패한 국가전략의 출발이었습니다.

또 한 자리 중요한 직책이었던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은 주은래였습니다. 즉 이 시기 주은래는 장개석의 부하였다는 소리입니다. 당시는 주은래가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으로부터 스파이 공작과 테러활동 훈련을 받고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주은래는 정치부 주임이라는 직권을 교묘히 이용해 비밀리에 교관들과 사관후보생도들 사이에 중공당원의 수를 늘려 세력 확대를 꾀했습니다. 여기에 응했거나 포섭된 경우는 소련에서 귀국해서 이 학교의 교관이 된 섭영진(聶榮臻)과 광동 토박이 군벌 엽검영(葉劍英), 제1기생으로 입학한 서향전(徐向前)과 진갱(陳賡)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훗날 모두 모택동과 주은래의 노선을 추종하면서 중공군 원수가 되거나 대장이 됩니다. 이 시기 황포군관학교 내에서 주은래가 펼친 이러한 공작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여기서 자세하게 논할 게 아니고 별도의 장이 필요해서 생략합니다.

황포군관학교의 입학자격과 교육과정 면에선 18~25세 사이의 애국애족 정신이 투철한 청년들에게 입학 자격이 주어졌고, 제1기는 6개월을 이수한 후에 배출됐었죠. 당초 러시아 교관들은 교육과정을 총 18개월로 하자고 주장했지만 빨리 장교들을 배출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장개석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6개월로 결정됐습니다. 그러나 제2기부터는 교육기간이 약 10개월로 늘어났다가 제3기부터는 13개월로 점점 더 늘어나서 최종적으로 황포군관학교의 마지막 기수인 제7기는 20개월(1929년 1월~1930년 9월)의 교육기간이 됐죠.

제1기생은 보병병과 밖에 없다가 제2기생부터 보병, 포병, 공병, 치중병(輜重兵, 수송 및 병참), 헌병 등 5개 과로 나뉘어졌습니다. 제3기생부터는 입영생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신입생은 3개월의 입영 교육을 거쳐 시험에 합격한 자만 정시생으로 진급하였고, 제4기생 이후에는 정치, 기병, 교통, 무선 등의 과가, 후반에는 영어, 독일어, 불어, 일어 등의 외국어 교습반도 증설됐습니다. 각 기수별 졸업생수는 제1기부터 제7기까지 각각 645명, 499명, 1233명, 2654명, 2418명, 3970명, 1518명이었습니다.(무한 분교 포함)

중국국민당은 소련의 당군 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당 대표제도를 운영했었고, 황포군관학교도 소련식 군사교육제도 하에서 교육이 이뤄졌는데 기본 교과과정은 1923년 9월 장개석이 소련을 방문해서 파악한 붉은 군대(적군)의 전술 및 전법을 참고하게 되면서 소련 적군의 것을 상당 수준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식, 일본식 군사교육 내용도 부분적으로 가미됐습니다. 장개석이 청나라 말기의 군관학교와 일본 포병학교에서 교육 받았던 군사교육 내용, 일본의 군사교범, 중국의 전통적인 군사전략과 사상도 교육됐으니까요. 교육시에는 학교가 소재한 광주에서 쓰이는 광동어가 아니라 표준 중국어로 이뤄졌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취지가 중국 통일에 기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던 데다 중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의 사투리로는 교육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27년 8월 국공합작이 깨어져 국민당과 중공이 불구대천의 적이 되면서 주은래는 쫒기는 처지에서 장개석의 곁을 떠났지만 기이하게도 9년 뒤 1936년 12월 서안사변시에는 위치가 뒤바뀌어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개석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장개석을 만나 사건의 해결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래도 주은래는 옛 상관에 대한 예우로 장개석에겐 깍듯이 예의를 다해 “장(개석) 교장”이라고 부르면서 성의를 다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직함을 불러 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존칭입니다. 우리말의 “님”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평소 장개석은 교장이라는 직함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서안사변시 중공내 장개석의 처리 방침을 둘러싼 의견대립 및 스탈린과 주은래의 역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서상문, 「西安事變과 周恩來」 『軍事論壇』, 통권 제88호 2016년 겨울호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본 블로그에도 이 논문을 올려놨습니다.)
 

