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 군사인재의 산실 황포군관학교를 찾아서
황포군관학교를 아시나요? 지난 세기 중국국민당 인물이든, 중국공산당 인물이든 수많은 군사 인재들이 배출된, 중국 현대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군사교육기관이었죠.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24년 6월 16일 남방 광동성의 성도 廣州에 세워진 육군 장교 육성 사관학교였습니다.
이 학교의 정식명칭은 ‘육군군관학교’였습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국민당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포함해 현대 중국의 군사발전에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친 중국현대사상 최초의 군사교육기관이었습니다.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은 장개석이었고(장개석은 교장직 복이 있었던지 雲靜이 다닌, 1925년에 중국에서 설립된 뒤 나중에 대만으로 옮겨온 국립 정치대학도 초대 교장을 지냈음), 이 학교의 중국국민당 당대표는 료중개(廖仲愷)였습니다. 중국국민당은 소련의 당군 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당 대표제도를 운영했었고, 황포군관학교도 소련식 군사교육제도 하에서 교육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국민당의 여타 조직도 마찬가지였지만 황포군관학교의 국민당 당대표는 교장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손문이 료중개를 당 대표 자리에 앉힌 것은 료중개가 자신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인 국민당 개조 및 레닌정권과의 합작에 앞장서서 추진한 인물이었기에 신임이 두터워서 믿고 맡길 만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자리 중요한 직책이었던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주임은 주은래였죠. 즉 이 시기 주은래는 장개석의 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1927년 8월 국공합작이 깨어져 국민당과 중공이 불구대천의 적이 되면서 주은래는 쫒기는 처지에서 장개석을 떠났지만 기이하게도 9년 뒤 1936년 12월 서안사변시에는 위치가 뒤바뀌어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개석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장개석을 만나 사건의 해결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서안사변시 중공내 장개석의 처리 방침을 둘러싼 의견대립 및 스탈린과 주은래의 역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서상문, 「西安事變과 周恩來」 『軍事論壇』, 통권 제88호 2016년 겨울호를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본 블로그에도 이 논문을 올려놨습니다.)
중국 현대사상 국공 양당을 통틀어 최고의 군사적 귀재로 불렸던 林彪도 이 학교의 제4기 졸업생이었습니다. 임표에 대해선 1940년대부터 모택동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장개석 역시 이미 교장시절 임표 생도의 출중한 능력을 눈여겨보고 대단히 총애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장개석은 1940년대 후반 국공투쟁 말엽에 임표가 지휘한 중공군에 밀려 장개석의 중국국민당군이 패해 남방으로 후퇴해내려 오게 되자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것이 임표 때문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훗날 1950년대 스탈린도 모택동에게 임표를 좀 빌려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그는 아주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습니다.
20세기, 걸출한 군사전략가로서 소련 적군에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가 있었다면, 중국국민당에는 독일유학출신의 독일군사통으로 장개석이 아낀 蔣百理가 있었고, 중국공산당에는 임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포군관학교에는 한국인들도 대거 참여해 상당히 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 내가 소장하고 있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 명부엔 초기 6개월 과정의 제1기부터 20여기에 이르는 전체 졸업생 약 7~8000명중 한국인들이 상당히 많았다고만 돼 있는데, 이번에 직접 와서 이곳에 전시된 자료를 보니 23명이었다고 소개돼 있네요.
나중에 더 확인해볼 일이지만, 이 보다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 학교 제4기생들이었고, 졸업 후 장개석의 중국국민당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공산혁명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1949~50년 사이 여타 중국혁명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대거 북한으로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 김일성과 남로당의 거물 박헌영 그리고 무정 및 박일우가 중심이 된 중공의 연안파가 합작해 일으킨 남침전쟁의 주역이 됩니다.
이곳에 전시된 많은 자료들은 중국현대사 중 특히 육군과 해군(나중에 생겨남)의 장교 배출상황과 그 뒤의 중국 국공 내전시의 군사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군요. 이 가운데에 나의 주의를 끈 것은 1936년 서안사변 결과 전격적으로 이뤄진 제2차 국공합작에서 중공군으로서 중국국민당군으로 새로 편제된 “팔로군”의 참모장까지 지낸 한국인 左權(아래 사진 중 국민당군 군모를 쓴 남성)을 중국인으로 소개해놓은 실수(혹은 왜곡)였습니다.
또 이 학교 한국인 졸업생 23명 중 보병과, 포병과, 공병과, 경리과, 정치과 총 5개 병과 중 보병 16명, 공병 1명, 정치과 6명으로 중국 각지의 다른 성 출신 보다 사람 수에 비례해 정치과를 많이 지망한 사실입니다. 당시 정치과는 군내 커미사르(Commisar)라고 불린 정치위원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치위원의 연원은 프랑스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것이 레닌의 러시아 적군에 들어와 정착된 제도로서 중국국민당도 이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정치위원제도는 중공군, 월맹군과 북한군에도 있었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보통 연대급 부대부터 배치된 정치위원의 역할은 군사, 전쟁 및 전투와 관련해 정치적인 판단을 내려 해당 부대가 정확한 노선을 밟을 수 있도록 최고 지휘관과 협의하거나 조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위원의 계급은 지휘관과 동일하거나 한 단계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는 지휘관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 높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황포군관학교의 정치과는 군관 후보들 중에 가장 우수한 생도들이 지망하고 선발됐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인 생도들이 전반적으로 우수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로 봐도 될 듯하군요.
여행 일정상 황포군관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더 계속할 수 없어서 유감이군요. 제대로 소개하려면 아마도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여의치 않게 일단 여기서 맺고 봅니다. 훗날 재론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우선 약간의 황포군관학교 관련 사진자료로 대신합니다. 지금 한일 간에 한창 무역전쟁이 불붙고 있지만, 막간에 재미 삼아 봐도 좋겠군요.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2019. 7. 23. 16:56
중국 광주 황포군관학교 舊址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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