당시 이 학교 교장 장개석의 집무실. 한편, 당대표로서 손문의 신임이 두터웠던 료중개는 국민당 내 좌파 세력중에 두각을 나타낸 입지에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듬해 손문 사망 뒤인 1925년 8월 20일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에 반대하고 불만을 가진 우파의 괴한으로부터 아침 출근길에 총을 맞고 살해되고 만다. 범인은 국민당 우파중 왕정위(汪精衛)와 함께 국민당내 3거두로 불린 또 다른 실력자 호한민의 사촌 동생 후이셩(胡毅生)과 몇몇 사람이 지목돼 처단됐지만 사건의 배후는 10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독자적인 군대가 없어 중국국민당에 대적할 수 없던 약체의 중국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을 통해 합법적인 신분으로 국민당과 광동지역에 세력을 넓혀가고자 하는 전략을 세워 실천했다. 위 사진은 국공합작 전 비밀조직이었던 중공이 광동지역에도 비밀리에 조직한 당 지부와 黨團이다. 물론 이 두 조직은 상급기관인 중공 廣東區委員會의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았다. 이 건물은 현 광주시 文明路194~200호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중공이 군대를 가지게 된 것은 1928년 8월 1일 南昌 추수봉기를 기해서 조직한 것이 최초였다. 오늘날 중공은 이날을 인민해방군의 창군기념일로 삼아 매년 기념식을 거행해오고 있다.
당시 이 학교 생도들의 내무반과 관물을 재현한 모습. 장교후보생들의 관물이 어쩐지 육군 병장 서병장의 군대 시절처럼 날렵했던 한국군 병사들의 관물정리에 비하면 각이 덜 나온다.

교육의 성과라는 면에서 보면 중국 현대사상 국공 양당의 군사 인재들 중 황포군관학교를 거친 자가 많았습니다. 먼저 국민당부터 얘기하면 국민당군 고위 지휘관들은 황포군관학교 시절 장개석의 부하였거나 이 학교를 나온 제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예컨대 장개석의 지시로 이 학교의 교도단 단장을 지내고 1930년대엔 국민당군 내 장개석에 이어 제2인자가 된 하응흠(何應欽), 황포군교 제1기생으로 장개석의 적계였던, 항일전과 국공투쟁에서 활약한 호종남(胡宗南), 군단장으로 제2차 국공투쟁 시의 서방회전(徐蚌會戰)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두율명(杜聿明, 제1기), 제1병단사령관(한국군의 군 사령관에 상당)으로 훗날 대만의 국방부장을 지낸 황걸(黃杰), 1949년 10월 금문전투 시 군단 지휘관이었던 호련(胡璉, 제4기), 국방부 정보계통 수장(保密局 국장)으로 한국전쟁에도 관여한 모인봉(毛人鳳) 등등 수 없이 많습니다.

중공군에도 역시 이 학교 출신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국공 양당을 통틀어 최고의 군사적 귀재로 불렸던 林彪도 이 학교의 제4기 졸업생이었습니다. 물론 임표 외에도 주은래에게 포섭돼 입학하거나 졸업후 장개석의 직계로 분류된 국민당군으로 가지 않고 중공에 소속된 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대부분 1920~30년대 중공의 무장봉기와 항일전쟁에 동원됐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중공의 주요 지휘관으로 살아 남은 자는 입학자 수에 비하면 많지 않았습니다. 제5기생 이후 기수로는 대략 도주(陶鑄), 한국전쟁 때 중공군 야전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송시륜(宋時輪), 양지성(楊志成)과 나서경(羅瑞卿)을 들 수 있습니다.

암튼 소련의 영향을 받아 중공군에 1955년 계급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10대 원수 10명 중 2명, 대장 10명 가운데 3명이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 뒤엔 더 늘어나 원수 4명과 대장 5명이 황포군관학교에서 나왔으니 말 그대로 중공군 고위 지휘관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중공군에서 군사적으로 최고 두각을 나타낸 임표에 대해선 조금 더 소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세기, 걸출한 군사전략가로서 소련 적군에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가 있었다면, 중국국민당에는 독일유학 출신의 독일군사통으로 장개석이 아낀 蔣百理가 있었고, 중국공산당에는 임표가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이미 이 학교 교장시절부터 임표 생도의 출중한 능력을 눈여겨보고 그를 대단히 총애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장개석은 1940년대 후반 국공투쟁 말기에 임표가 지휘한 103만 명의 중공군 동북인민해방군(그 뒤 제4야전군으로 개편)에게 밀려 장개석이 지휘한 중국국민당군이 패해서 남방으로 후퇴하게 되자 동북지역을 내주게 된 것이 결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이었고 이것이 임표 때문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장개석은 옛 부하와 제자들에게 패하고 나라를 내주게 된 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정한 역사의 단면 치고는 중국만이 아니라 세계사에까지 파장을 불러온 중국현대사와 세계사의 비극이었습니다.

1940년대부터 모택동도 임표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심지어 스탈린도 모택동에게 임표를 좀 빌려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그는 아주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모택동으로부터 “친밀한 전우”(親密的戰友)라는 찬사를 들으며 제2인자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을 쳐내고 자신이 최고 지도자가 되려고 시도한 쿠데파가 실패로 돌아가자 부인 엽군(葉群)과 아들들을 데리고 소련으로 탈출하다가 일행이 탄 비행기가 몽골 상공에서 원인 모를 이유로 추락해서 전원 사망합니다. (지금도 사고원인이 풀리지 않고 있는 중국현대사상 최대의 미스테리임!)

황포군관학교에는 한국인들도 대거 참여해 적지 않은 졸업생들이 배출됐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 내가 소장하고 있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 명부엔 초기 6개월 과정의 제1기부터 20여 기에 이르는 전체 졸업생 약 7~8000명중 한국인들이 상당히 많았다고만 돼 있는데, 이번에 직접 와서 이곳에 전시된 자료를 보니 23명이었다고 소개돼 있네요. 나중에 더 확인해볼 일이지만, 이 보다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 출신자들은 대부분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들이었습니다. 상해 한국임시정부 내 대표적 좌파 인물로서 김구와 몇 차례 투쟁을 벌인 김약산이 대표적 인물이었죠. 김약산은 졸업 후 장개석의 제자라는 걸 내세워 임정 내에서도 중국 국민당의 군부에 인맥이 두터웠던 걸 활용해서 경제 지원을 받는데도 유리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김약산 외에 1930년대부터 중공을 쫓아 다니면서 취재한 미국 여기자 님 웨일즈(Nym Wales, 필명이고 본명은 Helen Foster Snow)가 쓴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김산(장지락, 장지학),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구술해준 “아리랑”에서 혁명가의 전범으로 상정된,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지낸 박영, 동교 제1기생 출신으로 중공 홍군과 팔로군의 고위 장교까지 지낸 좌권(본명은 좌관계), 북한 정권의 창출에 깊이 관여한 김두봉도 이 학교 출신이었죠. 그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대부분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공산혁명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1949~50년 사이 여타 중국혁명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대거 북한으로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서 김일성과 남로당의 거물 박헌영 그리고 무정 및 박일우가 중심이 된 중공의 연안파가 합작해 일으킨 6.25남침전쟁의 주역이 됩니다. 이 사실에서 보면 황포군관학교는 중국현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죠.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의 국가별 출신지 및 학과별 학생수. 한국인은 23명이 배출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좌권과 그의 부인 劉志蘭 부부와 그들의 갓난 딸 左太北(1940년 8월 山西省 武鄕縣 塼壁村의 팔로군 총사령부에서)

또 이 학교 한국인 졸업생 23명 중 보병과, 포병과, 공병과, 경리과, 정치과 총 5개 병과 중 보병 16명, 공병 1명, 정치과 6명으로 중국 각지의 다른 성 출신 보다 사람 수에 비례해 정치과를 많이 지망한 사실입니다. 당시 정치과는 군내 커미사르(Commisar)라고 불린 정치위원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치위원의 연원은 프랑스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것이 레닌의 러시아 적군에 들어와 정착된 제도로서 중국국민당도 이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정치위원제도는 중공군, 월맹군과 북한군에도 있었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보통 연대급 부대부터 배치된 정치위원의 역할은 군사, 전쟁 및 전투와 관련해 정치적인 판단을 내려 해당 부대가 정확한 노선을 밟을 수 있도록 최고 지휘관과 협의하거나 조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위원의 계급은 지휘관과 동일하거나 한 단계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권한은 지휘관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 높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황포군관학교의 정치과는 군관 후보들 중에 가장 우수한 생도들이 지망하고 선발됐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인 생도들이 전반적으로 우수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로 봐도 될 듯하군요.

그리고 이 글을 면밀하게 읽어보면 얻을 수 있는 결론이 있습니다. 중공이 중국 국민당군을 집어 먹은 과정 중 초기 단계에 속하는 국민당이라는 거대한 숙주에 기생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행 일정상 황포군관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더 계속할 수 없어서 유감이군요. 내일부터는 호남 등지로 북상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남아 있어서 제대로 소개하려면 아마도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여의치 않게 일단 여기서 맺고 봅니다. 훗날 재론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우선 약간의 황포군관학교 관련 사진자료로 대신합니다. 지금 한일 간에 한창 무역전쟁이 불붙고 있지만, 막간에 재미 삼아 봐도 좋겠군요.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위 사진 속 멀대의 왼쪽은 광동성의 명문 광주(광저우) 中山대학의 엽용호 교수. 내가 2002년 홍콩 중문(中文)대학의 방문학자로 가 있을 때 같은 기숙사의 룸메이트였던 그는 이번 나의 두번째 광주 방문 기간 중 전일정을 같이 동행해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년부터 그는 미국의 UCLA대학의 교환교수로 1년간 가 있게 돼 내년 2월 내가 미국을 방문할 때에 다시 조우하기로 약속했다. 그의 미국 체류가 원만히 끝나고 수확도 풍성하기를 기원한다.

2019. 7. 23. 16:56
중국 광주 황포군관학교 舊址에서
雲靜 초고
2025. 1. 13. 16:16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제목 수정 및 일부 가필

★추기 : 중국과 대만이 한때 골육상쟁을 치렀지만 그럼에도 작년 학교창설 100주념 기념일에 대만과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동창들이 광주에 다 같이 모여 기념활동을 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